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분노가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경찰? 사법부? 공권력? 공적시스템. 다 아니다. 그런 국가와 국가기관이 아니다. 인간들이 밉고 저주스럽다. 죽은 그들이 무슨 열사냐? 의사냐?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약한 약자일 뿐이다. 제대로된 법치는 이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누가? 경찰이, 사법부가, 공권력이, 국가의 모든 기관이 그런 법치로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이건 국가 기관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오늘 이 사법부 참사에 가까운 선고를 내린 서울중앙법원 형사합의27부 판사들의 비겁과 비열함의 문제다. 지금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저주는 분명 사람을 향하고 있다.
오늘 용산참사 재판 선고가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분노가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경찰? 사법부? 공권력? 공적시스템. 다 아니다. 그런 국가와 국가기관이 아니다. 인간들이 밉고 저주스럽다. 죽은 그들이 무슨 열사냐? 의사냐?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약한 약자일 뿐이다. 제대로된 법치는 이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누가? 경찰이, 사법부가, 공권력이, 국가의 모든 기관이 그런 법치로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이건 국가 기관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오늘 이 사법부 참사에 가까운 선고를 내린 서울중앙법원 형사합의27부 판사들의 비겁과 비열함의 문제다. 지금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저주는 분명 사람을 향하고 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분노가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경찰? 사법부? 공권력? 공적시스템. 다 아니다. 그런 국가와 국가기관이 아니다. 인간들이 밉고 저주스럽다. 죽은 그들이 무슨 열사냐? 의사냐?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약한 약자일 뿐이다. 제대로된 법치는 이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누가? 경찰이, 사법부가, 공권력이, 국가의 모든 기관이 그런 법치로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이건 국가 기관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오늘 이 사법부 참사에 가까운 선고를 내린 서울중앙법원 형사합의27부 판사들의 비겁과 비열함의 문제다. 지금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저주는 분명 사람을 향하고 있다.
손석희와 김제동의 하차가 액면으로는 고비용에 의한 구조 조정 활동일 수 있지만 시기적, 정치적 맥락은 이면을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방송 내외적으로 상식을 지키려 했던 보기 드문 사람들이다. 그들을 잘라낸 몰상식하고 교양머리 떨어지는 반대편의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가.
하지만, 우리는 지켜야 할 대상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권력의 미디어 장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망하게도 어떤 정권이나 미디어, 언론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솔직히 MBC 가 인민의 위한 방송은 아니질 않는가? KBS 는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다만, 그것 밖에 지킬 것이 없는 착한 사람들이 나서서 절절한 방아쇠를 당기는 중이라 생각한다.
정연주씨나 최문순씨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코드 인사라 했다. 권력이 바뀌면 코드를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다.(물론, 자연스럽지만 옳은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 영역이 국민 대다수가 인정하는 균형있는 토론 사회자에게 개그와 코미디로 사람을 웃기는 딴따라의 영역에까지 코드토론, 코드웃음을 조장하는 악랄함을 자연스러운 경영, 개편활동이라 볼 수가 없게 만든다. 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여기에도 반MB 구도의 절체절명의 싸움으로 명분화시킨다.
그들이 누구보다 먹고 살만 했고 서민의 지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맥락으로 파악되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차하게 된건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너도나도 '지못미' 를 외치며 김제동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는 것은 사려 깊어 보이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해 죽어간 사람들, 생존을 위해 모욕 당하는 사람들, 웃지 않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석희씨나 김제동씨는 약자를 보호해줘야 할 사회적 강자가 됐다. 하지만 강자이면서 약자를 탄압하는 반대편의 사람들에 비해 명백한 차이가 있고 그 자긍심도 반드시 인정해줘야 한다.
손석희는 스스로도 '인본주의자' 라 했다. 김제동은 '사람이 사람에게' 라는 주제로 열렸던 마들산연구소 강의에서 상식은 "사람이 죽었으면 예의를 표하고 국민은 계몽과 협박의 대상이 아니라 꾸준히 희망을 주고 끝까지 끌고 가야 할 대상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라고 말했다.
이제는 손석희나 김제동이 우리를 지켜줘야 한다. 어쩌면 개그나 균형 있는 토론이 아닌 어떤 편으로 어떤 계급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식이나 균형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금과 같은 성원이 있으면 된다. 그들의 상식이 우리의 상식이고, 지금껏 그나마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상식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면 감정적인 지못미가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세상이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지켜야 할 대상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권력의 미디어 장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망하게도 어떤 정권이나 미디어, 언론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솔직히 MBC 가 인민의 위한 방송은 아니질 않는가? KBS 는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다만, 그것 밖에 지킬 것이 없는 착한 사람들이 나서서 절절한 방아쇠를 당기는 중이라 생각한다.
정연주씨나 최문순씨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코드 인사라 했다. 권력이 바뀌면 코드를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다.(물론, 자연스럽지만 옳은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 영역이 국민 대다수가 인정하는 균형있는 토론 사회자에게 개그와 코미디로 사람을 웃기는 딴따라의 영역에까지 코드토론, 코드웃음을 조장하는 악랄함을 자연스러운 경영, 개편활동이라 볼 수가 없게 만든다. 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여기에도 반MB 구도의 절체절명의 싸움으로 명분화시킨다.
그들이 누구보다 먹고 살만 했고 서민의 지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맥락으로 파악되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차하게 된건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너도나도 '지못미' 를 외치며 김제동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는 것은 사려 깊어 보이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해 죽어간 사람들, 생존을 위해 모욕 당하는 사람들, 웃지 않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석희씨나 김제동씨는 약자를 보호해줘야 할 사회적 강자가 됐다. 하지만 강자이면서 약자를 탄압하는 반대편의 사람들에 비해 명백한 차이가 있고 그 자긍심도 반드시 인정해줘야 한다.
손석희는 스스로도 '인본주의자' 라 했다. 김제동은 '사람이 사람에게' 라는 주제로 열렸던 마들산연구소 강의에서 상식은 "사람이 죽었으면 예의를 표하고 국민은 계몽과 협박의 대상이 아니라 꾸준히 희망을 주고 끝까지 끌고 가야 할 대상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라고 말했다.
이제는 손석희나 김제동이 우리를 지켜줘야 한다. 어쩌면 개그나 균형 있는 토론이 아닌 어떤 편으로 어떤 계급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식이나 균형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금과 같은 성원이 있으면 된다. 그들의 상식이 우리의 상식이고, 지금껏 그나마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상식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면 감정적인 지못미가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세상이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나영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에 치를 떨립니다. 딸아이를 키우는 아비의 입장이 아니어도 심정적으로는 신체를 찢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지요. 사정이 이러하니 가해자의 형량을 12년에서 무기징역으로, 화학적 거세를 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보편적 양심이나 정서에 지나치게 벗어난, 게다가 보기 드물게 그 피해의 정도가 적나라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적잖은 파장이 일 수 밖에 없겠지요.
왜 12년 밖에 안되냐는 말이 많습니다. 다 찾아 보지는 못했겠지만,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관련법 형법 297조를 뒤져 봐도 10년형이상 이란 예는 없네요. 특별법과 연계하여 12년 형량이 나왔겠지요. 물론, 대한변협 인권담당 변호사에 의하면 다른 법률을 적용하면 무기징역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판사가 적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다는 군요. 만취 상태를 감안했다는 지점에서는 판사들이 별별 꼴을 많이 봐서 기계가 됐구나 란 생각도 들었지요.
양형 기준이 있는 각론은 꼼꼼히 점검한다지만 총칙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총칙 제 5조는 사회와 국민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5조(사회의 책임) 모든 국민은 아동·청소년이 이 법에서 정한 범죄의 상대방이나 피해자가 되거나 이 법에서 정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도록 사회 환경을 정비하고 아동·청소년을 보호·선도·교육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가해자에게 전자발찌를 7년동안 채우게 됩니다. 잠재적 가해자를 잠재적 피해자로 부터 격리하려는 공공적 시도라고 보여 집니다. 이런 시도가 가능해진 것도 최근의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합의도 합의 자체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또 다른 문제가 반드시 발생하니까요. 즉, 이런 짐승들을 완전히 사회와 사람으로 부터 격리시키려는 법규정이 짐승과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과정의 장치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무고, 억울함에 대한 염려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는 성범죄 뿐만 아니라 무고함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수업료를 많이 치뤘고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범죄로 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해자를 죽도록 때리거나 거세를 한다거나 찢어 죽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일까요. 그런 해소 이상으로 법정형량을 높이는 법개정도 중요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보호 대상에 대한 조치가 끝나고 개선되어야 할 어떤 현상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지요. 분노가 진공상태가 되어 가해자를 더 가혹하게 처벌해달라고 청원하고 무시무시한 형량으로 법개정을 원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합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체제와 그 장치의 옳바른 작동이 더 중요 합니다. 범죄의 가해자가 되는 생각의 틀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인권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눠서 생각하게 되면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분노로만 작동되게 된다는 점이지요. 스스로 범죄의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은 아이와 사회를 보호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 한가로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지켜 보면 잠재적 범죄를 축적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남성은 여기자의 가슴을 주물럭 거리고 술집 마담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남성의 친구들은 남자가 그럴수도 있지 라고 하지요. 여자들은 이뻐야 1등 신부감이 된다고 어느 미모의 여성은 여성들을 모아 놓고 연설 합니다. 모여 있는 여성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디 그뿐 일까요. 어떤 범죄와 보호를 다루는 공권력과 병원등의 행태는 어떻습니까. 이런 어른들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겠다고 하는 일이 입시경쟁이고 사교육 정진이며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잘나야만 하는 약육강식 교육 입니다. 아이들은 성의 희롱과 비하에 관대한 어른들의 태도를 배우고 그러거나 말거나 남을 이기기만 하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자세를 교양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령, 나영이의 가해자가 돈있고 힘있는 자였다면 사전에 돈으로 빽으로 다 해결했을 텐데 병신처럼 살아서 저렇다고 더 끔찍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요.
법이 있어도 작동되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작동시키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지요. 가해자를 찢어 죽이는 상상만으로 대중들과 함께 피를 토하는 들끓음 말입니다. 어떤 정치를 용인했고 어떤 사회를 구축했는지 반성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죠. 벌써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 보십시오. 권력은 뭐든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하게 만듭니다. 나영이의 끔찍함을 위로하며 다른 쪽으로는 여기서 파생되는 대중적 효과, 인권의 저울질,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한 목적성의 법률 개정으로 파장을 만들어 내는 것 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차단하고 더 근본적인 것에 매스를 댈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목격해야 할 지점은 피해나 가해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과 주위를 목격해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 없이 만들어 내는 사회의 패단에 대처하는 방법 말입니다. 우리는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법과 일련의 매카니즘이 거치는 과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현재의 법과 사회가 왜 우리의 요구를 보호할 수 없는지 개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빌미를, 원치 않는 목적성을 띤 정치적 명목을 주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나영이를 지킬 수 없었지만 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돈과 경쟁적 교육으로 사회가 썪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나마 인류가 인간다움으로 살아 왔던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사 그 아이를 지키겠다며 덤벼드는 동정과 연민조차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왜 12년 밖에 안되냐는 말이 많습니다. 다 찾아 보지는 못했겠지만,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관련법 형법 297조를 뒤져 봐도 10년형이상 이란 예는 없네요. 특별법과 연계하여 12년 형량이 나왔겠지요. 물론, 대한변협 인권담당 변호사에 의하면 다른 법률을 적용하면 무기징역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판사가 적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다는 군요. 만취 상태를 감안했다는 지점에서는 판사들이 별별 꼴을 많이 봐서 기계가 됐구나 란 생각도 들었지요.
양형 기준이 있는 각론은 꼼꼼히 점검한다지만 총칙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총칙 제 5조는 사회와 국민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5조(사회의 책임) 모든 국민은 아동·청소년이 이 법에서 정한 범죄의 상대방이나 피해자가 되거나 이 법에서 정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도록 사회 환경을 정비하고 아동·청소년을 보호·선도·교육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가해자에게 전자발찌를 7년동안 채우게 됩니다. 잠재적 가해자를 잠재적 피해자로 부터 격리하려는 공공적 시도라고 보여 집니다. 이런 시도가 가능해진 것도 최근의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합의도 합의 자체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또 다른 문제가 반드시 발생하니까요. 즉, 이런 짐승들을 완전히 사회와 사람으로 부터 격리시키려는 법규정이 짐승과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과정의 장치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무고, 억울함에 대한 염려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는 성범죄 뿐만 아니라 무고함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수업료를 많이 치뤘고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범죄로 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해자를 죽도록 때리거나 거세를 한다거나 찢어 죽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일까요. 그런 해소 이상으로 법정형량을 높이는 법개정도 중요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보호 대상에 대한 조치가 끝나고 개선되어야 할 어떤 현상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지요. 분노가 진공상태가 되어 가해자를 더 가혹하게 처벌해달라고 청원하고 무시무시한 형량으로 법개정을 원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합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체제와 그 장치의 옳바른 작동이 더 중요 합니다. 범죄의 가해자가 되는 생각의 틀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인권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눠서 생각하게 되면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분노로만 작동되게 된다는 점이지요. 스스로 범죄의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은 아이와 사회를 보호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 한가로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지켜 보면 잠재적 범죄를 축적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남성은 여기자의 가슴을 주물럭 거리고 술집 마담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남성의 친구들은 남자가 그럴수도 있지 라고 하지요. 여자들은 이뻐야 1등 신부감이 된다고 어느 미모의 여성은 여성들을 모아 놓고 연설 합니다. 모여 있는 여성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디 그뿐 일까요. 어떤 범죄와 보호를 다루는 공권력과 병원등의 행태는 어떻습니까. 이런 어른들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겠다고 하는 일이 입시경쟁이고 사교육 정진이며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잘나야만 하는 약육강식 교육 입니다. 아이들은 성의 희롱과 비하에 관대한 어른들의 태도를 배우고 그러거나 말거나 남을 이기기만 하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자세를 교양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령, 나영이의 가해자가 돈있고 힘있는 자였다면 사전에 돈으로 빽으로 다 해결했을 텐데 병신처럼 살아서 저렇다고 더 끔찍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요.
법이 있어도 작동되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작동시키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지요. 가해자를 찢어 죽이는 상상만으로 대중들과 함께 피를 토하는 들끓음 말입니다. 어떤 정치를 용인했고 어떤 사회를 구축했는지 반성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죠. 벌써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 보십시오. 권력은 뭐든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하게 만듭니다. 나영이의 끔찍함을 위로하며 다른 쪽으로는 여기서 파생되는 대중적 효과, 인권의 저울질,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한 목적성의 법률 개정으로 파장을 만들어 내는 것 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차단하고 더 근본적인 것에 매스를 댈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목격해야 할 지점은 피해나 가해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과 주위를 목격해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 없이 만들어 내는 사회의 패단에 대처하는 방법 말입니다. 우리는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법과 일련의 매카니즘이 거치는 과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현재의 법과 사회가 왜 우리의 요구를 보호할 수 없는지 개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빌미를, 원치 않는 목적성을 띤 정치적 명목을 주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나영이를 지킬 수 없었지만 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돈과 경쟁적 교육으로 사회가 썪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나마 인류가 인간다움으로 살아 왔던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사 그 아이를 지키겠다며 덤벼드는 동정과 연민조차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TAGS 용서받지못할짓
프로젝트 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논쟁은 당연 커뮤니케이션이다. 논쟁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의 범주지만, 프로젝트라는 작은 경영단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엄연한 업무 중 하나다. 커뮤니케이션 업무란 무엇일까?
개인이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업무
1. 프로젝트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2. 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앞으로 나와 얘기할 사람은 누구인가?
3. 얘기할 사람의 연락처는? : 내선전화, 핸드폰, 이메일, 메신저 등등
4. 여러 연락처 중 상황에 따라 활용할 매체는 무엇인가?
5.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이 있는가? : 서버, 게시판, 프로젝터, 아웃룩, 기타 지정된 스토로지
6.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에는 어떤 것을 공유하는가?
7. 이메일을 TO 로 보낼 사람과 CC 로 보낼 사람은 누구인가?
매니지먼트가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업무
1. 매니지먼트에 속한 사람은 누구 인가?
2. 그외 이해당사자는 누구인가?
3.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보고 일정은?(일일, 주간, 월간 등)
4. 보고 탬플릿은?
5. 업무 트랙킹과 Panding 리스트 관리 체계는?
6. WBS 의 업무 담당자 Matching 은?
7. 각종 문서의 표준화는 무엇으로 하는가?
복잡하다. 이렇게 열거하는 이유는 '복잡성경제를 기반한 업무프로세스의 다양함' 따위의 멋드러짐이 아니다. 대게가 위계를 위한 '질서 잡기'의 일환이다. 너 위에 나 있다, 란 식을 세련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뒤에 참여한 사람이 겁을 집어 먹고 숨이 턱에 차도록 프로세스를 익히면서 이른바 '업무를 배운다' 는 암묵적 윽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란 이렇게 쿨하며 조용하다.
프로젝트 안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면 공중분해된다. 그 많던 말들은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가고 문서만 켜켜이 쌓인다. 1년에 단 한번 펼칠 문서라고 해도 1톤트럭을 대절해야 운반이 가능할 때도 있다. 부대낌과 말과 관계는 사라진다. 때로는 쿨하지 못하고 회복될 수 없는 원수가 되거나 아삼육이 되기도 한다. 시스템은 쿨했으나 인간은 그럴 수 없는 것, 인지상정이다. 그러하다 보니 시스템은 더더욱 쿨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공중분해 될 것 정해진 커뮤니케이션만 하면 되지 않나, 반문하게 되면 문제는 프로젝트 기간에 따라 견딤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해진 것 이상의, 시스템보다 더 시스템적이어서 반문할 수 없는 협업이 이루어지거나, 인지상정을 통해 비즈니스 관계가 전면 부정되어야 그 기간을 넘어 인간답게 살아 남을 수 있다. 넓게 보아 커뮤니케이션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프로젝트는 짧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매카니즘이다. 삶은 길고 목적이 다르다. 하지만, 일과 삶, 공과 사를 완벽히 분리하고 냉정한 듯, 양쪽을 다 제단하며 살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들 중에도 프로젝트를 한다.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은 완벽하게 구축된 시스템이 아니다. 시스템은 있으나 그것의 접근 방식은 삶의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공동체에서 너도 나도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는 기본 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도와 교양이다. 또는 성의와 진정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진정성이 아니다. 시스템은 고안단계에서 이미 냉정하고 진정성을 갖추도록 설계 되어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말과 언어다. 말은 말투에 언어는 텍스트에 기댄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는 것은 말투에 태도와 교양이 묻어 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말투에 단어를 골라 쓰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텍스트에도 제스쳐가 있다. 입속에서 꿀을 삼키기도 하고 가시를 씹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껍데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 성의와 진정이 있지 않으면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여지 없이 붕괴한다. 시간 차만 있을 뿐.
인간의 진정을 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태도가 곧 진정이다. 사람을 보고 빠르게 판단하는 만큼 실수도 잦다. 하지만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삶에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 있다면 그런 성찰이 있다면, 뛰듯 걷듯 자신의 주위와 사람을 살피며 몸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다면 태도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프로젝트던 삶에서든 커뮤니케이션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을 오늘 요약해내는 일일 것이다.
오늘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 이란 것에 힘들어 하는 에이전트, 컨설턴트에게..
클라이언트 옆에 앉아 보시라, 고 권하고 싶다.
개인이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업무
1. 프로젝트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2. 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앞으로 나와 얘기할 사람은 누구인가?
3. 얘기할 사람의 연락처는? : 내선전화, 핸드폰, 이메일, 메신저 등등
4. 여러 연락처 중 상황에 따라 활용할 매체는 무엇인가?
5.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이 있는가? : 서버, 게시판, 프로젝터, 아웃룩, 기타 지정된 스토로지
6.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에는 어떤 것을 공유하는가?
7. 이메일을 TO 로 보낼 사람과 CC 로 보낼 사람은 누구인가?
매니지먼트가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업무
1. 매니지먼트에 속한 사람은 누구 인가?
2. 그외 이해당사자는 누구인가?
3.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보고 일정은?(일일, 주간, 월간 등)
4. 보고 탬플릿은?
5. 업무 트랙킹과 Panding 리스트 관리 체계는?
6. WBS 의 업무 담당자 Matching 은?
7. 각종 문서의 표준화는 무엇으로 하는가?
복잡하다. 이렇게 열거하는 이유는 '복잡성경제를 기반한 업무프로세스의 다양함' 따위의 멋드러짐이 아니다. 대게가 위계를 위한 '질서 잡기'의 일환이다. 너 위에 나 있다, 란 식을 세련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뒤에 참여한 사람이 겁을 집어 먹고 숨이 턱에 차도록 프로세스를 익히면서 이른바 '업무를 배운다' 는 암묵적 윽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란 이렇게 쿨하며 조용하다.
프로젝트 안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면 공중분해된다. 그 많던 말들은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가고 문서만 켜켜이 쌓인다. 1년에 단 한번 펼칠 문서라고 해도 1톤트럭을 대절해야 운반이 가능할 때도 있다. 부대낌과 말과 관계는 사라진다. 때로는 쿨하지 못하고 회복될 수 없는 원수가 되거나 아삼육이 되기도 한다. 시스템은 쿨했으나 인간은 그럴 수 없는 것, 인지상정이다. 그러하다 보니 시스템은 더더욱 쿨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공중분해 될 것 정해진 커뮤니케이션만 하면 되지 않나, 반문하게 되면 문제는 프로젝트 기간에 따라 견딤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해진 것 이상의, 시스템보다 더 시스템적이어서 반문할 수 없는 협업이 이루어지거나, 인지상정을 통해 비즈니스 관계가 전면 부정되어야 그 기간을 넘어 인간답게 살아 남을 수 있다. 넓게 보아 커뮤니케이션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프로젝트는 짧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매카니즘이다. 삶은 길고 목적이 다르다. 하지만, 일과 삶, 공과 사를 완벽히 분리하고 냉정한 듯, 양쪽을 다 제단하며 살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들 중에도 프로젝트를 한다.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은 완벽하게 구축된 시스템이 아니다. 시스템은 있으나 그것의 접근 방식은 삶의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공동체에서 너도 나도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는 기본 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도와 교양이다. 또는 성의와 진정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진정성이 아니다. 시스템은 고안단계에서 이미 냉정하고 진정성을 갖추도록 설계 되어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말과 언어다. 말은 말투에 언어는 텍스트에 기댄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는 것은 말투에 태도와 교양이 묻어 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말투에 단어를 골라 쓰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텍스트에도 제스쳐가 있다. 입속에서 꿀을 삼키기도 하고 가시를 씹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껍데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 성의와 진정이 있지 않으면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여지 없이 붕괴한다. 시간 차만 있을 뿐.
인간의 진정을 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태도가 곧 진정이다. 사람을 보고 빠르게 판단하는 만큼 실수도 잦다. 하지만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삶에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 있다면 그런 성찰이 있다면, 뛰듯 걷듯 자신의 주위와 사람을 살피며 몸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다면 태도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프로젝트던 삶에서든 커뮤니케이션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을 오늘 요약해내는 일일 것이다.
오늘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 이란 것에 힘들어 하는 에이전트, 컨설턴트에게..
클라이언트 옆에 앉아 보시라, 고 권하고 싶다.
요즘 김태원은 '부활' 로 보여지지 않고 예능인으로 자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웃긴다. 나는 박명수 팬이다. 박명수의 나이와 내 나이가 그게 그것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짜증 섞인 개그가 웃긴다. 마치 내 모습을 투영하듯 그 짜증은 곧 내 일상의 짜증과 같기 때문이다. 김태원이 그렇다. 그는 더 나아가 귀찮음을 소재로 활용한다. 게다가 그들은 신체의 허술함을 무기로 한다. 아버지로 국민할매로 자신을 조롱한다. 한창 사회에서 일할 나이라는 이유로 절제를 미덕으로 섬기는 끼인 나이의 그들, 그들과 비슷한 우리들도 때때로 부리고 싶은 애교와 엄살이 있다. 박명수와 김태원이 그걸 보여준다.
김태원은 이승철과 함께 부활 맴버다. 삼사십대 사람들은 부활, 들국화와 청춘을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시절 김태원이 대마초로 걸려 들었을 때 나는 담배를 배웠다. 창작을 하기 위해 대마초를 피웠다고 한 발언을 믿었다. 나도 한때 학교밴드를 조직했고 곡을 만들기 위해 술을 마셨다.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불렀다. 고만고만한 학교밴드에서 유행가를 재생하던 것 이상으로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사랑과 이별, 그 자체였다. 밑고 끝도 없이 이승철이 부활을 탈퇴한 것으로 믿었고 이승철을 저주했다. 이승철이 복귀 했을 때 다시 열광 했다. 김태원이 부활을 재결성하고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단 소식에 팔뚝으로 눈을 훔쳤다.
부활은 부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밴드다. 사회 생활을 하며 한동안 부활을 잊었었다. 그러다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했다. 그때 부활은 '사랑할수록' 이란 노래를 발표 했다. 나는 이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됐다. 부활은 '위대한 밴드' 다. 삶의 목적이 있었던 시절마다 그들의 노래가 있었기에 그렇다. 인생을 반추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목격한 노래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부활은 위대하다. 그런 김태원이 예능을 하며 스스로를 조롱하고 엄살 부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네버엔딩스토리를 통해 그런 웃음과 감수성이 나오기 위한 자양분은 괴롭고 쓰디 쓸 수 밖에 없음을 모든 음표를 동원하여 보여줬다. 그것으로 엔드다.
지난 달 부활이 2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 했다. 그들은 또 부활했다.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김태원은 이승철과 함께 부활 맴버다. 삼사십대 사람들은 부활, 들국화와 청춘을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시절 김태원이 대마초로 걸려 들었을 때 나는 담배를 배웠다. 창작을 하기 위해 대마초를 피웠다고 한 발언을 믿었다. 나도 한때 학교밴드를 조직했고 곡을 만들기 위해 술을 마셨다.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불렀다. 고만고만한 학교밴드에서 유행가를 재생하던 것 이상으로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사랑과 이별, 그 자체였다. 밑고 끝도 없이 이승철이 부활을 탈퇴한 것으로 믿었고 이승철을 저주했다. 이승철이 복귀 했을 때 다시 열광 했다. 김태원이 부활을 재결성하고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단 소식에 팔뚝으로 눈을 훔쳤다.
부활은 부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밴드다. 사회 생활을 하며 한동안 부활을 잊었었다. 그러다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했다. 그때 부활은 '사랑할수록' 이란 노래를 발표 했다. 나는 이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됐다. 부활은 '위대한 밴드' 다. 삶의 목적이 있었던 시절마다 그들의 노래가 있었기에 그렇다. 인생을 반추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목격한 노래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부활은 위대하다. 그런 김태원이 예능을 하며 스스로를 조롱하고 엄살 부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네버엔딩스토리를 통해 그런 웃음과 감수성이 나오기 위한 자양분은 괴롭고 쓰디 쓸 수 밖에 없음을 모든 음표를 동원하여 보여줬다. 그것으로 엔드다.
지난 달 부활이 2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 했다. 그들은 또 부활했다.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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