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 맞춰 놓은 와이셔츠를 찾으러 이태원에 들렀다. 여기까지 왔으니 보광동 엔티크 가구숍에 들러서 근사한 앙투안 와토의 '시테섬의 순례' 모작본을 한번 더 볼 요량이 생겼지만, 쉬는 일요일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이른 일요일 아침, 와이셔츠숍에 들렀다가 압구정에서 머리를 깎고 서점에서 존재의 구입을 즐기다가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본 다음 집에 와서 책을 봐야 겠다고 정해 놓은 이른 일요일 계획에 난데 없이 생겨 난 가구숍의 일정이 역시 정해 놓지 않았다는 이유처럼 무참히 깨어진 지금, 위독한 병세가 완연한 창백한 손바닥은 속수무책으로 식은 땀을 흘렸다. 어디로 가야 하지? 갑자기 나는 일정 없는 이방인이 되어 한가함에 서 있었다. 한가함은 나에게 서툰 일인 것 같다. 되도록 짧게 머리를 깎으면 의례 무슨 일 있냐며, 무슨 일도 없는 과거를 바짝 끌어 당겨와야만 할 것 같은 친절한 간섭이 없는 단골 미용사는 깊숙히 머리칼만 썰어 내고 있었다. '더 짧게?', '더 깊숙히' 부끄러운 주말을 없애듯...
'저긴 소설이고 여긴 예술 입니다.', '즉, A 구역은 소설이고, F 구역은 예술입니다.' 대형서점은 사고의 권리를 그런 식으로 구획 지어 준다. 편리하지만 치밀한 우민화다. 편리를 격리할 수 없는 것이 현대적이라 하더라도 내가 만들 책방에는 장르의 구획이 없는 공간을 하나쯤 가지고 싶다. 오랜만에 꺼내보는 쩔은 '죄와벌' 의 중간 페이지쯤에서 노란 은행잎을 발견하는 생활의 놀라움처럼, 책의 색깔이나 쓰임새 별로 넣어 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서양미술사 400년 대도록 '푸생에서 마티스 까지' 란 책은 사고를 구획해 놓은 대형서점을 닮은 책이다. 400년이란 나열을 빼면 시선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전시회인데다가 대도록을 대형서점의 어느 구획에 집단으로 방출한 비즈니스 마인드까지, 무기가 구릴 수록 마케팅은 강화된다는 이치는 떨떠름하다.(게다가 작품이 없어서 피카소는 빼 놓은 건가? 아니면 그가 공산주의자라서?) 대도록을 내려 놓고 딱딱하지만 사족이 없는 천년의 그림여행과 화가들이 사랑한 파리 라는 화가들이 이젤을 놓은 장소를 추적한 책을 샀다. 그리고는 편리하게 A 구역을 방문해주기로 한 나는 그곳에서 재 간행된 쓸쓸한 '무진기행' 을 발견했다.
특산물이 없는 건 무진이나 서울이나 매한가지다. 무진은 그래서 안개가 있고, 서울엔 시멘트가 있다. 저만치 있는 산과 사람을 단절시키는데는 그만인 것들을 나눠가지고 있다. 소설가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무진이나 서울이나 여행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통찰력이 부족했던 내 10대 후반의 무진기행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마찬가지였던 생각이 상기된 것도 유배된 기억이 미처 돌아 오기도 전에 냅다 사버리고 서양미술 400년 전시회를 가볍게 포기한 후에 남산에 차를 대고 이미 서너 페이지를 읽어 내린 후 였다. 감각적인 글씨를 빼고 나면 김승옥은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시나리오가 어울리는, 60년대의 김기덕 같았다. 무진이란데, 참 모진 기억이다 라며 하인숙이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 을 대신해서 '목포의 눈물' 을 부를 때까진 그랬다, 15년전의 마찬가지였던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의 마지막 문장은 비밀을 가득 품은 무진의 안개 같았다. 외로움을 견디는 척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을 보고 솔찮은 것을 먹지만, 결국 심심해서 무료 에이즈 검사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방랑의 종말을 무진에선 안개가 서울에선 시멘트가 가리워줬던 것일까?
여행에서 돌아오며 수치심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서럽지 않았던 때는? 이태원에서 정신을 잃은 위독한 병처럼 길은 온통 위독하고 내 몸은 속수무책이다. 굳이 남들이 다 여행이라고 하는 형식을 갖지 않아도 나는 이제 술에 취해도 심하게 부끄러운 새벽을 맞고, 숙취 냄새가 가시지 않는 방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서도 부끄러워진다. 10대 후반에 느끼지 못한 부끄러움이 내 위독한 병이라며 혼잣말을 해보자면, 못마땅한 창백한 얼굴에 객사한 여귀의 가면이 씌어져서 역시 객사의 주의보를 일러주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급했다면, 나는 더욱 부끄러울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울 것이다.
'저긴 소설이고 여긴 예술 입니다.', '즉, A 구역은 소설이고, F 구역은 예술입니다.' 대형서점은 사고의 권리를 그런 식으로 구획 지어 준다. 편리하지만 치밀한 우민화다. 편리를 격리할 수 없는 것이 현대적이라 하더라도 내가 만들 책방에는 장르의 구획이 없는 공간을 하나쯤 가지고 싶다. 오랜만에 꺼내보는 쩔은 '죄와벌' 의 중간 페이지쯤에서 노란 은행잎을 발견하는 생활의 놀라움처럼, 책의 색깔이나 쓰임새 별로 넣어 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서양미술사 400년 대도록 '푸생에서 마티스 까지' 란 책은 사고를 구획해 놓은 대형서점을 닮은 책이다. 400년이란 나열을 빼면 시선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전시회인데다가 대도록을 대형서점의 어느 구획에 집단으로 방출한 비즈니스 마인드까지, 무기가 구릴 수록 마케팅은 강화된다는 이치는 떨떠름하다.(게다가 작품이 없어서 피카소는 빼 놓은 건가? 아니면 그가 공산주의자라서?) 대도록을 내려 놓고 딱딱하지만 사족이 없는 천년의 그림여행과 화가들이 사랑한 파리 라는 화가들이 이젤을 놓은 장소를 추적한 책을 샀다. 그리고는 편리하게 A 구역을 방문해주기로 한 나는 그곳에서 재 간행된 쓸쓸한 '무진기행' 을 발견했다.
특산물이 없는 건 무진이나 서울이나 매한가지다. 무진은 그래서 안개가 있고, 서울엔 시멘트가 있다. 저만치 있는 산과 사람을 단절시키는데는 그만인 것들을 나눠가지고 있다. 소설가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무진이나 서울이나 여행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통찰력이 부족했던 내 10대 후반의 무진기행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마찬가지였던 생각이 상기된 것도 유배된 기억이 미처 돌아 오기도 전에 냅다 사버리고 서양미술 400년 전시회를 가볍게 포기한 후에 남산에 차를 대고 이미 서너 페이지를 읽어 내린 후 였다. 감각적인 글씨를 빼고 나면 김승옥은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시나리오가 어울리는, 60년대의 김기덕 같았다. 무진이란데, 참 모진 기억이다 라며 하인숙이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 을 대신해서 '목포의 눈물' 을 부를 때까진 그랬다, 15년전의 마찬가지였던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의 마지막 문장은 비밀을 가득 품은 무진의 안개 같았다. 외로움을 견디는 척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을 보고 솔찮은 것을 먹지만, 결국 심심해서 무료 에이즈 검사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방랑의 종말을 무진에선 안개가 서울에선 시멘트가 가리워줬던 것일까?
여행에서 돌아오며 수치심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서럽지 않았던 때는? 이태원에서 정신을 잃은 위독한 병처럼 길은 온통 위독하고 내 몸은 속수무책이다. 굳이 남들이 다 여행이라고 하는 형식을 갖지 않아도 나는 이제 술에 취해도 심하게 부끄러운 새벽을 맞고, 숙취 냄새가 가시지 않는 방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서도 부끄러워진다. 10대 후반에 느끼지 못한 부끄러움이 내 위독한 병이라며 혼잣말을 해보자면, 못마땅한 창백한 얼굴에 객사한 여귀의 가면이 씌어져서 역시 객사의 주의보를 일러주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급했다면, 나는 더욱 부끄러울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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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2005/03/08 02:3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에드워드 호퍼의 'Sunday Morning' 이란 그림 생각나요.
평화롭지만..허허로운 거리의 풍경 같은 그런 일요일 아침 기행이었네여.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가니라 부산을 떤다고.. 나의 일요일 아침은 절대 평화롭지 못하지만,
이번 구정 연휴. 풍월당에서 바로크를 들으며 내려다보는 휴일 아침 압구정길의 스산함이 참 좋았읍니다.
Jack 2005/03/08 12:5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지평선을 바라보는 느낌, 네 그정도가 맞는 것 같네요...
앞으로는 너무 생각이 많은 주말을 사양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