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쳐 열풍과 IMF 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수많은 자영업자, 창업자가 생겼다. 목적형 창업과 생계형 창업으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반도체가 그랬듯이 벤쳐를 제 2의 국가 성장의 원동력으로 간주한 정권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은 과잉 공급하고 자본은 엉뚱한 곳에 쓰이기 좋게 만들었다. 목적형 창업이 성장의 케즘을 넘지 못하고 거품으로 터져 버리면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고 노동자와 같이 윤택해지기 위한 근본적 벤쳐 정신을 가진 창업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울고 불고 때를 쓰지 않더라도 그저 인간적인 것(은 울고 불고 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공감하고 서로를 연대하는 것이다.)만으로 따지자면, 속된 말로 망해도 3대가 먹고 사는 본래부터 계급이 다른 부르조아가 아니라 근본적 벤쳐정신으로 없는 살림 쪼개고, 있는 신용 금융기관에 팔아서 잘되면 같이 잘되자는 프롤레타리아 창업자가 거품에 터져 버리면, 생계수단을 잃은 노동자 만큼 창업자에게도 동정이 가는게 인간의 연민이다. 동정을 빼고 남은 비즈니스만이라면, 노동자의 3대가 걸쳐서 저주할 원수가 되겠지만. 실은, 경영을 하는 사람과 노동자라는 오늘날 가장 수상한 인간의 연대(회사라 통칭하는)에서 연민은 경계의 대상이다. 그것은 책임의 농도를 희석시키는데 있어서 위대한 H2O 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추구가 없는 인간적 연대는 되도록이면 빨리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공중분해 되는 편이 낫다.
모이면 의례 조직을 하는 인간의 그저그런 의지를 마치 절대 생존의 법칙인양 교육했던 것이 '뭉치면 산다' 이다. 뭉치면 왜 사는 지에 대한 부연은 없는체 나무 젓가락 한개는 쉽게 부러지고 세개는 부러지지 않는다는 유아적 쇄뇌를 통해서만 규정되었다. 이 구호의 역사적 계통(이승만 대통령이 언급)은 모호하지만, 개운치 않은 뭉침으로 인해 대열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고 대열은 오와열이며 곧 군사문화를 추리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어떤 정신은 어떤 지식보다 중요하다. 뭉치는 행위에 의한 밀도의 증가가 생물이나 물질의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논리된바 없지만, 생활에 있어서 그 행위는 어떤 정신으로 논리되어야 한다. 뭉치면 산다는 구호는 뭉치면 생활할 수 있다는 윤택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것은 군사질서적 위정자들에 의해 산다고만 하면 휘둘릴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대열의 조직이었을 뿐이다. 군사문화에서 '뭉쳤을 때의 삶은 어떤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가?' 란 생각은 효율적인 오와열을 흔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오와열에서 어떤 정신은 있을 수가 없다. 대체로 그런 오와열에서의 지식이란, 부당한 폭력에 굴복하는 방법론 정도가 된다.
뭉침, 즉 대열과 연대의 차이는 자아가 공감하는 정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대열의 질은 생존과 획일에 있지만, 연대의 질은 생활과 책임에 있다. 연대의 질에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은 반항과 모반의 차이와도 같다. 반항은 그것의 접고 펼침이 오롯이 혼자만의 결정에 의하지만, 모반은 사람들과 정신적 공감의 상태에서 반항을 하는 것으로 그것이 접혔을 때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연대에는 목숨과도 같은 책임으로 걸은 생활이 존재해야 한다.
현대의 공간은 인간이 뭉치고 떨어지고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전자적으로 Link 되고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족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미 말했듯 그저그런 의지로 조직하는 본능과 더불어 대열이나 연대는 우리 주변 어느 곳에나 있다. 다만, 인간의 연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대열들이 오와열에 대한 혈안이 마치 책임인양 떠들어 대며 사회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쳐열풍이 불었던 문민정부 때는 김영삼씨와 노동자의 노동을 띄먹고 도망친 창업자들이었고, 요즘엔 개그계가 그 대표성을 띄려고 하는 듯 하다.
울고 불고 때를 쓰지 않더라도 그저 인간적인 것(은 울고 불고 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공감하고 서로를 연대하는 것이다.)만으로 따지자면, 속된 말로 망해도 3대가 먹고 사는 본래부터 계급이 다른 부르조아가 아니라 근본적 벤쳐정신으로 없는 살림 쪼개고, 있는 신용 금융기관에 팔아서 잘되면 같이 잘되자는 프롤레타리아 창업자가 거품에 터져 버리면, 생계수단을 잃은 노동자 만큼 창업자에게도 동정이 가는게 인간의 연민이다. 동정을 빼고 남은 비즈니스만이라면, 노동자의 3대가 걸쳐서 저주할 원수가 되겠지만. 실은, 경영을 하는 사람과 노동자라는 오늘날 가장 수상한 인간의 연대(회사라 통칭하는)에서 연민은 경계의 대상이다. 그것은 책임의 농도를 희석시키는데 있어서 위대한 H2O 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추구가 없는 인간적 연대는 되도록이면 빨리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공중분해 되는 편이 낫다.
모이면 의례 조직을 하는 인간의 그저그런 의지를 마치 절대 생존의 법칙인양 교육했던 것이 '뭉치면 산다' 이다. 뭉치면 왜 사는 지에 대한 부연은 없는체 나무 젓가락 한개는 쉽게 부러지고 세개는 부러지지 않는다는 유아적 쇄뇌를 통해서만 규정되었다. 이 구호의 역사적 계통(이승만 대통령이 언급)은 모호하지만, 개운치 않은 뭉침으로 인해 대열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고 대열은 오와열이며 곧 군사문화를 추리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어떤 정신은 어떤 지식보다 중요하다. 뭉치는 행위에 의한 밀도의 증가가 생물이나 물질의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논리된바 없지만, 생활에 있어서 그 행위는 어떤 정신으로 논리되어야 한다. 뭉치면 산다는 구호는 뭉치면 생활할 수 있다는 윤택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것은 군사질서적 위정자들에 의해 산다고만 하면 휘둘릴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대열의 조직이었을 뿐이다. 군사문화에서 '뭉쳤을 때의 삶은 어떤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가?' 란 생각은 효율적인 오와열을 흔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오와열에서 어떤 정신은 있을 수가 없다. 대체로 그런 오와열에서의 지식이란, 부당한 폭력에 굴복하는 방법론 정도가 된다.
뭉침, 즉 대열과 연대의 차이는 자아가 공감하는 정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대열의 질은 생존과 획일에 있지만, 연대의 질은 생활과 책임에 있다. 연대의 질에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은 반항과 모반의 차이와도 같다. 반항은 그것의 접고 펼침이 오롯이 혼자만의 결정에 의하지만, 모반은 사람들과 정신적 공감의 상태에서 반항을 하는 것으로 그것이 접혔을 때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연대에는 목숨과도 같은 책임으로 걸은 생활이 존재해야 한다.
현대의 공간은 인간이 뭉치고 떨어지고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전자적으로 Link 되고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족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미 말했듯 그저그런 의지로 조직하는 본능과 더불어 대열이나 연대는 우리 주변 어느 곳에나 있다. 다만, 인간의 연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대열들이 오와열에 대한 혈안이 마치 책임인양 떠들어 대며 사회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쳐열풍이 불었던 문민정부 때는 김영삼씨와 노동자의 노동을 띄먹고 도망친 창업자들이었고, 요즘엔 개그계가 그 대표성을 띄려고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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