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을 본다. 별이 빛난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기 때문에 서울이 아닐 수 있다. 문득,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 통장이 생각난다. 생활의 자양분이었지만, 별과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통장은 나를 눈물나게 한다. 그저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깨고 난 적금만으로 눈물이 흐를 수 있을까? 여기엔 별이라는 이입장치로 인해 나의 감수성이 자연의 순수한 감수성과 반응한 탓이다. 별은 밤에만 뜬다. 자연은 그것을 보여주는 시간이 다르다. 따라서 서울처럼 별이 빛나지 않는 도시에서 별은 그저 가슴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뜻밖의 호의를 배푼다고 하자,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과 삼나무와 찬란한 마을을 '별이 빛나는 밤에' 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별을 보며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 통장을 떠올린다. 다시 눈가가 촉촉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이란 자고로 사물의 재현과 독자가 발휘할 수 있는 감수성의 범위 또는 작가가 전달하는 감수성의 범위가 보편성에 준거했을 때, 이건 예술이야, 감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오래전이지 않은 시대에는 말이다.
대중의 관점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대중의 안목은 시대와 필연적인 연관을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안목이 흐르는 시대에 그대로 몸을 맡겨서 생긴 변화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상호 반응으로써의 진화가 안목을 바꾼다. 그 안목이 수용하는 것 또한 인간 자체의 것이거나 자연 자체의 것일 때 뿐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구성이라 생각되었던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수용은 사실 칸트 정도 밖에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 자체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수용은 뉴튼 정도 밖에는 거슬러 올러가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얼마 되지 않은 역사일 뿐이다. 게다가 영혼과 정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앎의 범위안에 그것들이 있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자연을 재현하던 예술이 언제부터 재현을 멈추게 되었을까? 아마도 '탈' 이라는 의지가 생겼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근대화가 되었을 때 그것의 탈, 현대화가 되었을 때 그것의 탈, 해방과 탈주의 의지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안목은 자연을 볼 수 없는 시간이나 공간에서 해방되어 자연을 감상하고픈 소극적 의지에서 생산된 범주에 예술을 들이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양한 영혼과 정신들이 추구하는 것들, 현재에서 미래를 재현한 것들이 새로운 안목 즉 '탈'의 구조이며 사조적으로 현대예술이라고 한다. 현대예술은 자연을 재현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자연이라고 생각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꺼꾸로 누구나 아는 것을 상투적으로 재현하는 섬세하지만 지루한 예술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현대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이게 뭐지? 라는 감탄사다. 칸딘스키나 잭슨폴락과 같은 아메리칸 추상과 액션 페인팅의 예술을 보고 연발하는 감탄사는 이게 뭐지? 일 뿐이다. 아직 우리의 낡은 영혼은 별을 추구하는 것일까?
자연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은 인간이 추구할 수 없는 절대이성이다. 헤겔의 말이 들린다. 절대이성의 자유가 세계를 창조 했다는 말이. 하지만 자연이란 절대이성은 인간을 창조하며 너무 자유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지점을 쾌와 불쾌, 취미와 이성으로 명확하게 우리가 절대이성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을 찍어 준 사람이 칸트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술을 진지함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남들이 모두 예술이라고 해도 내가 불쾌하면 예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같은 쾌와 불쾌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창조한 예술이라는 어떤 작품에 대해서 '수(數)'적인 것이 기준이 되거나, 누군가가 예술이라고 지정해준 것을 예술이라고 인정하고 심각해질 필요도 없다. 절대이성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로 승화되어 작가의 유희로, 감상하는 행위로써는 감정의 유희로 승화되어 예술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유희하는 것이 되었다.
유희도 유희 나름이다. 그림 좀 그린다는 베르메르가 내가 그린 것은 예술이다, 또는 베르메르의 패트런이 내가 산 베르메르의 그림은 예술이라고 하면 예술인가 보다며 감상하는 척이라도 할텐데, 추상과 큐비즘를 비롯하여 포스트모던, 다다에 이르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자연을 닮지도 나를 닮지도 않은 예술성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존하여 표현된다. 작가도 감상자에게 어떤 대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간격을 다양성이라 볼 수 있다면, 확실히 획실성에 대한 탈적 감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술이 작가의 감수성의 재현일까? 오로지 작가의 그것에서 나온 재현일까? 다른 것과 모방을 시도한 적은 없을까? 모방과 재현, 새로운 안목이 형성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모방은 익숙함을 불러 오고 익숙함이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 대중적 숙달의 합의에 의해 대상이 된다. 오늘날 숙달된 대상이란 자연이 아니다. 현대의 대상성은 캐릭터라고 하는 복제된 자신 즉, 시뮬라크르이다.
이런 시뮬라크르에 숙달된 사람이 대중의 새로운 안목에 적응하며 만들어내는 예술을 팝아트라고 부른다. 팝아트는 예술 사조상 가장 대중의 숙달에 가까운 장르다. 예술작업, 아틀리에에서 수행되는 정적 작업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회화 방식이거나 매체를 이룬 인쇄나 퍼포먼스 기법을 활용하기도 하는 팝아트는 실은 기법에 대한 제한은 없어 보인다. 다만, 대중이 그동안 일상적으로 받아 들인 체제적 사물에게서 느낀 침체된 안목에 새로움을 일깨워 주목을 끄는가, 대중의 이해가 아닌 형식적 유희에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 그것이 팝아트의 예술성이 된다. 그렇다면 팝아트의 규정은 무엇인가? 대중가수나 영화배우는 팝아트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그들은 팝아티스트이지만, 미술사조가 규정한 팝아트의 형식이 아니므로 팝아트가 아니고 회화예술상의 팝아티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매스미디어의 존재들은 팝아트의 대상이 된다. 대중가수와 영화배우는 대중들이 닮아 가고 싶어 하는 대상성의 캐릭터이면서 모방하려는 추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팝아트는 이러한 모방과 그 심리가 작용하는 익숙함을 이용한다.
2차 세계대전과 대공항과 같은 전쟁과 사변을 겪은 세계 최대의 미디어 문화 시장인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한, 추상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상징이라고 해도 무방한 팝아트가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한가 라는 담론은 밀레니엄 초기에 이안, 민병직 등을 통해 대두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라며 추상적인 민족의식만 내세울줄 알았지 그의 타계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어떤 것이 있는지, 대중적 접근의 시도나 연구적 성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팝아트는 우리나라에서 가능한가? 기호와 팝의 강영민, 신종 캐릭터의 이동기, 초대 받지 않은 꿈과 갈등의 낸시 랭, 이들이 우리나라의 팝아티스트들 이다. 이중 낸시 랭은 주목하고 싶지 않아도 미디어로 부터 대중에게 주목하라는 주문을 최대로 내고 있는 아티스트 이다. 그냥 섹시한 것과 예술적으로 섹시한 피사체, 예술체의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르는 마초들은 낸시 랭의 아름다운 젖가슴과 엉덩이에 고정될 수 밖에 없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섹시함도 대중의 익숙한 코드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으니 그녀가 온몸으로 예술을 퍼포밍하는 자체 또한 팝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싶다. 팝아트가 그 정도의 지점을 얘기하는 것 인가?
싱겁다.
하지만, 낸시 랭의 작품엔 적당한 소금이 있다. 싱거운 것에 간을 맞추는 소금이라기 보다, 타오르기 직전의 소태 같은 찌게 냄비 바닥에 장렬한 자극을 뿌리는 소금 같다. 그녀의 예술적 대상성인 미디어도 서서히 열광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2003년 비엔나 비엔날레를 도발하면서 데뷰한 공격적 아티스트이다. 초대받지 않은 그녀가 길거리에서 펼친 퍼포먼스는 1874년 아카데미에 초대 받지 못한 인상파 화가들이 나다의 화실에서 펼친 전시회와 닮아 있다. 기존 질서의 파괴, 보편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성 충만한 해석이 예술에 도움이 되어 더욱 예술적이 되었다는 보고는 없지만, 그런 파괴를 시도하였다니 의도였다고 할 수 밖에. 낸시 랭의 터부 요기니는 그녀를 현재의 그녀로 만들어준 시리즈 작품이다. 건담과 꼴라주의 조합으로 요기니는 낸시 랭 본인이며 선과 악을 결합한 어떤 감정의 메신저로서 핸드백을 든 요기니가 요염하고 공격적으로 클립을 열고 꺼내는 담론은 터부이다. 니체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나서 '그림이 나에게 말했다' 라고 했다. 터부 요기니가 나에게 말했다. "그런거야? 내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둥둥 떠 있어야 했던 이유가" 미디어는 낸시 랭의 작품은 얘기하지 않는다. 대중이 달굴 냄비는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 미디어도 요기니의 말을 들었거나, 요기니는 수다쟁이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를 재현한 요기니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방법상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탓에 그녀 자체를 대상으로 모티브로 활용한다. 행위 퍼포먼스의 영역은 그녀의 전공이다.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애교와 순수는 그녀를 어느 장소에서 건 비키니를 입게 하고 거의 비슷한 요염한 자세를 만들게 한다. 그것이 그녀의 소금이다, 미디어는 그 순간을 노린다.
낸시 랭은 2003년 이후 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의 작품을 봐야 하는데 자꾸만 그녀의 판타스틱한 몸이 아른거린다. 속물 같은이라고... 나는 이것을 절제라는 고전적인 미덕으로 숨기지만, 낸시 랭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욕망을 절제하는 일은 귀찮은 일이다. 가볍지도 않으면서 숨기기 위해 온갖 억제 효소들을 생산하는 중노동을 하고 나서 헤어진 여자친구 사진을 보며 꺼이꺼이 울 수도 없다. 카타르시스라는 개별 승화는 기대할 수 없다. 빡빡한 감정에 질곡한 삶이다. 낸시 랭은 경고한다. 현실에서 고통 받는 것은 싫다고, 살아 있을 때 주목 받고 가벼운 예술을 하고 싶다고 질곡의 삶과 절제의 고전적 삶에 경고장을 발송한다. 거기에 빨간 입술 자국을 콕 찍어 보낼 것만 같다. 낸시 랭의 이미지는 그렇게 드리워진다. 경고장 봉투의 엄숙함을 경고하는 이미지로 말이다. 사실, 그녀의 팝아트적 이미지는 작품보다는 그녀의 육체적 매력이 발산되는 마술적 퍼포먼스에 있다. 게다가 그녀의 공연, 회화 작품은 비평적 텍스트의 범주에도 들락말락 한다. 온갖 현학적 수사와 서술적 문장들이 그녀의 예술을 해체할 수 있을 만큼 욕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는데다가, 그런 고전적인 언어들은 애시당초 낸시 랭의 레이더에 파괴되어야 할 목표물일 뿐이다. 고상한척 하지 말아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속물이 어떤 건데? 무거워질 수 없다, 속물의 가벼운 존재에 대해서... 그녀가 한손에 기동전사 머신건과 핸드백을 들고 던지는 메시지다.
그녀는 가볍지만 별을 향해 나풀나풀 날아가지 않는다. 별은 그녀를 복제하지 않았다. 그녀를 복제한 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그녀를 복제했고 그녀는 다시 자본주의를 시뮬라크르 한다. 복제와 모방의 끝나지 않는 사사로운 놀이, 그녀가 팝아트를 경박한 지점까지 끌어 내린 단 몇줄의 미학적 레토릭 되겠다. 하지만, 그녀를 해체하는데 있어서 두려운 점도 그녀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복제와 가벼움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술사조로서의 팝아트를 부정하고 그녀를 주목할 만한 현실의 사실로 세울 수는 없다. 그녀를 현실의 주목할만한 사실, 즉 역사로 기록되기 위해 작품만이 그녀의 재현으로 취급되어 질 수도 없다. 이미 그녀는 그것을 포기한 듯 보이기 까지 하다. 자본주의의 모든 상업적 요소들에 낸시 랭 라인을 구축하려는 예술철학이 그것인데, 철학이든 재현이든 퍼포먼스를 하는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상과 태도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언급했듯 그녀가 M.net 을 휘어 잡는 가능성 있는 엔터테이너로서, 패션 아트 디렉터로서, 집필 가능한 발행인으로서 어느날 압구정 횡단보도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루이비통 핸드백 속에 입을 쳐박고 노래를 불러도 크게 놀랄만하지 않으면서도, 꽤나 주목할만한 현실의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주목한 현실은 짐짓 고상한 척 하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바자나 에콜 같은 트랜디 잡지이다. 끼가 있는 자들이 모두 주목 받고 싶어 하는 잡지에 단골 아티클이 된 그녀는 대게의 트랜디 잡지들이 쏟아 내는 잡다한 로망에 기꺼이 몸을 맡긴 것 처럼 보인다. 사실, 그녀의 작품이 어디에 영향을 주는가 라는 일반적인 물음에 답한다면, 그녀의 몸과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반란적 성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짐짓 페미니즘적인 발언도 사뭇 진지하진 않다. 전통적 가치에 대한 종사에서 사회 가치적 욕구를 통해 여성을 해방한다는 선동적 의지는 비단 여성들만의 문제도 아니거니와 낸시 랭, 그녀가 추구하는 바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낸시 랭이 생각해 낸 예술과 삶과 성의 해방구는 그녀를 복제했고 그녀가 시뮬라크르한 자본주의이다. 그녀는 더 가벼운, 가둬 둘 수 없는 욕구 충족을 위해 남들이 기피 하는 공간과 시간에 스스로를 내놓는 작업에 팝아트를 빌려 왔을 뿐이다. 그녀는 꺼리낌이 없다. 빌려 온 것은 되돌려 주면 된다.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인간들은 민망할 따름이다. 그녀의 메시지를 잊었는가? 절제는 민망함을 낳는다, 이는 죄악이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이슈인지는 모르지만, 콘트라 섹쥬얼이라는 여성성의 해방구의 상징으로, 성공한 여성으로, 그녀가 달려가고 있는 곳 또한 성찰이 부족한 남성성의 국경선이다. 여권에 빨간 입술 자국을 찍고 애교의 여왕이라는 미디어의 소개처럼 오빠야~ 정도면 무사 통과다.
낸시 랭이 금기시 했던 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저항 의식은 아닌 모양이다. 전통에 대한 파괴는 애초에 기대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너무 어렵고 힘든 선언이다. 도시적 어떤 이미지, 늘씬하게 빠진 고급 외제 승용차가 날리는 날까로움, 온라인 보세 쇼핑몰에서 산 듯한 코스톰에 브랜뉴 루이비통 핸드백은 짝퉁일까? 그녀의 금기가 드러나는 투쟁의 지점이다. 진품 루이비통을 사라, 그것을 살까 말까 고민하거나 절제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 금기를 깨라... 그녀의 퍼포먼스는 절제된 자본주의적 욕망을 깨는데 있다. 대중속에서 명품이나 개별적 소비 자본의 확대가 추구하는 것이 오래가고 튼튼한 실용과는 거리가 멀고 보면 그것의 가치는 기존 질서안에서 미시적인 금기의 파괴를 통해 공기의 신선도가 다른 계급으로 옮겨 가기를 요구하는 발상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치명적이다. 그녀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해야 했을 대상성인 자본주의, 도시적 산출물들의 모순은 전혀 부정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또는 다양한 이성이나 감수성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녹여 내지도 못한다. 사이프레스 힐을 듣는다고, 성대묘사 한다고 그가 되지 않지만 더욱 해로운 것은 과격한 멜로디와 이미지가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가벼운 성찰이 발동 될 때 이다. 팝아트가 그녀의 장르라고 하지만, 사실 그녀의 감수성이나 기법이 그것에 다가갔을지도 모르지만, 생각도 다가가고 있는 중인가, 그녀는 자본주의에 무분별한 매몰을 퍼포먼스 중인가, 추종자를 모집하고 그들을 동원하여 명품을 사지 않는 자들, 자본에 비껴 서 있는 자들 앞에 금을 긋는 중인가, 그녀의 코맹맹이 애교 가득한 목소리는 충분히 대중을 움직일 수 있다. 불행이도 그녀의 작품이 아닌, 그녀의 섹시한 가슴을 바라보는 마초 오빠들의 가부장적 소유욕에 불타는 자본주의를 주입시켜 루이비통을 기꺼이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그녀는 바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녀는 일단 자신이 돈 잘벌고 그 덩어리인 애교와 섹시의 마술을 유지하며 대중들에게 자신이 곧 미디어이고 숭배의 대상임을 간주하게 한다. 원본이 없는 세계의 이념으로 자본주의를 이용하는데 거침이 없다. 더불어 그녀가 추구하는 재현의 대상이 본인 그 자체임을 천명하고 대중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존재를 일깨우는 다양한 안목을 제공하지 않는다. 낯익은 세계를 파괴하고 낯설은 존재의 일어남이 아니라 낯익은 세계를 파괴한다는 편집적 조작을 통해 다시 낯익은 세계로의 귀환을 추구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자신을 추구하게 만드는 나르시즘의 전파, 미와 숭고가 투쟁하는 예술이 아닌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가두는 정체불명의 유령을 신앙하는데 예술을 차용했을 뿐이다. 그녀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은 안목을 재조립하여 통찰을 이끌어 낼 필요조차 없다. 그녀 자체가 세계의 모든 자본주의를 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 좌절된 젊은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고 있다는 짐짓 공동체적인 생각을 할지언정 그녀가 치명적으로 공동체를 구분하는 이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향력 있는 개인이 대중에게 주목받기 위해 자신을 프로덕트적으로 활용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일깨워줄 세계의 통찰에 자신을 이용하거나 자신을 이용하게끔 개방하는데 자유롭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녀의 재능과 미디어가 만든 어떤 이미지가 활용되는 곳은 오로지 충천한 자본주의의 폐해속에서 만이다. 자유에서의 도피가 다른 이름으로 만든 팝아트이다. 물론, 팝아트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물과 원본 없는 복제품들을 묘사하여 그속에 그러한 존재자들에게 구체적인 체념을 입양시키게 하지만 성심성의껏, 성실한 자본주의의 존재자로서 낸시 랭이 위치한다는 것은 그녀의 매력에 비하면 팝아트의 허탈함만큼 안타깝기까지 하다. 자본에 대한 맹목적 함몰이 아닌 이용중이라는 평가는 공허하다. 앞으로 그녀의 유령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일깨워 줄 것인가, 다시 자본주의의 깊이를 재기 위해 자본의 맷돌에 정신을 묶어 떨어 뜨려야 한다면 너무 재미 없는 스토리다. 팝아티스트로서 그녀의 생각과 앞으로의 행보가 여간 궁금하고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글..
대중의 관점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대중의 안목은 시대와 필연적인 연관을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안목이 흐르는 시대에 그대로 몸을 맡겨서 생긴 변화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상호 반응으로써의 진화가 안목을 바꾼다. 그 안목이 수용하는 것 또한 인간 자체의 것이거나 자연 자체의 것일 때 뿐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구성이라 생각되었던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수용은 사실 칸트 정도 밖에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 자체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수용은 뉴튼 정도 밖에는 거슬러 올러가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얼마 되지 않은 역사일 뿐이다. 게다가 영혼과 정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앎의 범위안에 그것들이 있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자연을 재현하던 예술이 언제부터 재현을 멈추게 되었을까? 아마도 '탈' 이라는 의지가 생겼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근대화가 되었을 때 그것의 탈, 현대화가 되었을 때 그것의 탈, 해방과 탈주의 의지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안목은 자연을 볼 수 없는 시간이나 공간에서 해방되어 자연을 감상하고픈 소극적 의지에서 생산된 범주에 예술을 들이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양한 영혼과 정신들이 추구하는 것들, 현재에서 미래를 재현한 것들이 새로운 안목 즉 '탈'의 구조이며 사조적으로 현대예술이라고 한다. 현대예술은 자연을 재현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자연이라고 생각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꺼꾸로 누구나 아는 것을 상투적으로 재현하는 섬세하지만 지루한 예술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현대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이게 뭐지? 라는 감탄사다. 칸딘스키나 잭슨폴락과 같은 아메리칸 추상과 액션 페인팅의 예술을 보고 연발하는 감탄사는 이게 뭐지? 일 뿐이다. 아직 우리의 낡은 영혼은 별을 추구하는 것일까?
자연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은 인간이 추구할 수 없는 절대이성이다. 헤겔의 말이 들린다. 절대이성의 자유가 세계를 창조 했다는 말이. 하지만 자연이란 절대이성은 인간을 창조하며 너무 자유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지점을 쾌와 불쾌, 취미와 이성으로 명확하게 우리가 절대이성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을 찍어 준 사람이 칸트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술을 진지함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남들이 모두 예술이라고 해도 내가 불쾌하면 예술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같은 쾌와 불쾌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창조한 예술이라는 어떤 작품에 대해서 '수(數)'적인 것이 기준이 되거나, 누군가가 예술이라고 지정해준 것을 예술이라고 인정하고 심각해질 필요도 없다. 절대이성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로 승화되어 작가의 유희로, 감상하는 행위로써는 감정의 유희로 승화되어 예술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유희하는 것이 되었다.
유희도 유희 나름이다. 그림 좀 그린다는 베르메르가 내가 그린 것은 예술이다, 또는 베르메르의 패트런이 내가 산 베르메르의 그림은 예술이라고 하면 예술인가 보다며 감상하는 척이라도 할텐데, 추상과 큐비즘를 비롯하여 포스트모던, 다다에 이르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자연을 닮지도 나를 닮지도 않은 예술성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존하여 표현된다. 작가도 감상자에게 어떤 대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간격을 다양성이라 볼 수 있다면, 확실히 획실성에 대한 탈적 감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술이 작가의 감수성의 재현일까? 오로지 작가의 그것에서 나온 재현일까? 다른 것과 모방을 시도한 적은 없을까? 모방과 재현, 새로운 안목이 형성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모방은 익숙함을 불러 오고 익숙함이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 대중적 숙달의 합의에 의해 대상이 된다. 오늘날 숙달된 대상이란 자연이 아니다. 현대의 대상성은 캐릭터라고 하는 복제된 자신 즉, 시뮬라크르이다.
이런 시뮬라크르에 숙달된 사람이 대중의 새로운 안목에 적응하며 만들어내는 예술을 팝아트라고 부른다. 팝아트는 예술 사조상 가장 대중의 숙달에 가까운 장르다. 예술작업, 아틀리에에서 수행되는 정적 작업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회화 방식이거나 매체를 이룬 인쇄나 퍼포먼스 기법을 활용하기도 하는 팝아트는 실은 기법에 대한 제한은 없어 보인다. 다만, 대중이 그동안 일상적으로 받아 들인 체제적 사물에게서 느낀 침체된 안목에 새로움을 일깨워 주목을 끄는가, 대중의 이해가 아닌 형식적 유희에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 그것이 팝아트의 예술성이 된다. 그렇다면 팝아트의 규정은 무엇인가? 대중가수나 영화배우는 팝아트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그들은 팝아티스트이지만, 미술사조가 규정한 팝아트의 형식이 아니므로 팝아트가 아니고 회화예술상의 팝아티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매스미디어의 존재들은 팝아트의 대상이 된다. 대중가수와 영화배우는 대중들이 닮아 가고 싶어 하는 대상성의 캐릭터이면서 모방하려는 추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팝아트는 이러한 모방과 그 심리가 작용하는 익숙함을 이용한다.
2차 세계대전과 대공항과 같은 전쟁과 사변을 겪은 세계 최대의 미디어 문화 시장인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한, 추상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상징이라고 해도 무방한 팝아트가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한가 라는 담론은 밀레니엄 초기에 이안, 민병직 등을 통해 대두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라며 추상적인 민족의식만 내세울줄 알았지 그의 타계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어떤 것이 있는지, 대중적 접근의 시도나 연구적 성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팝아트는 우리나라에서 가능한가? 기호와 팝의 강영민, 신종 캐릭터의 이동기, 초대 받지 않은 꿈과 갈등의 낸시 랭, 이들이 우리나라의 팝아티스트들 이다. 이중 낸시 랭은 주목하고 싶지 않아도 미디어로 부터 대중에게 주목하라는 주문을 최대로 내고 있는 아티스트 이다. 그냥 섹시한 것과 예술적으로 섹시한 피사체, 예술체의 차이를 구분할 줄 모르는 마초들은 낸시 랭의 아름다운 젖가슴과 엉덩이에 고정될 수 밖에 없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섹시함도 대중의 익숙한 코드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으니 그녀가 온몸으로 예술을 퍼포밍하는 자체 또한 팝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싶다. 팝아트가 그 정도의 지점을 얘기하는 것 인가?
싱겁다.
하지만, 낸시 랭의 작품엔 적당한 소금이 있다. 싱거운 것에 간을 맞추는 소금이라기 보다, 타오르기 직전의 소태 같은 찌게 냄비 바닥에 장렬한 자극을 뿌리는 소금 같다. 그녀의 예술적 대상성인 미디어도 서서히 열광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2003년 비엔나 비엔날레를 도발하면서 데뷰한 공격적 아티스트이다. 초대받지 않은 그녀가 길거리에서 펼친 퍼포먼스는 1874년 아카데미에 초대 받지 못한 인상파 화가들이 나다의 화실에서 펼친 전시회와 닮아 있다. 기존 질서의 파괴, 보편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성 충만한 해석이 예술에 도움이 되어 더욱 예술적이 되었다는 보고는 없지만, 그런 파괴를 시도하였다니 의도였다고 할 수 밖에. 낸시 랭의 터부 요기니는 그녀를 현재의 그녀로 만들어준 시리즈 작품이다. 건담과 꼴라주의 조합으로 요기니는 낸시 랭 본인이며 선과 악을 결합한 어떤 감정의 메신저로서 핸드백을 든 요기니가 요염하고 공격적으로 클립을 열고 꺼내는 담론은 터부이다. 니체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나서 '그림이 나에게 말했다' 라고 했다. 터부 요기니가 나에게 말했다. "그런거야? 내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둥둥 떠 있어야 했던 이유가" 미디어는 낸시 랭의 작품은 얘기하지 않는다. 대중이 달굴 냄비는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 미디어도 요기니의 말을 들었거나, 요기니는 수다쟁이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를 재현한 요기니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방법상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탓에 그녀 자체를 대상으로 모티브로 활용한다. 행위 퍼포먼스의 영역은 그녀의 전공이다.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애교와 순수는 그녀를 어느 장소에서 건 비키니를 입게 하고 거의 비슷한 요염한 자세를 만들게 한다. 그것이 그녀의 소금이다, 미디어는 그 순간을 노린다.
낸시 랭은 2003년 이후 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그녀의 작품을 봐야 하는데 자꾸만 그녀의 판타스틱한 몸이 아른거린다. 속물 같은이라고... 나는 이것을 절제라는 고전적인 미덕으로 숨기지만, 낸시 랭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욕망을 절제하는 일은 귀찮은 일이다. 가볍지도 않으면서 숨기기 위해 온갖 억제 효소들을 생산하는 중노동을 하고 나서 헤어진 여자친구 사진을 보며 꺼이꺼이 울 수도 없다. 카타르시스라는 개별 승화는 기대할 수 없다. 빡빡한 감정에 질곡한 삶이다. 낸시 랭은 경고한다. 현실에서 고통 받는 것은 싫다고, 살아 있을 때 주목 받고 가벼운 예술을 하고 싶다고 질곡의 삶과 절제의 고전적 삶에 경고장을 발송한다. 거기에 빨간 입술 자국을 콕 찍어 보낼 것만 같다. 낸시 랭의 이미지는 그렇게 드리워진다. 경고장 봉투의 엄숙함을 경고하는 이미지로 말이다. 사실, 그녀의 팝아트적 이미지는 작품보다는 그녀의 육체적 매력이 발산되는 마술적 퍼포먼스에 있다. 게다가 그녀의 공연, 회화 작품은 비평적 텍스트의 범주에도 들락말락 한다. 온갖 현학적 수사와 서술적 문장들이 그녀의 예술을 해체할 수 있을 만큼 욕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는데다가, 그런 고전적인 언어들은 애시당초 낸시 랭의 레이더에 파괴되어야 할 목표물일 뿐이다. 고상한척 하지 말아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속물이 어떤 건데? 무거워질 수 없다, 속물의 가벼운 존재에 대해서... 그녀가 한손에 기동전사 머신건과 핸드백을 들고 던지는 메시지다.
그녀는 가볍지만 별을 향해 나풀나풀 날아가지 않는다. 별은 그녀를 복제하지 않았다. 그녀를 복제한 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그녀를 복제했고 그녀는 다시 자본주의를 시뮬라크르 한다. 복제와 모방의 끝나지 않는 사사로운 놀이, 그녀가 팝아트를 경박한 지점까지 끌어 내린 단 몇줄의 미학적 레토릭 되겠다. 하지만, 그녀를 해체하는데 있어서 두려운 점도 그녀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복제와 가벼움 때문이다. 이를테면 예술사조로서의 팝아트를 부정하고 그녀를 주목할 만한 현실의 사실로 세울 수는 없다. 그녀를 현실의 주목할만한 사실, 즉 역사로 기록되기 위해 작품만이 그녀의 재현으로 취급되어 질 수도 없다. 이미 그녀는 그것을 포기한 듯 보이기 까지 하다. 자본주의의 모든 상업적 요소들에 낸시 랭 라인을 구축하려는 예술철학이 그것인데, 철학이든 재현이든 퍼포먼스를 하는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상과 태도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언급했듯 그녀가 M.net 을 휘어 잡는 가능성 있는 엔터테이너로서, 패션 아트 디렉터로서, 집필 가능한 발행인으로서 어느날 압구정 횡단보도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루이비통 핸드백 속에 입을 쳐박고 노래를 불러도 크게 놀랄만하지 않으면서도, 꽤나 주목할만한 현실의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주목한 현실은 짐짓 고상한 척 하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바자나 에콜 같은 트랜디 잡지이다. 끼가 있는 자들이 모두 주목 받고 싶어 하는 잡지에 단골 아티클이 된 그녀는 대게의 트랜디 잡지들이 쏟아 내는 잡다한 로망에 기꺼이 몸을 맡긴 것 처럼 보인다. 사실, 그녀의 작품이 어디에 영향을 주는가 라는 일반적인 물음에 답한다면, 그녀의 몸과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반란적 성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짐짓 페미니즘적인 발언도 사뭇 진지하진 않다. 전통적 가치에 대한 종사에서 사회 가치적 욕구를 통해 여성을 해방한다는 선동적 의지는 비단 여성들만의 문제도 아니거니와 낸시 랭, 그녀가 추구하는 바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낸시 랭이 생각해 낸 예술과 삶과 성의 해방구는 그녀를 복제했고 그녀가 시뮬라크르한 자본주의이다. 그녀는 더 가벼운, 가둬 둘 수 없는 욕구 충족을 위해 남들이 기피 하는 공간과 시간에 스스로를 내놓는 작업에 팝아트를 빌려 왔을 뿐이다. 그녀는 꺼리낌이 없다. 빌려 온 것은 되돌려 주면 된다.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인간들은 민망할 따름이다. 그녀의 메시지를 잊었는가? 절제는 민망함을 낳는다, 이는 죄악이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이슈인지는 모르지만, 콘트라 섹쥬얼이라는 여성성의 해방구의 상징으로, 성공한 여성으로, 그녀가 달려가고 있는 곳 또한 성찰이 부족한 남성성의 국경선이다. 여권에 빨간 입술 자국을 찍고 애교의 여왕이라는 미디어의 소개처럼 오빠야~ 정도면 무사 통과다.
낸시 랭이 금기시 했던 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저항 의식은 아닌 모양이다. 전통에 대한 파괴는 애초에 기대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너무 어렵고 힘든 선언이다. 도시적 어떤 이미지, 늘씬하게 빠진 고급 외제 승용차가 날리는 날까로움, 온라인 보세 쇼핑몰에서 산 듯한 코스톰에 브랜뉴 루이비통 핸드백은 짝퉁일까? 그녀의 금기가 드러나는 투쟁의 지점이다. 진품 루이비통을 사라, 그것을 살까 말까 고민하거나 절제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 금기를 깨라... 그녀의 퍼포먼스는 절제된 자본주의적 욕망을 깨는데 있다. 대중속에서 명품이나 개별적 소비 자본의 확대가 추구하는 것이 오래가고 튼튼한 실용과는 거리가 멀고 보면 그것의 가치는 기존 질서안에서 미시적인 금기의 파괴를 통해 공기의 신선도가 다른 계급으로 옮겨 가기를 요구하는 발상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치명적이다. 그녀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해야 했을 대상성인 자본주의, 도시적 산출물들의 모순은 전혀 부정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또는 다양한 이성이나 감수성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녹여 내지도 못한다. 사이프레스 힐을 듣는다고, 성대묘사 한다고 그가 되지 않지만 더욱 해로운 것은 과격한 멜로디와 이미지가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가벼운 성찰이 발동 될 때 이다. 팝아트가 그녀의 장르라고 하지만, 사실 그녀의 감수성이나 기법이 그것에 다가갔을지도 모르지만, 생각도 다가가고 있는 중인가, 그녀는 자본주의에 무분별한 매몰을 퍼포먼스 중인가, 추종자를 모집하고 그들을 동원하여 명품을 사지 않는 자들, 자본에 비껴 서 있는 자들 앞에 금을 긋는 중인가, 그녀의 코맹맹이 애교 가득한 목소리는 충분히 대중을 움직일 수 있다. 불행이도 그녀의 작품이 아닌, 그녀의 섹시한 가슴을 바라보는 마초 오빠들의 가부장적 소유욕에 불타는 자본주의를 주입시켜 루이비통을 기꺼이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그녀는 바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녀는 일단 자신이 돈 잘벌고 그 덩어리인 애교와 섹시의 마술을 유지하며 대중들에게 자신이 곧 미디어이고 숭배의 대상임을 간주하게 한다. 원본이 없는 세계의 이념으로 자본주의를 이용하는데 거침이 없다. 더불어 그녀가 추구하는 재현의 대상이 본인 그 자체임을 천명하고 대중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존재를 일깨우는 다양한 안목을 제공하지 않는다. 낯익은 세계를 파괴하고 낯설은 존재의 일어남이 아니라 낯익은 세계를 파괴한다는 편집적 조작을 통해 다시 낯익은 세계로의 귀환을 추구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자신을 추구하게 만드는 나르시즘의 전파, 미와 숭고가 투쟁하는 예술이 아닌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가두는 정체불명의 유령을 신앙하는데 예술을 차용했을 뿐이다. 그녀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은 안목을 재조립하여 통찰을 이끌어 낼 필요조차 없다. 그녀 자체가 세계의 모든 자본주의를 조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 좌절된 젊은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고 있다는 짐짓 공동체적인 생각을 할지언정 그녀가 치명적으로 공동체를 구분하는 이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향력 있는 개인이 대중에게 주목받기 위해 자신을 프로덕트적으로 활용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일깨워줄 세계의 통찰에 자신을 이용하거나 자신을 이용하게끔 개방하는데 자유롭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녀의 재능과 미디어가 만든 어떤 이미지가 활용되는 곳은 오로지 충천한 자본주의의 폐해속에서 만이다. 자유에서의 도피가 다른 이름으로 만든 팝아트이다. 물론, 팝아트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물과 원본 없는 복제품들을 묘사하여 그속에 그러한 존재자들에게 구체적인 체념을 입양시키게 하지만 성심성의껏, 성실한 자본주의의 존재자로서 낸시 랭이 위치한다는 것은 그녀의 매력에 비하면 팝아트의 허탈함만큼 안타깝기까지 하다. 자본에 대한 맹목적 함몰이 아닌 이용중이라는 평가는 공허하다. 앞으로 그녀의 유령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를 일깨워 줄 것인가, 다시 자본주의의 깊이를 재기 위해 자본의 맷돌에 정신을 묶어 떨어 뜨려야 한다면 너무 재미 없는 스토리다. 팝아티스트로서 그녀의 생각과 앞으로의 행보가 여간 궁금하고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006/07/07 01:09
2006/07/07 01:09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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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 2006/07/10 09:0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ㅆㄷㄴㅅ
내곡 2006/07/10 09:0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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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 2006/07/10 09:0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ㅆㄷㄴㅅ
지나가다 2006/07/28 11:2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배보다 배꼽이 커진격 같습니다. 님께서 낸시랭 작품을 직접 보신 후에 평가를 했을까 의문이 갑니다. 님께서 낸시랭을 통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미술사조에서 팝아트가 새로운 장르도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에 순수와 상업이라는 극단적인 구분은 더이상 가치와 의미가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에선 지금 만들어지는 모든 예술이 전부 팝아트라고 불릴 수도 있습니다. 찬반론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해석도 일단 제처두고,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낸시랭 거품을 일단 제거한 후 냉정하게 객관적인 시점에서 미술비평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아니면 미술작품이야 그냥보면 되지 비평이 왜 필요해?라는 단정과 다를봐 없지 않을까요?
jack 2006/07/10 11:05 편집/삭제 댓글 주소
배보다 배꼽에 대한 지적은 대체로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의도가 정치해석과 작가 자체에 있었으나, 배꼽격인 미술과 낮은 미학의 관점이 지나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냉정한 객관적 시점에 대한 견해는 저랑 좀 다르네요. 주관적인 감수성에 따라 비판인지, 해설인지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나가다 2006/07/10 12:31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작품의 의미는 보는 사람마다 그 중요성이 다르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요. 특히 단 하나의 해석으로는 작품의 의미를 단정할 수 없음으로 여러 관점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주관적 시점은 비평가의 취향이나 가치관 또는 해석의 대상이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론에 의한 잘못된 정보들로 모순적인 해석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아니면 미술비평이 정치나 사회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고요. 그렇기때문에 해석이 세계관과 미술이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경우엔 단순히 작가 이름을 홍보해주기 위한 기사거리로만 소비됩니다. 그리고 어차피 객관적 시점도 주관적 성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포괄성에 대한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겠죠. 반대로 미술의 형식에만 너무 의존하여 비평하면 그린버그처럼 작가보다 비평가가 커져버리는 오류도 있을 수 있습니다.
jack 2006/07/10 15:03 편집/삭제 댓글 주소
언론이 뿌려주는 정보에 대해서 어떤 해석이란 측면에서는 숙달과 교양의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미술자체나 작가에 대한 해석이 관점의 문제이긴 하지만 미술자체를 해석하기 위해서 작가적인 측면이 더 고려되어야 의미 있는 비평이 된다고 봅니다. 사조나 형식은 취사선택하는데서 객관성을 보장 받겠지만, 견해는 작가의 세계관 뿐만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의 세계관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비중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주관적인 부분이, 세계관을 포함하여, 객관적 시점을 공유하는 지점을 통찰이라고 봅니다만, 그 지점을 포괄적으로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시점차이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지나가다 2006/07/10 15:31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요즘같이 이미지가 복제되고 차용되는 세상에서 작가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너무 복잡하여 무의미하며, 오로지 작가가 만든 작품들의 연결선상에서 작가의 공통된 주요관심만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옭은 해석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더 합리적이거나 덜 합리적일 수 있는 수긍이 가는 해석은 항상 있으며,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언어의 무한연상작용 떄문에 상호간에 배타적이고 모순되는 해석을 모두 용인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비실용적이라, 자위성이 강한 비평 대신에 차라리 작품(개념미술)을 시도하는 것이 합리적이죠. 그렇기때문에 해석의 소통에 있어서 미리 정한 기준점이 있어야 독자들과 약속한 연관성, 조화,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비평은 게임이라고 봅니다. 게임을 즐기려면 나름대로 정해진 규칙을 배우고 패턴을 파악하여 패턴의 변용을 통해서 재미를 추구하듯이, 미술비평도 소재, 매체, 형식을 먼저 통해서 작품의 외적 정보(작가에 대한 일화와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 상황같은 정보들)도 수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글쓴이가 어떤 글을 쓰든 인간인 이상 시점차이는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이성과 감정을 나누는 이분법이 잘못된 것이며 이성과 감정은 서로 피할 수 없이 얽혀 있기 때문에, 틀에 맞춘 딱딱한 글을 기입한다 하여도 주관적인 성향을 배제 할 수는 없겠죠. Jack님이 나름대로 미술에 대한 열정이 있으신 듯 싶어, 제가 아마츄어 낸시랭 대신 다른 원조 아티스트들을 권하고 싶네요. 제가 디자인 대학생 주제에 너무 까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요즘 쌈지가 블로그를 통해서 낸시랭 이미지 관리를 계획하는 것 같아 괜한 참견을 했네요. 대중의 무지를 상업적으로만 이용하려는 자들을 보면 정말 짜증나거든요. 최소한 한젬마는 다이제스트 미술사 역할은 했지요.
jack 2006/07/10 22:44 편집/삭제 댓글 주소
요즘에는 언론이 세계를 복제하고, 대중이 그 복제를 복제하는데 있어서 그 조작의 작동방식에 대중이 쉽게 영합하는 부분을 속성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면서 대중의 선을 믿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낸시랭을 작게 나마 살핀 것도 낸시랭이 몸바치는 상업주의가 그녀가 추구하는 예술원형인지, 추종자라는 집단을 모집하고 감히 그들이 동원되고 기꺼이 동원되어지는 숭배의 의식을 보면서 님이 짜증났던 것처럼 씁쓸했지요. 상업주의의 우상이 탄생하는 현재 진행형에 여간 신경이 쓰이더군요. 다양한 예술을 즐기는 시각도 더 편향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불온한 부류로서 '잘 즐겨야 하는' 다양함보다 문화예술이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전히 생각을 해봅니다.
예술에 대한 비평이 감히 제 열정에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예술의 동어반복을 손쉽게 재단했던 수많은 판단들에 경종을 울릴 필요가 느껴지는 충고에 감사합니다.
권하신다는 원조 아티스트는 잊지 마시고 권해주시길...
지나가다 2006/07/28 11:2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원조: Jeff Koons + Tang Jia Li
요즘은 한젬마
montreal florist 2009/10/27 03:21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정말 정말 이상한 처자 라니깐여
DrunkenSTAR 2009/10/20 10:57 편집/삭제 댓글 주소
낸시랭 때문에 팝아트가 왜곡되는 것은 아닐지... 팝아트가 좀 추잡스럽긴 해요..취향이 형식안에서 마구 뒤틀리는 것이니까요. 대중적인 것이 정치나 아트나 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