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05/05/30 19:10 / 기억
천장에 닿았던 햇살이 벌써 늙어, 구들장에 드러눕는다. 내가 사는 서쪽 노을 꼭두서니에는 나의 딱딱한 활자가 오래도록 붙어 있다. 햇살의 노른자위는 밟아도 데이지 않는다.
5월이 간다. 폐허의 길을 건너던 맨발은 결석한 여자가 창호지로 드리치는 노을에 대고 읽던 이별소설의 행간 위를 걷기 시작한다.
끊어진 다리를 절룩거리며 폐허를 걷다가 도착한 그곳엔 보이지 않던 사랑이 차가운 얼음처럼 황무지에 등을 대고 붙어 있을까? 늙어 버린 햇살로 부지런히 문지르면 다시 찬란하게 녹아 번질까?


[이수동, 詩人]
2005/05/30 19:10 2005/05/30 19:10
DrunkenSTAR 이 작성.

가열찬 프로젝트의 15 라운드, 내 푸른 눈은 먼지 낀 노을로 변해간다. 눈도 목도 15 라운드를 치루고 판정을 기다린다. KO 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왜 Process 는 Jumping 하지 못하는 걸까?

성대가 약한 나로서는 성대의 힘이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에서 자꾸만 얼굴을 붉힌다. 요즘은 혈류가 성대를 통해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화를 돋우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 화가 무척 난다.
왜 이 프로세스가 빠졌는가? 왜 이 프로세스가 빠졌는데 이제서야 노티스가 되는가? 왜 이 프로세스는 적절히 구사가 안되었던가? 왜 이 기능은 개선이 안되는가? 왜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단어를 취사선택하지 않는가? 왜 Order & Check 을 하지 않고 flow 되는가? 왜 전제를 흔들고 하위 논리를 조립하려 하는가? 난, 일과 관계된 모든 상태에 실제로 화를 내고 화가 난다. 속으로 화를 내면서 현황 파악에 나서고, 각 팀원들과 꼬깃꼬깃 화를 펼쳐 놓으며 상태의 유지, 상태의 전개방법에 대해서 논의하거나 일방적으로 꾸짓기도 한다. '무조건 시키는대로 이렇게 해' 란 방식은 나랑 맞지 않는데, 엇그제는 화를 참을 수 없어서 몇가지는 독재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스스로의 화가 밖으로 표출되고 나서 정신과 마음이 온통 침잠해져서 압구정 오뎅집 '정든 집' 에서 살얼음 핀 정종을 수어잔 마셨다. 화를 낼 수록 머리도 자주 아파온다.

프로세스를 빼 먹고 진행한 프로젝트 리더를 조기 철수 시켰다. 엄중한 징계로 생각했으나 정작 본인은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평가의 실현을 통해서 깨움을 주어야 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생략된 프로세스의 상태를 유지시켜서 14 라운드를 뛴 프로젝트에 타월을 던지지 않고 갈 것인가, 일단 타월을 던지고 프로세스를 정비하고 갈 것인가? 성대에 힘을 주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에 리스크 책임자로써 뒤늦게 침목을 놓는 격이다. 문제는 프로세스의 생략으로 인해 각 이해 당사자간에 감정적 반목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는 것. 프로젝트 룸의 분리와 프로젝트 리더의 방만한 운영이 초래한 결과가 생각보다 큰 gap 을 가지게 되었다는 오늘의 현상에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세스는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아는 프로세스는 문제가 없었을 경우에만 적용 가능한 것이다. 몸만 알고 있는 프로세스는 제각각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에 Feed-Back 되는 문제에 대해서 각각 방안이 달라서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없고 능력도 되지 못한다. 이럴때 도덕적 해이는 충분히 요령을 찾아 내려고 하고 계통을 따르지 않고 은폐하려는 의지가 발동하게 된다.
나이가 경력이 있다는 말도 허풍이다. 끊임없는 이성적 반성과 창조적 책임이 없는 경력은 공허하다.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역할의 Object 와 Activity, Activity 에 따른 Action Plan 이 있고 그에 따르는 직관과 책임에 대해서 서술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준엄한 화를 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을 포기하고도 누군가를 리드 하겠다고 리드 했다고 하는 것은 맹목이다.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스트레스로 회귀한다고, 행여 공든탑의 종말을 선언하는 서글픔은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면 나로 시작하는 세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열정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 몸이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생체적인 악성을 만들어 내더라도 일에 있어서 그것이, 나의 아우라가 되었으면 한다.
2005/05/25 21:55 2005/05/25 21:55
DrunkenSTAR 이 작성.

인간실격

2005/05/19 22:21 / 생각
실수는 있을 수 있다. 허위와 파쇼의 꼴값이 난무하는 세상에도 그정도 너그러움은 있는 법이다. 너희들이 서빙고 분실틱한 저질 인격체로 몰아 세웠던 박승대하고 어깨 동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도 너희들이 그동안 웃겨준 노고에 대한 고마움 같은 것도 있고, 얼마든지 너희들과 어깨동무를 할 너그러움이 있다. 게다가 너희들은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지 폭로와 공작을 찾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았던가?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서 있으면 하려고 했던 말도 다시 담아서 헹궈보고, 카메라 앞에 서면 마음의 긴장이 한 개인의 역사를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할 만큼 경건하게 되는데, 그게 잘 안되는 사람들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에만 연대하여 사이좋게 모여 있는 줄 알았다. 싸움도 있고 논쟁도 있고 연대가 안되면 갈라서기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성이고 보면 설득과 참여, 화해와 용서는 그 인간성의 정점이다. 노예 계약이라며 서슬 퍼렇던 너희들의 기자동원이 있고 난 후 박승대의 독재 마인드를 확인했으며 일말은 너희들에게 연민 같은 것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론 석연치 않은 것들(박승대와 너희들의 인간적 연대, 표면화된 인기에 기댄 인간의 욕심 등)이 있었지만, 그래도 너희들이 약자인 것 같아 보였다.

웃음을 설파할 줄 아는 자들이 정치 공작 같은 걸 할 이유는 없겠지, 매니지먼트까지 따로 둔 자들이 비즈니스에 깊이 관여하여 웃음을 위한 주름을 술책에 사용하지는 않겠지, 난 역시 나이브했다.
한시도 같이 못하겠다는 서슬이 일주일만에 무뎌진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화해는 책임지지 않는 사회성, 아니 한 인격체의 비겁성, 아니 어떤 인간성의 실격을 대단한 꼴값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끝까지 언론의 오바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획책을 비롯하여 무엇에 홀린듯 황당하다며 서로 껴안고 흘리는 눈물은 진정한 악어의 눈물이 아니고 무엇이냐?
너희들은 약자인줄 알았더니 강자였고, 언론과 국민을 너희들의 밥그릇 채우기에 활용할줄도 아는 고도의 정치가였고, 목적하는 이윤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끌어 낼 줄도 아는 비즈니스맨이었다.
너희들의 이런 비겁하고 파렴한 작태를 보며 그래도 사람들이 씁쓸히 웃음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면, 국민을 개똥으로 보던 박정희나 전두환의 파쇼와 다를게 무엇이냐? 이것들을 또 용서하고 웃찾사 같은 쓰레기가 있는 난지도 같은 스튜디오에 찾아가서 해벌쭉 웃는 인간들이 있을 테니, 기본적인 사상의 표상조차 없는 이 불쾌한 사회는 인간 실격들의 책임 없는 연대를 언제까지 용서만 할 것 인가?
[사진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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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9 22:21 2005/05/19 22:21
DrunkenSTAR 이 작성.

이런 날

2005/05/16 20:00 / 기억
한가닥 숨소리만으로도, 이런 날, 누구에게라도 위로 받고 싶다. 이럴땐 나도 어쩔 수 없이 바지춤에서 옷깃이 삐죽 빠진 나약한 사람으로, 골목 어귀에 기대어 서 있고 싶다. 개걸스럽게 사랑을 섭취하고 싶지만, 그 언덕, 그 노래, 그 웃음이 아니더라도 그 한가닥 숨은 더더욱 아니어도, 누군가를 보며 '오늘 힘든 일 없었어?' 물어보고 누군가가 쏟아 놓을 수다를 듣다가 가끔씩 느닷없이 박수를 치며 누군가의 하루에 나도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날은 그랬으면 좋겠다.
2005/05/16 20:00 2005/05/16 20:00
DrunkenSTAR 이 작성.

벤쳐 열풍과 IMF 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수많은 자영업자, 창업자가 생겼다. 목적형 창업과 생계형 창업으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반도체가 그랬듯이 벤쳐를 제 2의 국가 성장의 원동력으로 간주한 정권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은 과잉 공급하고 자본은 엉뚱한 곳에 쓰이기 좋게 만들었다. 목적형 창업이 성장의 케즘을 넘지 못하고 거품으로 터져 버리면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고 노동자와 같이 윤택해지기 위한 근본적 벤쳐 정신을 가진 창업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울고 불고 때를 쓰지 않더라도 그저 인간적인 것(은 울고 불고 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공감하고 서로를 연대하는 것이다.)만으로 따지자면, 속된 말로 망해도 3대가 먹고 사는 본래부터 계급이 다른 부르조아가 아니라 근본적 벤쳐정신으로 없는 살림 쪼개고, 있는 신용 금융기관에 팔아서 잘되면 같이 잘되자는 프롤레타리아 창업자가 거품에 터져 버리면, 생계수단을 잃은 노동자 만큼 창업자에게도 동정이 가는게 인간의 연민이다. 동정을 빼고 남은 비즈니스만이라면, 노동자의 3대가 걸쳐서 저주할 원수가 되겠지만. 실은, 경영을 하는 사람과 노동자라는 오늘날 가장 수상한 인간의 연대(회사라 통칭하는)에서 연민은 경계의 대상이다. 그것은 책임의 농도를 희석시키는데 있어서 위대한 H2O 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추구가 없는 인간적 연대는 되도록이면 빨리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공중분해 되는 편이 낫다.

모이면 의례 조직을 하는 인간의 그저그런 의지를 마치 절대 생존의 법칙인양 교육했던 것이 '뭉치면 산다' 이다. 뭉치면 왜 사는 지에 대한 부연은 없는체 나무 젓가락 한개는 쉽게 부러지고 세개는 부러지지 않는다는 유아적 쇄뇌를 통해서만 규정되었다. 이 구호의 역사적 계통(이승만 대통령이 언급)은 모호하지만, 개운치 않은 뭉침으로 인해 대열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고 대열은 오와열이며 곧 군사문화를 추리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어떤 정신은 어떤 지식보다 중요하다. 뭉치는 행위에 의한 밀도의 증가가 생물이나 물질의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논리된바 없지만, 생활에 있어서 그 행위는 어떤 정신으로 논리되어야 한다. 뭉치면 산다는 구호는 뭉치면 생활할 수 있다는 윤택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것은 군사질서적 위정자들에 의해 산다고만 하면 휘둘릴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대열의 조직이었을 뿐이다. 군사문화에서 '뭉쳤을 때의 삶은 어떤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가?' 란 생각은 효율적인 오와열을 흔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오와열에서 어떤 정신은 있을 수가 없다. 대체로 그런 오와열에서의 지식이란, 부당한 폭력에 굴복하는 방법론 정도가 된다.
뭉침, 즉 대열과 연대의 차이는 자아가 공감하는 정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대열의 질은 생존과 획일에 있지만, 연대의 질은 생활과 책임에 있다. 연대의 질에 생활이 있어야 하는 것은 반항과 모반의 차이와도 같다. 반항은 그것의 접고 펼침이 오롯이 혼자만의 결정에 의하지만, 모반은 사람들과 정신적 공감의 상태에서 반항을 하는 것으로 그것이 접혔을 때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연대에는 목숨과도 같은 책임으로 걸은 생활이 존재해야 한다.
현대의 공간은 인간이 뭉치고 떨어지고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전자적으로 Link 되고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족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미 말했듯 그저그런 의지로 조직하는 본능과 더불어 대열이나 연대는 우리 주변 어느 곳에나 있다. 다만, 인간의 연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대열들이 오와열에 대한 혈안이 마치 책임인양 떠들어 대며 사회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쳐열풍이 불었던 문민정부 때는 김영삼씨와 노동자의 노동을 띄먹고 도망친 창업자들이었고, 요즘엔 개그계가 그 대표성을 띄려고 하는 듯 하다.
2005/05/12 18:29 2005/05/12 18:29
DrunkenSTAR 이 작성.

연애가 끝나면 보험

2005/05/07 19:10 / 생활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는 못한다. 위로酒와 레닌이 그랬다. 어떤 연애는 아름다웠으나 대지와 토양에 홀로선 외로움에 식은 땀을 흘리다가 듣는 기적소리만큼 사랑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었을 뿐, 이제 침잠의 토양에서 부표를 찾는 화려한 외로움으로 돌아가는 의식만이 남았다. 이 명료한 체제의 한심스러운 행복에서 다만, 충격적인 것은... 연애의 목적이 결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성기고 서걱거리는 것에 있고, 목적이 분해되었을 때, 그것은 어떤 연애의 소리의 분해이며 이제 고통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의 정막에서 온다는 것, 한번도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귀가 연애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면서 달고 다니는 고통 때문에 생기는 것이 추억이고 미련이고, 다시 그 연애를 찾는 것은 말이 아니라 눈물의 결정이고 돌아선 골목에서 들리는 소리인데... 이 신파의 체제에서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이 들리지 않는 소리에 대한 예의인줄 알았는데, 연애가 끝나면 보험이라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을까? 그런 고민은 순진하기 그지 없다. 강가에 선 갈대의 자세는 그저 순진한 인간의 맹세였다. 젖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연애가 끝나면 보험이라니, 아주 영 이별이 아니라 어디 내 생 어디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란 것이 그리움이 아니라 고도의 이 세계에서는 보험이라니...
어느날, 소리를 추적하며 마음의 가난함도 잊고 녹슬어 가는 세월이 지나치게 서글퍼서 이 이별이 혹시 영영 이별이 되면 기가 막히고 귀가 막힐까봐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결국은 보험증서 였단 말인가...
2005/05/07 19:10 2005/05/07 19:10
DrunkenSTAR 이 작성.

한심한 행복

2005/05/06 19:20 / 생각
우리나라에서 진보란, 80년대 반체제 운동을 했던, 최소한 그 무리의 언저리에서 같은 노선을 생각했던 사람들의 연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진보이고 '진보' 세력일까? 제대로 뛰면 참 멀리 뛸 수 있다는 설법의 자본주의 속에서 진일보한 사상이 그것인가?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란 얘긴데, 그렇다면 좌파도 진보세력들의 진일보한 대안사상에 동의하는가? 좌파=진보라는 등식이 맞지 않음을 증명하기는 쉽다. 대신, 내가 추구하는 행복의 이념은 그 정체를 들어내지도 않고 전진하고 있지도 않다. 진보나 보수나 모두 행복하자고 하는 짓인데, 전진이 없다. 그래서 행복이란 주제는 깔끔하지도 않고 게다가 한심스러워 보이기조차 하다.
추구하다보면, 왠지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매번 자신의 이념에 따라서 합리시키면서 질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합리를 타협한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지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복이 당연히 한심스러워진다.
행복에는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행복은 본능인가? 계몽주의가 있기 전에 성 아귀나스조차 여자는 영혼이 없는 존재로 존치하지 않았던가? 행복의 추구도 본능이 아니라 추구권에 의한 권리의 보편성에 기인했던 것은 아닌가?
본능의 절제, 양심의 숨김이 자유와 자본의 체제안에서 미덕이라면, 행복이란 것도 체제안에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운데 체제의 온갖 명령어에 쑥스럽게 그냥 웃어버리고 마는 것과 양심이 책무를 다하려고 대안을 제시하고 찬물을 끼얹듯 사상을 체제의 진일보로 전진하는 것 사이의 모호한 틈, 행복은 그 결절에서 얼마나 잘 합리하는 가에 있다.
당연히 한심하다.
가족의 체제, 연애의 체제, 결혼의 체제 안에서 한심해질수록 행복해진다니, 진보는 한심스러운 행복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것, 보수는 한심하지만 안락하게 행복해지는 것으로 일단락을 맺어도 될까?
2005/05/06 19:20 2005/05/06 19:20
DrunkenSTAR 이 작성.

Hundertwasser

2005/05/04 01:10 / 관심/페인팅
화사한듯, 찬란한듯 하지만 서울의 봄은 도처에 모순 투성이다. 본래의 색을 내는 물질은 찾아 볼 수 없다. 햇빛 아래 발가벗고 서 있어도 내 그림자는 검지 않다. 무엇하나 생명의 세계가 아닌 굴절된 현대의 구축, 누구도 서울을 상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동화를 꿈꾸지 않는다. 빈틈없는 공학과 엄숙한 조형으로 서울에선 다른 곳에서 그려온 감성의 색과 다른 곳에서 복원된 동화를 전시만 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불쾌한 이성만으로 조립된 도시에서 오로지 행복이란 야수적인 왜곡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세계를 표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세계안에 넣어 광포하게 왜곡할수록 행복해지는 것, 이 도시에서 보통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겸 화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 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 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오스트리아 빈의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ouse)다. 빈 시내 헤츠가세역 근처에 있는 이 연립주택은 삭막하고 특징이나 국적 없는 현대주택을 지양하고,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건축물을 목표로 하여 과거 왕이 살던 위엄 있는 왕궁과 같은 대중의 집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강렬한 색채와 서로 다른 모양의 창틀, 둥근 탑, 곡선으로 이루어진 복도 등이 조화를 이루며, 스카이라인이 신과 사람을 맺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생각 아래 중요시 하였다. 훈데르트 바서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비튼 마을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Hundertwasser House
1983-86 Vienna

인간이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세상의 진실로만 살아 가는 것은 얼마나 미덥지 않은가? 자를 대고 그린 선이 아니라 크레용으로 그린 가건축물은 진실이 아니라며 도태시켜버리는 파쇼의 도시에서 우리는, 훈데르트 바서의 호기심을 이미지로 저장하여 킨코스나 링코에 가서 확대 프린트하여 액자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조금은 디오니소스에 위로가 된다.


The 30 Day Fax Picture 1994
Mixed media (thirty A4 size FAXes)
151 x 130 cm Vienna

훈데르트를 반문명주의자, 생태주의자라고 하지만 그는 사람이 보통으로 자신의 세계를 꿈꾸고 표현하는 것을 지향했던 사람이다. 세계의 한계가 세상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았음을 형식으로 보여준 사람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훈데르트 바서]
훈데르트 바서는 그 자체가 미궁의 도시였고 아날로그 였다.


Kunsthaus Wien - Blue Version
오스트리아 빈의 쿤스트하우스(Kunsthaus=개인화랑)


Last changed on 01/28/05. This album contains 2 items.
Island of Lost Desire. Mixed technique (1975), 59 x 48 cm.
Private Collection


Les Emanations - The Emanations 1999
Mixed Media : watercolor, egg tempera, oil, sheets of gold and silver
SIZE: h: 112 x w: 140 cm / h: 44.1 x w: 55.1 in


http://www.hundertwasserhaus.at/1st.html


2005/05/04 01:10 2005/05/04 01:10
DrunkenSTAR 이 작성.

낮술

2005/05/02 12:45 / 생활
햇볕이 땅엣 모든 꽃봉우리를 키우기 위한 공평한 노동을 하던 봄날, 일요일, 누군가는 취하지 않고 누군가는 도주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밤술까지 이어달릴 낮술을 시작했다. 깨어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단출하게 모여 앉을 수 있게 공평한 햇볕이 술판을 비추운다.
수치심을 덮어주던 망토를 벗고, 밤이 침략했던 절친한 정신으로 세상을 본다. 섣불리 달아오르지도 냉정해지지도 않는다. 그냥 빛이 흡수하고 반사하는 모습을 멍텅구리로 바라보다가, 혹시 북받쳐 오를까봐 바다 언덕에 작은 야외극장이며, 팔당대교 카페며, 야광에 빛나는 남산 봉우리며, 점심시간에 다녀온 삼청동이며, 바람이 내어 놓은 길에 다른 사람들의 눈물과 섞여 빛처럼 흘러가라고 억지로 내어 놓았다. 그 바람속에 꽃잎도 같이 날린다. 밤에 그리워하던 것들과 조우하는 낮술에 콩나물 국밥 한그릇이 희망이었던 세월을 섞는다. 벌써 1년이 지나 오월이 왔다. 탕진해버린 시간은 빗쟁이처럼 밀려와서 푸른 시간이 된다. 시들어버린 콩나물처럼 낼모레면 사십인데 '다시 설레일 수 있을까?' 라며 어쩌자고 입천장 가득히 낮술을 밀어넣는 것인지...
밤까지 가기도 전에 나는 이미 너무 그리워 낮술판을 떠났다.
2005/05/02 12:45 2005/05/02 12:45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