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있고 성실하게 정원을 가꾸는 저스틴의 모습은 타인 만한 행복함에 안도하고, 타인의 불행에 적당히 동정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대게의 대중을 닮아있다. 반면에 그의 아내 테사는 반골 성향의 여성으로 미국을 섬기는 영국의 외교 정책을 성토하는 인권 운동가다. 제국주의화 되는 강대국과 거대 제약회사의 음모를 일단 접어 두고서라도 등장 인물들의 이러한 구도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침묵하고 알량한 원칙과 절차에 복무하는 체제순응적 인간과 세상을 바꾸려는 희망을 가진 인간과의 변증법적 대립이 그것이다. 물론 영화를 푸는 방식은 사랑 즉, 신파다.


강대국과 거대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세상에 접목되는지 폭로하는 콘스탄트 가드너는 헐리우드 영화가 빠지는 이상적 대단원인 영웅의 등장, 악을 징벌하는 정의 등을 내세우지 않는다. 테사가 추구하는 세상의 정의와 인간성의 회복은 애초에 헐리우드의 진부한 방식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파, 상업주의에 빠진 대게의 대중들은 테사를 엥글로색슨의 영웅 쯤으로, 저스틴을 사랑에 빠진 진정한 로맨티스트 쯤으로, 강대국과 제약회사의 논리를 픽션으로 치부하는데 가차가 없을 것이다.


5월3일자 조선일보 류정기자의 영화평은 모든 우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그대로 투시한다. 못사는 사람들을 위한 싸구려 정의감일랑 집어 치우라는 호소는 그런데로 그들 답다. 하지만 비교적 못사는 사람들, 피부색이 다른데 비교적 짙은 사람들, 출신성분이나 특정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지켜야 했던 최소한의 예의도 없음을 공공연히 사설하던 그들이, 테사의 태도와 배려를 지적하는 부분은 역겹기까지 하다.
조선일보의 영화평 보기


한 인권운동가라는 존재가 제도권의 저항적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권력과 자본에 의해 제거 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는 영화의 형식은 그대로 현실일 수 밖에 없다. 영화 내내 테사와 그녀를 돕는 아놀드는 한번도 영화로 부터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테사는 오직 자신과 다른 시선을 가진 저스틴에게 만큼은 따뜻한 시선 즉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음으로써 저스틴의, 우리의 호두 껍질을 깨운다. 하지만 테사의 시선이 그만큼 따갑고 따스한건 우리의 무임승차가 이제서야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금 희망에 부푼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강대국의 논리에 충실히 영합하는 거대자본이 아프리카 민중을 상대로 부당한 실험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의 꿈과 다른 꿈을 꾸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통해 함께 꾸는 꿈은 있어도 어떤 꿈이어야 하는지 규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꿈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는 대단원에 어떤 결론도 내려주지 않으면서 콘스탄트 가드너가 될 것인지 아니면 희망을 시작할 것인지 조용히 손을 내밀 뿐이다.
희망은 세상을 바꿀수도 있다.
2006/05/09 17:35 2006/05/09 17:35
DrunkenSTAR 이 작성.

권력은 인간에게만

2006/05/08 19:37 / 생각
대체로 반미에 반대하고 미국으로 인해 침해되고 있는 권리와 이념적 복무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들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난다' 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철학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간과를 지속적으로 지켜가기 위해 그들이 취한 체제가 60~80년대의 권위와 폭압이었고, 지금의 조작과 음모로 이어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기득권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게 되었고 덩달아 노동자이면서 자본가가된 이른바 개혁진보세력은 기득권의 신화에 사로잡혀 그간의 3년을 투자하여 의식 털어내기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개혁진보진영에게 국민이 주었던 정치적 파워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였다, 그로인해 여전히 차때기하여 축재한 돈, 놓고 돈 먹기에 열중인 짝퉁들이 스스로를 명품이라 명명하고 그 짝퉁명품을 사는 대게의 대중들의 한심스러움을 봐야 하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대중들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자행하는 일부 보수 언론들의 완벽한 조작체제에 중독되어 도저히 그 아편을 끊지 못하게 되었다. 되려 한물간 가부장적 권위의 부활을 통해 철없는 것들을 지하실에서 다스리기를 연호한다.


한물 간 것들에 대한 회생을 바란다면, 그 첫째는 친일파 청산이고 싶다. 언젠가 대추리 주민들과 평화 지킴이들의 저항을 교훈 삼아 숭미파를 역사적으로 청산해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깨달음이 없다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처럼 숭미파들의 교활한 조작 체계에 매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들이 노리는 바는 그러한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언제든 자본의 논리로만, 인간 됨됨이의 계몽을 최대한 빨갱이로 경계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이해력을 천천히 상실시킨다.


그 전략은 주요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은 언론에 대한 문법적 이해력을 잃고 5만평 정도 되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에는 정념적 민족주의를 파쇼에 가깝게 뿜어 내다가도 250만평의 제 나라 땅을 미국에 조공하는 데에는 그 민족주의를 거세한다. 이것은 더 이상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견해, 아니 평택의 작은 마을 대추리는 기득권과 관계 없는 무지렁이들의 삶일 뿐이라는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으로 미국의 패권주의가 팽택을 기점으로 일으키는 이라크식 전쟁에 또한 무지렁이들의 아들들이 의무적으로 파병되어야 하는 말도 안되는 그 끈끈한 동맹 관계가 선택적 민족주의자들의 포악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쯤되면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지 않는가? 인간이 아닌데 그들이 가진게 권력일리 없다.
2006/05/08 19:37 2006/05/08 19:37
DrunkenSTAR 이 작성.

탄핵

2006/05/04 10:06 / 생각
이제 이 정부를 탄핵하는 수 밖에 없다.
2006/05/04 10:06 2006/05/04 10:06
DrunkenSTAR 이 작성.

나는 한번도 적빈하게 살아본 적 없고, 한번도 어깨에 쌀포대 이어 본 적도 없는데다가, 거지꼴은 본능적으로 내키지 않은 사람이다. 보고 들은건 있고, 입은 찢어 졌다고 '민중의 노동의 낮은 데로 향하란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최전방에서 제3세계의 어려운 자본을 번거로움 없이 찾아다가 등록금을 대고 기이한 체제와 동족 상잔의 괴뢰 집단으로 북한을 몰아세우는 미국인 급우들과 어울려 시소 놀이를 했었다. 제도권에서 인정 받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잘난체를 하고, 철저한 자본의 시종으로 복종하면서, 체제에 순응하고 굴종하기를 가르쳤다. 이쯤되면 신자유주의적 시민이 아닐수 없다.


돈이 판치는 사회에서 여기 저기 쑤시며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자본교환적 가치가 어떻고 노동이 어떻고 공평이 어떻다니, 또 다른 세계의 지배를 꿈꾸는 떠돌이 이상주의자냐 넌?
그리하여 난 스스로 헐거움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 실은 토론도 최소로 해야 한다는 점에 동참하면서 동시에 이해를 위한 언어의 첫번째 기술은 열거라는 점을 원칙하고 있으니 여전히 패러독스다.


1. 평등하지 못한 담론의 장
내 말이 아무리 개소리라도 대화중에는 절대 비웃을 수 없는 자리, 개소리인줄 알면서도 그 개소리를 억지로 주입시킬 수 있는 자리, 개소리에 대한 반박을 하더라도 논리 정연하지 못하면 논지나 반박으로 받아 들여 지지 않는 노련한 처세와 화술의 장, 불평등할 수록 강한 개소리가 지배되는 대화의 장에 익숙한 사람이 평등한 담론의 장에 참여 하기 위해 갑자기 겸손과 조심스러움의 태도로 임할 수 있을까? 그로인해 평등한 담론 이전에 의식이고 의식 이전에 교양이다. 담론의 장에 계급적 평등이 아닌 교양적 평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그 장이 토론이 되거나 반목이 되거나 한다.


2. 칼라로 구분되는 노동
블루만이 기계 자본에 억압 받는 노동자가 아니다. 실은 사무직과 현장직을 가른 화이트와 블루의 계급성 자체가 수정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져온 것이다. 노동의 신성함이 블루에만 있다는 주장은 이상주의이면서, 그 구분를 두고 은연중에 사무직이라면, 사무직이라 생각하는 화이트라면, 노동이 아니라는 관계 정립을 통해 근로 기준법의 테두리에서 소외시키고자는 음모이거나 무의식속에 침작하려는 의도이다. 화이트? 당신도 노동자다.


3.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자격
노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노동 임금이다. 노동임금이 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잉여자본으로 남아 축적된 자본의 기능이 역시 노동자의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지 않고 지배계급이 수혜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만 늘리는 수단으로 쓰여졌기에 자본의, 자본으로써의 이념이 왜곡되었다. 그로인해 자본은 곧 부르주아지, 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척도, 지배계급의 기득권 등이 되어 노동자는 돈이 없는 사람으로 탈바꿈 되었다. 다시 말해, 없는 자만이 노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되는 희안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4. 노동자이면서 자본가
자본은 노동자의 희생과 피를 먹고 확대된다. 노동자라고 해서 저축하지 말라는 법 없고, 이념 없다. 완전히 화폐가 없는 원시로 회귀하던가 세상을 뒤집지 않고는 노동자가 노동 임금으로 적립식 펀드 넣지 말라는 이념만으로 접근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주의다. 우리가 얘기하는 양극화는 어떤 양극화 인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양극화인가? 목로의 주점에서 떠드는 양극화는 대게가 노동과 자본의 양극화이다. 하지만 그 양극화가 이념적으로 완전히 구분지어 질 수 있는 양극화인가? 양극의 2할을 제외한 나머지 6할은 자신의 사상을 규정하지 못하는 미성숙자들과 노동자이면서 자본가들이 모인 집단인 셈이된다.


5. 노동을 보호할 의지
그럴줄 몰랐던 현재의 정치적 지배계급이 급속도로 그들의 이념을 수정했을 때, 정반대로도 갈 수 없는 좌파 지지층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이며 어디인가? 비정규직 법안을 통해 곧 노동자가 될 계급들이나 화이트 노동자들의 무관심이 들어나면서 그들은 오로지 돈벌 기회만 궁리하게 되고, 그 궁리만을 하도록 모종의 강요가 있다는 점도 함께 간과해 버리면서 새만금과 대추리가 자연스러운 내용이 되버렸다. 이런 재료를 통해 이제 정부는 더 이상 노동, 인권을 보호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노동자는 더 먹고 살기 어렵게 되고 파괴된 환경의 더미에서 인권에 가차가 있을 턱이 없다.


6. 담백한 선택
더 이상 노동자의 지위를 온전히 보전해주지 못하는 지배계급,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고 미래를 영위해야 할 인권을 확대시키지 못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담백하고 솔직한 선택은 계급혁명 뿐이다.
또는 지지층이었던, 그 층에서부터 들고 일어 나야 하는 탄핵 뿐이다.


7. 현안을 바라보는 방법
일단 현안을 보는 교양의 문제다. 미국과의 관계가 사인하라면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 사인할때가 되면 사인하고 마는 태도로 보는 현안이 자유를 말하는 교양인가? 자본의 이해로 FTA 며 자본시장 통합에는 반응도 없던 이들이 거대 자본이 은행 하나 먹튀했다고, 또는 블로그 서비스 하나 인수합병 했다고 급작스럽게 성질을 내는 것은 과잉 민족주의와 다를바 없다. 통계적으로 현안을 파악하는 방법에 익숙할 수록 대중속에 숨는 방법도 가지가지로 빨라지는 법이다. 건강한 시선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가장 먼저 건강한 시선으로 통찰하는 방법은, 통계적으로 현안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좌파라면, 그리고 노동자라면 그렇다.
2006/05/03 21:14 2006/05/03 21:14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