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상투적인 분위기만으로 뭉둥그릴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섹시하다는 쾌감의 영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대게의 경우 지적이란 분위기가 일치할 경우는 지적인 언어를 구사할 때이다. 지적인 언어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수사들의 집합이 아니라, 정확한 단어의 구사만으로도 지적 혼돈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정확한 단어의 구사는 팩트를 생산하기 위해 구상되는 논리에 의해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쾌감과 취미를 표현하는 구도 안에서도 어떤 단어를 구사하여 표현하는가에 따라 이 지적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오래도록 지식과 지성이 이루기 어려운 개인의 능력치로 간주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범위 안으로 종속되어 졌다. 따라서 지식이 있다고 판단되어 지는 사회적 척도로서, 학력이나 그러한 학력을 가진 사람과의 혈연, 지연의 관계가 사회적 합의를 결정하는 계급으로 인정 되어졌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보수적으로 말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속의 지적 인격체로 인해 그 지적이라는 판단은 모두 허구 였음이 드러 났음을 개탄하곤 하지만, 지식이라는 사회적 합의(이 부분도 그들만의 판단일 가능성이 높지만)의 허구라기 보다는 지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역사의 연속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식은 언제나 대게의 인민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끊을 수 없는 고리와도 같았다. 이러한 굴레에 백성처럼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민중적인 발현이다.
전통적인 지식의 무리가 반복해온 역사를 끊어 먹는 현대적 방식으로써 집단 지성이 화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를테면 지식이 통제하던 미디어의 메카니즘이 민중들의 통제로 헤게모니 이동을 감행하고 있는 현대적 현상이 바로 집단 지성이다. 공교롭게도 가장 진보적인 매체인 인터넷이 이러한 화두의 온상이 된 이유가 오직 네트워크의 필요라는 루소(언어의 기원)식의 계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책임으로 만들어진 공공의 지적 체계에 대한 존재 이유를 깨달은 의식이 현대적인 개인화나 익명성만으로 설명되어 질 수도 없다. 공공의 지적 체계는 자발적인 판단이 공동으로 집합되었을 때,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의식의 발전과 이를 그대로 메카니즘에 적용한 탄력적인 미디어의 역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판단되어져 온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 더 안전한 방식인 집단을 이용한 지적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이며, 지적 판단을 역사의 연속성상에 있는 인민 지배 계급에게서 분리시키려는 천천한 개혁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털어 Web 2.0 이라고 하고 네트워크의 법칙상 그 우주적 확장을 집단적인 어떤 형태로 묶으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작업에 대한 현실적 적용의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집단에 지성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아니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근본에 대한 회귀가 보수적인 접근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보더라도, 집단이 만드는 대중적, 공공적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는 데 있어서 구현되는 메카니즘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을 뿐이다. 지성이라 함은 더더욱 흥미롭다. 앎의 정의가 아닌 헤아림의 정의로 수많은 '그것' 을 '다름' 으로 통찰하게 만드는 것이 지성 아닐까? 이것은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두 가지 힘인 '동의'와 '반대'가 반복적으로 작용되어야 한다. 다수결은 이 판을 깨는 반민주적인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너무 오랬동안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졌다. 많은 사람들의 집단 지성은 메카니즘안에서도 반민주적이라는 결론이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한 자본은 인색하기 마련이다. 자본이 언젠가 민주주의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기에는 인간의 역사가 너무 숨가쁘기만 하다. 게다가 이념적 무장이 없는 민중들을 선동하는 정치 구호속에서 그 집단 지성이라는 혁신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집단적으로 동원되고 세를 과시하는 일련의 활동이 난무하는 광장에서 지성이라는 헤아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광장의 활동은 그대로 인터넷의 진보적 화두속으로 옮겨져서 상업주의와 쉽게 결탁해버린다. 이제 이 집단적 지성이라는 네트워크가 오묘한 인간의 이합을 통한 경험의 공개인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의도적 조작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 자본이 파괴하는 것이 더 이상 자연으로 한정되지 않은지 오래지만 의문은 허탈한 답을 내고 만다.
집단 지성, 참여, 공유 같은 한무더기의 정치적 속성을 뿜어 내는 Web 2.0 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한껏 부풀어 전진하는 신작로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아니 대중의 집단 이성이 이 개념적인 기술 진보에 하루속히 동참하기를 뽐내며 기다리는 해괴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인간적 가치를 투철하게 관념한다는 어느 나라에서 조차도 반민주적인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 의식이 부족한 민족에게 지나치게 빠른 기술의 구현은 재앙일 수도 있다. 더 잘 사는 것만이 관심사인 민족이나 대중에게 상업주의는 숭고하다. 자본은 이 냄새를 간파한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개인을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해서 가십거리도 되지 않는다. 더 잘 살려는 숭고(?)함도 없으면서 집단이 나서니까 어떤 헤아림도 없이 나서는 자들까지 합세해서 개인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작은 가십이 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 집단에 종사하도록 만들어지는 지나친 기술의 도입은 반드시 개인에게 명백한 재앙이 된다.
검색어 '2006/10'에 대한 10 개의 검색 결과
- 2006/10/31 집단 지성 의문 by DrunkenSTAR
- 2006/10/30 몇몇 게으름 by DrunkenSTAR
- 2006/10/26 여성성과 남성성 by DrunkenSTAR
- 2006/10/21 free hugs by DrunkenSTAR (2)
- 2006/10/20 안웃으면 슬프니까 by DrunkenSTAR
- 2006/10/18 구별 by DrunkenSTAR
- 2006/10/16 오름 by DrunkenSTAR (3)
- 2006/10/12 하는 꼴을 보면 볼수록... by DrunkenSTAR (1)
- 2006/10/06 원자력 비판 by DrunkenSTAR (2)
- 2006/10/01 오름 기행 by DrunkenSTAR
굳이 블로깅이 아니더라도 쓰는 일이 더뎌지면서 덩달아 읽는 일도 게으르다. 맑지 않은 머리속에 생각지도 않은 낯선 그래프가 요동치며 은유법을 잊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구석이 떨어져 나간 밀납 인형처럼 점점 머리속은 단단해져 가고 흉칙한 모습이다. 그나마 호흡하고 있는 생기는 그래프다. 세기가 오락가락 하는 싸이렌, 미래로 부터의 경고다.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기 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더딘 쓰기와 게으른 읽기 뿐만 아니다. 높은 하늘에 쭈그리고 앉을 수 있는 계단만 있으면 더 나은게 없다던 뼈들은 부실하게 삭아 가고 있는지 도통 움직일 줄 모르고 허리와 엉덩이에 의지하고 그냥 붙어 있기를 바란다. 쓰기와 읽기가 머무르면 반대로 사람이 하는 일이 지겨워지고 냉소하게 된다. 진보하지 않는 자들의 구석기적 머리속과 점점 주파수를 맞춰가는 공포를 느끼면서도 조용히 유감을 조롱하고 라면을 끓인다. 계란을 넣을까, 파를 넣을까, 둘다 넣을까, 인생이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된다.
하루만 게으르게 전화를 옆에 끼고 문명을 배달시켜 생체신호를 연장하기만 해도, 이 따위 신비주의에 침울해진다. 토인비가 그랬던가? 진보하지 않은 역사속에는 신비주의와 냉소주의만 있다고, 게으른 것들의 집합에서 깨달은 것은 인생을 요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조직하는 것과 집합은 다르다. 게으른 것들도 조직하기 나름이다. 담배가 떨어져도 사러 나가기가 싫어 하루를 금연한다. 2주동안 계획한 이발을 미루고 장발을 정리하니 유행 비스므리 해진다. 이런 조직을 하고 나니 한결 생산적이 된다. 다시 오늘 아침이면 지겨운 사회적 조직들과의 부대낌을 알면서 견디려면 게으름의 조직이 필요하다.
특히나, 모름지기 여성이라면?, 남자답게? 같은 성의 획일적 상태를 말하는 전통적 가치관은 다분히 태생적 확실함에서 비롯된 운명으로 받아 들여져야 했으나, 현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더 이상 성기의 다름이 전부가 아니다. 생김새의 다름으로 차별되던 사회적 구조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후천적 감수성에 주목해야 한다. 성기의 구별로 결정적 역할을 하는 평등의 과정이나 페미니즘의 입장도 제정리 되어야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다움이라는 전통의 수정이다. 남성이 가진 여성성에 대한 부정과 여성이 가진 남성성에 대한 부정은 오직 성기에 대한 오리엔티드 되어져 온 '무엇 다움' 의 구속이었다.
실은 전통적인 성의 감수성이란, 수렵과 사냥을 목적으로 한 밖으로의 남성에게 요구되는 힘의 상징이 호전과 폭력의 잠재적 능력으로 그 남성다움이 목적 달성을 하였고, 내조와 살림이라는 안으로의 여성에게 요구되는 복종의 상징이 겸손과 침묵의 잠재적 능력으로 여성의 여성성을 대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은연중에 덜 폭력적이면 남성성이 부족하고 덜 복종하면 여성성이 부족한 가치관이 존재하게 되기 마련이다. 소수자적인 트랜스 젠더의 경우는 더욱 더 심각하다. 성기를 바꾸는 경우를 비롯하여 두 남성이(두 여성이)한쪽의 감수성이 남성성이거나 여성성일 경우 형성할 수 있는 가정의 테두리가 성기가 다른 성별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고정적 가정관에 저촉된다고 말세를 논할텐데, 과연 가치관에 의하자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가지갖가지 단면들이 성기의 다름이라는 전통적 여성성과 남성성만으로 이해될 수 있겠는가?
폭력적인 남성성에 비하자면 여성의 겸손과 침묵의 미덕이 휠씬 낫다. 이것은 평화와 존중이라는 보편적 인간성과 일치한다. 하지만, 남한의 국민 대표라는 몇몇 여성 국회의원들에 의해 회자되는 여러 사실들은 여성성의 이런 미덕과 거리가 멀다. 평화와 존중은 고사하고 겸손이나 반성(침묵은 차제하더라도)은 금물이 된지 오래다. 피감기관하고 골프나 치고 다니다가, 원산상륙 운운하질 않나, 과학적이지 않는 질문에 과학적인 답변을 요구하며 마이크의 데시벨이나 올리고 있는 작태는 실로 여성성에 대한 심각한 제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여성은 그 성기의 같음에 따라 모두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에 따라 여성이거나 남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게젤 샤프트적인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다른 개인으로 부터 소외되고 자본으로 부터의 축출로 모두 힘들고 외롭다고 하지요, 한번의 포옹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입니다. 잃어버린 사랑과 희망을 찾는데 거대한 계시와 반성 보다는 한번의 포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Jason Hunter 가 Free Hugs 라는 싸인을 크게 쓰고 거리로 나가 어떤 젊은 여성과 첫 포옹을 시작한 2001년부터 시작하여 전세계적으로 Free Hugs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a free simple hug 는 두 사람과의 짧은 교감에서 따뜻함을 얻고 그 따뜻한 색깔로 주위를 물들이게 됩니다. 위의 시드니에서 펼쳐진 free hugs 캠페인 동영상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거대한 담론이 필요 없고 다른 인종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들이 서로 포옹하는 것만으로 다름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며칠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캠페인을 했다고 하는데, 공짜로 포옹해드립니다가 아니라 자유롭게 안기, 자유롭게 안아드립니다, 등으로 해석해야 될 것 입니다. 종종 본질을 스토리로 망쳐버리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안아드립니다고 하면 누가 게젤 샤프트적인 사회 아니랄까봐, 1인당 천원이라도 받으면 돈이 될꺼라며 찌질거릴테니까요.







북한의 핵실험으로 말미암은 갖가지 사태는 민족주의자들과 사대주의자들의 구별, 민족주의에 기댄 기득권과 이념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풀뿌리 민중을 구별 짓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핵에 대한 국제 정치적 논리와 수많은 민중들을 겨냥한 잠재적 위협이라는 못마땅한 구성을 이룰 수 있다는데 그 본질이 있다. 국제 정치적 논리는 미국의 집권 세력의 논리와 UN 안보리의 논리로 구별된다. 미국의 집권 세력의 논리는 우파, 메카시즘, 패권주의 논리이고 UN 안보리의 논리는 상호 보완적 중도 논리이다. 어느 것을 근거 삼는가에 따라 논리의 이념이 달라질 것이다. 국제 정치적 논리에 있어서 북한의 논리는 이유가 된다. 북한의 이유에는 국제사회의 패권적 이념에 대한 정성적 저항이 있을 테고, 갖은 제재에 대한 정량적 논리가 있다. 북한의 이유는 미국의 논리와 UN 안보리의 논리에 의해 국제적으로 묵살된다. 생명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받고 있는 남한의 논리는 미국의 논리와 UN 안보리의 논리에 상호 보완적 중도가 된다. 이 지점에서 생명은 정치성은 띤다. 남한의 제일야당이라는 집단에서 이러한 중도 논리에 휘잡혀 전쟁 불사의 발언을 공공연히 함으로서 일개 민중들의 생명은 지척 간두에 놓인다. 논리가 생명을 먹는다. 북한의 이유에 대해서 담론은 있으나 대화는 없다. 북한의 이유에 대한 담론은 남한과 미국이 암암리에 밀약한다. 남한과 대화를 해봐도 남한은 미국에게 확인을 받는다. 되는지 안되는지. 북한의 이유는 이러한 확인 절차가 주체와 맞지 않는다. 북한의 주체가 국제 민족의 개별적 자유와 다르지 않다. 남한은 그것을 자주라 부른다. 자주가 없는 나라와, 비롯 민족은 같아도, 대화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 북한의 이유는 민중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북한을 북한으로 인정하길 원하는 주체의 발현이다. 결제서류를 들고 결제를 득하는 자가 아니라 결제를 하는 자와 대화를 원한다. 이러한 대화는 미국의 악의 축 정책과 남한의 끄나불에 의해 번번히 저지 당한다. 관심을 끌기 위한 적절하고도 강력한 대응이 북한의 이유 되겠다. 남한의 무능력과 미국의 패권에 대한 경종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민중은 동지로써 생명을 위협받고 있고 생명을 잃고 있다. 북한은 응당 핵무기에 대한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남한은 그보다 더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쟁 불사를 호도하는 기득 야당의 불순분자들을 제거하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민중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이상한 자들과 민중들의 구별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북한 핵실험 이후에 남한의 정부와 국회가 보여준 행동을 보면서도 남한 민중이 생명과 안전에 대해 불감해 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상이다. 정부는 해봤다고 할 수 없는 햇빛, 포용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변경 또는 폐기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으며, 국회는 늘 그랬듯 도대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지 조차 불감하게 만든다.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핵문제에 대해 늘 그랬던 방식으로 치고 받는 통에 무슨 북핵 관련 결의안 조차 합의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남한의 국회는 민주적 대의 정치라는 철학과 이념의 장에 존재하는 합의적 근거를 만들지 못하는 집단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의 합의란 언제나 밀실이거나 원외 협작이었고, 공개적 본회의의 총체적 공간은 논의의 장이 아닌 싸움질과 의사일정에 따라 춤추는 의사봉의 공연 무대가 되었다. 오늘 또 회의시간에 늦게 오고, 늦게 왔다고 질타하는 의장하고 싸우고, 퇴장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늘 그런 공연을 펼쳐 주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민중들은 당연히 외적인 핵문제, 게다가 미국의 패권주의가 이번 사태에 미칠 결정적 영향과 내적인 국회의 형편 없는 늘 그런 공연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성을 주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특별히 대담한 민족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든든한 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민중의 불감을 민중의 무지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불감은 무관심과 더 관련이 있다. 혹자는 이러한 불감과 무관심이 있기 때문에 민중 혁명은 죽었다는 얘기를 한다. 일리있는 우파적 통찰이다. 하지만, 불감과 무관심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영위되는 것은 아니다. 민중들의 움직임 없이 발전하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관심 없고 감정 없는 민중들이 영위하고 있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군가가 꾸려 나가게 해준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대체로 무엇을 어떤 것으로 승화시키는 역사적 두가지 힘인 동의나 비판이 배제 되기 일쑤다. 남한의 정부와 국회의 장을 보면 금새 그 예가 된다. 오직, 민중이 납득할 수 없는 협작과 절차적 의사진행만이 있을 뿐이다.
진보에서 조차도 계몽이라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한다. 하지만, 결국 지식인이 또는 사회적 리더라는 자칭 타칭의 개인과 집단이 민중들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줘야 하는 것은 계몽 그 자체가 아니라 계몽의 스킬이다. 이러한 스킬은 하향 방식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 내고, 미국의 용감무쌍한 패권주의를 자제시키고, 일본의 분수 모르는 신사참배를 주의시키는 일련의 노력들도 해당된다. 언제까지 스킬은 없고 패배주의에 현혹되어 미국의 똥꼬나 간지럽히고 있을텐가? 하지만, 남한의 집권세력과 국회를 보고 있으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저자들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계속 믿어야 하나...
체르노빌 사고가 있은지 20년이 되었다. IAEA 에서는 겨우 50명 정도가 당시 즉사 했고 이후에도 갑상선암으로 4천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민간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보다 천배에 가까운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길이 없다. 다만, 체르노빌 사고는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원자력에 대한, 핵에 대한 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기억하고 있다는 자체에 대해 바햐흐로 의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기억하는 것이 일상일 수는 없지만, 피폭에 대한 후세기적 역사에 있어서 체르노빌은 히로시마와 비견되는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이에 대한 경중은 사뭇 다르다. 구소련 키에프시에서 발생한 이 사고로 피폭 영향지역에 있는 7백만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히로시마의 사람들과 같은 동정을 보내는 이는 별로 없었다. 다만,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지역에서 발생한 크나큰 피폭 사고로 인해 전력 생산에 활용되는 원자력에 대한 공포마저 심화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기의 원전이 있다. 원전은 해마다 증가하여 10년후에는 30기로 대폭 증가될 전망이다. 전력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원자력 만큼 효율적인 자원도 없는데다가 개발논리에 따른 전력 수급에 있어서 원자력에 대한 비판은 설 자리가 없다. 핵폐기물의 처리에 대한 근무자와 지역주민의 영향에 대해 오직 정치적인 논리만이 작용하고 있다. 장치에 대한 운영적 사고의 가능성은 이러한 정치와 개발 논리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일부 주민조차도 핵폐기물의 영구적 확산에 대해 관대해하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정보의 부재에 의한 무지로 밖에 볼 수 없다. 피폭은 단 시간내에 사망하는 재래식이 아니라 가능성을 상존시키는 항구식 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별도로 만들어지기 전 원자력 발전을 담당했던 한국전력공사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실시했던 국내 원전 근무자와 주변 지역 주민 역학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미 10년 전인 1995년에 100mSv(밀리시버트) 이상의 누적 노출량을 보이는 노동자가 135명이나 됐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체르노빌의 경우 1000mSv 의 방사능이 노출됐다.
원자력으로 인해 한반도는 내적으로 원전, 외적으로 북핵 위협으로 공포에 휩사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의 핵보유와 핵실험 위협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반응은 당연히 반대다. 하지만, 국제 정치적 입장에서 미국이 행사하는 불합리한 차등 적용에 대해서도 응당한 반대의 입장을 천명해야 한다. 북한의 핵보유 및 실험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불쾌하기 이를데 없다. 동북아에 대한 최종 방위선을 일본으로 두고 있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정치, 외교적으로 북한 만큼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동북아 균형국이 있을까 싶다. 중국과 중동을 견제하기 위한 인도와 이스라엘의 핵보유에 대해서 관대하고 지원적인 미국의 논리는 북한이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남한의 핵보유는 반대하는 상반된 구조를 견지하고 있다. 북한을 어떤 체제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에 있어서 악의 축은 비단 북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한반도 전체에 대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억지력은 없고 매파적인 남한 사회를 핵의 유무로 안보, 공안적인 상황으로 쉽게 몰아 넣을 수 있다는 발상과, 더불어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 행사를 감행해도 한반도 전체에 대한 군사적 유연성이 결코 미군의 투입이 아닌 미군의 철수였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핵에 대한 가시적 위협이 북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아오모리현 롯카쇼무라에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건설하고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로 핵폭탄을 만들 때 2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주지 시키고 있다. 현재 일본은 핵무기를 단 60일안에 보유 할 수 있는 잠재 보유국이다. 물론, 미국은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핵은 그것의 사용이 현재를 윤택케하기 위한 에너지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종말이 될 현재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의 용도가 무기라면 더더욱 빠른 종말의 시작일 것이다. 관리 가능한 모든 투철함의 관리란 미국의 핵관리 정책은 허울 좋은 상상력이다. 자신들만이 가능하다는 핵의 우월 논리가 국제 정치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진보세력이 미국에 의한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대한 이유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 쳐 놓은 핵 우산은 핵으로 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핵이 폭발하여 피폭을 당하는 범위임을 알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행형으로 남아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점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핵 우산, 내부의 사고 또는 북핵의 위협으로 인해 피폭이 있다면 체르노빌 처럼 20년이 지나도 아무도 그 고통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산업부 송의달 기자 같은 비참한 관점은 가지지 말자
해안선은 볼만큼 본 것 같은 거만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8월에 처음 방문했었던 김영갑 갤러리의 환상적인 오름의 파노라마가 아주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오름에 올라 거창스럽게 뭘 얻겠다느니, 삶이 어쩌구 저쩌구 진지하게 고민할 생각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다만 3박4일의 짧은 일정동안 오름 여섯개(용눈이 오름, 새별오름, 따라비, 아부오름, 다랑쉬, 가메옥) 쯤은 오르겠다는 계획정도가 전부였다. 오름은 오르는 것보다 입구를 찾는게 더 힘들다는 유경험자의 충고는 첫날 부터 격언이 되었다. 김영갑 선생의 오마주인 용눈이 오름은 중산간을 가로지는 16번 도로에 연에 있는데다가 친절하게도 용눈이 오름 이란 돌명패까지 세워져 있어서 가장 손쉽게 찾아 오를 수 있었다. 가파르지도 않은데다가 상냥하기까지한 오름의 곡선을 따라 중간에 한번도 쉬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김영갑 선생이 오름의 아름다움을 담는데 파노라마 기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믿음은 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15미리 화각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부드러움에 한숨이 나왔다. 35미리나 50미리로 디테일하게 촬영하는 것은 오름의 태생적인 곡선을 잘라내어 지층에서 쏟은 내륙의 산과 평등하게 만드는 작업임을 깨닫게 한다. 특히 용눈이 오름처럼 정상에서 다양한 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오름에게는 치명적인 잘라내기가 된다. 멀리서는 잘자란 잔디처럼 보이는 초원은 거칠고 말과 소의 배설물 투성이 었다. 요리조리 피해 올라가도 어디 한군데 편히 앉을 곳이 없다. 삼각대를 펼치고 낮은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대체로 구름이라는 예보는 제주도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비가 올 수도 있고, 구름이 말짱히 걷힐 수도 있다. 다만, 지속되는 시간이 문제인데 오름 여섯개를 오르겠다는 계획이 발목을 잡는다.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도로에서는 몰랐던 바람이 으슬으슬 춥다. 어떤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높은 구름을 가리고 있는 낮은 구름이 한라산 쪽으로 밀려 올라 갈 수 있도록 해풍이 좀 더 불어줬으면 좋겠고, 이밥 태운 연기처럼 아랫 마을을 온통 덮고 있는 안개도 증발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내내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다.
두번째 오른 오름은 아직도 미스테리다. 아부오름이라고 생각하고 올랐으나 아부오름의 특징인 굼부리에 하트모양의 전나무 숲이 보이질 않았다. 용눈이에서 아부오름 방향으로 가다가 아부오름을 지나치고 착각을 했으니 칡오름이거나 민오름쯤으로 추측만 할 뿐, 여전히 아부오름은 아니다. 굼부리 주위를 솔나무가 곰보처럼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고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용눈이 오름에서보다 제법 시원하고 재잘거린다. 풀벌레 소리 보다 바람이 먼저 얘기를 걸고 지나치고 다시 다른 바람이 와서 전혀 새로운 얘기를 부치고 사라진다. 하늘을 쳐다본다. 바람은 구름을 밀어낼 얘기는 하지 않는 듯 했다. 도리어 성산쪽을 둘러 싸고 있던 구름 뭉치마저 중산간쪽으로 천천히 몰려 오는 듯 했다. 결국 아부 오름은 찾지 못했다. 용눈이 오름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고, 그 이름모를 오름에서 내려와 농로를 잘못 타고 들어가는 바람에 길을 잃고 헤맨 시간까지 해서 다른 오름을 오르기엔 무리였다. 구좌읍에서 어떤 농로를 가로 질렀는지 모르겠지만, 벗어나고 보니 표선면이었다. 점심을 김밥으로 해결한 탓에 당케식당의 전복죽도 간절했지만, 일단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따라비의 위치와 입구 정도만 파악해놓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따라비는 표선면 가시리 산 62번지이고 표고 342 미터, 오름의 할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그 자연미가 빼어난 곳이다. 하지만, 입구는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편치 못해 당케식당의 전복죽도 잊어 먹고 애월로 돌아와 버렸다.
마음이 급했다. 아부오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송당리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부오름을 앞오름으로 표시해 놓은 것을 알았지만, 입구라고 생각한 곳은 목장 입구였고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오름 주위를 몇차례 돌아 봤지만 도로는 점점 오름과 멀어지기만 했다. 목장 입구 건너편의 작은 농로를 따라 들어갔다.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는 길이 나왔다. 장비를 챙기고 숲을 걸어 올라가기로 작정했다. 가지런히 농로를 따라 둘러쳐진 삼나무 숲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오름을 가리고 버티고 있었다. 숲을 따라 한참을 걸었지만 뚫고 갈만한 오솔길 조차 내주질 않았다. 숲 건너에는 키만한 억새풀이 모험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 흔들거렸다. 삼나무 숲을 간신히 지나고 삼각대를 꺼내 억새풀을 휘젓자 마자 꿩 한마리가 푸닥거리를 했다. 간신히 지나왔다고 생각했었던 삼나무 숲을 달음질로 건너오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부오름이 저항을 하고 있었다. 나약한 도시인이란, 저항을 인정하는 것도 빠르고 쉽다. 아무렴 자연인데, 저항한다는데, 아직 오름이 많다, 합리화는 지적활동이 아니라 자기 위로다. 모험심은 더더욱 아니고... 카메라와 랜즈도 놀랐는지 여기저기 글킨 자국이 보인다.
다랑쉬 오름은 비교적 쉬웠다.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장비를 오르 내릴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았는지 계단이며 잡고 올라갈 수 있도록 밧줄을 당겨 놓았다. 그래도 하필 이렇게 경사가 가파른 쪽에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힘에 겨웠다. 마지막 50여 미터를 남기고는 뒷굽이 바닥에 닿질 않아 거의 까치발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다랑쉬 오름은 높이 만큼이나 굼부리의 깊이도 상당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면 동쪽으로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중산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날씨는 여전히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대체로 구름, 정확한 예보였다. 안개는 오늘도 새끼들을 낳았는지 마치 연못에서 뿜어져 나온 는개를 광불케 했다. 뭉쳐라 뭉쳐라 바람을 협박에 보았으나 굼부리 안에서 소용돌이 칠 뿐이었다. 다랑쉬의 굼부리 에는 돌탑 몇개가 쌓아져 있었다. 사람이 오르 내린 흔적이 있었지만 내려가진 않았다. 저 아래 깊은 바닥이 왠지 무덤처럼 보였다. 4.3 사건때 민간인들이 오름 굼부리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학살되었다는 얘기가 진동되어 떨려 왔다. 삼다도, 눈물이 뭉쳐 만든 바람이 많고, 선지피가 마르고 엉켜 붙은 검은 돌이 많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여자들이 많고... 그래서 삼다도라... 세월이 변해 이제 그 정상에서 칼라풀한 패러글라이딩을 한다. 나처럼 혼자 여행 온 니콘 유저가 삼각대를 펼치고 촬영 준비를 한다. 그와 날씨 얘기며 오름 얘기를 하다가 다랑쉬 오름 앞에 있는 아끈 다랑쉬 쪽이 일품이긴 한데 날씨가 이런데다가 한 두사람 오르는 사람도 없어서 좀 심심하다는 시덥지 않은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내려갈 참인데 내가 아끈 다랑쉬에 오를 테니 찍어 보라고 역시 약속 같지 않은 인사를 하고 서둘러 내려 왔다.
아끈 다랑쉬, 다랑쉬 오름의 동생 겪인 이 오름은 높이며 곡선이며 굼부리며 보잘 것이 없다. 다만 아끈 다랑쉬의 정체는 풀벌레 소리에 있었다. 얕으막한 초원 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따라 풀벌레 소리가 눈을 감게 만든다. 새근거리는 중단 없는 홀림으로 모든 소리 조차 유혹하고 만다. 사람의 귀는 그저 대책 없는 포로가 된다. 드문드문 떠 있는 개망초꽃의 머리를 손바닥에 스치며 걷다 보면 곤드레 만드레 취한 파열음이 저도 모르게 입안을 맴돈다. 등산로가 없는 오름 그대로의 소리가 들린다. 아끈 다랑쉬 오름에서 굳이 사방을 둘러볼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매년 들꽃 축제가 열리는 새별오름은 제주도의 오름중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른다. 그 유명세 때문인지 허름하지만 오름 입구에 관광단지도 자리잡고 있고 주차장도 있다. 축제는 10월말이다. 지금은 입구에 방목하는 말들이 진을 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은 5시30분, 표고 519 미터로 꽤 높고 중산간에서 벗어나 애월읍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비교적 서쪽이라 일몰 시간을 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구름이 문제여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직 축제까진 한참 남아서 인지 길이 있음직한 곳에 키만한 억새가 온통 뒤덮고 있었다. 밀림용 장칼 따위가 있을 턱이 없고 무턱대고 손을 내저으며 걸어 갔다가는 거미줄에 구속되고 만다. 작은 나뭇가지를 앞장 세우고 걸어가면 그나마 거미줄을 걷어 내는데 도움을 준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새별오름 정상을 오르지 못한 이유는 야생 노루 때문이었다. 키만한 억새풀 숲에서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뛰어 다니더니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며 주위를 떠나질 않는다. 제 영역이란 것을 알릴 참인지, 그 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질 않았다. 새별오름에서 두려움을 가진 것은 내 다리 밖엔 없었다. 한발 한발 억새풀이 꺾이는 소리가 날 때마다 펄쩍펄쩍 뛰어 다니다가 괴상한 소리를 내고 몸뚱이는 보이질 않는데 가까운 숲이 흔들거렸다. 노루의 사냥감이 된 듯한 서늘한 느낌을 받아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역시 아부오름의 저항에 순응했던 것처럼 새별오름의 거샌 저항에 힘 입어 중턱에서 아직 덜 자란 억새를 촬영하는 것으로 오름 기행을 접었다. 며칠후엔 수천명의 사람들 때문에 어차피 제 자리를 내주어야 할 참인데 나까지 나서서 휘둘러 쫒아 보낼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내 자리에 안주해 왔을 때가 있었고, 남의 자리를 새로운 것이란 허울 좋은 핑계로 차지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자리거나 처음 발견한 것은 없다. 자연이 있었거나 사람이 있었거나 했을 터, 그 자리를 차지 했을 때거나 이처럼 잠시 방문 했을 때에 조차도 경외하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자리는 이미 자연이나 사람이 견뎌낸 시간과 역사가 있을 테니까...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