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을 보고 선거에 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가 이미지로 가벼워지는 현상을 개탄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이명박은 정말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의 대게는 이명박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무현이 싫어서가 해답이다. 이를 통해 대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짐짓 이러한 장미빛 미래의 담보가 이미지와 반정부 정서에 의해 형성된 마당에 정책이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이명박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진보의 이데올로기 찬탈을 그야말로 끈기 있기 주입했던 보수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진단하는 상황이다. 당선 됐으니 정책을 재검증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개이치 않는다. 어차피 이제와서 정책을 살펴봐야 별 수 없는 노릇인데다가 민주주의의 작동은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의 작동이라 생각하기 시작한 민중들의 집단적 행동에 토를 달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 술자리에서도 열심히 논의 했던 것이지만, 중요한 건 계몽, 그리고 계몽을 주도할 언어, 언어를 공유할 조직인 셈이다. 하지만 계몽도 언어도 조직도 모두 어려운 하수상한 시절이다. 진보라는 개념은 거의 비틀어졌다.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비정규직이 되어 88만원세대의 반열에 들어 있어도 제도적 거부를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이 사회에서 낙오됐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자괴와 더 열심히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는 긴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계몽의 주제와 주체는 이 자괴와 긴장만으로 뭉친 덩어리를 해체하고 다시 재조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몽도 폭력이라며 나자빠질 드라마적 언어 비판을 일삼는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의 자기 중심적 패션은 더 이상 시대를 관통할 수 없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대선 진단은 옳다. 하지만 언어의 개발을 위해 언어에 집중하는 이유가 계몽에 있지 않고서는 합목적적이지 않다. 게다가 운동적 방식도 불특정 계층과 동시대의 모든 대중에 있어서도 생산적이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장미빛 미래에 좌절하고 아무것도 인정 받지 못하는 세대를 새롭게 조직해야 하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절한 세대에게 저항과 투쟁의 진보적 언어로는 세대를 조직할 수 없다. 이것은 좀 더 이미지적인 메시지여야 한다. 흔하고 어떤 대화에도 불현 듯 끼어 들어 유머가 되거나 상처가 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어 뿐만 아니다. 실은 세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대를 분리시킨 지난 세대의 잘난척에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건 아주 간단하다. 운동해보지 않은 세대를 배제 시킨 잘난척이다. 이로 인해 세대는 다음 세대와의 교감을 중단했고 세대를 돌보지 않았다. 단절된 세대는 그만큼 좌절했고 사회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셈이 되었다. 연대는 보증처럼 부정적 정서를 함유하게 되었고 나만 책임지고 나만 잘되면 되는 세대가 되었다. 서로 서로를 보듬어도 지난 세대가 만들어 놓은 단절적 사회구조를 연결하거나 뚫어 내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세대는 각개로 움직인다. 누군가는 파산할 것이고 그 만큼의 잉여를 바라며 버틴다. 센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놈이 센 놈인 영화적 언어가 세대의 담론에 방점을 찍는다.
언어, 계몽, 조직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이다. 80년대 좌파적 언어다. 현실은 이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낭만적 개념이 저항과 투쟁을 대변해야 한다. 이를 만드는 일은 현재의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현재 진보가 단절시킨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순서를 논하자면 조직이 먼저다. 사실, 언어는 기존 세력에서 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에서 할 일이고 계몽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흘러야 한다. 이제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라 해야할 문제가 남은 셈이다. 장미빛 희망인지 미래인지... 선거는 끝났다. 이제 조직이 그것을 만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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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은 분절된 역사를 잇는 희망의 연속성이다. 역사의 연속성 안에 현재를 놓는다면 현재는 희망이 없다.
결국 짝퉁 개혁진보는 짝퉁임을 역사 곧곧에 아로 새겨 넣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김근태에 대한 역사적 희망은 공중 분해 되었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기록조차 민망스럽다. 사학법 개정에 대한 빅딜에 처연하게도 민생을 들먹이는 작태에 대해서 이제서야 제 길을 찾은 것이라 위안을 삼을 민중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민생이 딜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야 하는 문제인식이 자칭 개혁진보들의 고상한 정치공학이었다는 점이 경악스럽다. 경제 지표만을 바라보고 있는 대통령의 좁은 시각에 있어서 민생은 어차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인데다가 그것을 스스로 양극화라는 허울 좋은 정치 텍스트로 포장지를 만들어 판도라 상자를 쌓아 놓았으니 풀지도 못하고 반송도 못하는 정권이 되었다. 스스로 정통성을 개혁과 참여로 설정한 정권의 반동을 민생의 문제만으로 서사할 수도 없다. 그나마 개혁의 이름으로 사립학교법에 대한 논의가 자주성과 공공성에 담론하고 있었고 정권의 정통성이 그 담론 안에 담보되어 있다는 점은 개나 소나 아는 사실이다. 단, 그것을 주장했던 자칭 개혁진보 세력들의 짝퉁들만이 간과하는 주지의 현안은 그야말로 가치관이고 역사고 다 집어 치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실은 그 법의 실효를 통해 민중과 민중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4대 개혁법안은 개혁이란 이름의 상징일 뿐이다. 밥벌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숭고한 민중의 삶에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과거사진상규명법 등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하지만 정치하는 기득권으로 단기적인 민생의 처우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앞서 오늘날의 열매를 따는 우리에게 지난날의 핍박과 억압의 굴레속에서 김을 매고 거름을 친 선배들을 가르치는 의미가 저 4대 개혁법안 아니었던가? 그것은 상징이었고 이 정권이 하지 않으면 않되는 역사가 아니었던가? 정치공학과 역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정권 앞에서 학생의 정체성이나 노동자의 정체성 따위는 논할 가치가 없어진다.(이미 가치 없는 계급임을 강조하는 수많은 조치와 정책들이 난무하지 않던가?) 강대국 논리, 수구 논리, 글로벌리즘 같은 거대 논리 앞에서 굽실거리는 집권세력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 따위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놀랄만큼 그들은 무지하다. 이러한 무지는 작통권 환수 반대를 주장하는 720여인의 반공주의, 사대주의 지식인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들이 행위한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들이 지식인이란 타이틀로 모두가 같이 만든 역사를 배반하는 선언에는 오직 노무현에 대한 맹목적 반감만이 있을 뿐이다. 역시 정치공학을 최선의 립싱크로 이용하는 내용 없는 사유를 즐기는 자칭 지식인들, 짝퉁이다.
집권세력이 내놓은 수많은 정책들이 정작 민중을 외면하고, 그들이 외면하고픈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주장과 다름이 없는데다가 그 코드에 있어서 첫번째로 일맥상통하는 것을 업적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한 수구 지식인들의 작통권 환수 반대 선언은 그야말로 개콘이다. 이것을 침묵했던 지식인의 일갈이라는 조선일보 다운 언론관이 앞장서서 무가지 함으로서 반지성적인 행위가 지성의 행위로 둔갑하게 된다. 노무현 정권은 개혁진보세력도 정권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좌파신자유주의 정권 선언은 절망적이다. 동지도 아닌 적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급초대를 해놓고 물타기며 줄타기의 역사를 유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상징이거나 민생이거나 이성적인 의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지식인들 마저 앞장서서 역사를 해체하고 정치성의 장치에 그들의 기득권을 저당 잡히고 마치 적립식 펀드를 붇는 것처럼 지성과 이성의 운영을 대리시키고 있는 지경이니 불행이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 민주주의의 메카니즘이나 이성의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희망은 계몽이다.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이념 앞에서 반공주의 수구보수주의의 메가폰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소수는 소수일 뿐이다. 따라서 변화와 변혁의 명제를 선의지로 추구하고자 할 경우 수(數)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을 필연적으로 요구 받게 된다. 대중의 집단이성이나 파쇼를 거부하는 비판의 기능을 거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소수가 수적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답을 얻어야 하는 부분도 역시 계몽이다. 계몽을 다른 이름의 폭력으로 끔찍해 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대답은 역시 계몽 뿐이다. 알려야 하는 숫한 진실들과 파괴해야 하는 숫한 우상들이 존재하는 한 천천한 진보건 달리는 진보건 계몽의 대안 앞에 겸허해야 한다.
720여명의 반지성적 지식인들의 선언이 있던 날, 리영희 선생이 50년간의 지적활동을 마친다신다. 계몽이 희망인 시대에 막막한 선생의 말씀이 그대로 그쳐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일보에서 김대중 말단 기자를 계몽시키셨다면 지금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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