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분노가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경찰? 사법부? 공권력? 공적시스템. 다 아니다. 그런 국가와 국가기관이 아니다. 인간들이 밉고 저주스럽다. 죽은 그들이 무슨 열사냐? 의사냐?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약한 약자일 뿐이다. 제대로된 법치는 이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누가? 경찰이, 사법부가, 공권력이, 국가의 모든 기관이 그런 법치로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이건 국가 기관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오늘 이 사법부 참사에 가까운 선고를 내린 서울중앙법원 형사합의27부 판사들의 비겁과 비열함의 문제다. 지금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저주는 분명 사람을 향하고 있다.
검색어 '생각'에 대한 238 개의 검색 결과
- 2009/10/28 용산참사재판 by DrunkenSTAR
- 2009/10/13 지켜주세요. by DrunkenSTAR
- 2009/10/01 우리가 목격해야 할 사회 by DrunkenSTAR (1)
- 2009/09/16 위장전입에 대하여 by DrunkenSTAR (2)
- 2009/09/09 감당할 수 있을 만큼 by DrunkenSTAR
- 2009/09/07 개때들의 애국심 by DrunkenSTAR
- 2009/08/18 김대중 서거 by DrunkenSTAR
- 2009/08/14 에이미트 박창규 사장과 MB by DrunkenSTAR
- 2009/08/06 쌍용자동차와 연민, 연대의식 by DrunkenSTAR
- 2009/07/23 미디어법이 우리에게 by DrunkenSTAR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분노가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경찰? 사법부? 공권력? 공적시스템. 다 아니다. 그런 국가와 국가기관이 아니다. 인간들이 밉고 저주스럽다. 죽은 그들이 무슨 열사냐? 의사냐? 아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처럼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나약한 약자일 뿐이다. 제대로된 법치는 이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것이다. 누가? 경찰이, 사법부가, 공권력이, 국가의 모든 기관이 그런 법치로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이건 국가 기관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오늘 이 사법부 참사에 가까운 선고를 내린 서울중앙법원 형사합의27부 판사들의 비겁과 비열함의 문제다. 지금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저주는 분명 사람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켜야 할 대상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권력의 미디어 장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망하게도 어떤 정권이나 미디어, 언론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솔직히 MBC 가 인민의 위한 방송은 아니질 않는가? KBS 는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다만, 그것 밖에 지킬 것이 없는 착한 사람들이 나서서 절절한 방아쇠를 당기는 중이라 생각한다.
정연주씨나 최문순씨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코드 인사라 했다. 권력이 바뀌면 코드를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다.(물론, 자연스럽지만 옳은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 영역이 국민 대다수가 인정하는 균형있는 토론 사회자에게 개그와 코미디로 사람을 웃기는 딴따라의 영역에까지 코드토론, 코드웃음을 조장하는 악랄함을 자연스러운 경영, 개편활동이라 볼 수가 없게 만든다. 하지만 착한 사람들은 여기에도 반MB 구도의 절체절명의 싸움으로 명분화시킨다.
그들이 누구보다 먹고 살만 했고 서민의 지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맥락으로 파악되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차하게 된건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너도나도 '지못미' 를 외치며 김제동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는 것은 사려 깊어 보이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해 죽어간 사람들, 생존을 위해 모욕 당하는 사람들, 웃지 않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석희씨나 김제동씨는 약자를 보호해줘야 할 사회적 강자가 됐다. 하지만 강자이면서 약자를 탄압하는 반대편의 사람들에 비해 명백한 차이가 있고 그 자긍심도 반드시 인정해줘야 한다.
손석희는 스스로도 '인본주의자' 라 했다. 김제동은 '사람이 사람에게' 라는 주제로 열렸던 마들산연구소 강의에서 상식은 "사람이 죽었으면 예의를 표하고 국민은 계몽과 협박의 대상이 아니라 꾸준히 희망을 주고 끝까지 끌고 가야 할 대상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라고 말했다.
이제는 손석희나 김제동이 우리를 지켜줘야 한다. 어쩌면 개그나 균형 있는 토론이 아닌 어떤 편으로 어떤 계급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식이나 균형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금과 같은 성원이 있으면 된다. 그들의 상식이 우리의 상식이고, 지금껏 그나마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상식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면 감정적인 지못미가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세상이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왜 12년 밖에 안되냐는 말이 많습니다. 다 찾아 보지는 못했겠지만,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관련법 형법 297조를 뒤져 봐도 10년형이상 이란 예는 없네요. 특별법과 연계하여 12년 형량이 나왔겠지요. 물론, 대한변협 인권담당 변호사에 의하면 다른 법률을 적용하면 무기징역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판사가 적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다는 군요. 만취 상태를 감안했다는 지점에서는 판사들이 별별 꼴을 많이 봐서 기계가 됐구나 란 생각도 들었지요.
양형 기준이 있는 각론은 꼼꼼히 점검한다지만 총칙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총칙 제 5조는 사회와 국민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5조(사회의 책임) 모든 국민은 아동·청소년이 이 법에서 정한 범죄의 상대방이나 피해자가 되거나 이 법에서 정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도록 사회 환경을 정비하고 아동·청소년을 보호·선도·교육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가해자에게 전자발찌를 7년동안 채우게 됩니다. 잠재적 가해자를 잠재적 피해자로 부터 격리하려는 공공적 시도라고 보여 집니다. 이런 시도가 가능해진 것도 최근의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합의도 합의 자체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또 다른 문제가 반드시 발생하니까요. 즉, 이런 짐승들을 완전히 사회와 사람으로 부터 격리시키려는 법규정이 짐승과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과정의 장치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무고, 억울함에 대한 염려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는 성범죄 뿐만 아니라 무고함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수업료를 많이 치뤘고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범죄로 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가해자를 죽도록 때리거나 거세를 한다거나 찢어 죽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일까요. 그런 해소 이상으로 법정형량을 높이는 법개정도 중요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보호 대상에 대한 조치가 끝나고 개선되어야 할 어떤 현상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지요. 분노가 진공상태가 되어 가해자를 더 가혹하게 처벌해달라고 청원하고 무시무시한 형량으로 법개정을 원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합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체제와 그 장치의 옳바른 작동이 더 중요 합니다. 범죄의 가해자가 되는 생각의 틀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인권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눠서 생각하게 되면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분노로만 작동되게 된다는 점이지요. 스스로 범죄의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은 아이와 사회를 보호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 한가로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지켜 보면 잠재적 범죄를 축적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남성은 여기자의 가슴을 주물럭 거리고 술집 마담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남성의 친구들은 남자가 그럴수도 있지 라고 하지요. 여자들은 이뻐야 1등 신부감이 된다고 어느 미모의 여성은 여성들을 모아 놓고 연설 합니다. 모여 있는 여성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디 그뿐 일까요. 어떤 범죄와 보호를 다루는 공권력과 병원등의 행태는 어떻습니까. 이런 어른들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겠다고 하는 일이 입시경쟁이고 사교육 정진이며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잘나야만 하는 약육강식 교육 입니다. 아이들은 성의 희롱과 비하에 관대한 어른들의 태도를 배우고 그러거나 말거나 남을 이기기만 하면 죄가 사하여 진다는 자세를 교양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가령, 나영이의 가해자가 돈있고 힘있는 자였다면 사전에 돈으로 빽으로 다 해결했을 텐데 병신처럼 살아서 저렇다고 더 끔찍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요.
법이 있어도 작동되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작동시키는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지요. 가해자를 찢어 죽이는 상상만으로 대중들과 함께 피를 토하는 들끓음 말입니다. 어떤 정치를 용인했고 어떤 사회를 구축했는지 반성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죠. 벌써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 보십시오. 권력은 뭐든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하게 만듭니다. 나영이의 끔찍함을 위로하며 다른 쪽으로는 여기서 파생되는 대중적 효과, 인권의 저울질,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한 목적성의 법률 개정으로 파장을 만들어 내는 것 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차단하고 더 근본적인 것에 매스를 댈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목격해야 할 지점은 피해나 가해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과 주위를 목격해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 없이 만들어 내는 사회의 패단에 대처하는 방법 말입니다. 우리는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법과 일련의 매카니즘이 거치는 과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현재의 법과 사회가 왜 우리의 요구를 보호할 수 없는지 개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빌미를, 원치 않는 목적성을 띤 정치적 명목을 주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나영이를 지킬 수 없었지만 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돈과 경쟁적 교육으로 사회가 썪어 들어가고 있지만 그나마 인류가 인간다움으로 살아 왔던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사 그 아이를 지키겠다며 덤벼드는 동정과 연민조차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교육은 인간 답게 살기 위한 인간에 대한 학습이 아닌 잘 살기 위한 수단이란 점을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잘 살기 위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부인이 안되는 사회다. 아이 사랑을 앞세운 이 시대의 돈 잘 벌기 대열에 가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위장전입이다. 위장 전입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친척 집에 세대주를 하나 더 꾸리는 형태, 이때 친척과의 협조로 위장 전세, 월세 계약서를 마련하는 것. 서울에 주거용 오피스텔이나 집을 사두고 거주는 지방에 하면서 주소지는 서울로 해두는 형태. 전자는 서민들이 후자는 돈 좀 있다는 부류들이 하는 형태다. 이렇게 주소지를 이전해 두면 교육제도에 혜택(?)을 받는다. 세대까지 구성해 두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분양되는 아파트나 준주거지의 분양권을 노릴 수 있다. 위장전입의 노림수는 이 두가지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임태희씨가 장인의 출마 지역구로 주소지를 이전하여 1표 더 행사하려 했다는 고백은 차라리 애교다.
위장전입은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줄줄이 고백하지 않아도 시중에서 성행하는 불법행위다. 법치를 중요시 하는 이 나라 정부에 의하면 위장전입은 척결해야 할 중차대한 과업이다. 위장전입이란 불법행위의 전제로 인해 제도권의 교육은 사악한 존재가 된다. 가서 사는 것도 아니고 위장으로 살아야 교육이 되는 교육제도가 교육이 된다면 그야 말로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거 아닌가. 그래서 재테크가 양념으로 낄 수 밖에 없다. 위장전입을 오로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어쩔 수 없는 위장만으로는 당위가 떨어 진다. 누군들 자식 사랑하지 않나? 하지만 잘 살기 위해 그것이 돈이니까 그렇게 했다고 하면 어이 없게도 용서가 된다. 그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잘 사는 기준, 잘 사는 사람의 모범, 그렇게 살아 보고자는 서민들의 희망이니까 말이다.
저렇게 살지 못해 이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이 싫어 죽어라고 그들을 목표로 삼아 사교육에 가랭이 찢어 져도 자식들 몰아 넣고 공부 시키는 것이 오늘날 서민의 군상아니던가.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조상을 탓하며 우리 자식은 그거 꼭 시키 겠다는 희망으로 지금 그들의 불법 행위는 눈감아 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 그들은 우리보다 고위이기 때문에 저 정도 성역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을 공연히 얘기하는 것이 오늘날 서민의 의식아니던가.
서민이나 중산층이나 대게가 이렇게 살아 가거나 살고 싶어 한다. 자식들에게 제도권에서 우대적인 교육을 시키고 재테크를 통해 자산 증식을 꾸미는데 위장전입이 도덕성과 일면식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이 된다. 오로지 노동을 통해 몇십억씩 벌었다는 악바리 연예인들 얘기는 기본적인 수익이 되니까로 해석되고 김밥 장사로 수십억을 벌어 사회에 쾌척하는 할머니들의 얘기는 더러운 앞차마의 이미지에서, 결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깨져 버린다. 서민들에게 노동을 통한 자산증식은 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증식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카테고리 된다. 교육은 잘 살아야 하는 자본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기본 수익이 되는 노동의 일자리를 찾고 주식과 부동산에 잘 투자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밑거름인 셈이다. 위장전입까지 했는데 그 밑거름도 못배우면 사람들은 대번에 교육 잘못시켰다고 할 것이다.
국민들이 죄다 이런데 국민이었던 하지만 이제 고위 공직자가 되겠다는 사람의 위장전입이 무슨 문제인가. 어제 라디오 토론을 듣다 보니 어느 대학교수가 '도덕성과 자질은 별개의 문제' 라고 위장전입과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악의 어쩔 수 없음에 연대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어느 TV 토론에서 '이런 나라에서 땅투기 안한 사람이 바보 아닌가' 라며 솔직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는 그런 매카니즘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이 매카니즘에서는 누구든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적이익에 관계된 활동을 해야 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는 방식, 순진한 노동 추구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행복이라는 인문적 감수성과 조우하고 자식 사랑이란 보편적 인류애의 어쩔 수 없음으로 가슴 벅차 오른다. 어찌 이것을 고위 공직자라는 정치적 지위에 불편부당하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국민이 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공공이 필요하다. 공공을 다루는 공인과 이를 통해 옳바른 공공선에 봉사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형성 결과다. 그 체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공평하고 평등하게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공공의 목적인 셈이다. 공공의 목적을 수행할 인간, 즉 공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다. 오늘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양심이 완전히 다른 보편성을 지닌다면, 즉 위장전입 따위는 양심에 털난 행위가 아니라 사적이익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권장해야 할 수단이라면 이미 잣대가 아니다. 이때는 어느 교수의 지적처럼 안하면 바보가 되는 마땅함이 된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공공이며 양심인가?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공허 인가.
오늘날 공공의 영역이 사적 영역화 내지는 민영화된 사실은 쉽게 발견된다. 특히 법치를 치료제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더 자주 목도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민간용역업체와 경찰이 합작하여 불태워 죽인다. 파업이 일어나면 역시 용역과 경찰이 자원을 총동원하여 진압한다. 국민 한사람이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도 경찰이 잡아 들인다. 법치가 사람의 생존과 양심을 거둬들인다면 거기에 대처해야 할 자세는 역시 두 가지로 귀결된다. 사적인 행복 추구는 공공의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지금은 아니꼽고 더럽지만 자식을 교육시켜 저 계급으로 소환시키는 것, 남들이야 뭘하든 위장전입, 그 할애비의 방법이라도 동원하여 더럽고 치사하게라도 돈을 글어 모으는 방법, 이 두 가지다. 그럼 다시 이 두 가지가 번갈아 바퀴 도는 매카니즘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너무나 단조로운 우리 사회의 플랫폼 아니겠는가.
이로서 공공이 더더욱 필요하다. 너무 가혹한 잣대, 재능에 비하면 허물도 아닌 것이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탈루 라는 것이라면 이 사회는 세금을 내고 법치 따위가 존재하는 근대 국가가 아니다. 국민에게는 3년이하의 징역이나 천만원의 벌금을 내라고 할 사람들이 같은 범죄를 진행하고 있다면 그것이 허물도 아니고 명령을 할 줄 아는 재능이 있기에 문제가 아니라면 이게 도대체 어찌된 세상일까? 이게 무슨 '발견' 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수사' 이지 인사청문회가 아니다. 하지만 불행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공이 강해질수록 자신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교육과 위장전입의 자본주의 기술을 통해 저들이 누리는 부가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데 무슨 공공이냐. 매몰비용이 너무 아쉽다는 얘기다. 게다가 대게는 완전히 무지하다. 대통령이 시장을 방문하여 오뎅이라도 먹으면 그 오뎅집에 프리미엄이 붙어 시장경제가 활성화 될 것이란 '무지'한 환상에 젖는 것, 그것을 제도에 탓하랴, 무슨무슨 이데올로기에 탓하랴.
위장전입이 악의 시작이겠으나 국민입장에서야 그것이 무슨 큰 허물이랴. 그렇게 살지 못해 안달이고 그렇게 살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구축된 것을. 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 사의 영역에서는 마땅히 편견이 존재해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산다고 하여 공공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국민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사적영역에서 모두가 돈이며 인간적이며 그런 것들이 한데 뭉쳐 잘 살기 위해서는 공공이 도덕적 규제를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경쟁적 능력만으로 잘 살 수 있다? 공공이 어떻든 간에?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 잘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니까. 위장전입한 사람들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공공이다.
감당할 수 있는 시간 끝에 꿈을 이뤘다고 치자. 모든 꿈의 이룸은 기득권이 된다. 누구나 이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한다.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꿈을 이뤘으니 이제 그 꿈을 버려라, 너를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후천적인 본능이 된다. 어떻게 이룬 건데 버린다는 건 말이 안된다. 우리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책임이란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책임지고 뭘 하겠다, 책임 져라 따위의 말을 수없이 많이 듣는다. 이 언어의 정치적 감수성 때문에 무책임이 책임인 등식이 성립되는 일들도 한 없이 목도했다. 좌우간 책임은 현상의 귀속이고 자유로운 인격의 결정이다. 청춘들의 꿈이나 어른들의 꿈이나 매한가지로 사회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것에서의 획득, 돈이거나 위치이거나, 이기 때문에 책임을 가장 가시적인 돈이나 위치의 변동으로만 얘기한다. 현상의 귀속이 사람에게 되어야 하는 것이 보편적일지 모르나 책임의 형태가 반드시 돈이나 거취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는 참으로 엥똘레랑스 하다. 인격이 그 둘을 합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책임을 다 져가면서 인격을 실현하는 양심을 부여 잡고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조금씩 악을 행하며 거대한 행복을 추구한다. 누구나 세상을 민망하게 살아 간다. 특히나 책임을 어떤 제도로 구속하고 그 안에서 기득권이 추구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민망함은 우리의 모습으로 일반화하여 쓰기에는 너무 구리고 상스럽다. 언어도 현상도 스스로에게 귀속시켜 본적이 없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기득권이 수성되는 방식을 배웠다. 나아가 저것이 정치 라는 왜곡도 서슴치 않는다. 그로 인해 우리에겐 면역이 생겼다. 아울러 그 유전자가 세계의 어느 곳에 있든, 재미교포건 재일교포건 상관 없이 같은 진화성을 품고 퍼진다. 꿈? 시간이 걸릴 뿐 다시 꿀 수 있다. 버림을 당하면 당했지 이룬 꿈인 기득권을 버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책임지며 살아 가는 법 대신 그것이 무엇이든 한번 얻은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며 살아 왔다. 다시 꿈 꾸기 위해 새로운 독을 마실 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저절로 떨린다. 소박한 꿈은 그야말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없는 꿈일 뿐이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지향만 하는 꿈이 사실 행복인데도 우리는 그런 꿈을 꿈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어떤 교환가치적 인정을 받을 수 없고 민망해 할 필요도 없으니까.
재범이 한국, 한국인을 욕한 것 그것도 그의 인격이었다. 게다가 그의 인격이 리더로서 민망하고 그 발언 자체도 잘못이었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두말 않고 격한 청소년의 감정 처럼 시원하게 떠났다. 어떤 이는 그는 계약기간도 남아 있고, 반드시 복귀한다, 그게 시나리오다 라고 한다. 회사차원에서 잠수 좀 타라는 조폭스러운 감수성에 기대어 결과적으론 동정이 될 여론에 줄서 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른들의 애국심 같은 것에 호들갑을 떨어 봤자 아마 이건 극복 안될꺼야, 냉소하고 만다. 그가 복귀하는 시점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치룰 개인적인 고통 또한 낡아 빠진 타인의 고통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다만, 민망하게 사는 어른들의 그 자랑스러운 민망함이 도무지 이해가 안될 뿐이다. 그것이 정의 인양 행복인양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의 척박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오늘 나의 호주머니속으로 들어온 돈은 누군가의 피다. 누군가의 피로 우리 스스로의 살을 찌우는 삶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미안해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독을 마셔야 하고 소박한 꿈을 지향하는 것에 슬퍼해야 하고 감당하지 못할 삶을 강요 당하는 아이며 어른들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젊은이 하나가 기득권을 버리고 떠났는데 여러 생각이 든다. 왜일까... 부엉이 바위도 오버랩 된다.
2PM, 재범의 린치 과정을 보면서 또 애국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통의 소속감에 반하는 행동에 대한 집단 린치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데다가 천박하게도 애국심을 경제적 차원에 속해 있는 교환가치로 승화시키는 절차에도 매우 익숙해져 버렸다. 재범의 한국 비하는 바로 유승준과 비교된다. 오래된 기억이 아니더라도 미수다의 베라가 발간한 책 '잠 못드는 서울' 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른바 '한국 내지는 한국인을 비하 하며 한탕질을 해대는 양아치들' 의 범주에 모두가 속한다. 이러한 네이션적인 감정의 폭발은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그 열정에 논리를 덮어 씌운다고 해서 정신병리가 해소되진 않는다. 한국이란 국가를 한국인이란 덩어리를 비하하면 안된다는 사고의 체계는 명백히 어떤 지적 영역이 아니다. 재범의 말에 대한 스팩타클한 반응과 10대 청소년의 욕지거리 수준과 어울리는 격하고 상스러운 언어들은 단순히 감정이 이입되어 만들어지는 일종의 정신병일 뿐이다. 이런 지적에 대게는 '같은 민족에게, 우리나라를 욕하는데 넌 아무렇치도 않냐? 넌 어느 나라 사람이냐?' 라는 병적인 답변으로 돌아 온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러면 안되나?
이런 반응의 부류는 대체로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국가가 개인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을 가지는게 보통인데 이 때문에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정신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전쟁세대라면 모를까 젊은이들 조차 국가일심동체에 이바지하는 감수성은 측은하다. 애국이 자신의 현상황을 구제할 지도 모르는 절박함에 처해 있다면, 이를테면 청년실업, 비정규직문제 따위들, 왜 국가에 이토록 애국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자본을 일방적으로 취득하고 적절한 재분배는 하지 않는지 고민해야지 남들이 이성을 놓았다고 스스로도 이성을 놓고 재범 따위를 린치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국가가 잘했다고 궁둥이 만져주는 것도 아니고 그 소속감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다. 제성찰도 환경적응도 안된 아이의 욕지거리에 개때들처럼 몰려 들어 살점을 뜯어내는 태도가 나라 사랑, 겨레 사랑으로 명제되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집단폭력인가.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들도 아니고... 민주적인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게다가 스스로 진보 성향이라며 블로그에 노무현이나 김대중의 근조 리본 따위를 걸어 놓고 한다는 짓이 이렇게 얕은 수준이니 실제로 선거가 일어나면 죄다 이명박 따위나 그 아류들에 표를 던지고 재미삼아 비판질에 날새는 줄 모르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박재범에 대한 배심감, 한국에서 건드려서는 안될 애국심, 그런 것들을 네티즌들이 회자시키자 언론은 악랄한 받아 쓰기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동안 박재범에 대해 어떤 신뢰를 가졌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이 범주에 반드시 끼는 것이 공인 이란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연예인이 공인이라면 그야말고 국가에서 녹이라도 줘야지 왜 기획사에 속해서 연습생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박재범에 대한 신뢰는 저 친구가 얼마나 우리를 즐겁게 하면서 자본을 축적할까 일 뿐이다. 그가 좀 되먹었으면 문근영처럼 기부도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애국심, 이런 시시콜콜한 애국심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아할 부류는 오직 지배 계층 뿐이다. 애국심이란 것이 특징적으로 자본 교환을 전재로 하지 않기 때문에 매우 호혜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지배 체제가 이런 국민들이 많을 수록 지배당하는 것,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끌어 내는데 용의하다는 것을 알게 해줄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도 스스로 괜찮다고 위로하고 국가에 헌신할 것을 알아 버린 다는 점이다. 박재범에 시간과 애국심을 투자하느니 제 스스로 살길 찾는 일에 몰두하는 편이 휠씬 낫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곧 입에서 단내나며 '한국 좆같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친구야, 꽃이 핀 줄 알았는데 꽃이 졌어 열매를 맺을 줄 알았으나 열매는 달리지 않았어, 다시 꽃도 피지 않아...
친구야, 우린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거니, 우리가 아파하는 소리를 들을 귀는 어디에 있니, 우리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눈은 어디에 있니...
친구야, 너는 아니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봄비처럼 아파도 우리 웃으면서
우리만 아픈 것이 아니라고 우리 웃으면서 친구야, 우리 이 아픈 길을 기꺼이 가야지...
친구야, 피고 질때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우린 아직 사람이다.
친구야, 그러하니 우리 이 길을 가자, 아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 사람의 길을, 그 길에서 피고 지고 아프고 슬퍼하고 열매를 달자...
박창규 사장의 버르장머리 발언은 민주주의로 까지 연결된다. 정부가 인민들의 입을 틀어 막더니 업자까지 소송을 통해 입막음을 한다 는데 사실 4300억원을 손해 봤다는데 3억원 배상하라는 숫자 논리는 업자의 입장에서 계산법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버르장머리 로 의도가 파악되듯이 나머지 4297억에 대한 손해배상을 PD 수첩, MBC, 광우병대책회의 등에 전가는 시켜야 겠는데 버르장머리로는 안되는 것이 이 사람들 나이가 30살 김민선씨 처럼 자신의 아들딸뻘도 아니고 사회각층의 지지세력과 의견그룹 하다 못해 정치인이고 법조인들이 태반이다 보니 자신들도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에 계산법이 어그러진 것이라 보인다. 논리나 상식이 아닌 버르장머리로 해결 하려는 것, 이른바 가부장적 사장들의 습성이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들에게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들에게 세상 모든 것은 교환과 거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아닌 것은 가치가 아니다. 그런 뇌구조에 민주주의라? 개가 막 풀을 뜯어 먹는다.
인터뷰를 꼼꼼이 읽으며 그들의 고충과 손해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버르장머리 라는 전통(?)이 오늘날에는 규범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물론, 개인의 인생에서 조건 없는 예절이 적용되는 관계에서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행위와 소송을 거는 행위가 다른 것쯤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문제는 이런 해괴한 논리를 주저 없이 펼친다는데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민주주의의 새로운 억압세력의 등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데 있다. 글세 이것이 공포일까? 물론, 김민선씨에게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고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 고통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을 CEO 출신이라 주장하는 대통령을 뽑고 나서 우리의 일상, 민주적이었다고 믿었던 일상은 하루도 빠짐 없이 그 믿음을 시험 받고 있다. 생각해보라, 박창규 사장의 버르장머리나 기타 등등의 발언은 정작 MB 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대통령만 아니었으면 옆에서 말리지만 않았으면 국민 전체를 상대로 버르장머리를 고치고 소송을 불사할 사람이다. 자신의 무식을 사사건건 돌발적으로 영상화 시키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안녕히 주무시라 하지 않고 정신 차릴 사람들 많다며 대놓고 비난하는 데스크가 있질 않나, 이러한 명예훼손과 모욕의 피해는 적어도 300억 이상이라 생각하고도 남음 이다. 여전히 CEO 였다면 말이다.
우리는 또 시험대에 올랐다. 김민선씨의 일상을 담보로 말이다. 공포를 느끼기 전에 분노를 느껴야 하며 걱정을 하기 전에 복수를 떠올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겪는 시험대에서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고 또는 김민선씨와 같은 다른 이들의 삶을 소환하여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시험을 치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공포네 걱정이네 하는 것은 허약한 뒷모습을 보이는 꼴이다. 엣지 있게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품자.
같은 노동자들은 어떻습니까. 한국노총이 MB정권의 앞잡이가 되고 민주노총마저 지도력과 운동성을 잃어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하여 그 강성한 다른 금속노조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일이 아닌양 뒷짐 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같이 일하던 비해고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측이란 이름으로 해고노동자, 그들의 가족들을 위협하고 자본가를 대신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찬 정상조업이란 완장은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 입니다. 일제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쳐 살아 남은 반민족주의자들의 청산되지 못한 완장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쌍용자동차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이건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연민하지 않고 연대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기에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이 권력은 어떤 형태로든 청산될 것이고 댓가를 치루게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뒷짐 진 대게의 사람들, 사측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맘껏 행사한 비해고노동자들의 파괴된 공동체의식은 다시 회복될까요? 솔직히 쌍용자동차를 위해 특별 세금이라도 더 내야 한다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라진 연민과 연대 의식 입니다.
과연 그럴까?
언제나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렇게 폭력의 비호를 통해 태어 났었다. 하지만 위기의 과정과 순간에도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민주주의는 정부나 국회에 있지 않았다. 학생, 시민들이 학습하고 의식하며 끝내 거리에서 만들어 냈다. 민간 정부가 들어 서며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그런 제도 안에서 실현, 지속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국회에 날치기며 폭력을 위시한 법안 통과의 절차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미디어법은 어떤가. 그 과정의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이전의 분노와 다른가? 미디어법을, 한나라당의 반역적 행위를 역사가 심판해줄 것이라 믿고 기다리면 될까? 한가로운 생각이다. 성숙한 정치 인식, 더욱 나이브한 생각이다. 미디어법은 역사를 바꿔 놓을 법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국가와 전체적 추구, 자본주의와 기득권에 대한 무저항, 가난의 성숙, 반민족 반민중적 인식의 확산, 각종 천박함의 다양성을 서서히 침투시키는 제도적 장치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정권 유지를 열망하는 한나라당, 기득권의 만세를 원하는 조중동의 법이다.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한번 인식된 관점을 도무지 바꾸거나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못하도록 하는 심리적 강제법이다. 이로 인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더 많은 부조리를 저변에 천작시킬 제도다. 그때의 역사란 일그러진 역사다. 그때의 역사는 한나라당과 조중동과 이명박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며 가난하고 억압 받는 사람들을 경쟁에 도태된 자, 게으른 자로 격하게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 심판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 지금 당장 미디어법이 우리에게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역사로 갈 것인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