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전입에 대하여

2009/09/16 13:40 / 생각

우리 사회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교육은 인간 답게 살기 위한 인간에 대한 학습이 아닌 잘 살기 위한 수단이란 점을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잘 살기 위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부인이 안되는 사회다. 아이 사랑을 앞세운 이 시대의 돈 잘 벌기 대열에 가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위장전입이다. 위장 전입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친척 집에 세대주를 하나 더 꾸리는 형태, 이때 친척과의 협조로 위장 전세, 월세 계약서를 마련하는 것. 서울에 주거용 오피스텔이나 집을 사두고 거주는 지방에 하면서 주소지는 서울로 해두는 형태. 전자는 서민들이 후자는 돈 좀 있다는 부류들이 하는 형태다. 이렇게 주소지를 이전해 두면 교육제도에 혜택(?)을 받는다. 세대까지 구성해 두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분양되는 아파트나 준주거지의 분양권을 노릴 수 있다. 위장전입의 노림수는 이 두가지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임태희씨가 장인의 출마 지역구로 주소지를 이전하여 1표 더 행사하려 했다는 고백은 차라리 애교다.

위장전입은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줄줄이 고백하지 않아도 시중에서 성행하는 불법행위다. 법치를 중요시 하는 이 나라 정부에 의하면 위장전입은 척결해야 할 중차대한 과업이다. 위장전입이란 불법행위의 전제로 인해 제도권의 교육은 사악한 존재가 된다. 가서 사는 것도 아니고 위장으로 살아야 교육이 되는 교육제도가 교육이 된다면 그야 말로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거 아닌가. 그래서 재테크가 양념으로 낄 수 밖에 없다. 위장전입을 오로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어쩔 수 없는 위장만으로는 당위가 떨어 진다. 누군들 자식 사랑하지 않나? 하지만 잘 살기 위해 그것이 돈이니까 그렇게 했다고 하면 어이 없게도 용서가 된다. 그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잘 사는 기준, 잘 사는 사람의 모범, 그렇게 살아 보고자는 서민들의 희망이니까 말이다.

저렇게 살지 못해 이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이 싫어 죽어라고 그들을 목표로 삼아 사교육에 가랭이 찢어 져도 자식들 몰아 넣고 공부 시키는 것이 오늘날 서민의 군상아니던가.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조상을 탓하며 우리 자식은 그거 꼭 시키 겠다는 희망으로 지금 그들의 불법 행위는 눈감아 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 그들은 우리보다 고위이기 때문에 저 정도 성역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을 공연히 얘기하는 것이 오늘날 서민의 의식아니던가.

서민이나 중산층이나 대게가 이렇게 살아 가거나 살고 싶어 한다. 자식들에게 제도권에서 우대적인 교육을 시키고 재테크를 통해 자산 증식을 꾸미는데 위장전입이 도덕성과 일면식이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이 된다. 오로지 노동을 통해 몇십억씩 벌었다는 악바리 연예인들 얘기는 기본적인 수익이 되니까로 해석되고 김밥 장사로 수십억을 벌어 사회에 쾌척하는 할머니들의 얘기는 더러운 앞차마의 이미지에서, 결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깨져 버린다. 서민들에게 노동을 통한 자산증식은 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증식은 주식과 부동산으로 카테고리 된다. 교육은 잘 살아야 하는 자본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기본 수익이 되는 노동의 일자리를 찾고 주식과 부동산에 잘 투자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밑거름인 셈이다. 위장전입까지 했는데 그 밑거름도 못배우면 사람들은 대번에 교육 잘못시켰다고 할 것이다.

국민들이 죄다 이런데 국민이었던 하지만 이제 고위 공직자가 되겠다는 사람의 위장전입이 무슨 문제인가. 어제 라디오 토론을 듣다 보니 어느 대학교수가 '도덕성과 자질은 별개의 문제' 라고 위장전입과 그와 관련된 모든 사회악의 어쩔 수 없음에 연대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어느 TV 토론에서 '이런 나라에서 땅투기 안한 사람이 바보 아닌가' 라며 솔직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는 그런 매카니즘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이 매카니즘에서는 누구든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적이익에 관계된 활동을 해야 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는 방식, 순진한 노동 추구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행복이라는 인문적 감수성과 조우하고 자식 사랑이란 보편적 인류애의 어쩔 수 없음으로 가슴 벅차 오른다. 어찌 이것을 고위 공직자라는 정치적 지위에 불편부당하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국민이 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공공이 필요하다. 공공을 다루는 공인과 이를 통해 옳바른 공공선에 봉사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형성 결과다. 그 체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공평하고 평등하게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공공의 목적인 셈이다. 공공의 목적을 수행할 인간, 즉 공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다. 오늘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양심이 완전히 다른 보편성을 지닌다면, 즉 위장전입 따위는 양심에 털난 행위가 아니라 사적이익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권장해야 할 수단이라면 이미 잣대가 아니다. 이때는 어느 교수의 지적처럼 안하면 바보가 되는 마땅함이 된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공공이며 양심인가?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공허 인가.

오늘날 공공의 영역이 사적 영역화 내지는 민영화된 사실은 쉽게 발견된다. 특히 법치를 치료제로 사용하는 국가에서 더 자주 목도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민간용역업체와 경찰이 합작하여 불태워 죽인다. 파업이 일어나면 역시 용역과 경찰이 자원을 총동원하여 진압한다. 국민 한사람이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도 경찰이 잡아 들인다. 법치가 사람의 생존과 양심을 거둬들인다면 거기에 대처해야 할 자세는 역시 두 가지로 귀결된다. 사적인 행복 추구는 공공의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지금은 아니꼽고 더럽지만 자식을 교육시켜 저 계급으로 소환시키는 것, 남들이야 뭘하든 위장전입, 그 할애비의 방법이라도 동원하여 더럽고 치사하게라도 돈을 글어 모으는 방법, 이 두 가지다. 그럼 다시 이 두 가지가 번갈아 바퀴 도는 매카니즘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너무나 단조로운 우리 사회의 플랫폼 아니겠는가.

이로서 공공이 더더욱 필요하다. 너무 가혹한 잣대, 재능에 비하면 허물도 아닌 것이 위장전입, 논문표절, 세금탈루 라는 것이라면 이 사회는 세금을 내고 법치 따위가 존재하는 근대 국가가 아니다. 국민에게는 3년이하의 징역이나 천만원의 벌금을 내라고 할 사람들이 같은 범죄를 진행하고 있다면 그것이 허물도 아니고 명령을 할 줄 아는 재능이 있기에 문제가 아니라면 이게 도대체 어찌된 세상일까? 이게 무슨 '발견' 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수사' 이지 인사청문회가 아니다. 하지만 불행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공이 강해질수록 자신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교육과 위장전입의 자본주의 기술을 통해 저들이 누리는 부가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데 무슨 공공이냐. 매몰비용이 너무 아쉽다는 얘기다. 게다가 대게는 완전히 무지하다. 대통령이 시장을 방문하여 오뎅이라도 먹으면 그 오뎅집에 프리미엄이 붙어 시장경제가 활성화 될 것이란 '무지'한 환상에 젖는 것, 그것을 제도에 탓하랴, 무슨무슨 이데올로기에 탓하랴.

위장전입이 악의 시작이겠으나 국민입장에서야 그것이 무슨 큰 허물이랴. 그렇게 살지 못해 안달이고 그렇게 살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구축된 것을. 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 사의 영역에서는 마땅히 편견이 존재해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산다고 하여 공공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국민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사적영역에서 모두가 돈이며 인간적이며 그런 것들이 한데 뭉쳐 잘 살기 위해서는 공공이 도덕적 규제를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경쟁적 능력만으로 잘 살 수 있다? 공공이 어떻든 간에?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 잘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니까. 위장전입한 사람들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공공이다.

2009/09/16 13:40 2009/09/16 13:40
DrunkenSTAR 이 작성.

교육을 생각해 본다.

2009/06/18 15:33 / 생각

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의 습득과 사고의 확장은 일상 생활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삶의 한 부분이다. 교육은 가정, 일터 등 모든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반일리치는 '탈학교론' 에서 학교가 교육 자체와 제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 사회의 교육은 대체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행되는 기능으로 국한 된다. 이러한 한계가 교육을 형식적으로, 빈부와 지역간 격차, 학벌주의를 조장함으로서 실질적인 인간 교육을 시키지 못하도록 한정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반일리치의 학교를 떠나라 - out of school - 라는 다소 과격한 주문은 현대 사회의 서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이다. 교육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은 마땅하나 학교를 떠나 수행될 수 있는 교육을 일반 대중들이 감당하기에는 현대 사회가 그 비용과 시간을 호락호락 내주질 않는다. 그런 까닭에 공교육이란 이름의 제도적 체제가 존재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는 리트머스는 교육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좌, 우 이념이 현실과 가장 첨예하게 갈등하고 정직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비웃으며 기득권을 활용한 사교육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며 경쟁이 더 치열해지길 바란다.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교육을 경멸하며 교육에 대해 성찰하며 비인간적 사회구조를 비판하지만 결국 티 안나게 사교육에 빠진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문제를 대체로 공교육의 비현실, 사교육의 고비용으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독성이 사회로 흘러 들어와 엉망으로 만드는 순환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 비현실적인 곳에서 자녀를 교육 시키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다. 따라서 좌파나 우파나 이 순환고리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감수해야만 한다. 결국 비용을 감내할 수 있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 되었다. 교육의 문제는 결국 대결 구도 속의 비용의 문제일까.

한국 사회에 있어서 교육의 문제가 비용 측면으로 다뤄지는 것은 제도권 교육, 이른바 교육의 사회적 안전망인 공교육의 퀄리티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안전망을 찢어 버릴 수도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마인드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마인드는 계몽과 각성만으로도 충분히 반성되고 실천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 마인드가 요구하는 것은 '각오' 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 위해 운전면허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의 1종과 2종은 필요에 의한 기능으로만 작동하지만 일반고와 특목고는 '목적' 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이 제도 안에서 변별력과 수월성에 의하지 않고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교육은 더욱 더 안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도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개인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 없는 일이란 것을 누구나 안다. '각오' 는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정치적이어야 하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제 주제를 아는 수 밖에 이 사회를 비춰보고 있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

"당신은 어떻게 이명박이나 공정택을 그렇게 욕하면서 자녀를 학원에 보낼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1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물음은 그 자체로 지나치게 순수하여 폭력적이다. 경쟁을 빌미로 공포를 확대하는 보수정치인이나 사교육기관의 마케팅의 악랄함과 맥락을 같이 하는 좌파적 근본에서 어떤 부모도 그 자신과 자녀를 해방시킬 각오는 하지 못한다. 좌파적, 사회주의적 신념을 쫒는다고 해서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자녀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 학원을 모두 국유화하지 않고서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이전의 자연적 교육관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이러한 상투적인 물음조차 패배자 처럼 느껴진다. 교육을 때려 칠 순 없고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알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새삼 느낀다.

2009/06/18 15:33 2009/06/18 15:33
DrunkenSTAR 이 작성.

아이가 생기고 나서 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하는 염려가 있다. '혹시 이 아이가 갑자기 죽지나 않을까, 병에 걸려서, 한창 걸음마 중에 넘어져서 사고로..' 심히 불경한, 나아가 분열증에 가까운 염려 때문에 아이가 방에서 혼자 자고 있으면 아이의 가슴을 쓸어 내리며 가끔 확인도 한다. 아이가 금새 13개월이 됐다. 아이는 옹아리를 언어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온갖 외계어로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잡고 어미에게 건내기도 하고 빨대로 물을 마시며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넘어가는 과정을 차례차례 아비와 어미에게 시연해 보인다. 아이가 13개월이면 사고를 조직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소유의 개념은 모르겠지만 손아귀에서 빼앗기는 상황은 이해하고도 남아서 울고 소리를 지른다. 나아가 그야 말로 조직적으로, 이렇게 울고 소리를 지르면 아비든 어미든 빼앗은 상황을 돌이키려 애쓴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반복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는 워낙에 부산스러워서 안고 있어도 눈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아비는 아이에게 '그만' 이란 지구어로 말하고 아이는 안드로메다를 향한 외계 소통을 시작한다.

가족의 달, '사랑' 이란 주제로 MBC 가 휴먼다큐멘타리를 방송하고 있다. 요즘엔 이런 다큐를 보는 것도 곤욕이다. 아이와 부모가 얽힌 회복되기 힘든 상황 속에서 가족, 사랑 같은 일상에선 단물 다 빠진 감정이 얼마나 숭고하게 작동되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눈물 몇 방울로 이겨 낼 수 없을 만큼 소심해졌다. 내가 저럴까봐 겁나고 어미가 혹시나? 해서 더 겁나고 우리 아이는 어떻게.. 여기까지면 우울과 분열증이 융단 폭격을 가해버린다. 이쯤되면 사랑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조악한 상상의 결과겠지만 아이를 빌미 하는 모든 것에 허약해진 이성이나 자존감을 발견하는 일은 흔하디 흔해 빠진 스토리다.

육아는 아이가 자라면서 아비, 어미를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인가 보다. 세상이 아무리 흉악하여도 수천년동안 인류가 겪어 오며 그나마 사람 사는 곳 처럼 보일 수 있던 이유가 육아의 과정이 염색체 인자로 인류에게 자리 잡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아비, 어머가 아이를 위해 현대 의학이 규정하는 정신적, 육체적 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임상적으로 그런 경우를 민족적 특성을 빌어 '화병' 이라 WHO 조차 규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 있다. 물론, 육아 과정에 반드시 임상적 화병이 동반된다거나 화병 자체의 인과관계가 육아에만 국지된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이 환자들을 민족적으로 내지는 국제적으로 구제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만, 희생이란 숭고한 수사로 위로가 가능하다. 이 악랄한 세상에서 부모가 아이를 사고로 부터 회피 내지는 지켜내는 것에 어떤 정치나 사회성이 가미될리 없다. 미혼일 때 이른바 개차판이었더라도 기혼과 출산의 상황이 벌어지면 육아와 희생의 유전자가 복원되는 것이 일반적인 영장류다. 사실 환자가 되는 지점은 아비와 어미가 스스로를 지혜롭고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발병한다. 어이 없게도 호모사피엔스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잠복기를 거치고 호모사피엔스가 되었을 때 발병 악화된다. 육아의 단계에선 부모가 환자가 되는 시기를 '교육' 이라 부른다.

외계어를 구사하는 13개월 영장류에게도 지구어와 지구의 온갖 이미지로 편집된 책이 필요 하다. 아이를 지구로 불러 오는 작업인데 방식이 다르다. 한국어로 불러 오느냐 영어로 불러 오느냐 차이가 난다. 아니, 난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아이가 어떤 언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지혜로움에서 시작된다. 다들 알겠지만, 한국어를 알기 전에 영어을 알아야 하는, 알도록 하는 교육의 방식이 오늘날 부모들에겐 중흥의 역사를 쓰는 사명이 됐다. 지혜로운 부모들 중에서도 더 지혜로우려면 더 빨리 아이의 입에서 "에이", "비", "쒸" 를 나오게 만드는 방식을 도입한 부모가 되면 된다.

아직도 '어륀쥐' 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울러 '학원 영업을 10시까지만 허용하겠다' 는 지배구조를 헤아리지 못한 멍청한 선언도 여전히 비웃을만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 현상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 맘껏 비웃고 조롱해도 개개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어륀쥐와 학원의 메카니즘은 현실 정치의 아류나 다름이 없다. 정치는 정치고 교육은 교육인 것, 애써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어뤼쥐를 못해 사회적으로 낙오 되는 끔찍한 공포에 대결할 수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 아비, 어미는 좌파가 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이명박이 만들었을까? 도처에 깔린 학원의 선동 때문일까? 아니다. 이것은 부모들의 지혜로움에서 시작됐다.

아이에게 선택의 폭을 넓게 주지 않는 파렴치한 부모들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선택의 폭이다. 정치적 신념이 아닌 것이다. 아이의 적성이 대통령이나 과학자 보다 더 다양한 스팩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직한 부모들의 희생이다. 그 요로에 영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영어는 선택의 폭 따위도 아니고 그냥 언어의 일 뿐이다. 좀 더 무게를 둔다면 수능의 골격 쯤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어에게 이런 잣대가 어울리기나 한가. 영어는 자본주의, 글로벌 지향 사회의 선악과 다. 한번 베어 물면 경각심, 공포, 할아버지의 땅, 어륀쥐, 이명박, 학원 이 줄줄이 새 나온다. 아이가 선택을 생각하기 전에 아비, 어미가 베어 문다. 문제는 유전자다. 이것을 베어 물지 않으면 호모사피언스가 되지 못한다. 아니, 아이를 망치는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아이를 위해 희생 하지 않는 부모는 강제연행감이다.

영어를 하게 되면 외국인을 편하게 만날 수 있다. 가끔 연애질에도 도움이 된다. 취업? 당연히 도움이 된다. 영어는 유용하다. 단지 유용할 뿐이다. 강제연행된 부모들을 좌파로 몰아 넣는 논리가 여기에서 작용한다. 즉, 영어불용, 내지는 영어척결을 주장한다고 지레 짐작하고 조서를 꾸민다. 나는 한번도 영어를 배워서는 안되는 언어, 학문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조서에는 언제나 선처를 바래야 한다. 영어의 지위가 이쯤되면 상류층이고 이러한 지위는 고스란히 각 가정에 전가된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그 고유의 스팩트럼을 짜는 것이 아니라 영어 교육을 받느냐 못받느냐 차이로 발생하게 된다. 받는 축에서도 몰입식, 문화 체험형, 조기유학형, 부띠끄형 그 다양한 패턴에 따라 계층적 차이를 보인다. 영어 교육의 질적 차별이 사회적 인간적 계급으로 승화되는 현실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영어가 언어이고 수능의 골격이라면 공교육이 문법과 회화를 가르치면 되고 가르친 대로만 시험 문제가 출제되면 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유전자가 문제다. "강남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인데 그런 부모를 둔 아이의 공부 유전자가 뛰어나겠죠. 거기에 경제적 뒷받침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교육 기관의 대표이사의 말에서 어쩔 수 없는 벽을 본다. 유전자가 문제인데 유전자를 바꿀 수 없는 당연함을 당연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이것을 받아 들이면 역시 좌파다. 노래방 도우미를 나가건, 새벽까지 대리운전을 하던 어떻게든 유전자를 극복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희생의 범주는 아이를 병이나 사고로 부터 보호하고 회피하는 일련의 본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되어야 한다. 유전자를 바꾸는 일인데 정상적인 상태에서 할 수 있을꺼란 생각은 한가롭기만 하다. 사교육의 시작은 대게가 영어다. 언어가 감수성, 소통, 계몽의 수단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는 이상 영어의 지위는 날로 향상된다. 부모들은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영어로 잘 말하려면 사유체계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아는 부모는 많지 않다. 이 부분을 간파한 강남에 살고 석.박사이면서 경제력도 되는 부모들의 영어사교육은 놀랍긴 하지만 이들은 환자가 아니다. 이들은 유전자가 그렇다. 대한민국 1%의 유전자,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날로 영어의 지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영어를 언어로 인식하지 못하고 영어가 자신이 주장하는 어떤 신념이나 정치성향과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환자다.

한국에서 영어는 언어가 아니다. 영어에 관한 교육적 문제는 정치적 신념이며 사회 구조다. 영어는 우리 사회의 엄연한 계급적 문제다. 영어로 인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무산와 유산의 명확한 경계가 가능하다. 영어가 계급적 문제가 된 사회, 수백년전 한문으로 소통하던 사회, 수십년전 일본어로 사유하던 세대와 오늘날 부모들의 광기에서 어떤 은밀한 맥락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지나친 비약이라 볼 수 있을까.

 - 13개월된 딸에게 영어로 된 동화 전집을 사주겠다는 집안 문제? 로 인해 두서 없이 생각해 보았다.

2009/05/20 00:06 2009/05/20 00:06
DrunkenSTAR 이 작성.

나는 공교육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또는 얼마나 멍청한지 알지 못하지만 사교육이 꽤나 영리하다는 것을 지난 9개월동안 알게 됐다. 사적 교육 기관은 더 이상 어설프게 단위 과목을 팔지 않는 대신 온갖 아름다운 수사를 다 동원하여 '아이들의 미래' 를 얘기 한다. 투박하게 얘기해도 아이들의 미래는 좌빨이나 우꼴통이나 공통적으로 먹히는 주제다. 도대체 아이들의 미래 란 무엇일까. 정작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입을 벌리고 닫는 학부모들에게서 미래란 찾아 보기 힘들다. 온갖 염려와 현실 불만 투성인 푸념을 철수, 영희 엄마에게 들은 대로 늘어 놓는다. 다들 학원에서 듣고 온 아이들의 미래 때문에 아빠의 무능과 할아버지의 상속에 대해서 진지한 정보를 나눈다. 한국 교육에서 아이의 미래는 아이로 부터 나오지 않는다.

남보다 앞서 나가고, 나처럼만 안살면 된다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서너시간 수다를 일삼는 학부모들이 장담컨데 7할 이상이다. 나처럼만 안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에게서 아이는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설득은 페이소스 비슷한 것과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남보다 앞서야 하는 사회적 구조와 나처럼만 아니면 된다는 눈물 겨운 히스토리에 무너지지 않을 아이가 있을까. 아이는 양자택일의 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잠자코 이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에 따라야 하는지, 지금부터 담배나 꼬나 물고 공원을 때지어 쏘다니며 새로운 인생을 찾아야 하는지. 사교육 기관, 아니 사교육 기업은 이 지점의 요로를 영악하게 파고 든다. 서울대 합격 몇명 플랭카드를 학원 건물에 내다 거는 동네 보습, 단과 학원 얘기가 아니다.

학원은 어떻게 기업이 되었나, 영어, 자본은 예상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결정적 방아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교조가 거리에 누워 수호하는 고교평준화의 확대 때문이다. 이게 없었다면 휴~ 학원기업에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고교평준화는 어떻게 소비하며 살까 고민하는 계급의 부모들을 패닉 상태로 만들었다. 어느 학교 다닌다, 는 변별력이 사라진 아파트 단지는 침묵에 휩싸였다. 이때, 공고, 예술고 쯤으로 알고 있던 특수목적고등학교 중에 외고, 자사고가 등장한다. 이들의 무기는 당연히 변별력과 수월성이다. 부모들은 환호한다. 학군을 쫒아 다니며 이사를 가던 번거로움도 덜어 진 듯 했다. 하지만, 이사는 여전히 다녀야 한다. 이른바 학원가 버블8 지역이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 짓는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3불정책의 하나인 고교평준화가 학원을 기업화 시켰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줄 안다. 물론,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고교등급화, 내지는 고교평준화 해체로 가야 하는 논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일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단과 학원을 다니는 것과 특목고에 가기 위해 버블 8 지역의 학원을 다니는 것은 구분지어야 한다. 한해 입시생이 대략 60만이다. 이 구분은 40만 대 20만 정도로 분리된다. 40만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라도 가려는 학생, 20만은 학원 버블 8 에서 특목고를 준비하는 학생이다. 한해에 특목고 정원이 대략 1만명이다. 1만명에 들기 위해 20만명이 학원을 다니고 이것이 학원기업의 시장규모다. 반항할 것인지 현실을 따를 것인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시기는 고등학교 때가 아니다. 중학교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부터다. 40만인지 20만인지 초등학교 3학년이면 결정된다. 밤10시 이후 학원교습을 금지 시키건 말건 학원은 다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준비하니까, 2학년때부터 준비하라고 선전하면 된다. 차라리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피아노, 태권도 학원 외에 사교육을 금지 시키는 편이 덜 순진한 정책이다.

해마다 인구는 줄어 들고 있다. 사교육 기업은 하루 24시간이 아니라 인구 수에 더 집착한다. 이에 맞는 마케팅 전략은 자정까지 영업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계층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더 어리거나 운전면허학원이 유일한 사교육이 되던 계층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대학은 정해져 있다. 신생 대학이 갑자기 SKY 반열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대교협에 앉아 있는 꼰대들이 절대 용납치 않는다. 하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된다. 자립형, 자율형 사립고라고 선언만 하면 된다. 이명박은 300개 자사고를 만들어 경쟁을 줄여 사교육을 안정화시키겠다고 했다. 이런 학교 건설이 진행되면 산술적으로 일반고에 진학하려던 40만에 대한 사교육 마케팅이 가능해진다. 동네 보습학원의 플랭카드가 아니라 대형 버스를 대절하고 근사한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강남 사교육 기업의 마케팅이 스타벅스 퍼지듯 한다는 얘기다. 이 지점에서 암초를 만난다. 온갖 것에 다 핑계가 되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재정적자가 그것이다. 시민단체나 전교조의 반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해마다 인구는 줄어 드는데 시장이 넓어 질리가 없다. 단위 과목이나 학생마다 더 많은 교육비를 지출하도록 하기에는 정부의 사교육비 제한이란 유일한 명분에 너무 맞서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인구통계적으로 더 어리거나, 더 늙거나 이다. 마케팅의 기본이다.

10시 이후에도 장사를 하는 학원이 있다면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겠다고 한 곽승준은 홍준표에게 얻어 맞을 만 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명박 한테는 엎드려 뻗쳐 당했을 일이다. 공정택 교육감 당선을 통해 위기감에 연대할 줄도 알게된 이 지역 유권자들은 이명박정권의 핵심이다. 이 곳에 경찰력을 투입한다? 그것도 아이들을 간접적 대상으로 하여... 말도 안되는 얘기다. 그렇다고 학원기업의 마케팅을 정지 시킬 수도 없다. 이른바 진보적 개념 연예인이라 믿던 신해철이 대표적인 학원기업의 CF 모델로 '자녀에게 맞는 학습 방법과 목표를 확인하라' 고 독설을 외치는 것이 개념적인지 진보적인지 따위로 논리의 추상성을 확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학원의 배울만한 마케팅 전략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인구통계를 넘어 정치성향적 시장 확대를 노리는 영리한 행보다. 아이의 삶에 질이나 계급 상승의 교육적 욕구는 진보나 보수의 경계가 따로 없다는 리얼리티의 결산인 셈이다. 입이 달토록 이명박을 비난하는 아비도 쉬쉬하며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정치성향과 교육의 미묘한 입장차이를 양심불량으로 까지 몰아 가지 않아도 되는 절묘함으로 가득찬 함축이라 하겠다.

주위의 학부모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학교 선생을 비웃는다. 전교조 선생을 만나면 마인드는 있는데 기술이 안되고, 교총 선생을 만나면 기술은 있는데 마인드가 없다는 식이다. 공적 교육을 받는 12년은 누구나 동의하듯 아이들의 삶에 행복과 더불어 사는 인간성을 배우는 시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기술이 없고 마인드가 있고 또는 그 반대로의 경우처럼 그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교육적 이해를 키워야 한다는 이 땅의 아비들에게 교육의 근원적 물음이나 저 우주적 간극의 대립속에서 어떤 판단을 구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다행이 아이들의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이명박 정권을 때려 부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용기가 쉽사리 들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아비들은 괴롭다. 아이가 공교육만으로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걸까. 어떤 진보주의자는 지금의 교육적 현실이 비현실적이 라고 말한다. 이런 순수한 선언에 선동될 학부모가 도대체 이 땅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런 순수한 학부모는 공룡에 가깝다. 한집 걸러 한집에서 날마다 발생하는 교육과 경제력과 이해력의 갈등을 온 신체로 느끼는 현실을 비현실이라고 요약하는 어떤 진보주의자들의 근본주의야 말로 전혀 리얼리티 하지 않다. 공교육을 살리자 는 총론의 각론에는 사교육의 규제와 놀라움이 마구 뒤엉킨 지옥 같은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데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공교육은 도리어 공허한 선생들의 간극으로만 남아 인신공격을 해댄다. 무엇이 제정신인지 알 도리가 없다.

미국이 금융기관을 국유화 하려는 것처럼 나는 학원기업을 국유화하지 않고서는 사교육 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공교육을 살리는데 사교육의 규제가 필수라고 생각하는 혐오스러운 정책논리에 조금이라도 조응하고자 한다면 더더욱 국유화가 실체성을 띈다고 본다.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가장 비슷한 현실감각을 따르는 교육의 현실에 있어서 이 또한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따라서 사교육 자체의 문제는 사회 내지는 체제 변혁적 문제로 승화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어 낼 수 없다. 정치성향도 바꾸지 못하는 이 정직함 앞에, 계몽이란 언어 조차 용기가 필요한 마당에 정말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저항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국유화 따위의 무정부적 비웃음을 비켜 나가 그저 아이에게 "그래도 네 꿈은 뭐니?" 라고 물어 볼 수 있는 아비라도 되려면 아이 뿐만 아니라 아비도 자신만의 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마도 아비의 그 꿈이 아이를 아니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꿈을 대신 꿔주면서 아이를 지배하던 교육이란 이름의 제도를 벗어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제발 그 꿈을 헛갈리게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해철이 사교육 광고를 하는 것 까진 쩐의 논리라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지 개념을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았으면 하고, 행복과 인간성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들의 책값, 딸의 등록금을 위해 어미는 식당일을 아비는 대리운전을 해야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선전하는 이명박의 라디오 방송이 없었으면 좋겠다.

2009/05/04 16:19 2009/05/04 16:19
DrunkenSTAR 이 작성.

영어로 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은 사실, 영어라도 잘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사람간의 변별력을 키워 구분해내겠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모든 사회적 현상을 시장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변별력 없는 교육은 없고 시험으로 줄 세우지 않는 교육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교육도 사람에 따라 받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삶의 방식이 교육으로 부터 나온다고 봤을 때, 영어는 더더욱 이 사회의 삶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 논리적인 사람이면 좋겠지만 반드시 누구나 논리적일 필요도 없고 논리의 수준-논술이라는 시험의 형태로 변별력을 가려야 할 필요도 없다. 이 지구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것을 보면 그 사회의 퀄리티를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자심감, 애정, 열정 따위가 무엇에 종사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의 문제가 사교육의 실태로 부터 시작하는 모순 조차 천작하지 못하는 교육의 실체적 수준을 보고 있으면 이 사회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근원적 질문에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구에서 인간 답게 살아야 하는 어떤 방법을 가르치는 사교육은 없다. 즉 우리 사회의 사교육 문제는 삶의 방식이 아닌 것들에 변별력을 부여 했던 교육 정책과 그런 시스템이 교육이라며 세상에 퍼트리고 다닌 기성 세대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등과 꼴등이 존재해야만 하고 일등은 대접하고 꼴등은 도태시키는 인식이 철저할 수록 그 간극에는 위선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위선을 통해 꼴등은 억압 받는지도 착취 당하는지도 모르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일등의 위선을 위한 꼴등의 실존이 우리 사회의 교육을 요약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영어집중, 몰입 교육을 하고 자사고를 늘리면 사교육비가 줄어 들고 기러기 아빠가 퇴출된다는 위선으로 수혜적 민중은 실존적 위협을 받는다. 결국 더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방식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그래서 우린 더 많이 버는 것 말고는 다른 행복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흉흉해지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일이 점점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2008/01/29 17:42 2008/01/29 17:42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