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이미 반노동, 반민중적인 사고로 신자유주의 노선에 동참할 사람이었다. 일찍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노조 분할과 갈등을 통해 민주노총의 농촌마인드를 비난했던 한국노총이었다. 노사정 합의에 있어서도 사측과 정부의 안을 수용하고 민주노총을 이른바 따 시킨 것도 이용득 위원장의 정치적 발로 였다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가 이명박과 호기 좋게 손을 잡았다고 해서 놀라울 일도 아니다. 두 사람 다 정책이 관점을 바꾼다는 짧고 얄팍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들의 특징은 총론은 거창한데 각론은 형편 없는 열거를 주장하거나 총론을 목적하지 않는 각론을 늘어 놓고 선전하기 바쁜 부류들이다. 피지배자는 대게가 정책과 시스템을 통해 관점이 바뀐다. 하지만 지배자나 지도자는 관점을 통해 정책을 수립하고 관점을 현실화 시킨다. 이명박과 이용득이 악랄한 이유는 지도자이면서 절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관점과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도자인척 한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전폭적으로 지지 하거나 최소한 지지할 곳이 없어 남들이 지지 한다며 안락한 비판적 지지의 대열에 서거나 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 민중이 대다수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공포스러울만치 처절한 현실이다. 검찰이 BBK 는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여론조사 1위 후보는 기소하지 못한다는 정치석 해석을 한 것 뿐이라며 신당은 결국 현직 검사의 탄핵소추를 감행했다. 어쨌던 검찰에는 일고의 믿음이나 인간적 측은함을 보낼 생각이 없다. 그들의 알량한 조직적 자부심이 오늘날 한국사회에 미친 해로움은 회복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5년에 한번씩 바뀌는 대통령이야 죽도록 해먹지 못하는 것이지만 검찰 조직의 해악은 작금의 차원을 넘어 선다. 이 해악의 요지가 현실을 파탄 낸 세력의 주둥아리로 부터 나왔다고 해도 여론조사 1위인 유력한 대선 후보를 기소할 수 없어 수사를 엉터리로 했다는 의혹에서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검찰의 정치적 해석도 여론조사 1위인 후보에서 나왔고, 한국노총의 자기 계급의 정체성 부정도 관점의 존경어린 동질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력 후보에 대한 반동적 줄서기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맥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은 총론은 같은데 각론이 다른 집단간에 낮은 단위로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어쨌든 현실이다. 온갖 비리와 도덕적 파탄을 동원해도 부동의 1위 후보를 만든 것도 민중이며 정체성 부정이 오늘날 참여정부의 가장 치졸한 실패라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급적 연대를 구축하여 스스로 일어서길 냉소하고 남의 부스러기를 주어 담는 거지근성에 복무하기로 한 것도 민중이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실패한 민주노동당의 어려움은 반동적 민중과 진보라고 주장하는 반진보적 개혁세력으로 부터 잉태되었다. 주장하건데, 잃어 버린 10년은 잃어 버린 경제가 아니라 잃어 버린 진보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노무현, 정동영으로 이어지는 반진보세력은 개혁이란 비슷한 레토릭으로 현실 이반질을 해대며 2002년의 단일화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지근성과 비리에 내성된 민중을 만들어 낸 것도 10년간 반진보세력이면서 범진보인양 허튼 정치적 선전을 한 결과다. 10년간 부정된 진보로 인해 난치정체병에 시달린 민중들이 병에서 벗어나 안락함으로 복귀하고 싶은 심정은 당연하다. 차라리 경제라도 살려라 떡부스러기라도 커지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 중산층도 기대할 수 없는 노동자와 농민과 시장상인들이 이명박을 찍는 이 단순 명쾌한 이유를 밥벌이가 숭고한 대게의 사람들끼리 무턱대고 탓할 수 있나. 하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향한 이합집산에 정체성 따위는 없다고 해서 부자건 가난하건 보수건 진보건 간에 권력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각론에 매달릴 때, 사회가 더 좋아지려는 총론은 한낫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민중을 위한 총론을 얻을 수 없는 사회는 조금도 좋아지거나 진보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호주머니 타령만 하다가 사회적 시스템은 기득권의 관점과 논리로만 지배당할 것이 불 보듯 하다. 자기 호주머니 걱정만 하는데도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검찰이 1위 후보라서 기소하지 못한 이유와 한국노총이 1위 후보를 지지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릴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다. 고통도 우리가 받아야 하고 아이들에게 물려 주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총론과 각론이 들어 맞지 않게 변명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두렵지 않은가? 이런 현실이 공포가 아니면 무엇이 공포인가?

2007/12/11 14:42 2007/12/11 14:42
DrunkenSTAR 이 작성.

국민이 노망 났다?

2007/12/05 18:08 / 생각

국민이 노망 났다 는 김근태의 반응은 단 한 순간도 정치적 판단을 버릴 수 없는 직업 정치인의 진정어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과 적당히 선을 둔 전력이 있었지만 그도 민중의 생존적, 정서적 환경을 파탄 내버린 정권의 중심이 아닐 수 없기에 명백한 오만이다. 오늘날 대선구도가 병리적으로 이상징후로 치달아 결국 노망이 될 수 밖에 없는 말기적 증상이 된 원인이 오로지 정권 교체의 열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한마디로 정치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기득권 수성에 나섰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후안무치 하지만 국민이 노망나지 않은 명제를 증명할 마땅한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BBK 의 안개가 걷히고 이명박 대세 구도가 고착되면 그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광명이 고작해야 한반도대운하와 300여개 사립고 라는 점이다. 국토를 찢어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를 통해 물류를 진작시킨 근대 국가가 없었고, 사립학교를 늘려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비를 줄이는 풍부한 상상력을 적용한 사례가 없는데도 그의 지지도는 절대 물러섬이 없다. 국민을 통채로 치매환자로 규정한 고약함에서 정신을 차리고 망조의 관점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김근태의 노망은 정동영이 안찍고 어떻게 저런 위선적 인간을 지지할 수가 있냐는 통탄이다. 하지만 한스러움 수준에 머문다. 모두에 말했듯 그도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 정권의 반민중적 인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대운하와 교육정책의 방죽을 넘는 정권 교체의 열망이란 것이 노망적 지지도로 환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어두운 전망은 이러한 고착구도가 그대로 선거에 반영될 가능성 또한 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정권 교체의 열망을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역부족에서 찾고 있고 벌써 부터 이를 반성해야 한다며 이론의 숙지 자세로 접어 드는 채비를 서두른다. 분열적 좌파가 아니라 텍스트적 좌파의 위험도가 증대되어 그나마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운동적 투쟁마저 거둬들이는 어둠은 아닐런지 염려스럽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민중 계몽은 분명히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김근태식 반응으로 국민이 노망난 이유는 오래도록 한국 사회를 주름 잡고 있는 시행착오의 경험과 손쉬운 용서에서 비롯된 무식한 교양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근태가 말하지만 않았다면 이 사회와 국민은 확실히 병리적 이상징후에 빠진 집단 정신병동 맞다. 정신병동은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인간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실존의 문제에 맞닥들인다. 오늘날 대선구도는 이러한 실존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모두가 생각을 놓고 좋은게 좋은 손쉬운 용서를 저변에 깔아 놓음으로서 실존적 문제를 쓸어 버린다. 다시는 현실로 복귀하고 싶지 않은 분열적 상태의 지속을 바다 이야기에 찾는 대중들로 가득차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이러한 반동적 심리는 이명박의 능력이나 인물의 매혹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대게가 정권교체의 열망이라는 노망 현상에 기인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나 이회창 보다 덜 보수적이고 실용에 가까운 이명박이 호주머니 사정을 좀 낫게 해주겠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박근혜의 권위적 보수로의 회귀보다는 낫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가 살며 보여준 온갖 치졸한 태도와 저열한 교양은 스스로 제작한 사제 시한 폭탄이다. 실용적 보수가 옮고 그르다는 판단은 유보적이어도 도덕적 파탄에 대한 노망적 용서의 집단 행위는 분명 시한 폭탄의 파편에 당할 방패막이를 자체하는 꼴이다.

오늘날 대선 구도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의 빈곤이 주물러진 한덩이의 빗살무늬 토기를 구워내는 상황이다. 게다가 견디기 녹녹치 않은 정서적 폭력의 상황인 것이다. 아 정말 기가막힌 것은, 왜 우리 사회는 다른 사회가 겪은 시행착오의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반복 경험해보고서야 배우게 되는 것일까?

2007/12/05 18:08 2007/12/05 18:08
DrunkenSTAR 이 작성.

권력을 향한 짝퉁 개혁과 천민자본주의의 난장은 참혹한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슬프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관성으로 벌어지는 선거판이라고 해도 누구든지 사회를 동작하는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공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스스로 자본을 축적하거나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가 되어 봐야 찢어지는 가랭이만 남는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불행이도 아니다.

더욱 기가막히게도, 자신의 처지나 계급을 여전히 자신의 희망이나 자기확대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우려한 행동을 집단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농사를 지으며 한미 FTA 를 찬성하고 한우를 아껴달라고 외치는가 하면 자본주의 먹이 사슬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계급이 감히 중산층의 몰락과 나라 경제를 걱정한다. 여전히 자신의 희생이 부족함을 스스로 통곡하고 자발적 복종에 나서라 동원하는 스피커를 자청한다.

얄궂은 지식인들은 그들의 비평적 계급 활동은 줄이고 약자의 계몽과 권력 감시에서 약자 동원, 권력 집착의 듣보잡 행동으로 계급적 활동을 이동시켰다. 지식과 자본으로 무장한 계급은 약자에게 강자의 원리를 주입하며 환상과 염려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미래의 강자라는 환상과 강자들의 사회가 무너지면 강자가 될 수 없는 염려를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회유의 단계도 없이 자발적으로 줄서기의 끄나불이라도 잡으려고 환장들을 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한결 같은 정신병리적 현상은 각론이 다른 총론에 열광한다는 점이다.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한 정책적 총론을 실현하려는 특목고, 자율형사립고의 확충이라는 각론을 '참' 으로 간주한다. 자본주의 먹이 사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 학벌이나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는 총론을 이해하더라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학 자율화와 본고사 부활이라는 각론이 이들에겐 '참' 좋은 공약이 된다. 어디 이뿐인가, 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바로 비정규직으로 2년마다 실존에 빠질 세대적 고민 또한 찾아 볼 길 없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자신만은 비정규직이 안되면 그만인 영혼 빠진 좀비를 자청한다.

IMF 를 짝퉁 진보의 잃어버린 10년쯤으로 생각하는 무식한 역사 의식은 그렇다치더라도 한번도 자신들의 세대를 결정해 본 경험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만한 시대적 담론은 가질 여지가 없는 자본종속적 세대에게 희망은 여전히 돈이나 버는 것이다. 이런 세대와 이런 세대를 세계화적 적응이라고 호도하는 기성 세대간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성이나 존경은 돈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이 없는 기성 세대는 아버지라도 인간적 존경을 받을 권리를 박탈 당한다. 이런 세대 간극과 계급적 갈등은 오래도록 공존하기 어렵다. 언젠가 이런 토대는 혁명이 되거나 봉기가 된다.

그래서 백낙청 선생은 줄기차게 통일을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곧 닥칠 혁명이나 봉기의 폭력을 막으려고..

2007/12/04 15:07 2007/12/04 15:07
DrunkenSTAR 이 작성.

비판적 지지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비판적 지지는 이름을 달리하며 구차하게 한번 더를 구걸하기도 하고 정말 허물을 덮어도 될 만한 능력이 있을지 모를 의구심 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비판적 지지는 종종 사표론과 만나 공연히 표를 죽이지 말고 의미 있는 곳에 던지라고 유혹한다. 현재의 대선구도 처럼 진보 인줄 알았는데 결국 진보가 아니었던 개혁 세력의 당선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보수 세력의 당선 가능성이 높을 경우 더욱 빛을 발한다. 지난 대선에는 절반의 진보가 이뤄낸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오늘날 그 절반은 짝퉁과 함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진보 진영으로 세력화하는데 실패 했다. 민노당이 지난 대선보다 더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지점이 교육과 양극화 해소, 신자유주의 반대에 대한 정책을 빼고는 볼 것 없는 공약들로 열거 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진보적인 사회 체제를 만들고 싶어도 민노당에게는 유혹하기 쉬운 비판적 지지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두려움 이다. 막상 집 한채 없는 서민일지라도 집값이 떨어지면 어쩌나 두려워하고 세계화가 모두 잘 살게 해주는 변화인 것 처럼 호도된 영향 탓에 세계화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 때문에 진보를 지지하거나 표를 주지 못한다. 어이 없지만 두려움은 비판적 지지의 동력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그대로 제도화시킨 민주주의를 이뤄내지 못하고 결국 사표인 비판적 지지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오늘날 정치구도, 대선구도를 만든 책임은 노무현과 참여정부 그리고 한번 더를 구걸하는 386 정치인들에게 있다. 이들의 정치 계몽은 문국현과 이명박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권영길과 문국현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집단 뇌사 상태를 조장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에겐 여전히 비판적 지지의 악마적 유혹이 필요하고 이를 협박하기 위한 유일한 정치 공학으로 다시 단일화를 떠올린다. 단일화는 어떤 요구가 아니라 하나의 협박에 가깝다. 즉 비판적 지지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추잡한 협박이다.

진보적 사회 체제를 원한다면 비판적 지지에 쓸데 없는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바로 뭔가가 좋아 질 것만 같은 개발성장주의에 현혹될 이유도 없다. 진보적 정치, 사회 체제 안에서는 1%만 더 잘 살아도 통계적으로는 1인당 GNP 가 오르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는 누구나 조금씩 더 잘 사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복잡하지 않다.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으며 누구나 일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악이나 비판적 지지도 아닌 누구를 진정으로 지지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다.

2007/11/27 19:42 2007/11/27 19:42
DrunkenSTAR 이 작성.

공멸할 대선구도

2007/11/23 18:26 / 생각
단순히 볼세비키 무력 혁명 쯤으로 폄하되는 러시아 혁명은 사실 가장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된 무혈 혁명에 가깝다. 혁명은 하나의 파괴의지와 하나의 건설의지로 자의식을 형성한다. 이러한 혁명의 자의식은 무엇보다 다수의 민중이 민주적 결정을 하기 위해 동의와 비판의 역사적 동력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사나운 에너지가 되거나 해프닝이 된다. 혁명은 분명히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의지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혁명은 현재의 어떤 사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정치적 연설과 정책 그리고 읽을 거리에 대한 놀라운 집착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공화적 대의 정치에서 선거는 제도적인 혁명에 가깝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 뿐만 아니라 정치 조직적 에너지와 사회 전반의 담론이 집중되어 폭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OECD 가입국으로 사회 깊숙히 세계화가 점진하고 있는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해 주식을 하고 부동산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혼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 남으려는 시도는 완전한 시대 착오이다. 장기적으로 개별 자본은 집적된 자본으로 이동하고 단위 노동력을 가진 대게의 민중은 잘 살기 위해 노력했던 추억만이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잘 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물론 자신의 생각도 바꿔야 하지만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왜, 노력했는데 못사는가? 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는 현대 정치에서 그나마 합리적인 제도 개혁인 셈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오늘날 저항해야 하는 것은 군부독재나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계몽하는 이유가 독재자도 언젠가는 죽는지라 한계가 있지만 자본은 한계도 물리적 임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잘 살라는 유혹으로 인간의 영혼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고 기생하며 정치의 폭발적 증후가 시작되는 선거에도 예외 없이 흡혈한다. 잘 살려면 시스템, 즉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물론 잘 사는 것은 모두 굉장히 잘 사는 말도 안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모두 조금씩 잘 사는 체제이다. 이러한 변화를 위한 혁명을 누가 꿈꾸고 있는지 놀라운 집중력으로 살피지 않고서는 자본과 자본의 이익에 투철한 프로파간다와 진정성을 구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구별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대선 구도는 차선도 아닌 차악의 선택이 당연시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분해야 할 참담함이다. 온갖 범죄의 지명수배자들이 나와바리를 놓고 패싸움을 벌이는 구도에서 유권자는 선거법의 정신적 구속으로 인해 조난 신호조차 보낼 수 없다. 지지와 비판을 공유할 수 없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로 인해 유권자의 모든 권리는 선거일의 한표로 요약되어 버렸다. 유권자가 권리의 보유자가 아닌 인간으로 서 투영되어야 할 교양이나 태도 따위가 개인 문제로 치부되면서 우리는 시스템을 바꿀 현실적 기회를 잃어 버리고 있다. BBK 와 이명박만 남아 있는 이러한 선거는 한국 정치의 수치다. 이런 선거를 치뤄봤자 어떤 합당한 결과나 잘 살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민주화를 가장한 반민주주의 세력에 패배했고 부패의 순환고리에 지쳤다. 혁명은 커녕 공멸할 선거만 남았다.
2007/11/23 18:26 2007/11/23 18:26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