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의 습득과 사고의 확장은 일상 생활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삶의 한 부분이다. 교육은 가정, 일터 등 모든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반일리치는 '탈학교론' 에서 학교가 교육 자체와 제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 사회의 교육은 대체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행되는 기능으로 국한 된다. 이러한 한계가 교육을 형식적으로, 빈부와 지역간 격차, 학벌주의를 조장함으로서 실질적인 인간 교육을 시키지 못하도록 한정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반일리치의 학교를 떠나라 - out of school - 라는 다소 과격한 주문은 현대 사회의 서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이다. 교육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나 학교를 떠나 수행될 수 있는 교육을 일반 대중들이 감당하기에는 현대 사회가 그 비용과 시간을 호락호락 내주질 않는다. 그런 까닭에 공교육이란 이름의 제도적 체제가 존재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는 리트머스는 교육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좌, 우 이념이 현실과 가장 첨예하게 갈등하고 정직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비웃으며 기득권을 활용한 사교육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며 경쟁이 더 치열해지길 바란다.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교육을 경멸하며 교육에 대해 성찰하며 비인간적 사회구조를 비판하지만 결국 티 안나게 사교육에 빠진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문제를 대체로 공교육의 비현실, 사교육의 고비용으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독성이 사회로 흘러 들어와 엉망으로 만드는 순환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 비현실적인 곳에서 자녀를 교육 시키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다. 따라서 좌파나 우파나 이 순환고리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비용을 감내할 수 있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되었다. 교육의 문제는 결국 대결 구도 속의 비용의 문제일까.
한국 사회에 있어서 교육의 문제가 비용 측면으로 다뤄지는 것은 제도권 교육, 이른바 교육의 사회적 안전망인 공교육의 퀄리티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안전망을 찢어 버릴 수도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마인드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마인드는 계몽과 각성만으로도 충분히 반성되고 실천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 마인드가 요구하는 것은 '각오' 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 위해 운전면허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의 1종과 2종은 필요에 의한 기능으로만 작동하지만 일반고와 특목고는 '목적' 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이 제도 안에서 변별력과 수월성에 의하지 않고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교육은 더욱 더 안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도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개인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란 것을 누구나 안다. '각오' 는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정치적이어야 하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제 주제를 아는 수 밖에 이 사회를 비춰보고 있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떻게 이명박이나 공정택을 그렇게 욕하면서 자녀를 학원에 보낼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1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물음은 그 자체로 지나치게 순수하여 폭력적이다. 경쟁을 빌미로 공포를 확대하는 보수정치인이나 사교육기관의 마케팅의 악랄함과 맥락을 같이 하는 좌파적 근본에서 어떤 부모도 그 자신과 자녀를 해방시킬 각오는 하지 못한다. 좌파적, 사회주의적 신념을 쫒는다고 해서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자녀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학원을 모두 국유화하지 않고서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이전의 자연적 교육관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이러한 상투적인 물음조차 패배자 처럼 느껴진다. 교육을 때려 칠 순 없고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알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새삼 느낀다.
검색어 '계급'에 대한 3 개의 검색 결과
는 신자유주의, 반민주주의 정권을 지탱하는 두 계급이다. 부자는 경찰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경찰은 권력을 가진 부자나 또는 그냥 부자를 성심 성의껏 지킨다. 부자와 권력을 겨냥한 비판은 경찰과 부자가 아닌 계급에서 나오고 경찰은 부자를 위해 기꺼이 비판과 맞선다. 서민은, 엄밀히 말하면 돈없고 빽없는 서민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경찰을 때론 존경할 때도 있지만, 부자는 자신들을 아무리 지켜줘도 경찰을 존경하는 법이 없다. 지팡이와 끄나불의 차이다. 게다가 경찰은 부자가 되지 못하고 부자는 경찰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정에 밝은 어떤 경찰은 경찰이면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모색한다. 경찰이 부자가 되려면 로또에 당첨되거나 권력을 핥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에 열심히 헐떡 거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반민주주의로 전속력을 내는 이유는 경찰이 경찰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는 노력을 경주하기 때문에 가속화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부자인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연일 올림픽 열기가 뜨겁다. 무게를 들고 내리는 역도가 그렇게 몰입성이 강한지 어제야 알았다. 사재혁이 금메달, 기뻐해줄 일이다. 그의 금메달에 내 감정을 함부로 이입시켜 기뻐해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대게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우리나라 사람, 한민족, 대한민국 이런 전통적 멘탈리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기뻐해줄 수 있다면 기뻐해줄 수 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사족을 달 이유도 없고 그저 평범한 사람의 그것처럼 잘했다고 기뻐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영광과 기쁨을 함부로 나누지 않고 오로지 사재혁에게 돌려 주는 일도 잊지 않고.
개인의 영광과 기쁨을 전통적이거나 체제적 멘탈리티에 묶어 함부로 나누려는 시도는 개인의 독립적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언론매체와 국가로 부터 나온다. 이것은 실질적 공동체가 없는 계약으로 해석되는 이익사회 즉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사회일 수록 더욱 열광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밖은 온통 인간적 연대를 잃어 버린 삭막한 정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기를 원하지만 절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잘 살기를 원하는 관계로 자신의 기준을 조정한다. 따라서 스스로 삭막한 정글을 만들었지만 인간이란 본능적 부대낌과 살가움에 목말라 한다. 이 멘탈리티를 정치적으로 묶어 함께 기뻐 할 수 있는 금메달로 정의하여 선동하면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에 아무나 껴앉고 웃을 수 있다. 이 살가운 풍경, 오랜만이지 않은가?
공동체 지향적인 사회라면 이 살가운 풍경에 열광하진 않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항상 인간적 연대를 적당히 유지하는데 금메달을 땄다고 더 살갑고 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저 그 노력과 영광에 박수 정도. 그런 사회는 아마도 이배영을 함부로 영웅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실패로 얻은 국가적 영웅 타이틀을 4년동안 노력한 금메달의 영광과 바꾸기 위해 올림픽에 출전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금메달보다 더 행복할지 모를 일 아닌가. 대게의 사람들이 올림픽을 국가적 행사나 국가적 경쟁 무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올림픽을 사생활로 본다. 어떤 개인이 어떤 개인과 4년동안 고독과 외로움을 통해 수련한 자신을 겨루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미디어 때문에 다 까발려 지긴 하지만 금메달? 그 영광은 그의 오랜 수련에 대한 영광일 뿐. 국가적으로 그게 모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올림픽 10위? 올림픽 10위인 우리나라는 영장 없이도 인도에서 촛불 켜고 쥐새끼 쥐구멍엔 볕들 날 없다고 외치면 강제로 잡아가고 64일째 단식으로 억울하게 뺏긴 밥그릇 좀 찾아 달라고 물이 가득찬 폐를 부여 잡고 있어도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올림픽 10위 따위를 국가적 규정으로 인식하는 이런 천박한 주책에서 벗어 나야 한다. 이런 수준의 교양이 정권이나 권력으로 부터 나왔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더욱 치명적이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제 밥그릇 못 찾은 이배영을 안타까워하며 제 생활속의 밥그릇은 어디다 뒀는지도 모르는 못 가진 사람들의 순진함이다. 천박한 주책은 그래도 최소한 이런 순진함을 이용이라도 한다. 대한민국, 올림픽 10위가 네 밥그릇 보다 중요해, 64일 단식하는게 뭐가 중요해 올림픽 10위라니까. 국가가 공동체일까. 특히 오늘날 우리가 사는 국가는 구성원이 있고 공동체가 존재하는 국가일까. 공공이 민영으로 치닫는 이 끔찍한 상황에서 못가진 자들 끼리 서로 도와 밥그릇 찾아 주는 일에 이렇게 인색해도 되는 일일까. 올림픽은 사생활이다. 그 사생활에 박수쳐줄 여유가 있어 좋다. 64일째 단식으로 제 밥그릇 찾는 사생활에도 우리의 여유가 발휘되고 다시는 억울하게 뺏길 일도 제 혼자서 고통 받아야 하는 일도 없기를. 하지만 오늘도 그들은 죽어 가고 있다... 언제쯤 그들이 먹을 수 있을지...
개인의 영광과 기쁨을 전통적이거나 체제적 멘탈리티에 묶어 함부로 나누려는 시도는 개인의 독립적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언론매체와 국가로 부터 나온다. 이것은 실질적 공동체가 없는 계약으로 해석되는 이익사회 즉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사회일 수록 더욱 열광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밖은 온통 인간적 연대를 잃어 버린 삭막한 정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기를 원하지만 절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잘 살기를 원하는 관계로 자신의 기준을 조정한다. 따라서 스스로 삭막한 정글을 만들었지만 인간이란 본능적 부대낌과 살가움에 목말라 한다. 이 멘탈리티를 정치적으로 묶어 함께 기뻐 할 수 있는 금메달로 정의하여 선동하면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에 아무나 껴앉고 웃을 수 있다. 이 살가운 풍경, 오랜만이지 않은가?
공동체 지향적인 사회라면 이 살가운 풍경에 열광하진 않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항상 인간적 연대를 적당히 유지하는데 금메달을 땄다고 더 살갑고 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저 그 노력과 영광에 박수 정도. 그런 사회는 아마도 이배영을 함부로 영웅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실패로 얻은 국가적 영웅 타이틀을 4년동안 노력한 금메달의 영광과 바꾸기 위해 올림픽에 출전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금메달보다 더 행복할지 모를 일 아닌가. 대게의 사람들이 올림픽을 국가적 행사나 국가적 경쟁 무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올림픽을 사생활로 본다. 어떤 개인이 어떤 개인과 4년동안 고독과 외로움을 통해 수련한 자신을 겨루는 일이다. 현대 사회의 미디어 때문에 다 까발려 지긴 하지만 금메달? 그 영광은 그의 오랜 수련에 대한 영광일 뿐. 국가적으로 그게 모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올림픽 10위? 올림픽 10위인 우리나라는 영장 없이도 인도에서 촛불 켜고 쥐새끼 쥐구멍엔 볕들 날 없다고 외치면 강제로 잡아가고 64일째 단식으로 억울하게 뺏긴 밥그릇 좀 찾아 달라고 물이 가득찬 폐를 부여 잡고 있어도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올림픽 10위 따위를 국가적 규정으로 인식하는 이런 천박한 주책에서 벗어 나야 한다. 이런 수준의 교양이 정권이나 권력으로 부터 나왔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더욱 치명적이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제 밥그릇 못 찾은 이배영을 안타까워하며 제 생활속의 밥그릇은 어디다 뒀는지도 모르는 못 가진 사람들의 순진함이다. 천박한 주책은 그래도 최소한 이런 순진함을 이용이라도 한다. 대한민국, 올림픽 10위가 네 밥그릇 보다 중요해, 64일 단식하는게 뭐가 중요해 올림픽 10위라니까. 국가가 공동체일까. 특히 오늘날 우리가 사는 국가는 구성원이 있고 공동체가 존재하는 국가일까. 공공이 민영으로 치닫는 이 끔찍한 상황에서 못가진 자들 끼리 서로 도와 밥그릇 찾아 주는 일에 이렇게 인색해도 되는 일일까. 올림픽은 사생활이다. 그 사생활에 박수쳐줄 여유가 있어 좋다. 64일째 단식으로 제 밥그릇 찾는 사생활에도 우리의 여유가 발휘되고 다시는 억울하게 뺏길 일도 제 혼자서 고통 받아야 하는 일도 없기를. 하지만 오늘도 그들은 죽어 가고 있다... 언제쯤 그들이 먹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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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 2009/06/18 20:0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DrunkenSTAR 2009/06/19 12:51 편집/삭제 댓글 주소
MBC 의 올해 캠페인이 '험한 세상에 다리 되어' 랍니다... 무척 험합니다. 올해만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