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2

2009/09/29 15:11 /
프로젝트 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논쟁은 당연 커뮤니케이션이다. 논쟁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의 범주지만, 프로젝트라는 작은 경영단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엄연한 업무 중 하나다. 커뮤니케이션 업무란 무엇일까?

개인이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업무
1. 프로젝트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2. 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앞으로 나와 얘기할 사람은 누구인가?
3. 얘기할 사람의 연락처는? : 내선전화, 핸드폰, 이메일, 메신저 등등
4. 여러 연락처 중 상황에 따라 활용할 매체는 무엇인가?
5.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이 있는가? : 서버, 게시판, 프로젝터, 아웃룩, 기타 지정된 스토로지
6.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에는 어떤 것을 공유하는가?
7. 이메일을 TO 로 보낼 사람과 CC 로 보낼 사람은 누구인가?

매니지먼트가 해야 할 커뮤니케이션 업무
1. 매니지먼트에 속한 사람은 누구 인가?
2. 그외 이해당사자는 누구인가?
3.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보고 일정은?(일일, 주간, 월간 등)
4. 보고 탬플릿은?
5. 업무 트랙킹과 Panding 리스트 관리 체계는?
6. WBS 의 업무 담당자 Matching 은?
7. 각종 문서의 표준화는 무엇으로 하는가?

복잡하다. 이렇게 열거하는 이유는 '복잡성경제를 기반한 업무프로세스의 다양함' 따위의 멋드러짐이 아니다. 대게가 위계를 위한 '질서 잡기'의 일환이다. 너 위에 나 있다, 란 식을 세련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뒤에 참여한 사람이 겁을 집어 먹고 숨이 턱에 차도록 프로세스를 익히면서 이른바 '업무를 배운다' 는 암묵적 윽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란 이렇게 쿨하며 조용하다.

프로젝트 안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순식간에 만들어 졌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면 공중분해된다. 그 많던 말들은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가고 문서만 켜켜이 쌓인다. 1년에 단 한번 펼칠 문서라고 해도 1톤트럭을 대절해야 운반이 가능할 때도 있다. 부대낌과 말과 관계는 사라진다. 때로는 쿨하지 못하고 회복될 수 없는 원수가 되거나 아삼육이 되기도 한다. 시스템은 쿨했으나 인간은 그럴 수 없는 것, 인지상정이다. 그러하다 보니 시스템은 더더욱 쿨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공중분해 될 것 정해진 커뮤니케이션만 하면 되지 않나, 반문하게 되면 문제는 프로젝트 기간에 따라 견딤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해진 것 이상의, 시스템보다 더 시스템적이어서 반문할 수 없는 협업이 이루어지거나, 인지상정을 통해 비즈니스 관계가 전면 부정되어야 그 기간을 넘어 인간답게 살아 남을 수 있다. 넓게 보아 커뮤니케이션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프로젝트는 짧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매카니즘이다. 삶은 길고 목적이 다르다. 하지만, 일과 삶, 공과 사를 완벽히 분리하고 냉정한 듯, 양쪽을 다 제단하며 살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들 중에도 프로젝트를 한다.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은 완벽하게 구축된 시스템이 아니다. 시스템은 있으나 그것의 접근 방식은 삶의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공동체에서 너도 나도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는 기본 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도와 교양이다. 또는 성의와 진정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진정성이 아니다. 시스템은 고안단계에서 이미 냉정하고 진정성을 갖추도록 설계 되어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말과 언어다. 말은 말투에 언어는 텍스트에 기댄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는 것은 말투에 태도와 교양이 묻어 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말투에 단어를 골라 쓰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텍스트에도 제스쳐가 있다. 입속에서 꿀을 삼키기도 하고 가시를 씹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껍데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 성의와 진정이 있지 않으면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여지 없이 붕괴한다. 시간 차만 있을 뿐.

인간의 진정을 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태도가 곧 진정이다. 사람을 보고 빠르게 판단하는 만큼 실수도 잦다. 하지만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삶에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 있다면 그런 성찰이 있다면, 뛰듯 걷듯 자신의 주위와 사람을 살피며 몸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다면 태도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프로젝트던 삶에서든 커뮤니케이션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을 오늘 요약해내는 일일 것이다.

오늘 클라이언트와 '커뮤니케이션' 이란 것에 힘들어 하는 에이전트, 컨설턴트에게..
클라이언트 옆에 앉아 보시라, 고 권하고 싶다.
2009/09/29 15:11 2009/09/29 15:11
DrunkenSTAR 이 작성.

부활

2009/09/22 13:31 / 관심
요즘 김태원은 '부활' 로 보여지지 않고 예능인으로 자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웃긴다. 나는 박명수 팬이다. 박명수의 나이와 내 나이가 그게 그것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짜증 섞인 개그가 웃긴다. 마치 내 모습을 투영하듯 그 짜증은 곧 내 일상의 짜증과 같기 때문이다. 김태원이 그렇다. 그는 더 나아가 귀찮음을 소재로 활용한다. 게다가 그들은 신체의 허술함을 무기로 한다. 아버지로 국민할매로 자신을 조롱한다. 한창 사회에서 일할 나이라는 이유로 절제를 미덕으로 섬기는 끼인 나이의 그들, 그들과 비슷한 우리들도 때때로 부리고 싶은 애교와 엄살이 있다. 박명수와 김태원이 그걸 보여준다.

김태원은 이승철과 함께 부활 맴버다. 삼사십대 사람들은 부활, 들국화와 청춘을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시절 김태원이 대마초로 걸려 들었을 때 나는 담배를 배웠다. 창작을 하기 위해 대마초를 피웠다고 한 발언을 믿었다. 나도 한때 학교밴드를 조직했고 곡을 만들기 위해 술을 마셨다.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불렀다. 고만고만한 학교밴드에서 유행가를 재생하던 것 이상으로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사랑과 이별, 그 자체였다. 밑고 끝도 없이 이승철이 부활을 탈퇴한 것으로 믿었고 이승철을 저주했다. 이승철이 복귀 했을 때 다시 열광 했다. 김태원이 부활을 재결성하고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단 소식에 팔뚝으로 눈을 훔쳤다.

부활은 부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밴드다. 사회 생활을 하며 한동안 부활을 잊었었다. 그러다 사랑을 하고 또 이별을 했다. 그때 부활은 '사랑할수록' 이란 노래를 발표 했다. 나는 이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됐다. 부활은 '위대한 밴드' 다. 삶의 목적이 있었던 시절마다 그들의 노래가 있었기에 그렇다. 인생을 반추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목격한 노래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부활은 위대하다. 그런 김태원이 예능을 하며 스스로를 조롱하고 엄살 부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네버엔딩스토리를 통해 그런 웃음과 감수성이 나오기 위한 자양분은 괴롭고 쓰디 쓸 수 밖에 없음을 모든 음표를 동원하여 보여줬다. 그것으로 엔드다.

지난 달 부활이 2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 했다. 그들은 또 부활했다.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2009/09/22 13:31 2009/09/22 13:31
DrunkenSTAR 이 작성.

위장전입에 대하여

2009/09/16 13:40 / 생각

우리 사회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교육은 인간 답게 살기 위한 인간에 대한 학습이 아닌 잘 살기 위한 수단이란 점을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잘 살기 위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부인이 안되는 사회다. 아이 사랑을 앞세운 이 시대의 돈 잘 벌기 대열에 가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위장전입이다. 위장 전입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친척 집에 세대주를 하나 더 꾸리는 형태, 이때 친척과의 협조로 위장 전세, 월세 계약서를 마련하는 것. 서울에 주거용 오피스텔이나 집을 사두고 거주는 지방에 하면서 주소지는 서울로 해두는 형태. 전자는 서민들이 후자는 돈 좀 있다는 부류들이 하는 형태다. 이렇게 주소지를 이전해 두면 교육제도에 혜택(?)을 받는다. 세대까지 구성해 두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분양되는 아파트나 준주거지의 분양권을 노릴 수 있다. 위장전입의 노림수는 이 두가지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임태희씨가 장인의 출마 지역구로 주소지를 이전하여 1표 더 행사하려 했다는 고백은 차라리 애교다.

위장전입은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줄줄이 고백하지 않아도 시중에서 성행하는 불법행위다. 법치를 중요시 하는 이 나라 정부에 의하면 위장전입은 척결해야 할 중차대한 과업이다. 위장전입이란 불법행위의 전제로 인해 제도권의 교육은 사악한 존재가 된다. 가서 사는 것도 아니고 위장으로 살아야 교육이 되는 교육제도가 교육이 된다면 그야 말로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거 아닌가. 그래서 재테크가 양념으로 낄 수 밖에 없다. 위장전입을 오로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어쩔 수 없는 위장만으로는 당위가 떨어 진다. 누군들 자식 사랑하지 않나? 하지만 잘 살기 위해 그것이 돈이니까 그렇게 했다고 하면 어이 없게도 용서가 된다. 그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잘 사는 기준, 잘 사는 사람의 모범, 그렇게 살아 보고자는 서민들의 희망이니까 말이다.

저렇게 살지 못해 이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이 싫어 죽어라고 그들을 목표로 삼아 사교육에 가랭이 찢어 져도 자식들 몰아 넣고 공부 시키는 것이 오늘날 서민의 군상아니던가.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조상을 탓하며 우리 자식은 그거 꼭 시키 겠다는 희망으로 지금 그들의 불법 행위는 눈감아 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 그들은 우리보다 고위이기 때문에 저 정도 성역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을 공연히 얘기하는 것이 오늘날 서민의 의식아니던가.

서민이나 중산층이나 대게가 이렇게 살아 가거나 살고 싶어 한다. 자식들에게 제도권에서 우대적인 교육을 시키고 재테크를 통해 자산 증식을 꾸미는데 위장전입이 도덕성과 일면식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이 된다. 오로지 노동을 통해 몇십억씩 벌었다는 악바리 연예인들 얘기는 기본적인 수익이 되니까로 해석되고 김밥 장사로 수십억을 벌어 사회에 쾌척하는 할머니들의 얘기는 더러운 앞차마의 이미지에서, 결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깨져 버린다. 서민들에게 노동을 통한 자산증식은 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증식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카테고리 된다. 교육은 잘 살아야 하는 자본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기본 수익이 되는 노동의 일자리를 찾고 주식과 부동산에 잘 투자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밑거름인 셈이다. 위장전입까지 했는데 그 밑거름도 못배우면 사람들은 대번에 교육 잘못시켰다고 할 것이다.

국민들이 죄다 이런데 국민이었던 하지만 이제 고위 공직자가 되겠다는 사람의 위장전입이 무슨 문제인가. 어제 라디오 토론을 듣다 보니 어느 대학교수가 '도덕성과 자질은 별개의 문제' 라고 위장전입과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악의 어쩔 수 없음에 연대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어느 TV 토론에서 '이런 나라에서 땅투기 안한 사람이 바보 아닌가' 라며 솔직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는 그런 매카니즘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이 매카니즘에서는 누구든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적이익에 관계된 활동을 해야 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는 방식, 순진한 노동 추구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행복이라는 인문적 감수성과 조우하고 자식 사랑이란 보편적 인류애의 어쩔 수 없음으로 가슴 벅차 오른다. 어찌 이것을 고위 공직자라는 정치적 지위에 불편부당하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국민이 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공공이 필요하다. 공공을 다루는 공인과 이를 통해 옳바른 공공선에 봉사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형성 결과다. 그 체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공평하고 평등하게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공공의 목적인 셈이다. 공공의 목적을 수행할 인간, 즉 공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다. 오늘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양심이 완전히 다른 보편성을 지닌다면, 즉 위장전입 따위는 양심에 털난 행위가 아니라 사적이익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권장해야 할 수단이라면 이미 잣대가 아니다. 이때는 어느 교수의 지적처럼 안하면 바보가 되는 마땅함이 된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공공이며 양심인가?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공허 인가.

오늘날 공공의 영역이 사적 영역화 내지는 민영화된 사실은 쉽게 발견된다. 특히 법치를 치료제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더 자주 목도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민간용역업체와 경찰이 합작하여 불태워 죽인다. 파업이 일어나면 역시 용역과 경찰이 자원을 총동원하여 진압한다. 국민 한사람이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도 경찰이 잡아 들인다. 법치가 사람의 생존과 양심을 거둬들인다면 거기에 대처해야 할 자세는 역시 두 가지로 귀결된다. 사적인 행복 추구는 공공의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지금은 아니꼽고 더럽지만 자식을 교육시켜 저 계급으로 소환시키는 것, 남들이야 뭘하든 위장전입, 그 할애비의 방법이라도 동원하여 더럽고 치사하게라도 돈을 글어 모으는 방법, 이 두 가지다. 그럼 다시 이 두 가지가 번갈아 바퀴 도는 매카니즘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너무나 단조로운 우리 사회의 플랫폼 아니겠는가.

이로서 공공이 더더욱 필요하다. 너무 가혹한 잣대, 재능에 비하면 허물도 아닌 것이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탈루 라는 것이라면 이 사회는 세금을 내고 법치 따위가 존재하는 근대 국가가 아니다. 국민에게는 3년이하의 징역이나 천만원의 벌금을 내라고 할 사람들이 같은 범죄를 진행하고 있다면 그것이 허물도 아니고 명령을 할 줄 아는 재능이 있기에 문제가 아니라면 이게 도대체 어찌된 세상일까? 이게 무슨 '발견' 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수사' 이지 인사청문회가 아니다. 하지만 불행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공이 강해질수록 자신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교육과 위장전입의 자본주의 기술을 통해 저들이 누리는 부가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데 무슨 공공이냐. 매몰비용이 너무 아쉽다는 얘기다. 게다가 대게는 완전히 무지하다. 대통령이 시장을 방문하여 오뎅이라도 먹으면 그 오뎅집에 프리미엄이 붙어 시장경제가 활성화 될 것이란 '무지'한 환상에 젖는 것, 그것을 제도에 탓하랴, 무슨무슨 이데올로기에 탓하랴.

위장전입이 악의 시작이겠으나 국민입장에서야 그것이 무슨 큰 허물이랴. 그렇게 살지 못해 안달이고 그렇게 살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구축된 것을. 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 사의 영역에서는 마땅히 편견이 존재해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산다고 하여 공공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국민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사적영역에서 모두가 돈이며 인간적이며 그런 것들이 한데 뭉쳐 잘 살기 위해서는 공공이 도덕적 규제를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경쟁적 능력만으로 잘 살 수 있다? 공공이 어떻든 간에?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 잘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니까. 위장전입한 사람들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공공이다.

2009/09/16 13:40 2009/09/16 13:40
DrunkenSTAR 이 작성.

감당할 수 있을 만큼

2009/09/09 12:55 / 생각
누구나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간다. 공항은 마음이며 옷가지가 온통 구겨진 채 치르는 이별의 장소다. 공항에서 한 젊은이가 떠난다고 해서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법에도 없는 강제추방' 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의 살점을 격하게 뜯어 냈다. 또 몇몇은 급하게 빨간약을 발라 댔지만 뜯기고 바르는 짓을 동시에 하다보니 어떻게 베었는지 조차 정신이 없었고 아물어야 하는 시간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나라 특유의 연예 시스템인 연습생은 꿈을 먹은 자에게 독이다. 하지만 그걸 마셔야 꿈을 이룬다니 못 마실 이유도 없다. 독을 마시고 독하게 견뎌도 고만고만한 꿈을 이루는 자도 독하게도 몇 되지 않는다. 4년이라 했던가, 게다가 그 시간이 그 시스템의 암묵적인 기본 이라면 치뤄야 할 시간은 온통 비정규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이나 이른바 공부 잘해 사회에서 성공이란 수식으로 대접 받을 전문직 종사자가 되는 꿈이거나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준다. 우리는 그것을 견뎌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웠다. 꿈이 어떻든 간에 일정한 독을 마셔야 하는 것이 당위인 세상이다. 감당의 여부는 개인의 문제다. 우리는 제도적으로도 일관된 사회적인 삶을 위해 비정규적인 시간이 2년이상 지속되면 안된다는 합의를 가지고 있다. 물론 4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꿈이 있다하여 2년이든 4년이든 견디는 몫은 오로지 개인이 진다.

감당할 수 있는 시간 끝에 꿈을 이뤘다고 치자. 모든 꿈의 이룸은 기득권이 된다. 누구나 이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한다.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꿈을 이뤘으니 이제 그 꿈을 버려라, 너를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후천적인 본능이 된다. 어떻게 이룬 건데 버린다는 건 말이 안된다. 우리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책임이란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책임지고 뭘 하겠다, 책임 져라 따위의 말을 수없이 많이 듣는다. 이 언어의 정치적 감수성 때문에 무책임이 책임인 등식이 성립되는 일들도 한 없이 목도했다. 좌우간 책임은 현상의 귀속이고 자유로운 인격의 결정이다. 청춘들의 꿈이나 어른들의 꿈이나 매한가지로 사회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에서의 획득, 돈이거나 위치이거나, 이기 때문에 책임을 가장 가시적인 돈이나 위치의 변동으로만 얘기한다. 현상의 귀속이 사람에게 되어야 하는 것이 보편적일지 모르나 책임의 형태가 반드시 돈이나 거취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는 참으로 엥똘레랑스 하다. 인격이 그 둘을 합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책임을 다 져가면서 인격을 실현하는 양심을 부여 잡고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조금씩 악을 행하며 거대한 행복을 추구한다. 누구나 세상을 민망하게 살아 간다. 특히나 책임을 어떤 제도로 구속하고 그 안에서 기득권이 추구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민망함은 우리의 모습으로 일반화하여 쓰기에는 너무 구리고 상스럽다. 언어도 현상도 스스로에게 귀속시켜 본적이 없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기득권이 수성되는 방식을 배웠다. 나아가 저것이 정치 라는 왜곡도 서슴치 않는다. 그로 인해 우리에겐 면역이 생겼다. 아울러 그 유전자가 세계의 어느 곳에 있든, 재미교포건 재일교포건 상관 없이 같은 진화성을 품고 퍼진다. 꿈? 시간이 걸릴 뿐 다시 꿀 수 있다. 버림을 당하면 당했지 이룬 꿈인 기득권을 버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책임지며 살아 가는 법 대신 그것이 무엇이든 한번 얻은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며 살아 왔다. 다시 꿈 꾸기 위해 새로운 독을 마실 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저절로 떨린다. 소박한 꿈은 그야말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없는 꿈일 뿐이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지향만 하는 꿈이 사실 행복인데도 우리는 그런 꿈을 꿈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어떤 교환가치적 인정을 받을 수 없고 민망해 할 필요도 없으니까.

재범이 한국, 한국인을 욕한 것 그것도 그의 인격이었다. 게다가 그의 인격이 리더로서 민망하고 그 발언 자체도 잘못이었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두말 않고 격한 청소년의 감정 처럼 시원하게 떠났다. 어떤 이는 그는 계약기간도 남아 있고, 반드시 복귀한다, 그게 시나리오다 라고 한다. 회사차원에서 잠수 좀 타라는 조폭스러운 감수성에 기대어 결과적으론 동정이 될 여론에 줄서 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른들의 애국심 같은 것에 호들갑을 떨어 봤자 아마 이건 극복 안될꺼야, 냉소하고 만다. 그가 복귀하는 시점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치룰 개인적인 고통 또한 낡아 빠진 타인의 고통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다만, 민망하게 사는 어른들의 그 자랑스러운 민망함이 도무지 이해가 안될 뿐이다. 그것이 정의 인양 행복인양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척박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오늘 나의 호주머니속으로 들어온 돈은 누군가의 피다. 누군가의 피로 우리 스스로의 살을 찌우는 삶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미안해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독을 마셔야 하고 소박한 꿈을 지향하는 것에 슬퍼해야 하고 감당하지 못할 삶을 강요 당하는 아이며 어른들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젊은이 하나가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는데 여러 생각이 든다. 왜일까... 부엉이 바위도 오버랩 된다.
2009/09/09 12:55 2009/09/09 12:55
DrunkenSTAR 이 작성.

개때들의 애국심

2009/09/07 14:13 / 생각

2PM, 재범의 린치 과정을 보면서 또 애국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통의 소속감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집단 린치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데다가 천박하게도 애국심을 경제적 차원에 속해 있는 교환가치로 승화시키는 절차에도 매우 익숙해져 버렸다. 재범의 한국 비하는 바로 유승준과 비교된다. 오래된 기억이 아니더라도 미수다의 베라가 발간한 책 '잠 못드는 서울' 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른바 '한국 내지는 한국인을 비하 하며 한탕질을 해대는 양아치들' 의 범주에 모두가 속한다. 이러한 네이션적인 감정의 폭발은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그 열정에 논리를 덮어 씌운다고 해서 정신병리가 해소되진 않는다. 한국이란 국가를 한국인이란 덩어리를 비하하면 안된다는 사고의 체계는 명백히 어떤 지적 영역이 아니다. 재범의 말에 대한 스팩타클한 반응과 10대 청소년의 욕지거리 수준과 어울리는 격하고 상스러운 언어들은 단순히 감정이 이입되어 만들어지는 일종의 정신병일 뿐이다. 이런 지적에 대게는 '같은 민족에게, 우리나라를 욕하는데 넌 아무렇치도 않냐? 넌 어느 나라 사람이냐?' 라는 병적인 답변으로 돌아 온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러면 안되나?

이런 반응의 부류는 대체로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국가가 개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을 가지는게 보통인데 이 때문에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정신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전쟁세대라면 모를까 젊은이들 조차 국가일심동체에 이바지하는 감수성은 측은하다. 애국이 자신의 현상황을 구제할 지도 모르는 절박함에 처해 있다면, 이를테면 청년실업, 비정규직문제 따위들, 왜 국가에 이토록 애국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자본을 일방적으로 취득하고 적절한 재분배는 하지 않는지 고민해야지 남들이 이성을 놓았다고 스스로도 이성을 놓고 재범 따위를 린치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국가가 잘했다고 궁둥이 만져주는 것도 아니고 그 소속감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다. 제성찰도 환경적응도 안된 아이의 욕지거리에 개때들처럼 몰려 들어 살점을 뜯어내는 태도가 나라 사랑, 겨레 사랑으로 명제되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집단폭력인가.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들도 아니고... 민주적인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게다가 스스로 진보 성향이라며 블로그에 노무현이나 김대중의 근조 리본 따위를 걸어 놓고 한다는 짓이 이렇게 얕은 수준이니 실제로 선거가 일어나면 죄다 이명박 따위나 그 아류들에 표를 던지고 재미삼아 비판질에 날새는 줄 모르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박재범에 대한 배심감, 한국에서 건드려서는 안될 애국심, 그런 것들을 네티즌들이 회자시키자 언론은 악랄한 받아 쓰기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동안 박재범에 대해 어떤 신뢰를 가졌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이 범주에 반드시 끼는 것이 공인 이란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연예인이 공인이라면 그야말고 국가에서 녹이라도 줘야지 왜 기획사에 속해서 연습생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박재범에 대한 신뢰는 저 친구가 얼마나 우리를 즐겁게 하면서 자본을 축적할까 일 뿐이다. 그가 좀 되먹었으면 문근영처럼 기부도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애국심, 이런 시시콜콜한 애국심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아할 부류는 오직 지배 계층 뿐이다. 애국심이란 것이 특징적으로 자본 교환을 전재로 하지 않기 때문에 매우 호혜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지배 체제가 이런 국민들이 많을 수록 지배당하는 것,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끌어 내는데 용의하다는 것을 알게 해줄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도 스스로 괜찮다고 위로하고 국가에 헌신할 것을 알아 버린 다는 점이다. 박재범에 시간과 애국심을 투자하느니 제 스스로 살길 찾는 일에 몰두하는 편이 휠씬 낫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곧 입에서 단내나며 '한국 좆같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2009/09/07 14:13 2009/09/07 14:13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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