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권

2009/03/17 14:38 / 인물
전인권이 청주 교도소에서 돌아 왔다. 마약 투여 협의로 수감된지 1년만에. 전인권은 위대한 뮤지션이다. 전인권이란 인간과 마약의 연관 관계에 대해 경멸하는 세상의 오지랖 따위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은 위대하다. 다만, 그가 마약을 배웠다는 제2의 고향 필리핀으로 도주하여 '필로폰은 했으나 한국에서가 아니라 필리핀에서 했다' 라고 발언만 하지 않았어도 인간으로서도 괜찮은 존재 였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다. 그의 음악은 위대하지만 인간의 맥락은 낄때 뺄때 못 가리는 조영남이나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라 하는 어느 덜 된 유아와 비슷하다. 아이러니다.
2009/03/17 14:38 2009/03/17 14:38
DrunkenSTAR 이 작성.

수배자

2008/07/22 17:49 / 인물

날이 덥다.
문득,
원석선배가 걱정이다. 진걸팀장은 구치소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이 여름을 어떻게 견딜까...
문득,
이 미친 사회에 기대어 남달리 바쁜 척, 고달픈 척 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다.
그들이 걱정이다. 핑계는 그만하고 이번주엔 꼭 통인동에 들러 술 한잔 하자고 청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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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2 17:49 2008/07/22 17:49
DrunkenSTAR 이 작성.

김장훈의 실용주의

2008/05/20 01:26 / 인물

17일 촛불집회에 김장훈이 참가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놀랐었다. 이명박 정부 축하사절단도 인식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일까? 몇달만에 이명박 정부를 축하하던 자가 가졌던 신의의 가치가 들불같은 촛불과 함성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버라이어티 같은 인식의 전환을 두고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무대만 있다면 어디서든지 노래 부르고 그의 전매특허인 발차기를 할 수 있다는 강변이야 말로 그가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사회에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어떤 자세의 크기만큼이나 해로운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명박 정권의 탄생을 축하하며 힘찬 발차기를 내질렀던 여의도는 그냥 무대도 아니며 그 무대를 보는 사람들은 그 발차기가 이명박은 지지하되 정책 따위는 지지 하지 않거나 또 어떤 맥락이 다르거나 하는 복잡한 제단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이명박정부는 지지하지 않지만 취임식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만으로 박수 정도는 몰래 쳐줄 용의가 있는 반동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장훈 본인도 그랬을까? 그러니까 모 그런 역설을 발차기로 승화시킨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뻔뻔스럽게도 이명박 정부가 싸질러 놓은 쇠고기똥을 주어 담으려는 촛불집회에 나와 취임식에서도 등장한 발차기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 모르게 바쁜 스케줄을 축내며 눈물 흘리고 후회하고 반성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민간인들이야 환호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들 앞에 용기 있게 나아가 자유발언 따위를 하지 않으면 그 고독한 눈물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겠지만 김장훈이야 너무 다르지 않은가. 자신의 착한 일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이 다반사 인데 취임식의 발차기와 미친소 너나 먹어 발차기가 개별적 인식을 가진 독립적인 발차기라고 말이라도 해줘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맥락을 제단하고 인식을 고차원적으로 발현시키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류들이 지금껏 한국사회에 미친 해로움은 비단 멀리 찾을 일도 아니다. 인식인지 사상인지 노동인지 비즈니스프랜들리 인지 정계진출인지 사리사욕인지 이런 것들을 한번에 섞어 버린 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 같은 이도 있다. 그뿐만 아니다. 철학적 지식을 버라이어티하게 설교할 줄은 알지만 정작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철학적 고민이 얕은 김용옥 같은 지식인도 있다. 그러하다 보니 어떤 때는 새만금에 카지노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새만금 사업 도로 물리라고 포크레인 앞에서 피켓을 들 수 있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들의 언어를 해독치 못하는 무식한 우리의 뇌를 탓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래도 이런 부류들이 다행스러워 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렇게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도록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언어를 싸질러놓아도 언론이나 미디어가 그것을 번역하여 똑똑치 못한 우리들의 뇌속에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라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건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사람들이 그때 들은 노래를 추억과 함께 입속에서 오래도록 되새김질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의 녹음된 CD 만으로도 족하다. 굳이 똑똑치 못한 사람들의 뇌와 입속까지 경련을 일으키게 몸소 나와주실 일은 필요치 않다. 김장훈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무대에 나오기 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그 생각이 무대에서 노래도 되고 발차기도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그의 해로움은 이용득과 김용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쇠고기 협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반대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반대하지 않는다? 사안데 따라 다른 싸질름, 그리고 번역은 버라이어티나 언론이, 이런식의 패악질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그가 마치 CD 의 오토리버스처럼 펼치는 착한 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라고 과격하게, 때로는 아주 순진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각인 시키는 것만 같아 아주 불편하다. 이런 뻔뻔함 어디서 많이 본 아우라 아닌가? 참으로 실용주의적이다.

2008/05/20 01:26 2008/05/20 01:26
DrunkenSTAR 이 작성.

혁명가를 떠올리며

2008/02/20 16:13 / 인물

라울, 체와 함께 멕시코를 넘어 쿠바 해변에 도착한 피델은 80명의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키고 마침내 쿠바 혁명을 이뤄냈다. 쿠바 혁명으로 사회주의체제에 접어 든 쿠바에 안주하지 않은 체는 콩고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9명의 미국 대통령을 당해내며 갈등했던 체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내놓으면서 49년전 덥수룩한 수염으로 기세등등하게 쿠바 해변에 상륙했던 혁명가들은 비로서 완전히 죽거나 늙어 버린 듯 하다.

미국의 정치선전으로 인해 북한과 다를바 없는 빨갱이의 나라로 취급 받아 온 쿠바가 알려진 것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통한 쿠바(라틴) 음악과 1990년대 부터 일기 시작한 혁명가 체 의 자본주의적 이미지 소비가 급속히 번지면서 부터다. 깡패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화장기 가득한 트럼펫, 콘트라베이스의 리듬은 고사하고서라도 굳게 다문 입술에서 질기게 피워 오르는 시거는 체 의 상징이 되었다. 체 는 곧바로 맥주 받침, 티셔츠, 관광지 좌판의 기념품에 찍혀 패션으로 입혀졌다 벗겨지고 젖었다가 푸석푸석 말려지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는 체 의 평전(붉은 양장에 덮힌)을 끼고 다니며 유아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짐짓 혁명인양 착각하며 겉멋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체 의 파르티잔적 투쟁과 뼛속까지 사무친 민족해방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이러한 체 의 이미지화는 팝아트가 상업적으로 대중에게 스며든 맥락과 일치한다. 어쨌든 체 는 멋있지만 미국의 선전처럼 '과격한 사회주의 게릴라'에 불과하고 그의 동지로 여겨지는 카스트로가 지배하는(그것도 독재로)쿠바는 자유세계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깡패가 득실대는 소굴로 알려졌다.  

우리가 체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맥주병에 깔린 체 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뿐이다. 어느 누구도 체 의 리얼리티와 불가능한 꿈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어떤 부조리와 조응시키려 하지 않는다. 쿠바는 더욱 심해서 케네디의 지략(?)으로 봉쇄 조치된 나라에서 고작해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나라로 변신되었을 뿐이다. 최근 마이클 무어의 영화"식코"를 통해 잠시 등장하는 쿠바의 의료체계가 아픈 미국인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호혜적 장면마저도 쿠바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장면에서 세계 최강의 나라에서 병들어 치료 받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원수 지간의 나라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고 하여 어이가 없다거나 쿠바 사람들이 이러한 무상 의료체계와 라틴 음악에 맞춰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쿠바나 그것이 어느 한쪽의 척도로 최고가 되고 최악이 되는 구도일지라도, 인간의 행복은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최고에서도 행복하지 않으며 최악에서도 행복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리얼리티 아닐까. 따라서 이제 피델이 물러 난다고 하여 쿠바 민중이 해방 된 것도 행복 시작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입장과 미디어의 서구적 메가폰에 귀기울여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사상적 귀머거리야 말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델이 체 의 영웅적 이미지만큼 상업적으로 전파될 소지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쿠바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서구 언론들은 하나 같이 늙고 장출혈로 병든 피델의 무기력한 현재 모습을 부각시킨다. BBC 마저도 피델의 인생이란 포토슬라이드를 통해 젊은 시절 체 의 카리스마를 능가하던 피델의 모습은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 있다. 이것은 피델의 리얼리티가 체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만한 상품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가 거둔 어떠한 성취나 불행이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감춰질 징조이다. 이러한 징조는 지금까지 세기를 풍미한 파르티잔의 모든 저항 역사에서 확인 된다. 확실히 제국주의와 파트레스에 과격하게 저항한 파르티잔 중에 체 만큼 유명해진 사람도, 서구 사회의 일부 지식인(장 폴 샤르트르 같은)에게 짐짓 존경을 받는 혁명가도 없을 것이다. 이는 체 가 저항한 식민지제국주의가 자본제국주의로 변하면서 이념과 혁명도 이미지로 소비될 수 있고 자본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미디어나 시장이 그것을 상품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줄 때 뿐이다. 피델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난다. 이미 그는 노병으로 죽지 않고 금방이라도 벽에 똥칠할 분위기로 취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의 혁명 정신 따위는 안중에 없다, 다만 병들고 늙은 이미지가 싫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역사적 뒤안길로 쿠바의 해방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강경했던 카스트로의 권력을 이양 받은 라울의 실용주의가 미국과 소통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을 통해 드디어 쿠바가 자유 세계의 세계화적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부류들은 오로지 다국적 기업들과 투기 자본 뿐이다. 피델은 곧 소비될 수 있는 이미지인지 시장에서 확인되고 약탈의 대상인지 폐기처분 될 대상인지 가려질 것이다.(사실 아직 활발한 저항 활동 중인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도 언제 이런 자본의 처분 대상이 될지 알 수 없다.) 멀리 있는 체 나 피델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저항 정신으로 남아 있어야 할 우리들의 파르티잔에게도 영웅적은 아닐지라도 무엇에 그토록 저항하고 죽어 사라졌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번도 조명되지 못한 우리 시대의 혁명가 "김산"과 "이현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다.

2008/02/20 16:13 2008/02/20 16:13
DrunkenSTAR 이 작성.

한동안 사진을 찍었지만, 그만 두었다. 주말이면 삼청동 거리를 몰려 다니며 셔터를 눌러대고 장비와 기종의 비교에 열내는 무리에 섞인 듯한 불쾌한 기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불온한 사색을 하기에는 수양도 부족하고 불온치 않은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쁘띠부루주아 라서 그렇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약한 발상이긴 하지만 수용하는 대신 존경하기로 했다.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해서 누구나 활동가가 될 수 없듯이 최소한 점진적 진보를 위한 활동가들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사진가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난 사진가도 활동가라고 생각한다. 대게의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이는 제도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이라는 제도적 합의와 불법적이지 않는 절차적 합법에 의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조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부조리의 발견은 제도와 법이 정한 정상의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부조리의 발견은 다분히 불온의 태도에서 비롯되어 사색의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본다. 불온한 시간을 깊이 겪어 오지 않은 나와 같은 쁘띠부루주아의 신체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불온한 태도와 발견의 도그마를 가진 사진가가 있다면 그가 찍는 사진은 이미지가 아니라 부조리를 배설하는 고발장이다. 사진은 아름답게 찍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와 피사체를 둘러싼 환경이 끊임 없이 내뿜는 역사의 시간을 찍는 것이다. 이런 요약을 해내려면 사진가는 어지간한 불온만으로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피사체와 오래도록 관계하고 피사체를 둘러싼 환경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색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사진을 고발장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발견해내는 사진가가 있다. 이시우와 노순택이다. 두 사진가는 우리사회의 가장 거대한 부조리인 '분단' 을 고발한다. 분단이라는 피사체와 분단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환경을 온 신체를 통해 요약해 낸다.

우리는 왜 분단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분단은 우리 사회의 가장 거대한 부조리이면서 동시에 다른 부조리를 생산하는 숙주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숙주가 전염시키는 부조리의 현상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살아 간다. 나는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의 연속성이 마음을 구속하고, 하다못해 자기 검열을 통한 표현의 단속이 합법적 절차인 것 처럼 현상적인 부조리의 고착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분단의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거대한 담론적 문제이며 역사와 민족적 문제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분단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분단은 그동안 반공과 친미의 정치 상황에 의해 문제적 시각으로만 다뤄졌고 이에 접근하는 것이 차단되었다. 이 차단의 합법적 절차가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이시우와 노순택은 이런 차단에 고발장을 내민다. 역사도 아파 본 사람이 아는 것이다. 분단을 피의한 고발장을 접수하여 아파 온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단은 피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시우 http://www.siwoo.pe.kr/
노순택 http://nohst.simspace.com/

2007/12/14 13:57 2007/12/14 13:57
DrunkenSTAR 이 작성.

낸시 랭 비판

2006/07/07 01:09 / 인물
밤하늘을 본다. 별이 빛난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기 때문에 서울이 아닐 수 있다. 문득,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 통장이 생각난다. 생활의 자양분이었지만, 별과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통장은 나를 눈물나게 한다. 그저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깨고 난 적금만으로 눈물이 흐를 수 있을까? 여기엔 별이라는 이입장치로 인해 나의 감수성이 자연의 순수한 감수성과 반응한 탓이다. 별은 밤에만 뜬다. 자연은 그것을 보여주는 시간이 다르다. 따라서 서울처럼 별이 빛나지 않는 도시에서 별은 그저 가슴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뜻밖의 호의를 배푼다고 하자,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과 삼나무와 찬란한 마을을 '별이 빛나는 밤에' 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별을 보며 헤어진 여자친구와 깨진 적금 통장을 떠올린다. 다시 눈가가 촉촉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이란 자고로 사물의 재현과 독자가 발휘할 수 있는 감수성의 범위 또는 작가가 전달하는 감수성의 범위가 보편성에 준거했을 때, 이건 예술이야, 감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너무 오래전이지 않은 시대에는 말이다.

이어지는 글..

2006/07/07 01:09 2006/07/07 01:09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