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혁명이란 단어는 죽은 텍스트라는 말이 있다. 텍스트는 죽었으되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은 개혁과 혁신이란 활동성 넘치는 개념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윤을 창출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21세기적인 혁명으로서 개혁과 혁신을 요구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이윤을 창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사회적 공공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 목적을 거세한다.
어떤 혁명이나 개혁에 있어서 그것이 변화시키려고 하는 대상보다 이를 원리적으로 뒷바침 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덜 받는다. 혁명과 개혁은 같은 단어가 아니며 개혁은 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폭력적 절차를 수반하던 비폭력적인 민주적 절차를 수반하던 원래의 질서 가운데 일부는 남게 되어 현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가 아무리 개혁을 주장해도 원래의 질서 중 일부는 남게 되고, 남는 질서는 반드시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충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무리 개혁을 해도 분배할 수도 분해할 수도 없는 원래의 질서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를 변화 시키는 민주주적 절차로 한나라당이라는 대안이 마치 개혁인양 인식하는 무리들이 바로 남겨진 원래의 질서들의 총합이라 해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집권 세력의 변화를 통해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군주제를 유지 하는 것이며 그나마 파괴된 원래의 질서를 복원하는 일이 전부이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역사에 기록하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용인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땅히 진보해야 할 역사를 되돌릴테니까.
혁명은 이데올로기에 지배 받는다. 혁명은 한 체제를 다른 체제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좌우 되는데 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오직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남는 이유는 세계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의 메카니즘일 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시대인들이 어떻게 살고자 하고 잘 살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돈을 결부 시키는 것은 그만큼 자본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시스템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을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시스템, 즉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사인 셈이다. 자본의 탐욕과 자기 확장에서 벗어나 공동의 노력,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아 혁명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일 것이다. 천천한 개혁으로 할 수 없을 때 비로서 혁명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운은 쉽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볼세비키 혁명을 기록한 존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의하면 계급적 억압도 억압이지만, 혁명 전 러시아는 연설과 읽을 거리를 무차별적으로 빨아 들이는 사막의 모래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도시의 골목은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발언대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난상 토론을 펼쳤다. 인민들이 갈구한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엄청난 읽을 거리, 즉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했고 자신의 비참한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혁명을 진두할 수 있는 혁명가를 필요로 한 것은 혁명가의 요구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가는 기존 체제에 안주한 계급에서 나오지 않으며 한 개인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행동적 규범이 따르게 된다. 이는 19세기의 극단적인 혁명가였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문답' 에서 얻을 수 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는 혁명적 대의에 눈먼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무자비하며 심지어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일 수도 있다. 혁명가는 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친구나 가족과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도덕성의 기준을 희생하여, 혁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닌이나 호치민은 네차예프만큼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좋아했고 그들의 혁명적 경전과 강령에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혁명가는 고사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자본교환적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대중적 유행만이 있을 뿐이다. 억압은 있으되 어디서도 혁명적 기운은 찾아 볼 수 없다. 개혁이라는 자본의 헛개비를 믿고 국익적 선동에 무리지어 사상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유교적 사상을 자본의 제단에 재물로 바치고 민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사회 공동체에 진작하는 노력은 없고 개별 집단에 대한 복지만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저급한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에게 희망은 없다. 좀 더 불공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획득이나, 남보다 먼저 자본의 흐름에 양탄자를 깔고 눕는 것이 유일한 삶의 치열함이다. 그런 치열함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본의 물음에 대입시키며 고민한다. 그러한 방정식에 필요한 건 성형수술과 사치품, 그리고 적당한 동정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에게는 아직 혁명 같은 순결한 대의가 필요하지 않다.
어떤 혁명이나 개혁에 있어서 그것이 변화시키려고 하는 대상보다 이를 원리적으로 뒷바침 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덜 받는다. 혁명과 개혁은 같은 단어가 아니며 개혁은 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폭력적 절차를 수반하던 비폭력적인 민주적 절차를 수반하던 원래의 질서 가운데 일부는 남게 되어 현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가 아무리 개혁을 주장해도 원래의 질서 중 일부는 남게 되고, 남는 질서는 반드시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충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무리 개혁을 해도 분배할 수도 분해할 수도 없는 원래의 질서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를 변화 시키는 민주주적 절차로 한나라당이라는 대안이 마치 개혁인양 인식하는 무리들이 바로 남겨진 원래의 질서들의 총합이라 해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집권 세력의 변화를 통해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군주제를 유지 하는 것이며 그나마 파괴된 원래의 질서를 복원하는 일이 전부이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역사에 기록하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용인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땅히 진보해야 할 역사를 되돌릴테니까.
혁명은 이데올로기에 지배 받는다. 혁명은 한 체제를 다른 체제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좌우 되는데 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오직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남는 이유는 세계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의 메카니즘일 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시대인들이 어떻게 살고자 하고 잘 살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돈을 결부 시키는 것은 그만큼 자본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시스템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을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시스템, 즉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사인 셈이다. 자본의 탐욕과 자기 확장에서 벗어나 공동의 노력,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아 혁명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일 것이다. 천천한 개혁으로 할 수 없을 때 비로서 혁명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운은 쉽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볼세비키 혁명을 기록한 존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의하면 계급적 억압도 억압이지만, 혁명 전 러시아는 연설과 읽을 거리를 무차별적으로 빨아 들이는 사막의 모래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도시의 골목은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발언대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난상 토론을 펼쳤다. 인민들이 갈구한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엄청난 읽을 거리, 즉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했고 자신의 비참한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혁명을 진두할 수 있는 혁명가를 필요로 한 것은 혁명가의 요구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가는 기존 체제에 안주한 계급에서 나오지 않으며 한 개인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행동적 규범이 따르게 된다. 이는 19세기의 극단적인 혁명가였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문답' 에서 얻을 수 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는 혁명적 대의에 눈먼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무자비하며 심지어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일 수도 있다. 혁명가는 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친구나 가족과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도덕성의 기준을 희생하여, 혁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닌이나 호치민은 네차예프만큼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좋아했고 그들의 혁명적 경전과 강령에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혁명가는 고사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자본교환적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대중적 유행만이 있을 뿐이다. 억압은 있으되 어디서도 혁명적 기운은 찾아 볼 수 없다. 개혁이라는 자본의 헛개비를 믿고 국익적 선동에 무리지어 사상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유교적 사상을 자본의 제단에 재물로 바치고 민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사회 공동체에 진작하는 노력은 없고 개별 집단에 대한 복지만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저급한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에게 희망은 없다. 좀 더 불공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획득이나, 남보다 먼저 자본의 흐름에 양탄자를 깔고 눕는 것이 유일한 삶의 치열함이다. 그런 치열함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본의 물음에 대입시키며 고민한다. 그러한 방정식에 필요한 건 성형수술과 사치품, 그리고 적당한 동정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에게는 아직 혁명 같은 순결한 대의가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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