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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가 한개 더 생겼다. 취지는 "편안 마음으로 할 말 다해보자" 였던 것 같다. 술에 거하게 취한대다가 민영선배가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블로깅은 2001년 우리나라에 블로그라는 개념도 없을 때 무버블타입으로 시작했고 피머신을 거쳐 현재의 테터로 4년을 기록하고 있다. 블로깅을 할 때는 언제나 편했다. 블로그 "Another" 가 생겼다고 해서 특별히 더 편안한 건 아니다. 언아더 블로그는 팀블로그이기에 편하게 하자고 했던 것이고 어차피 글을 쓰고 편집하는 일은 본인들이 할 일이다. 단, 어떤 모습이 되는 블로그인가에 대해서 긴 토론은 하지 않았다. 디테일은 달라도 지향하는 것은 같으니 굳이 새로운 지향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도메인도, 호스팅도, 테터에서 팀블로그를 지원하는 텍스큐브로 설치하는 것도, 블로그 이름까지 모두 내가 했고 다들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하다 보니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편안 마음의 할 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고난의 일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볼 수 있는 시스템인데다가 현실과 이상의 어떤 문제들을 기록하고 주장하는 작업은 노동이라 규정해도 될 만큼 편안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대단한 일은 아니다. 단, 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시원한가 그것을 증명하는 소박한 시간일 뿐. 나에게도 팀에게도.

다른 블로그 이름은 "잠수함 토끼" 다. 시민단체 활동가, 수필가, 변호사, 교수, 사업가 그리고 그들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 스무명이 참여 하고 있다. 아직도 몇분은 헤매시고 계시고 어떤 분은 도중에 캠프 대변인으로 가버려서 참여를 못할 것 같고 몇 분은 나눔과 생명평화결사 활동이 너무 빡세서 들어와 보지도 못하신다. 괜찮다, 나중에 만나서 술 한잔 하면 된다.

잠수함토끼 http://www.submarinerabbit.net
2007/11/01 20:29 2007/11/01 20:29
DrunkenSTAR 이 작성.

충고

2007/09/14 17:47 / 생활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종종 경영 문제를 물어 오는 후배가 있다. 들어보면 대게가 사람에 대한 문제고 사람의 인연과 사연에 대한 것이다. 회사라는 목적 가치에 오래도록 인연을 두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건물은 그래도 둔 채 사람들만 사라지게 했던 IMF 중성자폭탄으로 인해 평생직장이란 가치는 사라지고 직업관은 능력과 시장요구에 부합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로 변화되었다. 여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직이란 근거로 생긴 한가지 믿음이 있다. "한사람 없어진다고 회사가 무너지나" 란 것인데, 이 믿음은 꽤나 신앙이 깊은데다가 한사람 없어서 회사가 잘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코드까지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평생직장은 이미 고전적 직업관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가치로 세계화를 하지 못해 온통 안달이 난 사회에서 평생직장은 마켓의 요구와 완전히 배치된다. 잉여자본이 노동유연성을 더욱 탄력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개인은 더 이상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객체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마켓에 어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기능이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에게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오로지 개인만이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조직은 조직의 이상이라 생각되었던 어떤 비전, 미션으로 구성되기를 거부하고 자본 생산이 용이한 지점과 자본 재생산으로 노동의 탄력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지점으로 끊임 없이 이동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세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동력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게가 '세상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마켓 안에 있다' 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노동이나 사람은 마켓안에서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어 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등가의 원칙을 기본하여 개인과 개인, 개인과 회사를 계약으로 묶는다. 이러한 계약에는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 나아가 회사에 대한 책임보다 더 포괄적으로 마켓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마켓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구조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노동의 치열함은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마켓이 원하는 책임, 즉 자본의 창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강제적 복무에 치열함을 부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연이나 사람간의 계약이 아닌 인연의 관계마저 부인하거나 마켓의 요구에 걸림돌인양 치부해버리고 만다.

중소기업을 하는 후배가 물론, 작은 회사에서 경영자가 일일히 챙겨야 하는 것도 순리일 수 있지만, 사람이 조직에서 들고 나는데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그와 함께 했던 오늘을 챙기고 칭찬하며 그의 미래를 격려해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적잖은 시간을 들이기를 바란다. 마냥 칭찬하고 격려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사람을 생각한 경영자라면 충고하고 때로는 아프게 꾸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애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사람과 노동을 존중하는 경영자라면 말이다.

2007/09/14 17:47 2007/09/14 17:47
DrunkenSTAR 이 작성.

결혼식장에서

2007/07/11 09:11 / 생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온통 신세를 진 기분이다. 신세가 대체로 폐를 끼치는 일이다 보니, 결혼이 지닌 감당할 수 없는 무게란 내가 아는 모든 삶을 한자리에 모아서 정중히 신세를 짐을 인사했다는 것이다. 겨우 두 세시간만에 삼십칠년 생활을 구겼다가 편 기분이다. 진선생님 앞에서 후들후들 다리가 떨렸던 이유는 아마도 곧 뒤돌아 내 현재와 과거를 한꺼번에 맞닥들여야 할 먹먹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는 의지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 상황이 행동을 조율하는 곳이기에 나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행동했고 퇴장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는 예의 바른 결혼 멘트는 식상하다. 수많은 역할모델이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다. 애써 감당을 회피했던 '노릇' 이란 전통적인 굴레를 좋고 싫고 혹은 옳고 그른 어떤 느낌이나 인식도 할 수 없는 순간, 왜 사람들이 여행갈 생각 밖에 안난다는 욕구에 매몰될 수 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결혼을 하며 그토록 전통과 고정관념을 거부하며 사는 어떤 타인의 삶이 결코 간단치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2007/07/11 09:11 2007/07/11 09:11
DrunkenSTAR 이 작성.

그저 그리울 것이다.

2007/06/26 02:16 / 생활

그리울 것이다, 달 아래건 별 아래건 훌쩍 떠나 홀연히 만나던 무인 간이역이. 나는 간이역에서 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뜨며 이 기차를 탈까, 다음 기차를 탈까 고민하는 방랑자와 같았다. 기차가 가는 방향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빛 속으로 돌진하며 작렬하는 파열음을 비스듬이 바라보고 있었다. 삶을 구겨 넣은 기차가 어느 간이역에서 풀어 내는 사연 모를 사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요약할 수 있는 실존적 분위기란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리기에 나는 지나치게 관조적이며 엄숙하다. 애써 눈물이 나지만, 눈물이라고 다 같은 눈물이 아니기에 금새 식어 버린다.

미안하지만, 내 가슴은 오로지 내 가슴만으로 이루어져 있질 않아서 한번도 간절한적 없던 피가 흐른다. 아직 나는 어느 고장에 가서도 그 고장이 끊임 없이 생산하는 진실에 한번도 진지하게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겉멋과 패션만으로 히히덕 거리며 자신을 돌아 봤을 뿐이다. 나에 대한 관심이 오직 그러함에서 비롯되었으니 무엇이든 하고 나서 후회한다. 한번도 삶을 구기고 더 이상 너덜너덜해지지 못해 풀어 내었던 적 없던 반성은 해서 무엇하나. 간이역이건 제주도건 사구, 석호건 나는 그저 그립기만 할 뿐이다. 내 눈물엔 냄새가 없다.

2007/06/26 02:16 2007/06/26 02:16
DrunkenSTAR 이 작성.

6월

2007/06/08 13:25 / 생활
6월, 71년생인 나는 인생에 이렇게 바쁜 시간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모국어를 잊었으면, 여기가 아니면 어디어도 좋을 것만 같은 자기회의의 시절이 있었는가 싶은데 이 몸이 두세개쯤 되길 바라는 지금 6월은, 나에게 살인적이다. 오늘의 나는 대게의 동시대인처럼 한달을 빈틈없이 산다는 건 어쩌면 제도권의 이율배반에 순응하고 소작의 규율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일 게다. 오늘의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세상을 비판하고 동의하는 여유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흉터가 없는 나는 6월을 빈틈 없이 보내면서 자신에 대한 예의에 충실한 삶을 보내고 있다. 절박함이 없었으니 자유로울 것도 없다. 내 절박함 따위는 과거의 리버스가 아니라 오늘의 절박함이라 상관이 없다. 하지만 오늘의 자유가 내 절박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것은 다른 누구의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일게다. 고맙습니다. 당신들을 기억하겠습니다. 내일의 행복이 오늘의 절박함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깨달으며 그 몫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2007/06/08 13:25 2007/06/08 13:25
DrunkenSTAR 이 작성.

이율배반의 디테일

2007/05/15 03:18 / 생활

전쟁 같은 일상이 함축한 의미는 세계의 실체적 움직임에 순응하느라, 그 전쟁 같은 지독함을 느끼서일 겁니다. 전쟁이 일상 같을 수 없고,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이치입니다만 역한 속물스러움을 느끼는 요즘은 "나 같은" 이란 말맴돌이에 힘겹습니다. 인간을 소통하게 했던 언어가 세계를 구성하면서 예술이 되었고, 과학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은유로 들립니다. 은유의 반열에 이율배반이 있고, 표리부동 따위들도 의미적으로 합리하다고 하니 느끼고 말하는 문턱이 높아지긴 했나 봅니다.
세계의 문턱은 더 고달파졌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멀리 있다면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언어를 끊임 없이 표현해야 하니 일상이 전쟁 같은 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노선이 없는 대중들 보다 다중적인 주체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들과 화해하지 못하여 반사회적이며, 반민중적이라는 타이틀로 공격을 받는가 봅니다. 언어가 있는 세계라면 형식을 통한 감수성이 표현될 것 입니다. 이러한 사조는 전체적으로 일관적일지 몰라도 디테일은 이율배반적 입니다.
자본주의에 살면서 사회주의를 꿈꾸고, 모더니즘의 바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항해하는 모든 형식과 표현은 타당성이 없기에 모순이며 이율배반 입니다. 이율배반을 좋거나 좋지 않은 취미 판단으로 규정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옮거나 옮지 않은 윤리 판단의 잣대에 저울질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사조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 사회는 일정량의 물리적 덩어리가 아니라 이율배반이라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은유의 시대이고 정치적으로는 이미지화 되었으며 예술은 이질적이고 탈중심적입니다. 현대사회의 디테일은 절대선과 절대악, 절대행복과 절대불행의 어중간한 지점을 자유롭게 맴도는 이율배반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얼핏 어떤 정체성도 주체도 없어 보이는 이러한 어중간한 추구에 저항하는 이성은 지향 입니다. 정체성은 확고한 독립이 아니라 지향점 입니다. 지향은 스스로를 여러 형식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잘된 규정은 참 인 두개의 명제를 놓고 이율배반을 노리게 되며 조금이라도 지향에 가깝게 규정하는 것 입니다. 그래도 이율배반인건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자율적으로 규정했는가 라는 지점 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판단한줄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만큼 세계를 구성하는 이율배반의 에너지가 강력합니다.
자율적인 지향과 규정은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들을 규제하고 자율적인 실천에 의지적으로 변해가는 것 입니다. 디테일에 이율배반이 있다고 해서 모든 실천적 의지를 멈춰야 하거나 지향을 수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향이 덜 성숙되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피상적 관점이 지배적일 때 대체로 디테일한 이율배반에 좌절하고 구성된 세계로 안락하게 편입하길 원하게 됩니다.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어려운 시도에 열정을 사치하는 것보다 가깝고 먼 지향을 성찰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 입니다. 자율적으로 말 입니다. 고독은 이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07/05/15 03:18 2007/05/15 03:18
DrunkenSTAR 이 작성.

결혼합니다.

2007/05/10 13:40 / 생활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침묵으로 무성했던 지독한 소문들에 대답합니다. 뭉개친 몸둥이를 한껏 풀어 헤친 기분 입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기특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자 많은 인생에 기꺼이 동참을 눈물내게 했던 사람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하는 말 따위가 건방지고 시덥지 않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걷고, 강물과 먼지를 깨우치며 살아 보이려 합니다. 돈으로 살지 않고 몸으로 헤프게 살아 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어느 미래를 지나치게 꿈꾸지 않고, 지금 아파하고 보듬으며 용기를 내려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단출한 삶도 그칠 것을 압니다. 그때가 되어 우리가 헤쳐온 바다, 그리고 그 깊이를 알아야 할 때가 오면 우리가 함께 흘린 땀과 깨우침의 무게는 지금 그 바다에 던져 넣은 연자맷돌, 그것과 같을 것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결혼하려 합니다.

2007/05/10 13:40 2007/05/10 13:40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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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천재인 준혁의 능수능란한 손놀림을 통해 하얀거탑은 의학 드라마이면서 정치 드라마가 되고 때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휘어 잡아 균형 있게 째고 꿰매는 솜씨 좋은 드라마다. 어쨌든 드라마가 인간사의 어떤 단층을 보여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치정을 불멸의 소재로 다루던 구태의연한 인간 관계를 한층 진지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사실만으로 마냥 하얀거탑의 내용에 열광적으로 동의하거나 긍정할 수는 없다. 목로의 주점에서 정치는 이미 진부하고 식상한 안주거리를 넘어, 분위기 마저 망치는 골치덩어리가 됐다. 행여 정치를 정치하다 라는 동사로 바꾸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사람이 어디까지 추해질지 염려마저 앞선다. 오늘날의 정치는 정치하는 계급과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가 협동하여 온갖 악의적인 텍스트로 점철된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대중과 멀어졌다. 따라서 정치 드라마라고 하면 의래 공화국을 쟁취하려는 선 굵은, 하지만 피곤한 인생의, 남자들의 이야기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정치하는 것이 어디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던가? 게다가 한국 드라마에서 정치 잘하는 여자가 적다고 하여 남자는 정치, 여자는 수다쯤으로 비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하얀거탑이 놀라운 이유는 일상의 정치를 발가벗겼다는 점이고, 반대로 악랄한 이유는 마초와 가부장적 전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선과 악처럼 구도를 그려가는 장준혁최도영을 그대로 양분하기에는 너무 많은 변명이 살아 있다. 인간을 긍휼이 여기지 않고 질병을 사랑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능력과 야망을 이루기 위한 끝없는 교만과 자신감이 불러오는 추잡한 사변들을 용서할 수 없지만, 진정 장준혁의 가여운 인생과 배경도 용서할 수 없을까? 소신과 따뜻한 인간성을 주제로 사람 자체를 보살피는 최도영의 자세를 현실의 조직에 넣고 한없이 긍정하고 동의할 수 있을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세계를 조절해가는 방법은 여간 머리가 좋지 않으면 몸을 숨기는 것 조차 버겁다. 세계가 스스로 바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와 틀이 그렇다. , 만들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장준혁은 만들어진 세계에 최고로 잘 복무한 자의 진골이며, 최도영은 만들어 갈 생각을 하는 이상주의자 즉 반골이다. 가슴에서 반골인 최도영을 응원하면서도 장준혁에 반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드라마가 끝나면서 순식간에 돌아 갈 수 밖에 없는 만들어진 세계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장준혁이 비록 일그러져 있지만, 개개인이 꿈꿔왔던 그야말로 거탑이 아니던가. 정치에 밝고, 말보다 몸이 먼저 아는 리더쉽,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개천에서 용내야 하는 사회에서 이 정도의 수완은 더 이상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기에 우리는 수긍한다. 저런 멘토가 없다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고 보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병들어 있다.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내줘야 하고 기꺼이 이용 당해야 하는 신념과 영혼이 늘어 나는 사회는 명백한 재앙이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패배주의 때문에 우리는 최도영을 고참으로 모실 수가 없다. 삶은 숭고하지만,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제도권의 삶이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밥벌이는 숭고하지만, 밥 벌어오는 과정은 그렇지가 못한 현실은 그 자체로 공포다. 친절하게도 하얀거탑은 이러한 공포가 장준혁과 그의 남자들 즉 남성성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가르쳐 준다. 인간관계를 온통 이익관계로 조립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던지는 조롱 속에 뜬금 없이 여성의 역할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베개머리 송사하는 하얀거탑의 여성성의 구도는 마땅치가 않다. 남성성의 광기가 불러온 이익관계 사회에서 이웃을 더 이상 구속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인간관계로 복구하는 데는 평화와 공존과 같은 여성성이 희망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모실 수 없는 최도영은 남성이지만 여성성의 상징이다. 하얀거탑은 시종일관 진중하게 무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지켜보는 시청자조차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서 진골이 될 것 인지, 반골이 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개인만의 선택이 아니다. 정치를 하는 가부장적 집단에 여성이 진출하는 모습만으로 사회적 여성성을 회복했다고 볼 수 없다. 장준혁의 파멸을 보면서 다시 긍정하는 비겁한 냉소를 던지는 행위가 아닌, 그를 여성성의 사회로 끌어 들여 보듬어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하안거탑은 무서운 사회에서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사회로의 귀환, 최도영을 고참으로 존경하고 기꺼이 모실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이면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7/03/07 00:23 2007/03/07 00:23
DrunkenSTAR 이 작성.

각설

2007/01/03 01:42 / 생활

어찌 되었던 2006년을 각설하고 2007년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지각을 하였고, 미천한 내 직업관은 2006년 12월31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울함으로 가득했다. 한해의 첫날은 지난해의 모든 상념과 풀리지 않은 갈등만을 각설하지 않는 듯 했다. 올해의 첫날을 맞이하는 나의 자세가 오직 지난해의 삶만으로 각설될 수 없기에 하루를 사는 것은 지난 37년이 기억나지 않는 담담함과 무거운 시간의 속력으로 요약되어 달려오는 것을 온몸으로 받기 위해 단단하게 버티려는 신음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올해는 내년 이 시간에 각설될 38년의 순간들을 생각하며 힘을 쭉 뺀 한해를 보내는, 그야말로 가벼운 계획을 세워본다.
그러고보니, 정말 나에게 필요했던 영양제가 이 힘빼기 였지 않았을까, 한번도 힘뺀다는 생각이나 계산을 해보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특별하지도 않으면서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기 위한 가식적인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그 에너지를 그동안 느껴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곳에 쓸 수 있겠구나 까지 염두에 두지 말고 ... ... 가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까지 깔끔하게 끊어 보는 힘빼기. 사실 뒷부분은 다소 정치적이다. 게다가 힘뺀다고 생기는 에너지가 생체적으로 분량을 가늠할 수 없는 열정 같은 것일 테고 그것을 어디 다른 곳에 써야 한다는 염두 자체가 갈등이다. 완전연소되는 매카니즘을 만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그 완성을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담보물이 필요해졌을 때, 그때 나의 자세는 분명 힘빼기의 본질과 다를 것이다.

어차피 내 인생은 그렇게 앞서 가지도 잘나지도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내 인생을 과대포장해주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은 암묵적 동의와 같고, 그 동의 앞에서 과대포장을 더 깔끔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소스를 조금씩 떨어 뜨리는 행위는 마땅히 반성하고 비판 받아야 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에 대한 어떤 접점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행여 남들로 인해 키워진 나의 사회적 어떤 명예가 있다면, 그것을 적정하게 제한하지 않은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과장된 지위를 이용하려는 속셈으로 귀결지을 수 있다.
나는 매우 정치적인 인간이다.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다른 개인이나 조직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다. 사건이 미칠 영향을 흘려 보내거나 이용하고 제한하는 활동을 함으로서 조직 내의 여러 사안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예측하고 관찰한다. 나는 이 모든 활동을 파워게임으로 규정하였고 그 동향을 예의 주시하여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가치를 판단하고 분류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나의 촉수는 온힘을 다하였다.
생각해보니 나의 인생은 대체로 사회적인 관점에서 지각생이다. 대학도 늦게 갔고, 군대도 늦게 갔다. 게다가 금융기관에서 조차 거래를 꺼려 하는 미혼인데다가, 이념적으로도 지각생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가열찬 관념보다는 더 배울 것이 많다는 낭만주의에 아쉬운 소리를 할 참이다. 지각생이니 많은 부분이 독학이다. 하지만. 부처가 아니니 깨닫지도 못했고, 공자가 아니니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힘을 빼면 자연히 비워지고 뻣뻣했던 것들이 물렁해질지는 아직 모른다. 겨우 각설한 한해의 첫날이다.

2007/01/03 01:42 2007/01/03 01:42
DrunkenSTAR 이 작성.

야근

2006/12/09 01:58 / 생활
연일 강도 높은 야근에 남아 나지 않는 건 체력 뿐만 아니라 정신도 온데간데 없다. 마음은 급하고 즉석해서 신기술을 공부하며 장표에 그려내는 작업을 오래간만에 진행하다 보니 세상 물정과는 정확하게 단절된다.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부담이 교차되고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에 무감각해지면 기름칠이 잔득 된 베어링에 가동되는 밀링머신과 다르지 않은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끼니를 굶어 칼로리를 공급받지 못한 뇌는 여러가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베어링을 돌리는데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노동과 가동의 차이가 의심스러운 지점이다.

만삭이 된 아내가 걸핏하면 통증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야 눈치를 보며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동료와 집이 멀어 아예 회사에서 자고 먹는 동료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고 짜증을 부려 따로 따로 찢어져야 할 위기에 있으면서도 새벽이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나는 동료들을 다그치는 나는, 악덕일 수 밖에 없는 흔하디 흔한 제도권의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낸 산출물로 그들의 노동이 신성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기껏해야 자본에 대한 호소라는 현실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가 진심으로 가당치가 않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겨루는 늠름한 모습에 가끔은 허탈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을 계량주의라 폄하해도 할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열악한 IT 근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간극에서 미래의 삶의 질적 향상을 꿈꾸는 순진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악덕 상사의 이름이 곧 자본의 명령은 아닐지 언정, 또는 그들 스스로의 알량한 책임감이나 보람일지 언정, 현실의 일상에 던지는 노력이 미래의 변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도 없는데 오로지 노동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신이다. 하나의 노동에 결합된 여러 관계의 삶에게도 헌신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은 자본이 주고 비로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부담을 느낄 때이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그 부담이 말을 하면 곧 명령이 되고 패배주의와 섞여 미필적 고의로 가장된 강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다른 꿈을 꾼다. 고로 그 부담도 다른 꿈을 꾼다. 그 다른 꿈의 범주 중에 대표적인 항목은 노동은 신성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소외된 노동이 바라보는 조직된 노동이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로 인해 같은 노동에도 클래스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고질적인 분열이 일어 나면 자본은 도리어 끈적하게 들러 붙는다. 그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노동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소외된 노동에게 조직된 노동이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조직된 노동의 움직임이 독재로 보이는 지점도 그 이해의 거리처럼 멀고 평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평행이 만나는 교차점이 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을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점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상호간의 이해와 관심이 떨어진 곳에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축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로 인해 인간적인 것들도 사라졌다.
야근이 끝나기 전에, 동료들을 휘몰아 순대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 겠다.
2006/12/09 01:58 2006/12/09 01:58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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