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영결식을 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슬픔에 그저 눈물이 났고 머리속이 텅 비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정권은 사람들의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틈에 불온한 고대녀 김지윤씨를 긴급체포했다. 용산 재개발 현장을 지키고 있던 문정현 신부는 용역에게 개끌리듯 끌려 나오고 경찰은 용역을 지휘하며 강제 철거를 진행했다. 그 길을 그의 주검이 지나갔다. 대법원은 삼성그룹에게 편법경영승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고 경찰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광장의 시민들을 방패날로 찍어 가며 밀어 냈다. 면전에 대고 '살인마' 라고 소리치고 사과만으로 되지도 않는 일이지만 '사죄하라' 고 소리도 쳐보았다. 수십만명이 또 다시 거리로 나와 슬픔과 분노의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런 광경을 온전히 보여주었다. 여기까지,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공동체라는 곳이다. 판단은 알아서들 하셔라... 좆같은지 아닌지...

2009/05/30 19:10 2009/05/3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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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트라우마

2009/05/27 19:37 / 생활

덤덤하게 텍스트를 응시하다가도 울화와 주위 깊지 못한 분노를 소비한다. 소비적일지라도 이것은 분명 공분의 퇴적일 것이라 믿는다. 이 명백한 사회적, 민중적 트라우마가 강력한 분출을 준비하는 꿈을 꾸며 야릇한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왠지 객관적 답답함, 슬픔 따위로 정신이 지친다. 힘들다. 그의 감상적 이미지들이 더더욱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술에 취한 밤, 그의 지지자였던 와이프도 힘들어 하길래 백세주 한병과 냉동닭을 사들고 가서 한잔 했다. 뜬금 없이 봉화에 함 가자던 남편한테 핀잔을 준다. 못갈 것에 술객기를 부리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나는 금새 골아 떨어졌다. 이런 경우엔 정신을 차리고 짐짓 똑똑한 척, 다 아는 척, 사리를 따져가며 말하는 것이 부질 없다. 분명한 건 분노다. 미담을 퍼뜨리며 인간적 슬픔에 젖는 사람들조차 근원의 분노를 찾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성급한 화해, 어리석은 망각, 선별적인 기억 따위로 분노를 용해시키는 일만 우리 스스로 조장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은 부질 없고, 허무... 권태로움까지... 알수 없는 일이다. 노무현을 열열이 지지하지도 않았고 그의 정책은 나에게 비웃음꺼리 였는데 이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치 내가 노무현이라도 된 것 같은 이 슬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분노일까?

2009/05/27 19:37 2009/05/2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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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2009/05/23 22:48 / 생활

대통령이었을 때는 탄핵으로 죽이고, 자연인이 되니 진짜로 죽여 버린 놈들이 가장 먼저 애도하는 야만의 시대를 보라. 그가 대추리, 한미FTA, 좌파신자유주의로 죽기 전까지 뇌물스캔들로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수백명을 학살하고 수천억원을 해먹은 전두환, 노태우도, 지금 이 시간에도 민중을 탄압하는 이명박도 인간이랍시고 살아 있는데. 그는 오늘 아침에 뛰어 내렸으나 이미 그전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이다. 5명을 산채로 불속에 떠밀어 태워버리더니 이제는 집 뒤 절벽에서도 밀어 버린다. 인간을 이렇게 악랄하게 다룰 수 있는 인간성이 과연 인간성이란 말인가. 아무말도 필요 없다. 그의 죽음이 슬프다. 스스로를 버린 그의 깨끗한 영혼 때문에 눈물이 난다.

2009/05/23 22:48 2009/05/2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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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쇼민주주의

2007/06/22 16:04 / 생각

대통령의 헌법소원으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헌법기관이 헌법소원을 할 수 있냐는 측과 대통령 개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한표를 행사하고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에 헌법에 소원을 구할 수 있다는 측이 있습니다. 어쨌든 변증법적으로 합의가 될 수 없는 이항대립인 점은 확실 합니다. 최근 정부는 한미 FTA 에 반대하여 파업을 결의한 금속노조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합니다. 오늘날 가장 각광 받는 정치적 수사인 무슨무슨 원칙이 실체적 원칙은 없고 원칙 자체만 단어로서만 존재한 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관용이란 성찰적 단어를 옮고 그름의 이분법적 형식으로 축소시키는 정부의 반인문적 시각은 역시, 노무현 정부는 공부도 안되고 정리도 안되는 집단이란 인식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대통령은 헌법적 기관 맞습니다. 이러한 헌법적 기관은 정치적으로 권리, 책임, 의무에 대한 정의와 그것의 항시적 존재가 중요합니다. 정치조직상으로도 대통령의 유고는 국무총리 대행으로 전환 됩니다. 이는 노무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란 자리가 중요하단 얘기겠습니다. 그러하니 대선 180일을 앞두고 정책 토론회다, 대통합 이합집산에 열을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부에서 무관용, 무관용하는데 정부는 집권기간동안 어떤 사회적 현안에 관용을 배풀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무관용 자체가 원칙 입니다. 걸핏하면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는데 모두 립싱크일 뿐 입니다. 민주주의를 한적도 없고 신자유주의의 몰이배 역할을 하는 노무현일지도, 그가 대통령일지라도, 그도 국민이란 점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요. 관용이란, 그가 아무리 싫어도 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그가 행사하는 표현의 자유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 입니다. 이것은 노무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관용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온 국민은 특정 정치 단체와 후보를 인터넷은 물론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가 일체 금지 되었습니다. 입닥치고 있다가 나중에 선거 벽보나 보고 투표하라는 겁니다. 동의나 비판 없는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정부의 국지적 파쇼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발언을 존중하기 위해 헌법소원도 불사하시는 대통령이 있는 반면 국민들의 생각과 입은 닥치라고 하는 발상이 공존하는 사회는 좌파신자유주의에 이어 파쇼민주주의라는 악랄하면서 창조적인 정체성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원칙, 즉 누구나 먹고 일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지켜지기는 요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선이 아니라 6월 항쟁의 그 민주화 항쟁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 입니다.

2007/06/22 16:04 2007/06/2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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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권리를 포기하라

2007/05/23 18:21 / 생각
기자실이 언론의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한목소리로 언론 탄압을 외치는 매체들을 보면 탄압은 탄압인 것 같고 기자실이 통합되면 당장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알권리가 침해되면 정보가 줄어 들고 소스가 동일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정보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되어 의견과 표현도 대게 비슷해질 것이다. 이거 큰일이다. 막아야 겠다.

언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하는 것보다 휠씬 거대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파악하는 세상은 어느새 비슷해졌다. 언론의 취사선택은 사안의 다양한 관심이나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이데올로기와 정치기반에 따라 다를 뿐이다. 저널리즘은 어떻게 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같고 하나 같이 같은 우상을 생산하고 이미지를 전파하게 되었을까.

기자실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 그곳에서 공식, 비공식 정보들이 난무하고 기사가 생산되어 그것을 알아야 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물론 현장의 기사가 직접 가판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데스크는 여기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첨가한다. 공간이 같으니 서로 컨닝도 하고 저널리스트 포퓰리즘도 무시 못할 테니 비슷한 기사가 나온다는 가정은 순진할까.

언론의 자유가 침해 받으면 민중의 알권리도 침해될까? 대충 그렇다. 기자실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한다. 알권리를 가지고 있는 민중은 그 권리의 충족을 언론에 위임했다. 물론, 위임장 같은 건 없다. 기자실은 저널리즘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자들만이 출입하여 제한된 정보를 취득하고 재생산하는 장소라고 한다. 민중, 시민실이 없으니 기자들이 배포하는 정보가 침해되면 당연히 알권리도 침해되는 구조다.

기자들끼리도 카르텔을 형성하여 정보를 독점하려 하고 기자증이 있어도 기자실에 출입하려면 이미 자리를 잡은 기자들의 투표를 통해 출입여부를 결정하였다고 하니 언론의 자유는 고사하고 신체의 자유조차 구속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년동안 그 잘난 엘리트 주의가 민중을 현혹시킨 우상이 어디 한 두가지 던가. 천박한 신체에 무관의 제왕을 쓰고 있으니 자가당착한 기사가 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겠다.

권리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것, 포기도 당연히 권리 주체의 판단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포기해도 되는 것이다. 알권리는 언론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민중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 하지만 권리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판단은 지키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은 더 이상 민중의 알권리를 방패 삼아 언론의 자유를 외치지 말고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외쳐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똘레랑스적으로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언론 스스로 개방적 사고를 가지고 더 많은 표현의 연대를 이끌어 내도록 하길 바란다. 기자실이란 공간적 시스템이 파괴되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스탠스를 거둬주길 바란다. 여전히 민중이 기대하는 알권리의 충족을 언론에 맡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무현이 보여준 범국가적 분열증은 이제 말기적 증상으로 번지는 것인가, 특정 언론과의 대립각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노무현의 이미지 정치의 준비태세는 집권과 탈권의 시대에 동어 반복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기타 치고 눈물 흘리는 대통령으로 이미지화 시켜 집권에 성공하고 난 지난 5년을 돌아 보면 우리들은 그를 정말 잘 알고 뽑았던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탈권을 하려니 역사가 두렵긴 한가 보다. 정책 보다 이미지가 우선인 선거 기간은 기타치고 눈물 흘리면 그만이었지만,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까지 한 마당에 언론에 알려진 것도 많고 알려지는 것도 많을 것이 차츰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스트레스는 우울증과 분노를 유발한다. 이미지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때, 권력은 물리력을 꼬드기고 임기 내내 개혁은 곧 통합이라는 원칙의 칼을 기자실에 드리댔다.

노무현의 원칙은 분열의 칼이었고 그 칼에 민중은 난자 당했다. 이미지 정치에 보기 좋게 당한 케이스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민중의 알권리가 이미지의 알권리로 변화하길 원하는 모양이다. 권력이 권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굳이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다. 알권리의 주체인 민중은 더 이상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알아야 할 권리를 포기하면 된다. 알려도 알아주지 않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그렇게 저항하면 된다.
2007/05/23 18:21 2007/05/2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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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식별

2007/04/04 17:39 / 생각

한미 FTA 체결로 대중의 관심은 '살림 살이가 얼마나 나아질까?' 로 급선회를 하는 듯 하다. 대~한민국과 국익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대중들은 행여 국가 체면이 깎이지나 않을까,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터, 이제 한시름 놓고 차분히 계산기를 두두려 보며 대한민국과 국익 앞에 착취 당하는 민중의 뼈빠지는 삶에 대해 부르르 분노를 떨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까 싶다. 한미 FTA 의 손익 계산서 앞에 망연자실한 진보 진영에도 이번 체결을 통해 한가지 확실히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피아식별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내용은 다르지만 반대의 행위가 일치하는 수구 보수세력과의 불편한 정신적 연대를 확실히 구별 지었으며, 노무현 정권의 기회주의적 정체성인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황망한 정의에서 드디어 '좌파' 를 때어 낼 수 있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따져볼 겨를이 없는 대게의 동시대인들은 한미 FTA 체결하면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살아 간다. 어떻게 나아 질 것 같은가? 라는 질문에 백이면 백 '시장 경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그것을 통해 발전을 이루는 것' 이라 대답한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오늘을 살아 남은 자들의 이러한 비극적 논리를 탓할 필요는 없다. 이제 국회 비준되고 각종 법률을 미국의 요구대로 바꾸게 되면 당장 의료보험료가 한달에 4만원은 더 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이들에게는 더 벌면 되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한달에 4만원을 더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도 말이다. 나보다 힘 없는 사람들을 지려 밟고 세운 성공과 윤택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가져야 할 보살핌의 철학을 잃은 살벌하고 무서운 사회다.
자본이 문화, 정체성, 역사, 인간성을 지배하는 이익 관계 사회에서 사상적 피아를 구별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권력의 레임덕을 돌파하기 위해 수구 보수 진영에 당당히 서는 선택을 통해 정치적 레토릭과 립싱크를 이용하여 자신보다 힘이 약한 대게의 민중들을 어김없이 지려 밟는 명백한 사상 구별을 단행했다. 철없는 실용주의적 사고가 불러오는 치명적 실수인 절차와 기술적 내용에 대한 편집증은 기어코 긴 호흡의 역사 속에 조직될 진보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부정까지 일삼고 있다.

그가 인권 변호사로서 억압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시절을 진정성있게 보냈었다면, 한미 FTA 를 통해 수혜 받는 거대 자본과 재벌, 언론 권력의 콧노래를 신화화시키는 시간에 점점 삶의 질을 착취 당하는 대게의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아픔을 보살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인식 안에 그 따위 혜안은 지워낸지 오래다. 사실 투쟁과 저항의 시작은 피아의 식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이고 희망도 이제 시작인 셈이다.

2007/04/04 17:39 2007/04/04 17:39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내가 다니는 회사는 매해 1월 전사 워크샵을 통해 앞으로 1년간 회사의 사업계획과 단기적 전략과제를 발표하고 공유한다. 전략 부분은 내 담당이기에 한창 전략 보고서를 다듬고 조율하는 중이다. 전략을 세우면서 중요한 것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절차와 Activity 의 구성이다. 전술적 절차에는 대체로 도입기, 성장기, 평가기 등의 단계를 거치는데 이러한 구성에서 언제나 걸리는 부분이 평가기다. 희망차게 출발했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략을 평가하여 수정하거나 발전시키고 평가에 따라서는 폐기해야 하는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전략을 수립한 자가 평가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맞지 않다. 피평가자가 평가의 기준을 마련해본들 책임을 회피할 수단을 기준 안에 만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희망찬 수립을 해놓고 냉정하고도 치밀한 평가 기준을 마련할 만큼 인간은 겸손하지 못하다. 나 또한 수립한 전략의 모든 부분을 구성해 놓았지만, 평가 단계만을 빈칸으로 방치하고 고민중이다.

집사람이 바람을 피워도, 방명록에 댓글이 안올라와도 그 탓을 '노무현 때문이야' 로 돌리는 세상에서 그 당사자인 대통령은 국민들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겠다, 작년에 이미 포기했다 고 말하며 당당히? 맞섰다. 대중이 여론 형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댓글에 대한 취급이 여전히 민주주의와는 역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인적인 관념을 배제한다고 해도, 평가를 포기하고 스스로 독불장군을 선언한 대통령의 자세는 시정잡배의 시덥지 않은 짝다리와 다를바가 없어 보인다.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은 언론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집권 정부와 보수 언론이 다루는 사회 현안들(한미 FTA,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비정규직 문제, 새만금 사업, 사회 양극화 등등)이 기본적으로 같은 인식의 틀안에서 정책적으로 반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서로를 공격하고 공격 당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 하다. 따져 보면 노무현 정권이 보수 세력과 다른 정책은 두가지, 전시작전권환수와 햇볕정책 밖에 없다. 결국, 노무현 정권은 보수 세력과 정책적으로 코드가 맞는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이 노무현 정권을 탄압? 하는 이유는 이미 그를 좌파로 규정했던 원칙을 깨고 있지 않는다는데 있고, 영원한 친북세력인 김대중 정권의 대북 햇볕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데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는, 현재 집권 정부의 정책이 보수 세력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찰떡 궁합을 과시해야 할 때에, 무능이란 이름으로 정권을 비난한다는데 있다. 정책적 코드는 같지만, 추진 절차가 무능하다는 섬세한 지점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언론을 비롯한 보수 세력이, 어쨌든 그들의 원초적 본능인 기득권 수호 부분을 제외하고서라도, 노무현 정권을 비난하는 지점은 대게가 대북 정책부분과 인사 말고는 거의 없다. 노무현 정권을 좌파로 규정한 그들의 정신 세계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진보 세력에서는 일찍이 노무현 정권을 좌파로 규정한 적이 없다. 이는 진보세력이 좌파 정권이라 규정하고 동의한 적이 없는 노무현 정권을 보수 언론의 강력한 무가지로 떠밀어 낸 결과이거나, 진보세력이 노무현 정권과 충분한 거리를 두는데 게을렀다는 증거가 된다.

노무현 정권은 그들에게 최대의 적은 언론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언론은 우리 사회의 불량식품이란 정의를 만들어 냈다. 국정 파탄의 원인에 있어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통령을 보며, 언론에 대한 불량식품의 정의가 노무현 개인의 인식인지 정권의 인식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이쯤되면 분열도 이만저만한 분열이 아니다. 독재와 독불, 파탄과 시행착오의 단어적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의 뇌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판단이성을 잃어 버린 외로운 야생짐승의 목놓은 울부짐과 흡사할 뿐이다. 4년전 노무현 정권을 출범시키고, 탄핵을 온몸으로 막아 섰고, 집권정당에 과반수 의석을 밀어줬다. 대게의 대중적 국민들이 행사할 수 있는 참정권을 모두 사용하여 정권의 탄생부터 그를 밀어주고 막아주었을 때 밥벌이가 가장 숭고한 서민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인간답고 숭고하게 살고 싶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참정권을 다 사용한 정치적 대중과 밥벌이가 숭고한 경제적 서민에게 개혁법안은 고사하고 민생법안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집요한 양극화의 덜미는 서민을 더욱 뒷걸음질치게 하고 나서야 이제 바라는 것이 평가에 관심 없다, 즉 간섭하지 말라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최고 권력자가 더 이상 평가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독재가 아니고 단순한 어려움의 토로일 수가 있을까? 평가 받지 않는 자가 세우는 정책이 어떻게 민주적일 수 있을까? 사회의 생산과 체제를 새롭게 편성해 나가기 위해 세운 전략이 비전 2030 이라고 한다. 미국과 일본을 모델로 세운 이 전략을 거들먹거리면 응당 보수 언론에서 반색을 하고 사설이라도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경제 만능주의로 가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부치면서 벤치마킹 대상이 초자본주의, 패권주의, 극우세력이 득실대는 미국과 일본이라며 공공연히 밝히는 것을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냉수 마시고 속 차리길, 중요한 건 경제가 아니라 사상이다. 사상은 사회와 민생을 돌보지 않은데 그 빛깔을 낸 정책을 만들려니 그 과정에 무능이라는 보수세력의 단어가 창궐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토록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단정하건데 보수 우파가 이번 대선에서 집권할 것이다. 물론 그곳에 단한표도 던질 생각이 없지만, 이 부분은 명백히 노무현 때문이다. 지킬 기득권도 없는 밥벌이만이 숭고한 서민들조차도 사회적 분배와 평등의 가치가 경제성장보다 우선에 서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됐고, 기득권에 기생하거나 경쟁적으로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한 야생적 패배주의가 만연한 사회로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 책임은 노무현에게 있다. 그가 평가를 포기하고 평가 받지 않겠다는 토로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면책하겠다는 알량한 포석일 뿐이다. 그가 이제 부터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립싱크는, 립싱크 자체다. 즉, 입닥치고 있는 것 뿐이다.

나도 그만 입닥치고 겸허하게 전략에 대한 평가 기준을 만들어야 겠다.

2007/01/05 01:51 2007/01/05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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