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달전, 구글로 부터 들어온 인바운드 영업에 대해 회사 내에서 말이 많았나보다. 언어가 달라도 구글 유저 인터페이스의 아이덴티티는 글로벌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와 문화의 발전은 다분히 자생적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인터넷을 닮아 있지 않고 기술의 진보 측면에서도 결코 그들과 뒤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글로벌 기업이나 서비스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겪는 어려움 중에 하나가 한국적 상황에 맞출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패턴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라는 점이다. 그동안 200억에 달하는 R&D 투자를 계약하고 여러 포탈 업체의 인수설까지 가십되던 구글의 한국 시장 진출 전망에 있어서 초미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바로 구글의 메인페이지와 검색 결과 페이지의 새로운 구성이었던 것은 업계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회자된 이야기다.
즉, 검색 포탈이 주도하는 한국의 인터넷 시장에서 검색과 다양한 사용자 어플리케이션 통합 위주의 구글 전략을 일부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사업 방향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라는 점은 http://www.google.co.kr 의 모습에서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경우, 구글은 여러 나라에서 적용하고 있는 전략을 한국 시장에 그대로 도입하여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변화를 꾀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전세계 검색 시장의 60% 를 차지 하고 있는 구글의 고자세가 중국의 보안 당국 앞에서 그들의 민주적인 철학을 버린 사례는 비즈니스를 위해 얼마든지 현재의 구글에서 변화할 수 있다는 탄력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까? 구글이 한국의 몇몇 웹에이전시에 검색 서비스의 유저 인터페이스를 한국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안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와 같이 접수 되었다.
구글의 영업 문의를 드롭(영업, 제안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용어)결정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영업이나 제안 요청을 접수 받고 참여를 결정하는데 검토해야 하는 지표는 대략 1)사업성이 있는가? 즉 사업을 할 역량과 의지가 있는가? 예산이 있는가? Profit 을 낼 수 있는가? 라는 기본 사업성에 관한 Check Point 를 만족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2)내부 자원이 있는가? 즉 사업을 수행할 인적 물적 자원이 있는지 파악한다. 자원이 있고 없음 뿐만 아니라 자원은 있되 해당 사업을 잘 할 수 있는 자원인가 판단한다. 3)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즉 단기적으로 사업성이 없지만, 장기적으로 역량을 확대하고 영업 시너지를 높일 수 있으며 향후 어떤 시점에 이익을 날 수 있는 구조가 될 수 있거나 직접 수익이 아닌 간접 가치가 증대될 수 있는지 파악하게 된다. 우선 순위는 당연히 사업성이다.
제 아무리 구글이라도 없는 건 없는 것이다. 구글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삼는 입장이라면 구글의 사업역량이 그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구글의 유저 인터페이스를 한국적으로 개편하는 프로젝트, 즉 구글 유저 인터페이스의 로컬화라는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로컬화를 통해 구글이 이룰 목적과 그 사업 자체를 논하는 입장 과는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 예산은 있는가? 견적을 보고 결정할 것이란 말은 일단 예산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보고하고 협의 중이란 말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란 뜻이다. 당장은 살펴본다는 말은 아직 의사 결정도 타당성 검토도 내부적으로 진행중이란 뜻 되겠다. 언제 할지도 모르는 사업에 사람을 투입시키고 보는 것은 경영상의 도덕적 해이와 진배 없다. 의사 결정은 어디서 하는가? 구글의 글로벌 특성상, 당연히 이 부분은 탑메니지먼트가 결정할 사안이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최고 의사결정권자까지 공유가 되어야 하는 상황은 그것만으로도 몇달이 걸릴 수 있다는 얘기, 즉 사업 의지가 약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게다가, 구글의 유저 인터페이스를 단기간안에 한국적으로 바꾼다는 전략은 포탈화 전략이라던가 서비스 전략 차원에서 검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부가가치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전체 사업성은 매우 떨어진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자원은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구글의 의사결정이 글로벌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언어 소통 가능자가 필수일 것이다. 투입 예상 인원 중에 단 한명이라도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런 자원이 없다. 구글의 파급효과상 많은 유저들의 평가에 직면해야 함으로 상당한 수준의 HCI 및 UI 지식 베이스와 함께 상당한 숙련도의 기술자가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당장은 그런 수준의 기술자가 없다. 이왕 노동임금을 받고 하는 것이라면 잘해야 하는 것이 상호간의 비즈니스 신의일텐데 내부 자원이 아주 없기도 하고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있기도 하여 뺄 자원이 없다면 본 프로젝트를 할 수 없음으로 결정한다. 이런 저런 판단을 유보하고 일단 수주하고 보자는 것도 경영을 하는 사람으로써 일종의 직무유기다. 마지막으로 전략적인 판단에서 구글은 네이버 보다 휠씬 매력적이다. 하지만, 앞의 두가지가 너무 충족이 안되는 경우, 지나친 욕심은 판단을 흐릴 수 있다. 본 건에 대해서는 아깝긴 하여도 이번엔 상황이 허락치 않으므로 드롭이다. 다른 프로젝트를 잘하고 있고 그리고 계속 잘한다면 기회는 있다. 없어도 지난 일을 아쉬워하지 말고... 따라서 구글의 제안을 드롭한 이유가 되겠다. 사업성 판단해서 안되는 건 구글 할아버지가와도 안되는 것이다.
검색어 '일'에 대한 35 개의 검색 결과
- 2007/01/25 구글의 제안을 드롭한 이유 by DrunkenSTAR
- 2006/07/19 원상태로 복구 by DrunkenSTAR (4)
- 2006/02/15 Web 2.0 의 체제의심 by DrunkenSTAR (6)
- 2006/02/10 소통의 개념 by DrunkenSTAR
- 2006/01/11 REQ: 대화법 by DrunkenSTAR
- 2005/12/28 REQ:? by DrunkenSTAR
- 2005/12/21 슬픈 프로젝트 by DrunkenSTAR (4)
- 2005/05/25 타이레놀식 '화'의 발산 by DrunkenSTAR
- 2005/04/26 Gestalt 이론과 관리의 이항대립 by DrunkenSTAR
- 2005/03/01 구상된 아젠다 by DrunkenSTAR (2)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슈퍼맨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영웅인양 나서서 남의 허물까지 책임져야 할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원복(원상태로 복구, Roll Back)의 의미는 경험상 복잡한 이해관계를 양산하게 된다. 지루하고도 치졸한 책임공방을 치루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의 정밀한 야비함마저 요구하기 때문에 이전에 쌓아 놓았다고 생각한 인간관계조차도 일시에 허물어 진다. 그것이 시스템에서의 원복이 가지는 정치성이다.
시스템을 구현하고 런칭을 시키는 유종의 미의 순간에 원복의 가능성은 예상 스케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동안 종사하였던 10개의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그랬다. 어느 클라이언트가 우리가 남들과 다른 조직적 차별성은 무엇인가? 크리에이티브인가? 마케팅인가? 라고 물으면 '문제 해결 능력' 이다, 라고 답하던 자신감이 무색할 정도로 처음 당해보는 원복의 순간이 촉각으로 다가오자 분위기는 살벌해지기 시작한다.
여러 부분을 맡고 있는 책임자들은 문제 해결의 능력을 보이기 보다는 일단 침묵한다. 침묵은 조직 처세 중에서 면피의 기초 작업이다. 말을 아낀다는 것은 언변의 실수도 있겠지만, 일단 은폐하고 조용히 해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럴 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때로 독립군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최선을 다해 문제해결을 한다는 것은 동업자였다는 일말의 인간적 유대마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보이기는 싫다.
아직 원복의 의미를 체감하지 못하는 팀원들에게는 원복되면 두달동안 집에 못갈줄 알라며 엄포를 놓는 긴장감 서린 선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스케쥴에만 있었던 가능성을 존재치않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어떤 작고 하찮은 단서든 찾아 낼 것을 종용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문제를 파악하고 종용하거나 모티브를 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 실행하여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결국 72시간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원복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현재 원만한 운영 중이다. 8개월, 객지생활, 2주간 런칭 준비, 마지막 72시간의 힘겨운 철야... 오늘은 삼겹살과 소주가 제격이다. 이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속에 조금씩 틈이 생기고 있다. 비가 내려 살벌하게 바뀐 환경도 원상태로 복구 되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예상은 하였으나 보딩메이트는 web 2.0 의 신봉자였다. 대번에 김중태의 시만택 웹 을 추천했고 지난 주 용산 회집에서 건내 받았지만,(고맙습니다) 이미 그 두달의 시간동안 web 2.0 에 대해 꽤 공부가 되어 있었다. 공부는 바로 의식화 되어야 하는 강박관념에 빠진 나와 신봉자는 만날 때마다 web 2.0 아니면 참여연대식 토론(제주도에서 참여연대 간사님들과 보낸 이틀밤동안 터득한 방식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을 즐기게 되었다. 열뗬다기 보다, 즐겼다는 게 맞다. 그랬기에 파무침 같은 몸을 이끌고 남대문 순대국집이나 용산 회집을 기웃거릴 수 있었을 테니까.
방금 전에도 신봉자는 내일 월차를 내고 web 2.0 conference 에 같이 가지 않겠냐며 연락이 왔다. 언감생심, 지방에서 클라이언트의 위세와 나의 자존심을 줄타기 하고 있는 新왕의 남자에게 있어서 몸의 위치는 세치줄을 벗어 날 수 없었다.(미안합니다) 신봉자보다 먼저 간 제자들은 개념과 토론의 단계에서 실체성으로 들어난 web 2.0 의 열기에 긴장 됐는지 현장 실황을 해왔고, 그대로 나에게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일단, 팀 오라일리가 등장하는 다음달, 이 열기는 보일러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단번에 열기가 아닌 현상이 될 조짐이다.
Web 2.0 을 간소적확하게 접하고 싶다면 이정환 닷컴의 관련 포스트를 무료로 읽어 보길 바란다.
고로, 여기서 국민의 9.9할이 모르는 web 2.0 에 대해서, 9.9할에 포함되는 사람으로써 되던 안되던 기술 논리를 펼 생각이 없다. 열기가 있는 영장류 속에 냉담한 파충류로 사는 것을 즐겼던 속사정을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지만, 열기에 대한 경계는 확실하다. 열기를 즐기는 혈액일 수록, 어떤 현안에서도 무임승차에 익숙해질테고 그때마다 쌓인 촛농은 주체를 다른 것과 다르지 않게 일반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다행스러운 건 web 2.0 이 다루는 소재가 독과점적인 MS 나 네이버의 폐쇄회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별한 테크놀로지의 플랫폼에서 사용자의 편의성을 미끼로 던지는 윈도우가 아니라 것, 확장성 브라우저 지원, 어느 언어도 탐색 가능한 유니코드, 사용자 경험의 확대를 위한 AJAX 등이 기동되어 인간 활동에 의해 만들어 가지는 메카니즘의 창조를 돕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한 플랫폼이 아니라(혹자는 web 2.0 이 플랫폼의 변화라고 하는데, 귀에 걸던걸 코에 걸었다고 플랫폼이 달라지진 않는다.)인간활동에 의해 만들어 가지는 메카니즘 이란데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데, 정보의 분류에 참여하고 해석하는데, 마지막으로 정보를 생산해내는데 협력적이냐는 물음에 긍정적이어야 성립되는 메카니즘 되겠다. 컨퍼런스에 스피커나 참석자는 web 2.0의 메카니즘을 더 이상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실체로 접근하고자는 사람들이다.(그래서 나는 신봉자에게 비즈니스적으로 "누가 먼저 실천하는가" 만 남았음을 설했다.)
잠시, web 2.0 의 개념적 원칙인 참여구조가 가져오는 네트워크 효과, 체계질서의 혁신과 분산되고 독립된 개발자들을 끌어 모으려고 짜인 사이트, 콘텐츠 신디케이션에 의해 가능해지는 가벼운 사업모델, 소프트웨어 채택 순환의 종결(영원한 베타), 긴꼬리 효과(Long Tail) 등에 기대어 현실의 열기와 더불어 생각해볼 때 역시 대한민국이란 씁쓸한 단정은 허술하지 않다.
다시, 컨퍼런스에서.. 참여구조와 체계질서의 혁신에 열기를 보여준 0.5할의 참여자들에게 묻는다, 컨퍼런스 스피커가 과연 이 참여와 혁신에 적합한지 의문은 들지 않았는가?, web 2.0 을 핑계 삼아 성장 동력으로 삼기에 충분한 정보 권력자들이 모여 열기를 팽창 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싸이좋게 살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 SK, 내 정보는 내 정보 니 정보도 내 정보인 네이버가 web 2.0 을 얘기하고 그에 열광한다?
어쩐지 이 열기는 그들이 앞으로 분명히 펼칠 한국형 web 2.0 의 출발이며 독점적 정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전 포석 쯤으로 보인다. 나는 그 열기에서 2년전 노무현 정권이 보여준 정보 통합의 마인드, NEIS 의 사상을 보게 된다.
인간의 적극적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질 어떤 메카니즘이 체제의 혁신에서 비롯될 것이란 희망적인 메시지는 단숨에 한국형 체제의 종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정보 통합을 통한 권력의 유지를 선호하는 실용진보의 씁쓸함을 느낀다.(정보의 통합은 정보의 권력을 낳는다. 왜냐하면 통합은 독점을 의미하고 독점속에 나누어야 생기는 기본권은 줄어 들거나 없어지기 때문이다.) 참여와 혁신을 통한 정보의 질적 향상도 애초에 어떤 2.0 속에서도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보의 질적 향상은 정보의 양적 보편성에 대한 반기이지만, 나아가 정보 복지 즉, 나누는 정보로 이어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특히, 정보를 이합집산하고 그를 통해 자본 계정을 만들어야 하는 네이버 같은 집단은 폐쇄성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체험적으로 구글 애드센스를 설치해보았으나, 그로 인해 구글이 web 2.0 의 모범생인지, 수혜자인지 구분이 모호해졌다. 게다가 의심까지...)
한국형 web 2.0 은 우연에 기댄 낮은 정치 수준에서 원칙없는 모호성이 가미 되어 체제 2.0 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직업에 있어서 지식을 말하고 기술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소통 하느냐에 따라 리더쉽과 태도로 연결된다. 그래서 소통하다라는 것은 감관을 이용하는 유용함의 장르가 아니라, ~에 의한 설명의 장르, 그 설명은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내가 이룬 세계의 장르가 대상이 된다. 내가 이룬 세계의 장르는 지식과 기술, 사상과 이념, 표정과 자세, 억양과 눈빛 등 현재의 나를 이룬 과정의 총체가 된다. 의지와 표상이 다른 세계가 순간적으로 소통을 이룰 때, 그 총체는 오로지 나를 보여주며 소통을 하나의 사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냥 말하다와 소통하다는 테마가 틀려야 하고, 소통의 대상(대체로 사람)에 대해 책임과 경외가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그냥 말하다 만으로는 어떠한 공유도 진정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타인의 세계를 엿보기 위함이 아니라 내 세계로의 초대임을 잊었을 때, 소통하기는 말하기가 되고 그냥 말하기는 쉽게 세계간에 충돌을 야기 시킨다. 그러므로 힘들고, 우울증(센치의 우울과 다른 우울)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아직 그의 세계가 누구를 초대할 만큼 형식이 없거나, 애초에 품위, 즉 싸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통해야 될 시점에, 내용 없이 그냥 말하려던 사람이 있어 다시 원래 자리에서 소통의 테마로 돌리기 위해서는 대략 1시간, 피곤과의 투쟁, 저녁 식사 정도는 가볍게 스킵해줘야 한다. 사회적으로 그 책임 때문에 나에게 노동을 허락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그나마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것 쯤은 서글픔과 거리가 멀다.
Ex. #1 무시 후 정리
80갑자 내공 소유자에 해당하는 방법으로 프로젝트 초기 단계 회의 시, 중도에 신규 시스템의 도입 시 기선제압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시며 먹지 말라는 사과를 먹을 줄 모르셨던 것 처럼 최초의 무엇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기껏해야 예상 정도 이다. 그 무수한 예상을 늘어 놓는 것은 지식의 발현이나 리더쉽이 아니라 갑자 형성이 안된 설레발일 뿐이다.
최초에는 최초로 만나는 온갖 외갓 사람들이 인식적으로 경계하며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남다른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지만, 결국 예상을 늘어 놓는 설레발에서 벗어 나지 않는다. 얘기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도대체 처음 제기됐던 문제 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때, 설레발은 그 난형난제의 이야기속에 참여 하기를 유혹한다. 유혹의 이 순간이 이야기의 무시를 통해 관심의 빛을 밝혀야 하는 때이다.
!주의
물어오는 것에 대한 완벽한 무시가 아니라,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무시의 모양새이다. 상대가 묻는 것은 대답해줘야 한다.
무시에서 온통 무시로 마친다면, 상대는 관심을 거둬들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가차없이 변모시킨다. 무시는 아주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집나간 정신이 아니다. 무시는 거만의 모양새와 관찰의 정신되겠다. 모양은 날라리처럼 보이되, 돌아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관찰하여 머리속에 정리해 두고 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흙탕물에서 놀던 사람들은 그속에서 나와야 될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끈적끈적하니까... 이때, 이 무시로 인간의 관찰적 정신은 몇개의 카테고리를 이용하여 흙탕물을 버무려서 찰지게 만들고 앞으로 얘기해야 할 것들과 누가, 언제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가야 하는지 조각내어 정리해준다. 알고 있는 예상에 대한 늘어 놓음이 아니라, 현재까지 자리에서 나온 얘기들을 묶고 분리한 정리만으로 기선제압은 충분하다.
!Action
화이트 보드를 이용해서 카테고리를 글로 쓰고 간단히 도식화시켜주면 90갑자 되겠다.
요건정의(REQ : Requirement) 단계의 첫번째 대화법 되겠다.
첫 번째 문제 인식 : How requirements could be full listed? and then how listed requirements should be break-down?, finally, how many requirements have to convert to form of flow?
첫 번째 문제 인식은 Skill 의 문제로, 탬플릿을 토대로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다. 길(프로세스와 탬플릿)을 가르쳐 주면 해내는 것(Out-put)은 오롯한 것이다. 프로세스와 탬플릿은 형식이다. 형식에는 전문성이 깃든다. 그렇다면 내용은?
더 큰 첫 번째 문제 인식 : Who has charge of this requirement or section?
관리자의 Overview 는 어떤 업무의 90% 이상을 How 로 보지 않고 Who 로 연결하는데 있다. 업무(Work-package)=담당자(Staff)의 일대일 Matching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리자에게 지식의 강도는 전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성에 있다. 따라서 관리자는 넓은 지식을 개념화 시킬 수 있고, 개념화된 지식에 동기 부여(Motivation)를 시킴으로써 실제 업무 진행자(Player) 에게 전달하게 된다.
개념화 시킬 수 있는 지식을 가진 관리자는 카테고리를 구성할 수 있고 개별 카테고리에 대한 work-package 를 알고 있다.(알고 있어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먼저 해야 할 일은 각 카테고리와 담당자의 연결이다. 대부분 의뢰인(Client)의 조직은 대리인(Consultant)의 것보다 방대해서 이 연결고리를 찾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일단 연결고리가 되면 관리자의 경험과 기술이 혼합된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여 업무가 개념화 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요건의 내용이다.
요건의 내용은 앞서 말한 형식에 주입되어 비로서 요건의 셋트가 되고 요건의 셋트는 '요건 정의(Requirement Define)' 가 된다.
한 좌담회에서 '너무 복잡한 프로세스와 형식을 따지는 것 아닌가?' 라는 물음에 이미 오래전에 칸트 선생이 친절히 답을 했다. 통찰(사상)이 아닌 직관을 가지기 위한 요건정의 활동에서 개념이 없으면 맹목이 되고, 개념은 형식(대상이 표상되기 위한 시선, 그리고 문서에서는 항목)의 토대로 부터 비롯된다. Cutting edge 의 현대사회에서 아름다움은 형식으로 부터 깃든다. 하물며, 시각의 자극(아름다움)에 신념을 던지는 사람끼리의 소통에서 형식이 없으면 마음이 아무리 착해도 꼴보기 싫은 법이다. 언제 열길 사람속을 다 들여다 보며 프로젝트를 하나?
누구나 의지를 펌프질 하여 내보내는 통로가 있다. 작은 세계의 한 단편으로, 그리고 제도권 안에서 내가 다시는(한동안 장기간은) 의지를 펌프질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 프로젝트에 대해 너무 복잡하지 않게 생각을 돌려 먹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은 그 이유를 들먹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아팠으나, 태연할 수 밖에 없었던 예전의 슬픈 프로젝트 보다, 굳이 내가 생각지 않던 프로젝트에 와야 하고 해야 하는 당위의 가난이 슬플 뿐이다.
시간을 소비하고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의 소실점에 다다른 나의 세계는, 바로 낯설고 즉시 추억을 펌프질하기 시작한다. 어디든 새로운 공간은 즉시 시간을 흘리고, 의지는 시간을 추억으로 재현하기 마련이다. 프로젝트 라는 단기 노동은 히스토리의 재현, 즉 재현의 재현, 시뮬라크르 놀이이다. 놀이의 포인트는 속도이다. 속도는 현실의 상태와 협잡하여 재현의 원칙들과 타협하려 든다. 속도는 늘 경제와 사회윤리를 뺀 경영을 그 이유로 든다. 속도가 늘 그럴때 나는 맞서 왔는가? 속도가 두려운 나는, 늘 할말이 없어 늘 허투 글을 쓴다.
누구나 슬픈 프로젝트를 하기 싫은 건, 소중한 시간 흘릴까봐 슬프거나, 속도에 협조하는 자조적인 사회주의를 반성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단지, 낯익음을 굳이 버릴 이유가 없어서다. 그것은 가벼운 당위의 표상일 뿐이다. 불편에 감사할만큼 나의 오체는 튼튼하지 않다.
더욱 거대한 슬픔의 이유는 '오로지' 내가 갈 수 밖에 없는 판단을 해야 했던 조직과 결국 '오로지' 나 뿐인가 라며 나르시즘에 빠졌던 어처구니와 다른 갈등이 도사리는 낯설은 공간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 그리고 조직의 갈등을 아이러니로 규정하고 그 딜레마를 해방시킬 투쟁에 인색한 거만한 프롤레타리아들의 집합체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걱정하게 하지 않고 치밀어 화를 내게 한다. 울화는 도리어 슬프기도 하다.
성대가 약한 나로서는 성대의 힘이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에서 자꾸만 얼굴을 붉힌다. 요즘은 혈류가 성대를 통해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화를 돋우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 화가 무척 난다.
왜 이 프로세스가 빠졌는가? 왜 이 프로세스가 빠졌는데 이제서야 노티스가 되는가? 왜 이 프로세스는 적절히 구사가 안되었던가? 왜 이 기능은 개선이 안되는가? 왜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단어를 취사선택하지 않는가? 왜 Order & Check 을 하지 않고 flow 되는가? 왜 전제를 흔들고 하위 논리를 조립하려 하는가? 난, 일과 관계된 모든 상태에 실제로 화를 내고 화가 난다. 속으로 화를 내면서 현황 파악에 나서고, 각 팀원들과 꼬깃꼬깃 화를 펼쳐 놓으며 상태의 유지, 상태의 전개방법에 대해서 논의하거나 일방적으로 꾸짓기도 한다. '무조건 시키는대로 이렇게 해' 란 방식은 나랑 맞지 않는데, 엇그제는 화를 참을 수 없어서 몇가지는 독재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스스로의 화가 밖으로 표출되고 나서 정신과 마음이 온통 침잠해져서 압구정 오뎅집 '정든 집' 에서 살얼음 핀 정종을 수어잔 마셨다. 화를 낼 수록 머리도 자주 아파온다.
프로세스를 빼 먹고 진행한 프로젝트 리더를 조기 철수 시켰다. 엄중한 징계로 생각했으나 정작 본인은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평가의 실현을 통해서 깨움을 주어야 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생략된 프로세스의 상태를 유지시켜서 14 라운드를 뛴 프로젝트에 타월을 던지지 않고 갈 것인가, 일단 타월을 던지고 프로세스를 정비하고 갈 것인가? 성대에 힘을 주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에 리스크 책임자로써 뒤늦게 침목을 놓는 격이다. 문제는 프로세스의 생략으로 인해 각 이해 당사자간에 감정적 반목이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는 것. 프로젝트 룸의 분리와 프로젝트 리더의 방만한 운영이 초래한 결과가 생각보다 큰 gap 을 가지게 되었다는 오늘의 현상에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세스는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아는 프로세스는 문제가 없었을 경우에만 적용 가능한 것이다. 몸만 알고 있는 프로세스는 제각각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에 Feed-Back 되는 문제에 대해서 각각 방안이 달라서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없고 능력도 되지 못한다. 이럴때 도덕적 해이는 충분히 요령을 찾아 내려고 하고 계통을 따르지 않고 은폐하려는 의지가 발동하게 된다.
나이가 경력이 있다는 말도 허풍이다. 끊임없는 이성적 반성과 창조적 책임이 없는 경력은 공허하다.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역할의 Object 와 Activity, Activity 에 따른 Action Plan 이 있고 그에 따르는 직관과 책임에 대해서 서술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준엄한 화를 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을 포기하고도 누군가를 리드 하겠다고 리드 했다고 하는 것은 맹목이다.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스트레스로 회귀한다고, 행여 공든탑의 종말을 선언하는 서글픔은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면 나로 시작하는 세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열정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 몸이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생체적인 악성을 만들어 내더라도 일에 있어서 그것이, 나의 아우라가 되었으면 한다.
이쯤에서 저는 게쉬탈트, 이 넘 이론이 아니라 소설 아니야? 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이 넘의 이론은 고객체험의 경제를 꽤 뚫어봤다는 생각이 들면서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군집의 성향은 고객의 성향과 일치합니다. User 에서 Customer로써의 변화 관계와도 비슷한데... User 는 개별적인 존재인데 반해 Customer 는 Mass 적인 존재입니다. 검색엔진을 통해서 들어오는 User 가 아니라 누군가를 데리고 같이 들어와 즐기는(이 부분이 중요합니다)Customer 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Customer는 내가 즐기고픈 것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즐기는 것에 대해서 희생할 수 있는(주로 남친이나 남편이죠)사람을 원합니다. 잘 보십시오, 주위에 진정한 Customer가 있는지... 그렇다면, 고객체험의 경제에서 흡수와 몰입을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체험과 미적체험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것도 군집이라는 매우 탄탄한 이론과 함께 말입니다.
위에 말씀 드렸던 “즐긴다”는 것은 체험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체험이죠... 내가 직접 참여하면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겁니다. 옷을 고르면서 직접 입어보는 것도 이런 체험 마케팅의 한 방법입니다. 미적체험은 그 상황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는 체험입니다.
친구와 내가 잘 가는 백화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숱하게 돌아다니다가, 혼자서 쇼핑을 하다가 우연히 아주 멋진, 정말 멋진 공간 또는 매장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입이 싼 나는,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과장해서 말하고 친구를 끌고 이 공간 또는 매장을 찾습니다. 친구도 만족을 하겠죠(가정에 의해서)… 나와 친구는 반드시 지금 무엇인가를 사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사겠노라고, 그것도 경쟁적으로친구보다 먼저 사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을 느낀 사람은 반드시 참여, 즉 엔터테인먼트 체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비싸건 싸건 그건 문제가 안됩니다. 싸면 바로 사겠죠… 비싸더라도 나중엔 반드시...
군집의 이론으로 인해 한 사람에게 국한된 매출이 두 사람이 되고 입이 싼 그 두 사람으로 인해 돈의 군집은 늘어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차명계좌의 기술적 보안이나 자금도피에 대한 세탁이론에 더 관심을 가질 것 입니다.
[2001년 10월9일, Gestalt 이론과 고객체험의 관계]
모든 경우에 모든 컴포넌트를 이용해서 모든 설명을 하고 싶어 하는 Management 마인드가 모자라신 클라이언트에게 딱히, 컨설팅적인 회피 언어가 생각나지 않던 머리를 대신해서 입술이 군집이란 단어를 뱉어 놓았다. 이어서 입술보다 늦게 머리가 과거를 소급해서 2001년 10월의 게쉬탈트 이론을 찾아 냈다.
조망하지 못하는 정신모델은 끔찍한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고 리스크를 생산한다. 그 정신모델은 경험과 인식의 범주를 부정한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을 향한, 모든 것을 위한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는 미국식 Business administration 의 합리론적 견해이다. 비즈니스의 합리성은 필요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이란 비즈니스가 합리화 된다. 실제로 그러한 administration 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즉, 필요의 인식과 추진력만 있으면 비즈니스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어떤 사업, 사업성의 믿음이지 사업을 진행하는 관리의 믿음은 아니다.
비즈니스를 조망하는 management 는 비즈니스의 인식이 곧 관리와 동일하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Management 는 경험과 데이터에 의한 관찰에 의해서 완성되는 비즈니스에 촛점을 둔다. 비즈니스가 완성되는 것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것, 즉 간트차트, WBS 같은 것에 경험적 판단을 동원하여 정해진 것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활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관념적인 '모든' 이란 믿음은 관찰할 수 없는 덩어리로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논외의 대상이 된다.
관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합리적이란 이유로 믿음을 승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합리란 무엇인가? 도덕, 세상사, 제 각각 다른 가치관, 규범 등이다. 이를테면, 왜? 노인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관리한다고 했을 때, 합리적이라면 나이 많으신 노인 이고 도덕적으로 그래왔으며 경험이 많고 지혜의 대상이기에 깍듯이 인사를 해야 한다, 로 정의하고 모두 인사를 '잘' 하도록 관리할 것이다.
관리하는 사람의 관찰에 의한 관리는, 노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먼저 양손을 다리에 부치고 두발을 모으고 제자리에 서서 목을 60도 굽히면서 동시에 허리를 40도가량 정면으로 굽히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머리는 그대로 각도를 유지하고 먼저 허리를 천천히 펴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세운 다음 노인의 반응을 기다렸다가 가던 길을 간다, 그렇게 하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단계가 빠졌고 어떻게 하면 빠진 단계를 할 수 있게 하는지를 관리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면 Gestalt 이론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지적이라 생각했던 설득보다는 술한잔과 인간적인 뭉개짐이 휠씬 효과적인 소통이 되기도 한다. 다만, 비즈니스의 믿음만으로 근대화를 이룬 성장경제의 이념이 실은 관리 부실이었다는 역사를 부정할 수 있을까? 이항대립쌍에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 이전에 무엇의 산출물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관리의 이항대립과 대립하는 Post
가당치도 않다고?
내일 activity 3.4.12.5 에 대한 업무가 오후 4시에 회의를 거쳐서 협의가 끝나고 6시까지 프로젝트 게시판에 회의록이 등록될 수 있도록 독려해서 6시 10분에 프로젝트 관련자들에게 공유하도록 이메일을 쓴다고 예측하고 관리한다면, 여자친구와 7시에 예매를 해놓은 영화를 보고 9시에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예술적인 사생활까지 예측되니 아주 가당치 않은 것도 아니다.
예측에 대한 가당치 않음은 예측이 schedule 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측은 Task 와 Activity 가 가지고 있는 scope 를 측정하는 관리자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세계에 도달하는 관리 능력은 각 Task 와 Activity 들의 명징한 scope 에 달려 있고, 그 scope의 파악이 명확하다면 schedule 은 그것들의 순서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불행이도 프로젝트 현장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내일의 실수를 줄이기 위한 Risk 관리 활동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밀린 빨래를 한다는 것은 두번, 세번 같은 양말을 신지 않기 위한 Risk 관리 활동이고, 겨울바다를 보지 못한 후회는 Risk 관리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다.
탈수가 끝난 빨래를 널면서 나는 닥쳐올 위험(Risk) 에 대한 생각을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나열해본다. 영업팀에서 들은 클라이언트에 대한 의견이 먼저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PMBOK 에 의하면 프로젝트의 공식적 시작은 계약서의 날인, 경영자의 임명, 법적 이유 등을 들고 있지만,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시작은 PM 이 프로젝트를 인식할 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질료가 있어야 예술활동을 할 수 있듯, 프로젝트를 재료로 인식하는 프로젝트 관리자의 역할모델이 정립되는 드라마틱한 시점이 프로젝트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빨래를 할 때거나,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말 때건, 언제까지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계약금액은 얼마이며, 클라이언트 조직은 어떤 성향인지, 물끄러미 생각할 때... 비로서 PM 의 역할모델은 현재 진행형이 된다.
The purpose
우피치 미술관의 보티첼리 룸에서 3시간째 '프리마베라' 를 보는 동안 어떤 위대한 예술작품도 한 인간의 눈을 3시간이상 붙잡아 둘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인식은 너그럽지 못해서 경외와 존경의 짧은 외마디가 사라지고 나면 작품의 흠도 찾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실연을 하고 찾아 온 동해의 어느 빨간 등대 앞에서도 소주 한병을 병채 마시고 나면 그만이다. 상처는 자꾸 긁어야 아픈 법, 놔두면 자연이 딱지지고 떨어지는 것이 이치다.
프리마베라를 3시간째 보는 눈과 관심이 전환되는 팝업형 인식과 최강의 사랑과 실연의 반전, 그리고 복수하듯 다시 찾는 사랑과 예술에 대한 짧은 심취, 이 모든 것은 자꾸 긁어야 아픔을 느끼는 열정의 절편들이다.
소소한 일상과 가당치도 않은 프로젝트는 산업혁명의 분업화가 이루어 놓은 세계의 개체화임을 인정해야 한다. 유기적이며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믿고 있는 세계가 실은 파편 덩어리였음을 역시 인정해야 한다. 그토록 절절한 사랑도 그리움이 터질 것 같던 프리마베라도 다시 긁지 않는 이상,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합리성이 그것이다.
따라서 내 의도는 경영의 개체인 프로젝트가 일상이 아니고 일상은 예술적이지 않으며 인문학적 순수함이 비즈니스의 영악함을 상대할 수 없다는 담론을 파괴하는 모반을 획책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파괴의 속성은 합리적 개체화와는 다른 의미이다. 그것은 규범적이며 합리적이라 믿고 있는 담론에 대한 파괴이고, 그 파괴의 잔재위에 논리와 경험의 예제가 두개의 탑을 쌓을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이 두개의 탑을 감싸 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열정의 절편들이 어떤 변증법적 총체가 되기 위한 정전기이다. 다시 말해, 일상과 예술과 비즈니스가 부대껴 일어나는 순간을 탐구하는 것이 내가 구성할 글의 총체이다.
가당치도 않은 거창함을 설정하는 것은 숨어서 하는 반항을, 보여주는 모반으로 승화시켜 위험을 더 위험하게 만들고자는 의도이다. 그것은 어떤 관리자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는 '책임있는 위험 수반자' 라는 제 1법칙과도 상통한다.
The synopsis
행복한 인생들이 넘쳐나서인지,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에필로그까지 행복은 그냥 두기로 한다. 행복한 에너지는 폭발적이지 않다는 근거로 내 인생의 궁극적 현재인 프로젝트가 중심을 이룰 것이다. 예술적 감수성은 감수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양념이 되기도 하고, 때론 이미지나 텍스트를 비즈니스로 설명하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개의 탑이 형성하는 컨셉에서 사용할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을 것이고 교과서나 인용에 포괄적으로 기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관적 관점의 보완은 실용적이며 위험한 방법으로 극복될 것이다. 이를테면, 실명과 실제 비즈니스를 명명하고 실제 산출물이 예제되는 위험천만한 시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은 행복한 일상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음을 인정한 전형적 일상이다. 예술은 현대시와 소설의 텍스트와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신고전주의, 인상주의의 미술로 인용되는 이미지를 말하게 될 것이다. 프로젝트는 산업분야 중에서 인터넷 비즈니스 프로젝트의 라이프 사이클에 관한 것이다. 라이프 사이클은 수주와 수행 그리고 수행 이후에 대한 단계까지 포괄적으로 산문될 것이다.
모반은 크게 세개의 장으로 구성할 것이다.
첫번째 장은 프로젝트와 일상, 두번째 장은 예술과 프로젝트, 세번째 장은 일상과 예술과 그리고 프로젝트의 재구성이 될 것이다. 각 장의 단락들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제목할 것이다. 물론 각 장은 개별적이지만,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수필적인 일상과 소설적인 예술이 퓨전되는 아우라가 될 것이다.
이제, 외로움을 배우며 슬픈 모국어로 6월까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구상을 끝내다.
씨티그룹 프로젝트 룸에서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