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기륭전자

2008/08/10 16:56 / 생각
현지는 이제 5.8킬로, 2.49킬로로 태어나 백일이 지났다. 제 양껏 먹고 잘 자고 일어나면 베냇짓으로 아빠의 간장을 녹인다. 어느 날 현지가 제 양껏 먹어야 할 것을 거부 한다면 나는 어떨까? 제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그 이유가 해소될 때까지 먹는 것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안먹으면 죽는다. 아마도 혈당이 감소하여 심장기능이 저하되는 심부전이 일어나고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하나 보다. 서서히 죽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온갖 고통이 서서히 스며 들 것이다. 보는 기능을 상실한 눈으로 그 이유와 헛것을 번갈아 교차시키는 끔찍함으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어느 아비가 제 자식이 먹기를 거부하며 이런 고통을 감당하려는 것을 담담히 지켜 볼 수 있을까. 또는 어느 자식이 제 아비가 먹기를 거부하는 사태에 저는 살겠다고 온전히 먹기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밥상머리에 같이 앉는 것이 식구 인데 제 식구가 먹지 않는 것을 보며 견디는 것은 먹지 않는 것처럼 기적적인 일이다. 일부러 먹지 않는 일은 자살과도 같은 일이다. 다이어트? 이것도 일종의 자의식이다. 자살로 실존을 증명하듯, 살면서 타인의 증명을 통해 실존하려는 다이어트도 충분히 자의식이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해야만 하는 주변의식과 먹기를 거부하려는 자의식이 합쳐진 의지를 다이어트라고 부르진 않는다.

단식,
1983년 김영삼의 단식투쟁 부터 단식은 저항의 한 상징이 되었다. 물론, 단밭빵 먹으며 단식 했다는 가십은 집어 치우더라도 3당 통합으로 단식을 다이어트로 끌어 내린 학실한 장본인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저항과 투쟁에는 단식이 단골 메뉴다. 마치 밥 먹듯 단식 한다는 말처럼. 민주화 이후에 투쟁을 위한 단식은 사라질 줄 알았다. 아니, 십장의 뇌와 디젤 불도저의 신체로 무장한 2008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사라져야 할 미국산 쇠고기 메뉴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값싸며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으며 황제 다이어트를 할 것 같은 나라에서 단식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의 얘기 같다. 아무도 단식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KBS 에 경찰이 진입하여 농성 중인 직원들을 강제 연행하고 불법적인 이사회를 강행했어도 KBS 는 온전히 올림픽 방송 중이다. 사람들은 "KBS 에 경찰 난입" 을 안드로메다에서 발사된 알 듯 모를 듯한 코드로 인식한다. 현대사회에서 주목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인식된다. 단식, 그야말로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른다. 고로 가짜다. 조중동에서는 KBS 에 경찰은 난입하지 않았다. 이명박과 최시중의 위대한 국가 경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뿐이다. KBS 노조가 뒤늦게 투쟁! 삭발을 제 아무리 해도 그건 가짜다. 주목 받지 못한다.

기륭전자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은 58일동안 단식 중인데도 주목하는 사람은 적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사실에 입각해서 주장한다고? 기륭전자의 기업가치와 이익,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세계적 경쟁력은 진짜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58일간의 단식은 가짜일까? 어떤 것이 사실일까. 자의적 사실은 모두 가치적일 수 밖에 없다. 기업이익을 위해 비정규 노동자 몇명은 굶어 죽어도 되는 가치, 굶어 죽는 고통의 문턱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지는 비정규 노동자의 인간으로서 노동으로서의 가치, 무엇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진짜가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제 밥그릇 찾으려고 저런다고 한다, 그렇다, 제 밥그릇과 자의식과 주변의식과 제 식구들 챙기려고 58일동안 단식한다. 최소한 다른 밥그릇 찾아서 그 밥그릇을 차지해야 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시도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각성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그 예의의 댓가로 58일 단식이라는 처절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해야만 가치를 가지는 민주주의 잔인함과 맥락이 닿아 있다. 박태환의 4년, 체중조절에 실패한 유도의 최민호의 4년은 기억해도 기륭전자 노조원의 1000일, 58일간의 단식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체육관에 모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해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 몇분의 순간은 감동적이다. 박태환 자신에겐 매우 큰 영광이며 노력의 댓가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순간의 감동일 뿐 우리의 사회적 삶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것은 국가와 스포츠, 범세계적인 올림픽이 만들어낸 가짜다. 진짜는 우리의 삶에 끝까지 영향을 미칠 진지한 사회적 현안의 접근에 있다. 기륭전자 노동자가 만들어 낸 1000일과 58일간의 단식, 이 잔인함과 처절함에 접근하는 것이 우리 삶에 자양되는 진짜 사실이다.

단식 투쟁을 지지 한다고? 이것은 다이어트가 아니다. 단식 투쟁 지지는 죽음에 대한 지지를 도모하는 것으로 말도 안되는 잔인함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언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폐에 물이 차 죽어간다. 왜? 이 뙤악볕에 폐에 물을 채워 죽어 가야만 하는가. 저들은 죽어 간다, 그리고 죽는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이상 연민따위도 느끼지 못하는 갈 때까지 간 잔인한 우리 사회의 방치다.
2008/08/10 16:56 2008/08/10 16:56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더욱 격해지고 있는 대선 정국과 삼성 비자금 폭로로 인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예년 보다 뚝 떨어진 기온으로 가슴이 시렸던 시월 한달 동안 두명의 도시빈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양시의 노점상 탄압에 비관한 이근재씨는 10월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인천건설노조 소속 비정규직 전기원이던 정해진씨는 10월27일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조합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마지막으로 분신 사망했습니다. 한미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와 경찰폭력에 사망한 하중근 열사의 조의가 채 풀리기도 전에 우리가 일상으로 걷는 거리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비정규직이란 이름과 인간 답게 살려는 외침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요구와 열망이 있던 6월항쟁 때에도 이렇게 많은 동시대인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은 인간성과 의식을 잠식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자본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그 사나운 지배력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름을 지향해야 할 자유로운 의지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세욱, 정해진 열사는 깨지 말았어야 할 꿈에서 깨어 누구보다 먼저 현실을 깨달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절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것에 맞서는 자신의 작은 노동이 아무리 필사적이어도 결코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의 고독은 번민으로 고통스러웠을 것 입니다. 그가 떠나고 기적처럼 견뎌야 하는 가족들을 보고도 스스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릴 수 있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열사로 불리는 것 조차 모자랍니다. 어느 시대의 시보다 소설보다 더 시적이고 허구적인 현실이 무섭고 슬픕니다.

노점은 누구나 똑같은 목구멍에 그나마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어떤 이의 좌판입니다. 여러분은 그 좌판을 없애고 청계천에 꼭 물을 흘려야 겠습니까? 그래야 국가가 대단한 발전을 이루고 글로벌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된 이후 전보다 보호 받으며 잘 산다는 노동자는 없는데, 왜 노동자들 괜찮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말만 원칙이 되는지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대선보다, 삼성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킴스클럽의 진열대 위에 처분을 기다리는 고등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지 37년 되었습니다. 37년 동안 우리는 민주화를 이뤘고 노동조합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사 반란 정권을 단죄하기도 했으며 평화적으로 문민 정부를 이양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에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하는 노동자가 그대로 이고 도시 빈민들은 자본과 권력의 폭행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지경 입니다. 어떻게 노동자의 외침이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그동안 여러번이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시스템이 바뀌었는데 노동자의 깃발은 여전히 핏빛 입니다. 우리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을 한낮 과격 단체로만 치부하고 왜 저들이 저리 싸우는 데도 또 싸우고 또 투쟁하고 죽어가야만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권영길이하고 이석행이하고 비자금이라도 삥뜯을라고 하는 것인가요? 허세욱, 정해진, 하중근, 이근재 노동자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선, 삼성이 중요한가요? 그렇다면 내년에도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심연을 헤엄치는 등푸른 날생선이 될 것인지, 우리들의 선택과 행동이 그렇게 할 것 입니다.

2007/11/05 20:47 2007/11/05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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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사라졌다.

2007/10/28 21:39 / 생각
고전적인 개념에서 회사는 노동, 토지,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초기 자본주의의 제조업 중심의 개념에 머무른다. 오늘날 수많은 회사는 자본과 지식으로 이루어 진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지식경영이나 창조경영의 핵심이 바로 지식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자본의 유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하는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회사는 대체로 노동의 개념을 조직의 개념으로 둔갑시킨다. 조직의 개념이란 개인 단위의 노동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측정한다.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의 강약으로 계산되지 않고 효율성으로 계산된다. 효율성의 증감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정량의 노동과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도달로 측정하기 때문에 효율성의 증대를 꾀하기 위해서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사용자들의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오늘날의 회사에는 자본, 지식,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움직이는 것은 생산력과 효율성이다. 회사에서 노동은 사라졌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2007/10/28 21:39 2007/10/2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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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

2007/09/14 17:47 / 생활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종종 경영 문제를 물어 오는 후배가 있다. 들어보면 대게가 사람에 대한 문제고 사람의 인연과 사연에 대한 것이다. 회사라는 목적 가치에 오래도록 인연을 두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건물은 그래도 둔 채 사람들만 사라지게 했던 IMF 중성자폭탄으로 인해 평생직장이란 가치는 사라지고 직업관은 능력과 시장요구에 부합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로 변화되었다. 여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직이란 근거로 생긴 한가지 믿음이 있다. "한사람 없어진다고 회사가 무너지나" 란 것인데, 이 믿음은 꽤나 신앙이 깊은데다가 한사람 없어서 회사가 잘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코드까지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평생직장은 이미 고전적 직업관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가치로 세계화를 하지 못해 온통 안달이 난 사회에서 평생직장은 마켓의 요구와 완전히 배치된다. 잉여자본이 노동유연성을 더욱 탄력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개인은 더 이상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객체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마켓에 어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기능이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에게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오로지 개인만이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조직은 조직의 이상이라 생각되었던 어떤 비전, 미션으로 구성되기를 거부하고 자본 생산이 용이한 지점과 자본 재생산으로 노동의 탄력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지점으로 끊임 없이 이동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세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동력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게가 '세상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마켓 안에 있다' 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노동이나 사람은 마켓안에서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어 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등가의 원칙을 기본하여 개인과 개인, 개인과 회사를 계약으로 묶는다. 이러한 계약에는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 나아가 회사에 대한 책임보다 더 포괄적으로 마켓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마켓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구조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노동의 치열함은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마켓이 원하는 책임, 즉 자본의 창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강제적 복무에 치열함을 부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연이나 사람간의 계약이 아닌 인연의 관계마저 부인하거나 마켓의 요구에 걸림돌인양 치부해버리고 만다.

중소기업을 하는 후배가 물론, 작은 회사에서 경영자가 일일히 챙겨야 하는 것도 순리일 수 있지만, 사람이 조직에서 들고 나는데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그와 함께 했던 오늘을 챙기고 칭찬하며 그의 미래를 격려해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적잖은 시간을 들이기를 바란다. 마냥 칭찬하고 격려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사람을 생각한 경영자라면 충고하고 때로는 아프게 꾸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애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사람과 노동을 존중하는 경영자라면 말이다.

2007/09/14 17:47 2007/09/1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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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 오버 시대의 노동

2007/02/08 14:40 /
- 매우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잡지에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칼럼을 써서 보냈다.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정의가 혁신이라는 경영적 단어와 시너지를 내며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 프레임워크를 정리하는 일은 어떤 신생 산업에서든 마찬가지 절차였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세스와 등식을 이루던 문서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찌질거리던 거지 근성은 여전한데 벌써 혁신을 다루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면 이 문제는 적응력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과 경영의 문제이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 하는 것으로 노동 생산성을 이해 하는 원시적 단계에서 A 에서 B , B 에서 C , C 에서 다시 A 로 피드백 되는 시스템 단계가 성립되면 이로서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정의된다. 좀 더 복잡한 경영이 개입하면 A 의 일을 하는 조직과 구성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왜 A 의 일을 하는데 그 조직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된다. B 의 일을 하던 조직이 A 의 일을 하면 안될까?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도출된 제목이 멀티 플레이어이다. 노동자는 멀티 플레이라는 사상에 매우 민감하다. 즉 사용자가 노동력을 복합적으로 착취하려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급여 수준은 낮고 그에 못지 않게 근무 환경도 열악하며 클라이언트와 부대껴야 하는 감정노동은 그 이상인데 이일 저일 다 하라는 요구는 쉽게 반발을 산다. 이러한 반발은 대체로 대기업이나 포탈로의 이직을 부른다. 마치 그곳에 가면 그런 일은 다신 없을 것만 같은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말이다. 턴 오버(Turn-over), 프로세스가 기술적으로 시스템이 되지 못한 때 유행했던 트레이드 오프(Trade-off)와 마치 동어 반복 같으면서 이행 대립한 말이다. 상대적으로 쉬운 이직 환경과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력과 자원의 턴 오버가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의 노동자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일단은 멀티 플레이어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간단한 업무 프로세스 안에서 형제 같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고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행복이-업무적으로-추구로만 끝나는 이유는 턴 오버와 트레이드 오프라는 시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트레이드 오프가 성행하던 시대에는 최소한 정의하기 위한 저항이 존재했고 그것을 프로세스라는 현장의 기술적 부분으로 이해했다. 턴 오버의 시대인 현재는 어떠한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다. 싫으면 중이 떠나 다른 절을 찾아 다니는 자원에게 매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저항은 없고 분노만 있기 때문이다. 기획에서 디자인, 개발에 이르기까지 용역이 대부분인 업계에서 용역 단가를 심오하게 생각하는 노동자가 없으니 사용자는 노동의 신성함을 망각하고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게 된다. 프로세스의 정의가 필요했을 때 그것을 A 로 정의하지 않고 AB, AC 로 정의했다면 지금보다 더 심한 턴 오버의 시대를 맞이 했을 지도 모른다. 입맛에 맞게 옮겨 다니는 활동은 사실 행복의 순간이나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마음속엔 노동에 대한 신성한 의식이 없는 분노의 앙금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경영의 추구가 성장만을 동력으로 삼아 추구만으로 끝나고 경영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턴 오버가 노동자에게 그러한 허무를 남기게 될까 안타깝다. 선배들이 구축한 프로세스가 지나치게 계몽적이라 혁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늘날 이 업계를 이끄는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칼로리가 원동력인 노동의 신성함을 견적서의 산식 안에 퍼다 나르는 시대는 지났다. 아울러 자신의 노동을 경시하는 턴 오버의 태도로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도 그쳐져야 한다. 경영의 입장에서도 멀티 플레이어가 멀티 플레이어다워질 수 있기 위해서는 멀티 노동의 신성함을 이해하고 마땅한 노동 임금을 지불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07/02/08 14:40 2007/02/0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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