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휴가를 끝내고 회사로 복귀한 아내가 복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2박3일 워크샾을 가게 됐다. 갓난 아기 핑계로 빠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아내의 회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너만 애 키우냐, 따위의 아주 유치한 이유로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종일 맡아 주시기로 했다. 나 마저 그 잘난 프로젝트에 목이 매어 야근이 잦은 터여서 아침에 잠깐 보고 밤 늦게나 되어야 아이를 잠깐 안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뭘 아는지 모르는지 시큰둥한 표정이다. 아이를 한팔에 안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현지야 엄마하고 전화해 볼래? 여보, 현지 안고 있으니까 한번 불러봐
아내가 전화 넘어로 현지야 현지야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아이는 금새 표정이 달라지고 전화기 속으로 빨려 들어 갈듯이 몸을 뒤틀어 얼굴을 기울여 들이 민다.
여보, 당신 목소리 어떻게 알아 듣고 전화기로 얼굴 들이 민다.
그새 아내의 목소리가 뚝 끊기 더니 미안해 미안해 하며 펑펑 운다.
괜시리 나도 울컥해서 울고 말았다.
애기랑 처음 떨어져 보니 울만도 하지, 어머니가 한마디 거드시고 아이를 재운다며 들쳐 업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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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 쏟아지는 강북 강변에서 어느 조상님이신지도 모르고 제사를 지내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런 식은 아니지만 제사 내내 조잘거리는 조카들에게 절하는 법을 가르치다가 덩달아 기계적으로 절만 드리다가 온 꼴이다. 조상을 모시는 행사로서의 제사가 꼭 유교의 종교적 의식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우상으로서 받드는 의식에 있어서 다른 종교가 전제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가치가 유교의 제사에서 다른 종교보다 떨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우상이 한때 같은 시공간속에 있었던 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거나 오늘날의 종교적 믿음이 어느 정도 강요되고 있는 현실의 무감각 때문일 수도 있다.
가족이라는 사회적 공동체가 피의 대물림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감만으로 비롯된 당위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치관 자체가 실은 유교적인 전통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닮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작은 단위의 사회는 반드시 그 피의 존재감으로 부터 시작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족의 가치를 이룬다는 생각은 마치 보편적인 사상처럼 보인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장 거창하게 착각하는 언어가 휴머니즘이나 인도주의 같은 것이다. 이러한 착각된 언어에 쌓여 있을 수록 가족이라는 집합을 대할 때 '가족이니까' 라는 말로 그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설명된 것처럼 뭉둥그리는 가장 나쁜 태도를 보이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인간의 종족 번식의 시작이 아니라는 점, 적어도 법률적으로나 사회의 불평등한 시각이 존재하는 한 가족은 본능적 출발점도 아니라는 인식은 피의 계통을 따지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절대 인식되어 질 수 없다. 가족이니까 라는 태도는 제도가 규정한, 또는 그렇다고 믿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그렇지 못한 가족의 구성원에게 강요하는 지배적 관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상처일 수 있고, 악의 온상일 수도 있고, 희망을 가로 막는 벽일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에서 가족 문제 전문가라는 자들이 가족에게 상처 받은 자들을 다시 가족속으로 밀어 넣는 감동어린 장면은 가족 휴머니즘의 오락일 뿐 실제로 그 상처를 치유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장면은 다시 '가족이니까' 로 대변된 피의 존재감으로 부터 시작된 가족을 대하는 가장 나쁜 태도인 전통적 당위로 가족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족은 사회 공동체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가족안에서 생동하는 사랑이나, 인간적 정리를 가족의 테두리만으로 한정하는 둘러싸기의 전통에서 벗어 나야 한다. 사회 공동체적 가족은 공동의 선의 실천에서 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가족이라는 구조가 모두 행복하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치관은 그 구조가 가부장적 구조로 확립되었을 때만 성립한다. 가족의 구조는 생산적인 아버지와 내조적인 어머니의 단란하기 그지 없는 구성만이 존재할 뿐 그에 대비한 결손에 대해서는 가족이 지녔던 사랑과 인간적 정리를 과감히 거두어 버린다. 가족도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있는 사회제도 속에서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인정이 가족을 사회 공동체로 인식하게 되는 출발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겠지만, 가족이 언제나 개인에게 궁극적인 안식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개인에게 심대한 상처를 주는 가족에 대한 우리의 공동체적 시선이 앞서 말한 그래도 가족이니까 란 당위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존재할 때 다른 가족의 안전이 안중에 있을리 없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쟁이나 이 세상의 어떤 전쟁 또한 마찬가지로 가장 먼저 파괴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관계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남의 가족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전쟁에 대한 참혹함에 대해 대체로 염려하면서도 이를 비롯되게 한 이스라엘이나 미국에 대한 협오감은 삼가한다. 왜냐하면 제사로 이어져온 전통적 가치관이 공동체로 승화되지 못하고 오래동안 탈무드와 헐리우드식 휴머니즘에 노출되어 은연중에 슬기로운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으로 갈라져 있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문제 인식의 낙후가 그렇게 다시 이루어질 가족에서 시작하여 다시 가족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 생각하면 가족이 사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여전히 공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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