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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고픈 사람들을 위한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의 평가가 식상하여 '간접체험에 의한 기준' 과 세상의 중심이 오스트레일리아는 아니지, 라는 시니컬에 입각하여 감상하지 않았다. 감각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어떻게 외쳤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세상의 중심이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니라는 생각은 지리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세상의 실체를 지구로 한정지었을 때, 지구의 중심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울룰루(에어즈락) 라는 거대한 암석이 있는 지대라고 한다.
공간적인 배경을 배제한 '세상' 이라는 단어는 매우 관념적이다. 관념적 분석에 따르면 세상은 '나' 와 '주변' 이 차별되고, 나를 이루는 '세계'와 주변을 이루는 '우주'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 와 '세계' 는 끊임없는 '부정 不定' 이 존재하고 '주변' 과 '우주' 는 신화적 '믿음' 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를테면, 나를 세계와 관계 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 '필연' 이라는 정체성을 생성하고자 하는데 반해 주변과 우주의 관계는 '우연' 의 연속성에 지배 받는다. 따라서 나를 인정하는 정체성은 필연의 속성에 의해서 그 본질의 표상을 얻을 수 없고, 주변의 우주는 우연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지나가는 것' 에도 믿음을 부여하여 그 존재를 인지하려 한다.
간단한 진리론의 사각형에 의한다면 우연과 믿음은 존재를 인지하는 것임으로 본질적이지 않고, 필연과 부정은 현상적인 정체를 얻으려는 것임으로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중심에서의 외침은 나와 세계의 중심에서의 외침인지, 주변과 우주의 중심에서의 외침인지 구별되고,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관념이 현상적이고 본질적인 발현인지, 믿음으로 그 존재을 사유하는 것 인지, 밝혀진다고 볼 수 있다.

주변 우주의 우연성은 현대인의 생활양식과 일치하고 다양성의 촉발로 인한 세계로 부터의 정체성 부재 또한 동시대인이 겪는 정신적 질환과 다르지 않다. 현대인이 지닌 생활양식은 우연적인 우주에 맞춰서 발전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나침', '지나가다' 라는 우연적인 키워드가 우주를 이루는 네트워크 즉,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도구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익히 짐작하다시피 가장 극명한 예가 인터넷이다. 우연성의 네트워크인 인터넷은 지나침 이라는 키워드가 만들어낸 생활양식이다. 인터넷 속에서의 '나' 는 모든 텍스트를 우연적인 상징체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떤 노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다' 도착한 노드들의 클러스트링인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의 양식은 현실적인 주변 우주에서도 척박한 땅을 이러저리 헤매이는 노마딕 Nomadic 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 된다. 한편 그런 관점은 우주성 자체는 우연적이지 않고, '나' 라는 에고의 우연성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하지만, 주변 우주의 클러스트링은 우연적(인지하지 못했던) 노드들로 둘러 쌓여 있고 '나'는 '지나가다' 라는 키워드로 노드(다른 에고)와 텍스트(지식, 감정, 정보 등)를 상징체계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주자체가 우연성을 지니게 된다. 우연적 우주, 척박한 땅, 가치와 전통에 통제되지 않는 노마디즘 Nomadism 의 '나' 가 실은 자유로운 에고의 가치를 지니고 변화에 능동적 가치부여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인의 동적, 심리적 자유는 필연적 정체성의 가치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라는 필연적 키워드를 창조하기 어렵다.
노마디즘 Nomadism 의 '나'를 그저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여행쯤으로 완성 시킬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함으로써 에고의 에고다움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디바이스 device 만 주어 진다면 어디를 유랑해도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정체(停滯)된 정체(正體)를 추구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적 양식은 치고 빠지기식 삶을 능란하게 만든다.

따라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는 자기 부정을 통한 정체성과 필연성이 없는 에고들의 감각적 상징체계일 뿐이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여 '나' 의 정체적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노마디즘의 의지가 없는 여행자들이 공간적 여행지에 대한 동경을 외친 것 뿐이다.
2004/12/01 18:22 2004/12/01 18:22
DrunkenSTAR 이 작성.

인간의 퀄리티

2004/11/24 18:04 / 생각
모든 인간은 존중 받을 가치가 있고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난 이 말에 동의하고 싶다. 예외적인 것들이 관리대상이 되는 직업적 소명감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결혼하는 여자, 몸 파는 여자, 결혼하는 남자, 몸 사는 남자, 군대간 남자, 군대 안간 남자, 빽으로 군대 뺀 남자 모두...)에게 기본권은 명명 백백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외없이 인정하고 싶다. 하지만, 고3학생 강의석 군의 학내 종교의 자유 보장에 대한 똘레랑스적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쓰레기 리플을 다는 사람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퀄리티는 Low 와 High 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 : 전학가지-_-
행복한아이 님 생각 / 2004.10.21

미션스쿨이 그렇게 싫었음 예전에 떠나지 왜 지금까지 남아있었지?
강 군의 저런 행동,,내 눈엔 한심해보임.
곧 있으면 수능치고,졸업할텐데..
졸업하면 학교랑 자신이랑 이제 상관없는거잖아..-_-;
몸 망치고,인생망치고..쯧쯧
저런 애들은 대학이나 직장에서도 안 받아줄 듯..
맘에 안드는거 있음 또 단식투쟁할지 누가 알아?;;


제목 : 학교에서 전학보내준다고 그랬다는데...
yj 님 생각 / 2004.10.21

왜 안갔을까...궁금하네.
미션스쿨은 자기자본으로 기독교교육 시킬 수 있는 자유도 있는겁니다.
그런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따지면 국가에서 미션스쿨 인가를 내지 말았어야지...


이런 저절적 인간들이 곧잘하는 허무적 발언은 악법도 법이다 라든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던가, 더 나아가 1명 죽인 사람은 살인자고 100명 죽인 사람은 정복자라고 추켜세우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이런 허무적 저질 인간들의 등장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이를테면 아나운서 출신 국회의원 한선교의 튀는 행동(원내에서는 원희룡 의원이 튀는 인간 취급을 받지만 내가 보기엔 한선교 의원이야 말로 튀는 인간이다.)은 자기 생각 없는 인간의 퀄리티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가 발언해준 원고 쪼가리는 오직 당론으로 귀결되어 당당당 거릴 뿐만 아니라, 홈페이지의 '선교생각' 의 편린들조차 자기 생각은 고사하고 조,중,동에서 찍어준 보도자료 찌끄러기와 별반 차이가 없는 내용뿐이니 한선교 의원의 모습은 곧바로 오랜 수구인 정형근과 김용갑의 도플갱어처럼 보인다.

강의석군과 원희룡 의원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미운 오리새끼처럼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대체로 '저 새끼들 군대 보내야 되', '군대 가면 고문관 될 놈들' 이라는 그들만의 대단한 논리로 미운 오리들의 주장을 반박하려 한다.
대체로 그들의 아주 뛰어난 능력은 부당한 폭력에 굴복할 줄 아는 것과 자기보다 잘난 인간을 인정할 줄 몰라서, 또는 인정하기 싫어서 꼴통 주장에 거품 무는 것 뿐인데도 말이다.
2004/11/24 18:04 2004/11/24 18:04
DrunkenSTAR 이 작성.

영원히 그리울 사랑의 기억,

이 기분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주방 의자에서 다이빙하듯 털썩 떨어지는 조제처럼, 가슴에서 무엇인가 주저 앉는 듯한 이 기분을 말이다.

영화 전반에 깔린 외로움의 실체는 감당하기 조차 힘들다. 그것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조제의 공간, 휠체어 대신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유모차와 미닫이문으로 갈라 놓은 방구석, 조제의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보통의 외로움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인 조제, 사강 또한 외로움과 밀접한 소설가인데다가 얼핏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제목은 무리생활을 하지 않는 호랑이와 비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심연에서 무리지었으나 어둡고 외로운 공간속의 물고기들도 조제 처럼 삶의 부족함이나 불편함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원히 그리울 사랑의 기억, 그 자체가 결핍이며 외로움이라고 애써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들처럼...
2004/11/15 12:24 2004/11/15 12:24
DrunkenSTAR 이 작성.

관점

2004/11/11 20:11 / 생각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고 고등 교육 받고 직장 생활하다가 결혼하는 착한 여자, 먹고 살만하지 못하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으면서 몸까지 파는 나쁜 여자. 고로 나쁜 여자의 기본권은 부정하거나 무시해도 된다.
- 마초 남성과 여성 단체의 관점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너냐? 네
날 기다려주던 사람이 너냐? 네
미친 놈, 미친 년이 서로에게 정신을 팔아 버리는 대화.
고로 그들은 결혼을 한다.
결혼은 그래서 미친 짓이다.
그래서 미친 짓이 맞다.
미친 짓도 할만 하다.
- 결혼하는 친구와 대기중인 나의 관점
2004/11/11 20:11 2004/11/11 20:11
DrunkenSTAR 이 작성.

고모님 생신은 기억이 특별하다.
재작년 봉평에서 1박 2일 동안 팬션을 빌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싱싱한 송어회며 소시지를 구워 먹던 캠프파이어 까지, 피붙이들끼리 이런 부산스러운 모임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 나이가 들어 가시는 어른들은 갈수록 돗수 낮은 술을 찾으신다.
어제, 다시 돌아온 고모님 생신... 혼자 살고 있는 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으면서 찾아 뵙지 못한 것이 엔간히 찔리기도 했는데, 조금 넣은 용돈 봉투를 드리면서 더 젊어 지시는 거 같아요, 했더니 웃으시면서 봉투를 냉큼 챙기신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웃기던지... 손을 잡았더니 돌아가신 할머니의 손과 어쩜 그렇게 똑같은 지...
형들과 술이 두어 순배 돌아가고 행정수도이전 위헌에 대한 얘기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서 그 때문에 손해본 사람들의 사연을 얘기하다가 힘들지만 지금의 정치적 다양성과 자유가 기득권과 연관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의견에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찾는 지금의 현상이 더 활발해야 하고, 지금 우리가 힘든걸 견디지 못하면 저기 있는 저 조카 애들이 다시 짊어질 짐이 아니겠냐고 낮술에 약간 췻기가 오른 뒷말까지 덧붙였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 대뜸, 노무현이 이따위로 정치해서 이렇게 힘든데 그래도 노무현이 좋다고? 하신다. 한나라당의 절대 지지자 이시고 모 국회의원의 여성후원회장이시기도 한 어머니는 정치 얘기만 나오면 열이 난다시며 뭘 모르는 애들이나 우리당 지지하고 노짱 지지한다, 라고 일축하신다. 뭘 모르는 것, 도대체 내가 뭘 모르는 걸까?
저만치에서 듣고 계시던 큰아버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집안에서 찍으라는 사람 찍었고, 지지하라는 정당을 지지했다, 하신다.
집안에서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게 된 것은 국민참여정부 바로 이전으로 돌아간다. 이것도 하나의 다양성과 다름의 증거로 고민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집안 어른들이 다 계신데 큰아버지께 반기를 들 듯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는데요, 라고 말은 못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는게 내 생각이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아버지는 나를 나는 내 자식을, 이런 피붙이 구조를 전적으로 가부장적인 구조로 파악하고 부정할만한 용기는 없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집안의 정치성향을 따라가야 할 이유도, 적당한 당위성도 없다. 이를테면, 피붙이니까... 정도가 이유가 될만 하겠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마땅히 당신의 생각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신탁, 반탁으로 서로가 갈갈이 찢어지다 못해 전쟁을 통해 형제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셨을테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그 모진 인권 유린의 시대에 몸을 움추리고 살아남는 법도 배우셨을 것이다. 살아오신 삶의 지혜를 오늘의 잣대로 섣불리 폄하할 수 없는 시대를 견디셨다는 점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피붙이의 그것으로 더는 얘기를 꺼내지 않고 고분이 앉아 있었지만,
내 생각은... 여전히 다르다.

P.S 읽기..

2004/11/01 01:14 2004/11/01 01:14
DrunkenSTAR 이 작성.

신화가 될 판결

2004/10/22 14:08 / 생각
헌재는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에 있어서 근거의 서두가 관습헌법이라는 무영의 표상이라고 판결했다. 길거리에서 치기어린 쌈박질로 법과 맞닥들였던 일개 시민인 나는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고매하신 지식과 영롱하신 지혜를 가지셨을게 분명하다고 믿었던 재판관나으리가 "보이지 않는 것도 믿으면 헌법"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봉건시대 대청마루에서 마당쇠에게 이르는 추상과 별반 다르지 않음이다. 결국 우리들은 우매한 마당쇠가 돼 버렸다.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하고 무관의 제왕이라는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고 배웠다. 관습법이 성문헌법의 우위 개념이라면 판결문은 굳이 쓸 필요가 없겠다 싶다. 구문의 관습처럼 말씀으로 하시면 될 것을 말이다. 그래도 이것은 근거로 남겨야 되겠다 싶으셨는지 또렷 또렷 판결문을 읽고 배포하심은 영롱한 지혜의 돋보임이라 하겠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개 시민이지만, 민주의 의미는 절차와 근거의 주의이고 공화는 도덕적 권리의 출현 주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공화주의가 결핍의 민주주의를 보완한다 점에도 동의한다.

서울이 수도여야 하고, 부동산 값 안정이라든가, 기타 등등의 사회적 논의 대상을 배제했을 때, 아니 헌재는 그 사회적 제한을 판결의 기준에 포함시키는 순간 헌법을 수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을 하는 다른 헌법기관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되물어 봐야 할 것이다. 헌재가 수호해야 할 것은 서울은 수도다 라던가, 부동산 시세가 아니라 6월 항쟁으로 이룩한 제6공화국의 100여 조항에 달하는 근거가 있는 글자 헌법이다.

믿어왔던 관습이 성문헌법에 우위라는 생각은 판결문으로 먹고 살아오신 고매하신 지식이 실제로 고매하신지 까뒤집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뿐이다. 기초 언어학에서 의미를 가진 것은 오직 가시적 현상에 의한 본질 뿐이다. 믿어왔던 것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언어적 의미를 가지고 사회적 합의점을 낼수 있는 근거는 기호이지, 믿고 있는 어떤 존재감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결코 본질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수도이전의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논하기 전에 헌재의 생각은 매우 신화적이다. 그것은 달달 외우실 헌법조항을 다시 한번 조명하기는 커녕 정치적 이슈에 매달려 근거없는 봉건적 관습주의로 미봉하게된 근거이다. 이 결정은 명백히 피로 이룩한 6월항쟁의 명예를 회손한 것이고 절차와 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민주주의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이나라에 대해 사표를 던지고 싶게 만드는 고매하고 영롱한 판결되겠다.
2004/10/22 14:08 2004/10/22 14:08
DrunkenSTAR 이 작성.

칠성상어의 동경

2004/10/19 22:04 / 생각
남해의 완도군 보길면 예작도에 살고 있는 이항제씨는 마지막 상어 낚시꾼이다. 주낙이라 불리우는 낚시바늘을 이른 새벽에 바다에 던져넣고 셀로판지 같은 태양이 수평선에 오그라들 무렵이면 이네기라 불리우는 칠성상어의 거친 몸부림을 기대하며 주낙을 걷어 올린다. 대략 2 미터쯤 되는 상어를 두사람이서 잡는데 쓰는 도구는 상어의 콧등을 쳐서 기절시키는 몽둥이와 아가미를 잡아서 걷어챌 쇠꼬챙이가 전부다. 칠성상어가 사람을 해치는 상어는 아니라고 하지만, 시꺼먼 수면을 기어이 박차고 솟는 육중함은 저 심연의 밑바닥에서 잠자던 공포이기에 충분하다. 그런 공포의 콧잔등이를 보잘 것 없는 나무 몽둥이로 수차례 내려치는 이항제씨의 굵은 팔뚝은 이미 어부가 아니라 엑소시스트다. 상어는 이내 펄떡거리던 생존 의지를 반납해버리고 만다.
폭풍이 이는 날이면 자유로운 심연을 허덕였고, 날이 선 작두 지느러미를 별에 비춰보던 밤, 조류에 내맡겨진 몸이 천수로 썩어 모래바닥에 눕혀지길 동경하던 칠성상어의 생의 마지막에 보는 것이 이항제씨의 몽둥이였다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디를 가야 할지 조차 모르고 어떻게 가야할지도 모를 절대공간의 바다, 제 아무리 속력을 내더라도 꽉 막힌 현실에 부딛치지 않았던... 하지만 상어는 기껏해야 시속 5노트로 그리도 고단하게 퉁퉁거리며 오고서야 겨우 닿은 곳이 소금기 얼룩진 춘추복 상의를 툭 털면 밀려오는 비릿한 냄새의 예작도 포구.
살 한덩이는 준경이 시집가는데 잔치 음식으로 쓰이고, 살 한덩이는 마을 노인정 경로잔치에 쓰인다고 끌려가고, 꼬리 지느러미는 특별히 이항제씨가 챙겨 빈 쌀독에서 삭혀지고...

더 이상 날생선의 푸른 동경은 없을지언정... 나는 반포동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처럼 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펄펄 뛰는 활어는 아닐지언정... 나는 어느 날 포구 어귀 좌판에 늠름하게 펼쳐져 있는 칠성상어 일테다.
2004/10/19 22:04 2004/10/19 22:04
DrunkenSTAR 이 작성.

난... 문 열고 있는가?

트랙백 sending : 김규항 블로그
2004/09/22 20:23 2004/09/22 20:23
DrunkenSTAR 이 작성.

지킬박사와 하이드

2004/08/16 21:07 / 생각
무엇을 이용하던지 간에 글쓰기란? 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가벼운 글쓰기의 매체로 온라인을, 도구로 블로그를 사용한지는 적잖은 시간이 됐는데-물론 시스템은 여러번 바꿨지만-여전히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택스트에 대한 심리적 충격은 한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쥐오줌 핀 골방에서 두고두고 퇴고를 하다가 찢겨진 원고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글쓰기의 손쉬움...
사람은 이런 손쉬움속에서 정신적 빈곤함 이나 경박함과 조우하게 된다는 것을 몇몇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죽음과 다를바가 없다. 죽었으나 살아 있는, 살았으나 죽은 듯... 정체성의 창작이 사라진 시대속에서 진중권의 신화와 민중창작의 관조는 지켜볼만한 주제였다.

선과악의 경계가 주는 안락한 금가르기는 관념의 진출을 저지하는 바리케이트와 같아서 마치 이곳에 있는 책은 소설이고 저쪽에 꼿혀 있는 얄쌍한 것들은 시다. 라고 구획한 대형 서점과 다르지 않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로인해 우리가 스스로 죽인건 자의식에 기반한 철학적 담론이 아니던가... 음유적 명주실의 시와 뜨거운 입김의 장광설의 소설을 형태로 구분하거나 남이 구분해준 것으로 나눈다는게 얼마나 관념의 바리케이팅한 짓인가...

때론 정체성의 논란에서 본다면 지킬박사와 하이드 만한 캐릭터가 없다.(아수라백작?) 그 로맨틱한 배경 또한 이 젠틀하면서도 잔혹한 선악의 캐릭터를 연민으로 부각시키기도 하니... 거의 완벽하다.
일전에 친구가 내 영혼을 평가하기를 Trans Spirit 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이렇다 저렇다 하다는 것인데... 당시, 나의 변명은 기억하길... 언제나 나의 인격이 100%를 발휘하지는 않아~ 어떨때는 내 인격의 10%만 보였는데도 그 사람은 날 그 10%의 인격자로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그땐 잰틀했는지 사악했는지 알수 없지만 말야...

변명은 했으나, 나는 그의 발언에 동의하는 편이고 나의 변명에도 합리성을 부여하는 편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어원적 근거도 있다.

인격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연극에서 배우들이 캐릭터 표현 겸 확성기로 썼던 가면, 즉 페르소나(persona)에서 나왔다.
어쩌면 인격이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품위 있는 인간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가지 상황에 맞춰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즉, Trans Spirit 한 품성을 얘기하는 지도 모른다.

미스터 하이드의 악마적 능력은 곧 우리의 자아가 인정하지 않은 모순적 자아의 표출이다. 실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신의 자아가 이런 모순적 자아가 되지 않기를 이성으로 기도하며 마음의 적으로 규정해버렸을 뿐이다. 하이드는 물리쳐지지 않는다.
누구나 모순된 자아의 하이드를 가지고 있다. 모...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내 정신적 소산의 텍스트들은 일종에 내 자아의 하이드다.
게다가 그런 하이드적인 마인드가 상상력과 결합했을때 휠씬 텍스트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따라서 바로 그때 정체성의 창작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는데 여러가지의 글쓰기 중에서 억지로 하이드를 불러내어 쓴 글과 그렇지 않을때의 글은 너무도 차이가 나서 실상은 나조차도 내가 쓴글인지 또는 내 정체성이 맞는지, 정신적 모순의 상태를 가늠하기 어려울때가 있다.
퍼블리싱의 가벼움을 통해서 정신적인 진지함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자아의 이중자아을 불러내어 다양한 자아의 생활의 먼지가 상상력과 결합하여 빗어낸 노을의 겹층이 더 볼만 하다는 것은 나에겐 두말할 나위가 없다.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릴러 뮤지컬이란 타이틀로 조승우와 류정한이 데블캐스팅된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21일까지 공연한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란 수식어에서 미녀와 야수를 제작하고 세계 4대 뮤지컬에서 5대로 늘린 마케팅 상술 같아서 웃어버렸지만,
This is the moment(song by Colm Wilkinson) 란 이 노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힘이 있던가...
Once upon a Dream 이나 Someone like you 는 또 어떤가?
뮤지컬은 음악으로 본다는 말이 맞다.
역시나 한글로 개사를 한 버전으로 공연중이지만, 흠... 하이드의 악마적 유혹이 들끓기 시작한다.
코액스 오디토리움에서 한다는데 알기로는 그곳은 공연을 할만한 장소는 아닌듯 한데, 조승우라는 연기자의 지킬의 이미지가 어떻게 하이드의 악마적 카리스마로 변하는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다. 게다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음악은 그대로 심금을 울렸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켓츠가 모두 그랬다는데 정서적 합의점이 있다. 그러나...
지킬박사의 마인드로 그 순간을 같이 할 moment for moment 지킬박사나 하이드가 있을까? 말이다...


This is the moment 가사보기..

2004/08/16 21:07 2004/08/16 21:07
DrunkenSTAR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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