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2007/10'에 대한 9 개의 검색 결과
- 2007/10/30 분노 by DrunkenSTAR
- 2007/10/28 회사가 사라졌다. by DrunkenSTAR
- 2007/10/24 파병연장? 이 시덥잖은 소리에 대해.. by DrunkenSTAR
- 2007/10/23 이중섭선생을 추모하며 by DrunkenSTAR
- 2007/10/17 레닌의 노래 by DrunkenSTAR
- 2007/10/13 종전선언 추진과 텍스트적 시각 by DrunkenSTAR
- 2007/10/11 나쁜 사람 by DrunkenSTAR
- 2007/10/11 국가관 by DrunkenSTAR
- 2007/10/05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재인식 by DrunkenSTAR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자이툰 부대의 파병 찬성론자들, 이른바 군대조직의 향수에 젖어 사람 모이는 곳이면 그 시절 그 영광의 군복을 입고 등장하는 사람들, 목적에 따라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전쟁옹호론자들, 미국의 정책이라면 그것이 제국이건 테러 응징이건 무조건 옳은 친미주의자들, 공산괴뢰와 싸워 민족과 겨레 따위를 지켰다고 생각하는 반공주의자들, 그들의 단단하게 고정된 무지의 영혼을 용서한다. 어른이라 할 수 없는 구린 주장의 늙은이들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군대 불가피론 나아가 전쟁 불가피론에 막연히 수긍하는 젊은이들의 안락한 영혼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다. 구리고 낡은 머리에서나 가능한 주장을 단지 군대 갔다 온 엽전 생각에 기대어 펼칠 수 있는 용기라면 참으로 가상하다. 겨우 본전 생각이라니, 군대가 있어서 나라가 온전하다거나 공산주의로 부터 보호된다거나 전쟁을 억지할 수 있다는 해묵은 근거로 부터 시작했다면, 더 나아가 군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고 그 하나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훈련 받은 집단이란 것도 근거가 된다면 정작 군대가 있어 서로를 위협하는 것으로 부터 세상의 부조리가 생긴 점은 간단히 간과되지 않았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저런 가당치 않은 논란에 간단한 질문 몇개 던져 보자, 전쟁, 군대, 파병 옹호론자들에게 묻는다, 전쟁터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인간의 육체도 옹호할 수 있는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정거리가 몇이내 하는 그 잘난 폭탄 하나에 뼈조각만 남는 것도 옹호 대상인가? 같이 피난 가던 부모나 제자식이 그 조그만 총알 하나에 풀썩 쓰러져도 옹호 대상인가? 이런 상황은 동의할 수 없으나 군대는 필요악이고 전쟁은 목적에 따라 벌일 수 있다고 행여 경우 없는 논리일랑 집어 치우길 바란다. 젊은 영혼이라면 비상시국부흥회용 집단 주입식 관점과 상식과 지극한 보편에 대해 구별은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남는 것이 결국 국익.(도대체 이 국익이란 걸 누려 봤으면 좋겠다, 어딨는가?) 자이툰 파병 연장을 천명하는 대국민담화가 국익과 한미동맹의 깊은 고민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데, 그러니까 한 1년 더 파병하면 중동에서 남들 보다 싸게 석유를 끌어 온다는 얘긴가? 미국이 혈맹도 모자라 소울메이트 협정이라도 맺어 준다는 건가? 그러니까 몇몇 기업의 재건 이익이나 아주 오랜 후에 나타날지도 모를 국익을 위해 군대를 파병해야 한다는 것인가 말이다. 군대는 전쟁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훈련 받은 조직인건지, 국익 선봉대인지, 중동에 파견된 비정규직 근로자인지, 도무지 좌파신자유주의자한테는 끝까지 정체성이 없구만.
사실, 오늘날의 위작은 위작 자체의 논란을 비켜갑니다. 위작 자체에 대한 검증은 차라리 순진합니다. 예를 들어, 사본인줄 모르고 또 사본을 배껴서 나온 것은 사본의 사본인지, 비록 사본이지만 사본 자체가 사본의 사본에게는 원본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지 아닌지 판별도 안되기 때문 입니다. 즉, 어렵사리 사본이라 또는 위작이라 판별해도 그것이 원본의 위작인지 위작의 위작인지 알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기계적 사본과 달리 위작은 예술의 경계와 아주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작은 사본처럼 널리 공유하는 기계적 기능만을 함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즉, 윤리적이며 상업적인 목적입니다. 예술적 윤리는 일단 버려야 상업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윤리는 합목적적이진 않겠습니다. 일단 위작이 만들어지면 위작을 간직하고 혼자 감상하며 나름대로 감흥을 받는 것이 아닐테죠, 그렇다면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일단 위작은 논란을 비켜서 목적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유통 과정을 거칩니다. 상업적인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상업적인 유통을 거쳐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 내는 과정, 즉 위작의 세탁 과정을 거치게 되있습니다. 이때, 이 믿음에 가장 훌륭한 조력자는 위작의 배포자 뿐만 아니라 원본에 비과학적인 신념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원작자의 가족이거나 원작자를 대표, 대변할 수 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측근이라면 이 조력자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박수근과 이중섭선생의 위작 논란이 있던 작년 가을께, 제주도에 남아 있는 이중섭선생의 셋방에는 여전히 서귀포 섶섬, 그 너머 가족이 살고 있는 일본을 바라보는 이중섭선생의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섭선생의 평생 꿈은 가족과 함께 소박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는지요? 이중섭 미술관에 가보면 이 애틋함으로 절절한 편지로 인해 사뭇 그리움과 소의 깊은 눈망울이 닮아 있다는 것을요. 이중섭이 이쁜 소에 반해서 소를 그렸다는 단순한 동기가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제주도에는 이쁜 소들이 많습니다. 방목하여 생긴 그 이쁨과 이중섭선생의 삶은 아주 달랐지요.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으로 당하고 결국 적십자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중섭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그저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정도. 대신에 위작논란, 경매장에서 수억원에 거래 쯤이 오늘날 우리가 만든 이중섭선생의 스탠스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 검찰은 이중섭선생 뿐만 아니라 박수근선생의 작품 2천8백여점이 모두 위작이라고 판명했습니다. 여기에는 이 위작을 배포한 정황이 있는 김용수씨와 조력자로서 공모한 정황이 있는 이중섭선생의 아들 이태성씨가 끼어 있습니다. 박수근선생과 이중섭선생이 서양미술사의 폴고갱이나 반고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국미술의 패트런이라 할 수 있는 김용수씨, 이중섭선생에 관한한 그 누구보다 애정 어린 사무침을 가져야 했을 아들 이태성씨가 "호당 얼마"의 서글픈 상업주의에 복무한 결과입니다. 예술? 이것도 이젠 가격 입니다. 세계적으로 가격이 비싼 작품을 내걸고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야 말로 문화적 유희인양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태도가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위작 입니다.
레닌의 노래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미 육군대장
마크 W.클라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
김 일 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 덕 희
포로교환문제로 교착상태 있던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아이젠하워 취임, 스탈린의 사망으로 포로교환문제에 돌파구를 열고 1953년 7월27일에 판문점에서 마크 W.클라크, 김일성, 팽덕희가 서명한 한국 전쟁의 정전에 관한 협정을 조인합니다. 당시 남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불사하며 정전협정 조인을 거부합니다. 이승만의 이런 몽니와 북진통일론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 부터 한미상호조약을 이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만, 이승만의 서명거부로 인해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끈 '3자, 또는 4자간 종전선언 추진' 에서 그 당사자에 대한 논란은 사실 중국이 아니라 남한의 소외 내지는 남한을 염두에 둔 것 입니다.
창비논평을 통해 이남주 교수가 주장한 '3자 혹은 4자의 종전선언 추진, 중국이 섭섭할 일만은 아니다' 는 마치 남한은 당연히 종전선언 대상자로 규정하고 중국에 대한 외교적 건설적 사고 전환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 인용한 중국 관계자의 발언, 즉 "유감 이상의 것"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발언은 중국정부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보도를 근거로 중국정부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중국의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인정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냉정하게 판단하면 중국이 섭섭해할 일만은 아니다.]
국가간 계약에 준하는 협정은 개인간 또는 법인간 계약의 조항과 단어보다 높은 단계의 법적 근거를 가집니다. 흔히 신의와 성실로 계약을 이행한다는 정성적 조항이 들어가는 개인, 또는 법인간 계약서에도 계약서를 날인하지 않은 당사자가 감내라 밤내라 훈수 둘 수 없는 것은 상식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거와 대상의 상위 개념이 존재하는 국가간 협정에 당사자로서 법적 지위가 없는 3자가 협정의 선언적 효력상실을 논하는 것은 유아적이지 않는가라는 점 입니다. 감성적으로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북한의 신의와 남과 북이 한 테이블에서 서명한 남북공동성명의 당사자라는 것 만으로 북한이 남한을 종전선언 당사자로 인정했고, 국제사회도 이의가 없을 것이란 발상은 그야말로 추측과 낭만적 접근에 불과한 것 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남주 교수의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적 중국 역할은 그 자체가 감정적입니다. 논평에 의하면 논의와 선언을 따로 분리하여 궁극적으로 포럼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단계임을 주장하시는데 논의와 선언의 당사자가 바뀐 국제회의나 사적회의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할 포럼의 목적이 종전선언이라면 4자 였을 경우 남한이 현실적 당사자가 될 수 있겠지만, 3자 였을 경우 남한이 낄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물론, 사실상의 정전위원회가 북한의 도발로 그 기능을 상실했고 1994년 중국도 정전위원회에서 무단 철수한 것을 들어 3자일 때 중국을 종전선언 당사자에서 제외하는 것도 무의미 합니다.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선언을 통해 텍스트를 쓰고 지우는 행위는 염연히 다른 것이지요. 이 문제는 너무나도 명백한 텍스트적 역사여서 이견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한미FTA 나 NLL 에 관한 논란도 마찬가지 입니다. 먼저 텍스트로 쓰여져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나서 유권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유권적 해석도 직접 당사자간 합의나 사회적으로 공인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민주주의적 협의체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한미FTA 에 개성공단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개성공단 생산품은 메이드 인 코리아로 수출될 수 없는 것 입니다. 이것을 두고 포함되어 있네 없네 라며 논란을 할 깜이 안된다는 겁니다. NLL 은 육지의 군사분계선에 준하는 영토선이라는 단어로 규정한 협의문이 없다면 모두가 자의적 해석일 뿐 입니다. 이것은 잘못 정해진 총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떤 각론도 논리적이지 않아 난독증을 유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전동화가 아닌 다음에야 텍스트로 쓰여졌고 그것을 증명한 당사자의 서명까지 존재하는 역사를 그럴리가 없거나, 그럴수는 없다는 감성적인 태도로 접근하게 되면 우격다짐만 늘어나기 마련 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남주 교수가 주장한 것 처럼 정전협정이나 정전위원회보다 더 높은 정치적 합의체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를 일 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호한 주장을 통해 당연히 남한이 종전선언의 당사자라고 믿게 되는 민중이 많아 진다는 것 입니다. 꽃다운 젊은이들로 구성된 남한의 군대가 남한의 사령관이나 국군 최고 통수권자의 이름으로 평시에 작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도 불과 몇년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전시에 남한의 젊은이들은 미국에 의해 움직여 집니다. 남한의 젊은이니까 당연히 우리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것이 바로 낭만적인 현실시각 입니다. 지식인이라면 명백한 역사를 논해야지 정치적으로 해석 가능한 것들을 유념해서 역사를 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남주 교수의 3자 혹은 4자의 종전선언 추진, 중국이 섭섭할 일만은 아니다 는 주장은 유감스럽습니다. 우리는 정전협정의 대상자가 아니고 아직 까진 종전선언을 할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간 안창호씨를 전두환씨와 같은 종족으로 둔갑시키고 매춘업소에서 여성을 잘 고르는 방법에 대해 사회적 고참의 충고를 아끼지 않으신 그의 립서비스로 인해 웃으면 복이와요식 정서적 효과를 받았다. 자포자기는 하지 말아야 겠지만, 고매하신 반공주의로 무장하고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되고 싶은 수많은 교수 추종자들과 모종의 모의를 한 결과, 개신교 내지는 사학법의 간섭에 알레르기를 보이는 반공친미주의자들이 운영 할 300여개의 자립형 사립교라는 이름의 상점을 만들어 열심히 일하면 대형 상점의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포고를 내리셨다. 이것이 열심히 살기만 하면 개천에서도 용 난다는 정책이다. 협회는 싸우고 감독은 갈리고 연습 시간은 없어서 별 수 없이 가랭이가 찢어지도록 달렸지만 결국 진 축구팀은 정신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계급이라면 공산주의 사상이라며 치를 떠는 그의 추종자들이 시장계급은 어쩔 수 없단다. 왜냐하면 시장이 하는 일은 자유로워야 하고 보이지 않는 손만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인 즉, 눈에 보이는 개미떼가 아니라 먼발치에서 개미떼들의 일렬행진을 관망하며 한달에 천만원 이상 금융소득을 올리는 7700명 안에 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못한 인민들은 자신의 일개 노동이 얼마나 숭고한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대 담론에 매몰되어 한순간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채지 못하고 무지를 대물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기를 사람이라면 "가난한 집 똘똘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의 길이 열리는 정의로운 교육시스템" 의 실현이 생산성 경쟁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성찰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이유가 존재하는 기성, 반공 친미세대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유가 과연 가난에만 있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인데다가 그리하여 가난만 해결되면 교육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만 같은 있지도 않은 종말론식 낙관은 절대 금물이다. 시장논리에서 가난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교육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잘 생각해 보시라, 가난을 대물림 한 것이 아니라 무지를 대물림 했고 그 무지가 지속되는 한 로또 아니고서는 처지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장주의자들이 원하는 것, 그것은 민중의 무지다. 권력하기 좋은 지속 가능한 무지의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현정권이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대의 반봉건적 정권이던 "경제 양극화, 교육 양극화, 공교육 황폐화로 서민들의 한 가닥 희망" 마저 빼앗았기 때문에 교육은 더욱더 공적 장치가 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시스템이란,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익 추구를 위한 사립학교상점에 들어가서 시장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시장에서 정의란, 인간 됨됨이가 아니라 돈의 양에 따라 존경과 비하가 결정되는 정의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 제대로 알고 있을 그는 뻔뻔한데다가 참으로 나쁘다.
해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 였는가? 오늘날 폭주족만이 널리 기리는 해묵은 해방 의미는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의 모든 부조리를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왜 통일을 하지 못했는가? 우리는 왜 매사 정치적 거대담론에서 반미, 친미의 신체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작금의 글로벌시대에 문화적 니뽄주의가 친일과 무슨 상관이며 친일, 친일파는 진부하다 못해 논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는가? 백범 김구는 존경의 대상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졌는가? 아니면 그야말로 반민중 분열주의자인가? 한국전쟁은 왜 남침되었는가? 이러한 의문은 오늘날 우리의 숙명적 부조리이며 높은 차원의 문제 의식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기 위한 서민적 매진을 일삼는 동시대의 한국인에게 이런 문제 의식은 사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려한 휴가' 가 그랬듯 굳이 과거의 일을 들춰 낸다면 신파이거나 추억이 되어야지 청산이나 규명의 의미부여는 사는데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부조리를 적당히 가릴 수 있는 손바닥 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시대는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시대가 있다. 이미 지나간 시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시대를 거슬러 변하는 오늘을 사는 자세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운명, 그 축적된 과거로 부터 반영된다. 문제는 높은 차원의 의문에 여러 답이 있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관점을 가졌는가 라는 지점이다. 중금속처럼 쌓인 신체의 속성을 깨는 울림은 밖에서 쳐주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부터 울려야 한다. 그로부터 감당할 수 있는 관점은 역사의 어느 시점이나 역사적 고장이 끊임 없이 소리내는 진지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로인해 눈이 뒤집어 지고 피가 꺼꾸로 쏟는 느낌은 당연한 생리다.
이른바 좌파 필독서라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줄여 : 해전사)' 이나 해전사에 반기를 든 우파 지식인들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줄여 : 재인식)' 이나 변하지 않는 시대를 관통해 낸 다양한 답을 가지고 있다. 결정해야 할 것은 감당할 수 있는 관점이며 판단해야 할 것은 손바닥의 크기이거나 숙명적인 부조리에 대한 용기있는 대결이란 점이다. 항간의 얘기처럼 해전사는 역사의 실패를, 재인식은 역사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손바닥의 크기와 자세의 문제이며 그럴리가 없다고 무턱대고 믿어 버리는 맹목적인 신념의 문제이다. 역사를 살피는데 가장 잘못된 두가지 의식은 신념 그대로의 신념과 역사를 살피고 나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대체로 바른 역사를 살폈다면 신체적 축적을 통해 이룩한 신념 따위는 파괴 되어야 하고 역사를 통해 신념을 재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숙연한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에 대한 신념이 뻔하디 뻔한 것들의 총체적 집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민족민중 사관의 해전사와 탈민족주의 사관의 재인식의 갈등은 민족주의의 감성적 의리의 유무보다는 텍스트 사관과 신념 사관의 경연으로 보인다. 텍스트 사관은 충격적이지만 반성을 수반한다, 게다가 답과 의문을 동시에 던져 놓는다. 재인식을 탈민족주의 사관으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재인식은 그렇다고 믿어야 했던 것을 더 그렇다고 믿어야 하는 당위성을 열거한다. 이것은 신념 사관이다. 이미 나름대로 꽃 피운 민족주의를 수레에 실은 사관이다.
시대가 변한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시대를 만들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며, 선택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전사냐 재인식이냐는 문제는 높은 차원의 질문처럼 오늘을 사는대 하등 도움이 안되고 교양과 처세의 차이를 절감하는 사람에게 교양은 선택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핸드폰으로 누구나와 소통할 수 있고 인공위성으로 친구를 찾을 수 있는대다가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의 일을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장농 속에 모셔 놓은 비자금이 하루 아침에 인도와 홍콩의 어느 기업에 투자되는 첨단 사회에서 어떤 농민은 생계를 절규하고 저항했다는 이유로 백주 대로에서 맞아 죽고, 어떤 택시운전기사는 절망을 이유로 스스로 분신을 해야 하는 사회와 수십년전 동족간 전쟁을 치뤘지만 막상 종전 선언의 대상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선택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해전사냐 재인식이냐는 선택은 취향이 아니라 오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가감 없는 자세이다.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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