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월드컵 스티커의 문구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월드컵 조형물에 부칠 계획이라고 한다. 스티커의 부제로는 '나의 열정을 이용하려는 너의 월드컵에 반대한다' 이다. 벌써 몇달 전 부터 인가? 이명박씨가 시청앞 광장을 SKT 에 팔아 넘기고 거대 자본이 서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시민들을 상업주의에 가둬버린 것이. 2002년, 온 나라의 붉은 물결이 네셔널리즘이다, 파시즘이다, 설왕설래 되는 이유가 그 광기의 거부감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파시즘인지 아닌지 정의하려는 정치적 수사 또한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순수한 응원 체계의 열정과 카타르시스의 분출이라는 의견은 솔직히 순수가 아니라 순진이라 봐야 한다.

스포츠 오락으로써의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집단 의식은 모든 사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치의 슬픔이나 고통 없이 월드컵에 열정을 폭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들 위로 태극기가 떠다니고, 그 안에서 대한민국의 하나됨을 꿈꾸는 것은 그 집단의 트래이드 마크인 전설, 신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라의 정치는 볼 것도 없다며 완벽한 체념으로 일관하고 서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는 자조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는 태극기 아래의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이 없는 상태, 신화와 전설의 몰입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언론과 거대 자본만이 가해자라는 견해에도 반대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오로지 언론의 조작에 의해 형성된다고 볼 수 없고, 거대 자본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본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의도하는 응원가를 부르는 온갖 상업주의를 동원했기 때문에  집단 의식이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니힐니즘이 면죄부일 수 없다. 이것은 그것을 원하는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태세의 상태가 그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온 탓이다. 대중들은 그 문화의 유행성에 편승하여 오래 전부터 자본이 준비한 몰지각의 행위를 해오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우시카를 스타벅스에 팔고, 체게바라를 패션에 팔아 자신만이 잘 살고 행복하면 되는 이기적인 웰빙에 종사하는 것이 사이 좋은 세상이란 관점을 스스로 관철시켰으며 이미 의식을 넘어 무의식이 되었다.

자본이 연계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 엮어낸 새만금과 강제 철거의 현장에서 홀로 죽어간 고 신현기씨, 생때 같은 두 어린 학생들을 탱크로 깔아 버리고도 의기 양양하게 다닐 수 있도록 놓아둔 우리 탓에 채 1년이 안되어, 그 땅에 기대어 밥 먹고 그 땅을 길어 책보고 공부했다는 우리가, 서슴 없이 미국이라는 우상에 내어준 대추리와 도두리, 죽을 것을 아는 몇몇 사람들만이 투쟁하는 한미 FTA 반대 운동에 어느새 월드컵에 쏟은 열정을 거둬들이고 무임승차할 무리들을 반대한다. 그러기를 원하는 권력과 자본의 이중논리인 월드컵에 온통 이성과 감수성을 빼앗기고 나면 한미 FTA 의 말도 안되는 1차 협상안이 타결될 것이다. 그것을 카타르시스 라고 하는 무리들이 그 다음에 쏟을 열정은 어떻게든 빠른 시일안에 미국화 되는 일 뿐이다. 미국쌀을 먹고 미국 신용카드와 이자도 없는 미국 은행에 계좌를 터야 한다. 타이레놀 한알에 10만원 할 날은 바로 코 앞이다. 그리고도 다시 4년이 지나면 정치엔 관심 없고 여전히 경제는 어려운 무리들이 다시 모여, 그 열정의 동어 반복을 자랑스러워할지 궁금하다.

2006/06/08 11:52 2006/06/08 11:52
DrunkenSTAR 이 작성.

버마 군부독재 정권인 SPDC(국가평화발전협의회)가 아웅산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연장했다고 합니다. 버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반민주적 독재 탄압과 폭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버마의 군부독재 정권이 사회주의 기반으로 일어난 쿠데타이지만, 반민주적 체제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정세에서 그들의 위치가 북한과 이란으로 대변되는 악의 축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축의 관점이 민중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적 정서가 기반이고 미국의 자유주의 확장 정책상 이란과 같은 선상에서 다발적 개입이 가능한 지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외교적 오만에서 비롯된 자유주의의 확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0년대의 남한과 1950년대의 베트남의 정치와 민족주의에 제국주의 군사력으로 개입했었던 사례는 오늘날 이라크 민중의 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진 일련의 과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남한의 해방전후 미군정은 하와이에서 민족주의 인사들에게는 배신자로 하지만 미국에게는 식민 노예근성의 숭미주의자로 낙인된 이승만을 끄나불로 하여 남한을 반공, 숭미체제로 전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남한에서의 성공은 남베트남 사이공에서 역시 미국의 끄나불로 고 딘 디엠을 내세워 친미 정권을 세운 정책으로 맥을 이어 갑니다.

데탕트에 이어 미국의 국익은 이념이 아닌 경제적 이익과 전세계를 대상으로 미군기지의 전략적 확보로 전환됩니다. 이라크 전쟁은 이미 잘 알려졌듯이 명분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한나라의 국익을 위한 반인간적 폭력의 산물입니다. 절대목적적인 경제적 이익 그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적 전쟁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미군기지는 현재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가 되었으며 이를 포장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확장' 만이 절대선인양 립싱크를 합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버마의 군부독재 정권이 민주주의 인사들을 억압하고 민중들에 가혹한 폭력을 가하는 중에 미국은 2003년에 버마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법(Burmese Freedom and Democracy Act) 등을 통과시키며 적극적으로 버마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재에 대한 이해관계적 변화의 조짐은 미국 내부에서가 아니라 버마의 한 북부지방에서 우연히 일어나게 됩니다.

지난 1월, 원유 6억배럴에 해당하는 천연가스가 발견되면서 버마의 독재정권은 가스개발과 수송을 위해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협력하기로 합니다. 이에 곤돌라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버마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 있을 예정임을 천명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여기에 동방의 충실한 숭미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한국에서는 미군의 전략적 운영을 위해 땅에 목숨을 걸고 사는 민초들, 보듬고 살아도 모자랄 민중들을 내팽겨치고 대추리 땅을 내주었습니다. 버마에서 어떠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대추리는 그 활용면에서 오키나와, 필리핀 미군 기지의 병참이 될 가능성은 이미 그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버마의 반민주적 사태에 대한 국제적 노력은 환영할만 합니다. 다만, 같은 고통을 겪었던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정부의 노력은 인도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자기내 땅도 전쟁준비를 위한 미군에 내주는 판에 버마 민중의 민주화와 평화의 갈망이 보일리 없을테지요. 어차피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에는 체념까지는 아니지만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행보에는 관심이 갑니다. 또 다시 이라크와 같은 포장된 제국주의의 명분을 동원하여 버마에 전쟁을 발발 시킬 경우에는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이라크와는 다른 양상으로 한국의 위치와 개입에 대해 심각한 판단을 요구받을 것입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국제사회의 노력은 버마 민중의 대다수가 지지하는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과 버마 북부에서 발견된 천연 가스를 무기로 핵개발을 통해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민중의 노동을 착취하여 군부의 이익만을 챙길 독재의 종식까지만 이어지길 바랍니다. 버마 민중의 해방과 함께 민중이 원하는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가난한 삶에 찌든 버마인들을 위해 천연가스가 씌여지길 희망합니다. 국제사회의 도움은 버마 민주주의의 회복에서 그쳐야 합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소련과 중공이 북한의 자치권이 그 민중에게 있으며 우리 민족은 그만한 의식과 제도가 있음을 즉각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미래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버마 민중의 승리를 위해... 말입니다.

국제민주연대 '버마가스개발대응운동'

마웅저와 함께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

Initiatives for International Dialogue

참여연대 '버마와 우리'
2006/06/02 11:56 2006/06/02 11:56
DrunkenSTAR 이 작성.

무슬림 후세인씨

2006/06/01 11:58 / 생활

이슬람교 서울 성원의 후세인씨는 우리말을 잘한다. 마침, 아스르(오후예배)를 끝내고 나오는 후세인씨에게 예배당 안을 구경시켜달라고 했다. 이슬람교의 사원을 영어로는 모스크라고 부르지만, 아랍어로는 마스짓이라 부르고 경건함을 기초로 하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신자들이 모여 사는 얘기를 하며 서로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하루에 예배를 5번하는데 예배에 걸리는 시간은 보통 5분 정도다. 마스짓에 나오지 않더라도 카으바(아담에 의해 건립된 제단,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으며 마스짓 내부의 예배 방향은 모두 카으바가 있는 쪽을 향한다.)가 있는 방향으로 각자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된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흔히 남녀를 차별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예배당에서 남녀가 예배를 보는 장소가 달라서 생긴 오해이거나 서방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교를 다양한 종교적 자유로 보지 않고 충돌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후세인씨는 말한다. 후세인씨는 예배당에서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보는 이유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예배간에 신자와 신자간의 간격이 비좁고 절 등을 하는 움직임이 많아 서로의 신체가 닿아서 생기는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서지 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고 한다.(그럼, 현실 속의 여성을 차별하는 부르카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 되어야 하나?) 게다가 다른 종교보다 휠씬 더 양성 평등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사람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지 않고 영혼 그 자체로 보기 때문에 젊음과 아름다움이 사라진 육체에 대해 감성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영혼 자체는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 한다. 특히, 성직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자와 하느님이 일대일로 만나 기도하는 종교라고 한다. 그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호메트는요? 그는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최초로 설교한 자이지 경배의 대상이 아니란다. 기도는 오직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지 설교자나 예언자에게 하는 의식이 아니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후세인씨에게 그 유명한 '후세인' 이라는 이름 때문에 난처한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 후세인이란 뜻은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사람' 이란 뜻이라며 그냥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금요일 설교 때 오면 좋다고 추천해주었지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토요일 아스르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뭔가 현실과 괴리되는 듯한 설명인데, 유일신을 믿는 건 이슬람이나 개신교나 마찬가지고 유일신의 숭배는 차별과 차이에 대해 정리가 안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슬람교 서울성원

2006/06/01 11:58 2006/06/01 11:58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