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서거

2009/08/18 19:42 / 생각
친구야, 꽃이 피고 질때 참 아픈거래, 열매를 달아 줄 때 참 아픈거래
친구야, 꽃이 핀 줄 알았는데 꽃이 졌어 열매를 맺을 줄 알았으나 열매는 달리지 않았어, 다시 꽃도 피지 않아...
친구야, 우린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거니, 우리가 아파하는 소리를 들을 귀는 어디에 있니, 우리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눈은 어디에 있니...

친구야, 너는 아니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봄비처럼 아파도 우리 웃으면서
우리만 아픈 것이 아니라고 우리 웃으면서 친구야, 우리 이 아픈 길을 기꺼이 가야지...
친구야, 피고 질때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우린 아직 사람이다.
친구야, 그러하니 우리 이 길을 가자, 아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 사람의 길을, 그 길에서 피고 지고 아프고 슬퍼하고 열매를 달자...
2009/08/18 19:42 2009/08/18 19:42
DrunkenSTAR 이 작성.

수입 육류를 판매하는 에이미트 홈페이지에 가 보니 어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기사를 공지사항으로 올려 놓았다. 김민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서라도 미국산 쇠고기 매출에 이바지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치고 받을 것이 뻔한 기사를 자사 홈페이지에도 올려 놓는 저 대범함과 업자 다운 마케팅 기법은 아마도 그들 세계에서는 분통 터질 일에 한가닥 희망이었을 것이다. "박씨가 하는 것 봐서 우리도 따라하자", 박창규 사장이 다른 업자들의 줄소송을 예고까지 했으니 그들끼리 쇠고기 굽던 술자리에서 의기 투합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듯 하다. 게다가 언론플래이를 통한 반사이익이 정량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정성적으론 성공적이라 자평할 수도 있겠다. 소송은 몰라도 촛불 당시 글 한줄, 말 한마디 한 다른 연예인들 명단을 두고 서로 나눠서 각개 격파를 도모할지도 모르겠다. 소송,  광우의 성질을 타고난 정치인들의 어시스트, 언론을 통한 으름장, 아무리 생각해도 견적은 적게 들면서 효과적인 마케팅 전술이 아닐 수 없다.

박창규 사장의 버르장머리 발언은 민주주의로 까지 연결된다. 정부가 인민들의 입을 틀어 막더니 업자까지 소송을 통해 입막음을 한다 는데 사실 4300억원을 손해 봤다는데 3억원 배상하라는 숫자 논리는 업자의 입장에서 계산법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버르장머리 로 의도가 파악되듯이 나머지 4297억에 대한 손해배상을 PD 수첩, MBC, 광우병대책회의 등에 전가는 시켜야 겠는데 버르장머리로는 안되는 것이 이 사람들 나이가 30살 김민선씨 처럼 자신의 아들딸뻘도 아니고 사회각층의 지지세력과 의견그룹 하다 못해 정치인이고 법조인들이 태반이다 보니 자신들도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에 계산법이 어그러진 것이라 보인다. 논리나 상식이 아닌 버르장머리로 해결 하려는 것, 이른바 가부장적 사장들의 습성이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들에게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들에게 세상 모든 것은 교환과 거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아닌 것은 가치가 아니다. 그런 뇌구조에 민주주의라? 개가 막 풀을 뜯어 먹는다.

인터뷰를 꼼꼼이 읽으며 그들의 고충과 손해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버르장머리 라는 전통(?)이 오늘날에는 규범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물론, 개인의 인생에서 조건 없는 예절이 적용되는 관계에서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행위와 소송을 거는 행위가 다른 것쯤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문제는 이런 해괴한 논리를 주저 없이 펼친다는데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민주주의의 새로운 억압세력의 등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데 있다. 글세 이것이 공포일까? 물론, 김민선씨에게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고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 고통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을 CEO 출신이라 주장하는 대통령을 뽑고 나서 우리의 일상, 민주적이었다고 믿었던 일상은 하루도 빠짐 없이 그 믿음을 시험 받고 있다. 생각해보라, 박창규 사장의 버르장머리나 기타 등등의 발언은 정작 MB 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대통령만 아니었으면 옆에서 말리지만 않았으면 국민 전체를 상대로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소송을 불사할 사람이다. 자신의 무식을 사사건건 돌발적으로 영상화 시키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안녕히 주무시라 하지 않고 정신 차릴 사람들 많다며 대놓고 비난하는 데스크가 있질 않나, 이러한 명예훼손과 모욕의 피해는 적어도 300억 이상이라 생각하고도 남음 이다. 여전히 CEO 였다면 말이다.

우리는 또 시험대에 올랐다. 김민선씨의 일상을 담보로 말이다. 공포를 느끼기 전에 분노를 느껴야 하며 걱정을 하기 전에 복수를 떠올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겪는 시험대에서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또는 김민선씨와 같은 다른 이들의 삶을 소환하여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시험을 치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공포네 걱정이네 하는 것은 허약한 뒷모습을 보이는 꼴이다. 엣지 있게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품자.
2009/08/14 14:44 2009/08/14 14:44
DrunkenSTAR 이 작성.

많은 사람들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점검 농성을 노동자들의 반복적인 투쟁, 자기 밥그릇 찾기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듯 합니다. 77일간 옥쇄 투쟁을 하였고 아직도 몇명은 공장의 굴뚝위에서 똥 오줌을 받아가며 퇴약볕을 견디고 있습니다. 어느 평범했던 주부는 이 기가막힌 상황을 지켜보다 남편과 아이들을 남기고 자살을 했으며 요 며칠 동안은 전기도 물도 음식도 없는 어둠 속에서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기적적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이 공포스러움에 떨고 있을 남편을 위해 거리에서 우리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틀동안 경찰은 경악스러운 살인 진압을 감행했습니다. 살려 달라는 인간의 호소에 헬기를 동원하여 최루액을 투하하고 전기총으로 감전시키고 서너명이 둘러싸고 진압봉과 군화발로 못먹고 못마신 몸뚱이를 짓밟았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잘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수천억원을 지원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급휴직 해달라는 것 입니다. 그저 우리 가족들 살려달라는 것 입니다. 살려주지 못하는 우리의 관심과 인식을 돌아 봅시다. 거창하게 민주주의를 외치고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무슨 대단한 위치 쯤 되는냥 선전이나 하는 모습을 돌아 봅시다. 살려 달라는 사람들을 모른체하고 도리어 공권력이라는 전혀 공적이지 못한 물리력을 암묵적으로 용납하는 우리의 태도 말 입니다. 우리의 수준이 도대체 민주주의를 얘기하고 국가 브랜드 따위를 들먹일 수 있는 수준 인가요?

같은 노동자들은 어떻습니까. 한국노총이 MB정권의 앞잡이가 되고 민주노총마저 지도력과 운동성을 잃어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하여 그 강성한 다른 금속노조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일이 아닌양 뒷짐 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같이 일하던 비해고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측이란 이름으로 해고노동자, 그들의 가족들을 위협하고 자본가를 대신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찬 정상조업이란 완장은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 입니다. 일제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 남은 반민족주의자들의 청산되지 못한 완장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이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연민하지 않고 연대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기에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이 권력은 어떤 형태로든 청산될 것이고 댓가를 치루게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뒷짐 진 대게의 사람들, 사측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맘껏 행사한 비해고노동자들의 파괴된 공동체의식은 다시 회복될까요? 솔직히 쌍용자동차를 위해 특별 세금이라도 더 내야 한다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라진 연민과 연대 의식 입니다.
2009/08/06 13:54 2009/08/06 13:54
DrunkenSTAR 이 작성.

미디어법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던 것일까? 어제 타는 듯한 울화는 미디어법 자체가 아니라 꼴보기도 싫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를 시정잡배의 포스로 죽치고 점거하여 절차, 민주적 합의, 하물며 인격 따위까지 개무시하며 법안을 통과시킨 뒤 환호하는 모습에 온갖 역겨움이 목구멍을 태워버린 것이다. 미디어법이 통과 되도 쌍용차 공장에선 사람들이 다쳐 나가고 어떤 아내는 오늘 갖 돌박이 아이, 남편과 영영 이별을 고했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고요하다. 뱃속에서만 어제 쳐 마신 술과 분노와 역함이 뒤섞여 요동을 치고 있다. 미디어법은 당장의 민생 법안도 아니요 앞으로도 방송사 근처를 다니는 택시나 식당, 극소수의 방송 종사자의 밥그릇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거짓말은 이미 들통난 상태다. 게다가 제 아무리 조중동이 방송사 지분을 30%씩 사들이고 몇년 후에는 스스로 방송사를 차린다 한들 안보면 그만, 그들의 혹세무민, 날조 방송의 행간에 비웃음을 날릴 만한 성숙한 정치, 현실 인식이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어 보인다.

과연 그럴까?
언제나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렇게 폭력의 비호를 통해 태어 났었다. 하지만 위기의 과정과 순간에도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민주주의는 정부나 국회에 있지 않았다. 학생, 시민들이 학습하고 의식하며 끝내 거리에서 만들어 냈다. 민간 정부가 들어 서며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그런 제도 안에서 실현, 지속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국회에 날치기며 폭력을 위시한 법안 통과의 절차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미디어법은 어떤가. 그 과정의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이전의 분노와 다른가? 미디어법을, 한나라당의 반역적 행위를 역사가 심판해줄 것이라 믿고 기다리면 될까? 한가로운 생각이다. 성숙한 정치 인식, 더욱 나이브한 생각이다. 미디어법은 역사를 바꿔 놓을 법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국가와 전체적 추구, 자본주의와 기득권에 대한 무저항, 가난의 성숙, 반민족 반민중적 인식의 확산, 각종 천박함의 다양성을 서서히 침투시키는 제도적 장치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정권 유지를 열망하는 한나라당, 기득권의 만세를 원하는 조중동의 법이다.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한번 인식된 관점을 도무지 바꾸거나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못하도록 하는 심리적 강제법이다. 이로 인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더 많은 부조리를 저변에 천작시킬 제도다. 그때의 역사란 일그러진 역사다. 그때의 역사는 한나라당과 조중동과 이명박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며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을 경쟁에 도태된 자, 게으른 자로 격하게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 심판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 지금 당장 미디어법이 우리에게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역사로 갈 것인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2009/07/23 18:23 2009/07/23 18:23
DrunkenSTAR 이 작성.

평가와 열정에 관하여

2009/07/16 18:48 /

회사에서는 누군가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회사는 그것을 정중하게 '평가' 라고 한다. 평가는 곧잘 이런 식으로 부연된다.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되지 않는다.", 또는 "측정하지 않으면 행해지지도 고쳐지지도 않는다."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드러커와 세계적인 전력기기 회사인 ABB 의 퍼시 바네빅 회장의 말을 엄숙하게 빌려 말한다. 이것을 국내 기업에서는 KPI 라는 툴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직급, 팀 단위별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사안별, 기간별로 달성 여부를 모니터링 하는 것이다.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애면글면 어떻게든 사용하려는 입장인데 중소기업에서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다. 관리자도 실무자고 경영진이 영업직인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처럼 간지 좀 세우겠다고 KPI 같은 평가툴을 도입했다가는 한해 농사 평가도 못해보고 말아 먹기 쉽상이다. 어줍잖이 지식산업 좀 한다는 기업에 있어서는 측정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가 있냐는 둥 에둘러 검토조차 복잡하다는 입장이다. 이렇다 보니 정성적 판단이 각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대한? 잣대가 된다.

여의도에만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성적 판단이 더 많은 중소기업에도 만만치 않은 정치가 있다. 줄을 선다는 개념 보다는 평가할 시기가 오면 관리자들은 1년간 가장 인상 깊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것이 프로젝트 일 수도 있고 술자리의 난장일 수도 있으며 클라이언트의 지나가는 말 일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피평가자는 내내 관리자의 추억에 남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의 불경기, 이직 시장도 좋지 않은 때에는 정치? 행보가 다소 디테일해지고 관리자들도 다른 관리자들과 이런 저런 평판을 들으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이렇게 한바퀴 돌게 되면 관리자들 사이에서도 응당 편가르기가 시작된다. 왜 저놈은 내가 이뻐하는 애를 싫어하지, 어? 내가 미워하는 앤데 임원이 좋아하네, 따위의 각종 정서를 짜집기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세련된 문장으로 만들고 거기에 점수를 기입한다. 물론, 각 항목마다 가중치가 다른데 이 가중치의 근거는 직관이다. 정서와 직관이 합쳐져서 평가 라는 엄숙한 말로 승화된다.

누가봐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기업의 오래된 관습인 비인간적인 시스템도 적용되지 않은 거짓말 투성이로 개인이 평가된다. 이 평가를 통해 당장은 관계가 좋아진다. 좋아 하는 기준으로 좋아 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가 되었으니 궁합도 잘 맞는다. 이것을 또 엄숙하게도 '시너지' 라 명명하면 할말이 없어진다. 관리자와 보기 좋은 관계를 맺어 두지 못한 이른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뻔하디 뻔한 길을 걷게 된다. 인사라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일하겠다는 의지는 경외롭기까지 하다. 이런 경외로움이 지속적으로 조직에 투여 되면 자신을 스스로 리드 하고 소신에 관계된 자유로운 열정을 가진 개인은 차츰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일단 조직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시작하면 금화에서 구리를 빼고 다시 재련하는 매카니즘만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묘하게도 회사에서 정성적 평가에 의존하여 조직을 관리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평가를 시스템적이고 디테일하게 할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평가가 시스템적일수록, 또는 정치가 난무하는 평가일수록 리더만 득실대는 조직이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회사나 조직은 걸핏하면 리더쉽을 얘기하지만 리더쉽이 득달거리는 조직은 전진하지 못한다.

회사는 개인에게 스스로 열정을 갖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문제는 대기업에서 수많은 사람을 관리 라는 학문적 기능으로 묶기 위해 신입사원연수, 선배에 대한 복종, 시스템의 이해, 시스템에 대한 복종, 시스템의 운용 의 과정을 거쳐 리더쉽과 시너지와 평가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조직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영혼의 노숙자' 가 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지식산업 좀 한다는 벤쳐, 중소기업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을 극구 도입하길 원하는데 개인을 이성적인 인간으로, 열정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수완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것이 벤쳐나 중소기업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퇴직금이나 마찬가지다. 리더쉽이나 마케팅 전문 강사의 강의를 쫒도록 하지 않고 인문학 선생님, 철학, 실물경제가 아닌 거시경제학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제공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래도 평가가 필요 하다면 예술사조 강의를 듣고 다음날 디자이너를 몽땅 미술관에 데려가 작품에 대해 토의하고 그때의 태도와 자세를 토대로 평가를 하는 방법은 왜 벤쳐, 중소기업에서 해선 안되는 터부처럼 얘기되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2009/07/16 18:48 2009/07/16 18:48
DrunkenSTAR 이 작성.

« Prev : 1 : 2 : 3 : 4 : 5 : 6 : 7 : ... 103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