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를 거부했으니, 보지도 않았으며 보지도 않을 참이다. 2백만인가, 3백만을 찍고 일천 오백개 미국 개봉관 확보를 운운하는 통에 추호의 궁금함 마저 사라졌다. 괴물을 누르고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 될꺼라 예상 하는 언론들도 적잖다. 거, 신통방통한 이무기다. 보질 않았으니 사실 이무기인지, 우리 시대가 바라던 진정한 괴수 인지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CG 따위의 완성도나 장르 따위의 문법은 더더욱 모르겠다. 다만, 우리 시대 대중사회적 스터디 셀러인 황우석을 불러 내도 좋을, 어쩜 그리 똑 같은 복습이 이 사회에 다시금 필요하다면 명백한 비정상 아닌가. 도무지 대중의 선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되뇌어도 분기 승천하는 이유는 결코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영화를 논할 수는 없는게고, 심형래가 각종 오락 프로에 나와 반 영화 마케팅, 반 코미디를 할 때도 빼먹지 않는 소위 헐리우드에 태극기 꽂은 무용담은 나 스스로는 불편 하고 그만이지만 박세리의 뽀얀 발 컨셉이 애국가와 노상 겹쳐 졌던 이미지와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나만의 생각일까. 괴물은 있되 이무기 컨셉 빼고, 아리랑 빼고, 심형래 무용담 빼고 이것은 정통 괴수 영화를 표방해도 애국심따위가 디워와 견주어 졌을까? 이것도 나만의 패러독스 일지도 모를 일. 최소한 영화가 애국심과 결부되는 지점이 있고 그것을 활용한 흔적이 도처이며 이런 영화에 대한 논란을 제기 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관객이 아니라 사회적 대중으로서 담론을 제기하는 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관객은 7천원짜리 취향에 맞으면 앉아 있고 아니면 일어서면 되는 객체로 취급하는 무책임 또한 관객에서 벗어난 대중들의 짓들인 것을. 거참, 관객의 입장에서 재미 없으면 일어날 수 있는 권리처럼 디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는 것을, 영웅이 탄생했고 또 다시 성역을 만들다니, 참 못났다. 그런 애국심이 있으면 애국적 해방구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화려한 휴가' 를 통해 함 살펴 보는건 어떨지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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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이라는 단어는 어떤 상투적인 분위기만으로 뭉둥그릴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섹시하다는 쾌감의 영역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대게의 경우 지적이란 분위기가 일치할 경우는 지적인 언어를 구사할 때이다. 지적인 언어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수사들의 집합이 아니라, 정확한 단어의 구사만으로도 지적 혼돈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정확한 단어의 구사는 팩트를 생산하기 위해 구상되는 논리에 의해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쾌감과 취미를 표현하는 구도 안에서도 어떤 단어를 구사하여 표현하는가에 따라 이 지적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오래도록 지식과 지성이 이루기 어려운 개인의 능력치로 간주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범위 안으로 종속되어 졌다. 따라서 지식이 있다고 판단되어 지는 사회적 척도로서, 학력이나 그러한 학력을 가진 사람과의 혈연, 지연의 관계가 사회적 합의를 결정하는 계급으로 인정 되어졌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보수적으로 말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속의 지적 인격체로 인해 그 지적이라는 판단은 모두 허구 였음이 드러 났음을 개탄하곤 하지만, 지식이라는 사회적 합의(이 부분도 그들만의 판단일 가능성이 높지만)의 허구라기 보다는 지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역사의 연속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식은 언제나 대게의 인민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끊을 수 없는 고리와도 같았다. 이러한 굴레에 백성처럼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민중적인 발현이다.
전통적인 지식의 무리가 반복해온 역사를 끊어 먹는 현대적 방식으로써 집단 지성이 화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를테면 지식이 통제하던 미디어의 메카니즘이 민중들의 통제로 헤게모니 이동을 감행하고 있는 현대적 현상이 바로 집단 지성이다. 공교롭게도 가장 진보적인 매체인 인터넷이 이러한 화두의 온상이 된 이유가 오직 네트워크의 필요라는 루소(언어의 기원)식의 계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책임으로 만들어진 공공의 지적 체계에 대한 존재 이유를 깨달은 의식이 현대적인 개인화나 익명성만으로 설명되어 질 수도 없다. 공공의 지적 체계는 자발적인 판단이 공동으로 집합되었을 때,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의식의 발전과 이를 그대로 메카니즘에 적용한 탄력적인 미디어의 역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판단되어져 온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 더 안전한 방식인 집단을 이용한 지적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이며, 지적 판단을 역사의 연속성상에 있는 인민 지배 계급에게서 분리시키려는 천천한 개혁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털어 Web 2.0 이라고 하고 네트워크의 법칙상 그 우주적 확장을 집단적인 어떤 형태로 묶으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작업에 대한 현실적 적용의 현장에 있는 나로서는 집단에 지성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아니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근본에 대한 회귀가 보수적인 접근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보더라도, 집단이 만드는 대중적, 공공적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는 데 있어서 구현되는 메카니즘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을 뿐이다. 지성이라 함은 더더욱 흥미롭다. 앎의 정의가 아닌 헤아림의 정의로 수많은 '그것' 을 '다름' 으로 통찰하게 만드는 것이 지성 아닐까? 이것은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두 가지 힘인 '동의'와 '반대'가 반복적으로 작용되어야 한다. 다수결은 이 판을 깨는 반민주적인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너무 오랬동안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졌다. 많은 사람들의 집단 지성은 메카니즘안에서도 반민주적이라는 결론이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한 자본은 인색하기 마련이다. 자본이 언젠가 민주주의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기에는 인간의 역사가 너무 숨가쁘기만 하다. 게다가 이념적 무장이 없는 민중들을 선동하는 정치 구호속에서 그 집단 지성이라는 혁신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집단적으로 동원되고 세를 과시하는 일련의 활동이 난무하는 광장에서 지성이라는 헤아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광장의 활동은 그대로 인터넷의 진보적 화두속으로 옮겨져서 상업주의와 쉽게 결탁해버린다. 이제 이 집단적 지성이라는 네트워크가 오묘한 인간의 이합을 통한 경험의 공개인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의도적 조작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 자본이 파괴하는 것이 더 이상 자연으로 한정되지 않은지 오래지만 의문은 허탈한 답을 내고 만다.
집단 지성, 참여, 공유 같은 한무더기의 정치적 속성을 뿜어 내는 Web 2.0 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한껏 부풀어 전진하는 신작로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아니 대중의 집단 이성이 이 개념적인 기술 진보에 하루속히 동참하기를 뽐내며 기다리는 해괴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인간적 가치를 투철하게 관념한다는 어느 나라에서 조차도 반민주적인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 의식이 부족한 민족에게 지나치게 빠른 기술의 구현은 재앙일 수도 있다. 더 잘 사는 것만이 관심사인 민족이나 대중에게 상업주의는 숭고하다. 자본은 이 냄새를 간파한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개인을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해서 가십거리도 되지 않는다. 더 잘 살려는 숭고(?)함도 없으면서 집단이 나서니까 어떤 헤아림도 없이 나서는 자들까지 합세해서 개인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작은 가십이 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 집단에 종사하도록 만들어지는 지나친 기술의 도입은 반드시 개인에게 명백한 재앙이 된다.
한때 노현정 아나운서를 모델 캐스팅하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해두었던 전화번호를 지웠다. 게으름으로 갈음하여도 여태 가지고 있었던 것 자체가 노총각의 가난한 로망 쯤으로 덮어 버릴 수 없는 것이 술에 취하면 가끔 택시 뒷좌석에서 비틀거리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 동료들에게 '노현정한테 전화 함 해볼래' 했던 자랑 짓거리가 객기 이상의 무지였음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다. 결혼발표를 하고 나서 된장녀까지 논란된 사건을 지켜보다가 다음날 아침 뉴스에 나온 노현정 아나운서를 보고나서야 아침뉴스도 진행했었구나 알게 되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어느 뉴스 기사처럼 거대 기업에게 노현정 아나운서를 이렇게 우연히 아침뉴스에서 보는 가난한 로망마저 빼앗긴 것 같다는 쓸쓸한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너무 물끄러미 본 탓일까? 사실, 노현정 아나운서가 결혼한다는 일반적인 사생활에 어떤 정치성이란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래저래 된장녀 사건까지 싸잡아서 모든 마초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어느날 덜컥 재벌가에 시집을 가고 브라운관에서도 떠난다니 KBS 의 발바른 후속 조치 만큼이나 포탈들의 자동 검색어 삭제, 댓글 삭제 등의 거부감 넘치는 조치에 근성 넘치는 그들이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충 요약해보면, 거대자본의 횡포란다. 그렇다, 거대자본이 할 짓이 없어서 개인 사생활에 정치성을 부여하고 자본을 투입하여 성스러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거대자본이 훼손하는 경우에 대해서 대중들의 성찰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우르르 몰리는 것에 훼방을 놓느냐, 방임하는가에 기준을 둔다.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한 폭주족의 대행사를 민주주의의 한 발현으로 방임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와 인터넷의 대중들은 꼭 빼닮았다.
현대의 정보는 그것이 혹여 뉴스기사라고 해도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원소스에 대해서 조차 비평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금물이 될 정도로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넘쳐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사실인지 판단할 수 없는 모방과 모방의 모방이 이루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방의 원소스를 찾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누가 행위하였는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초고속이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고작해야 여러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대게의 대중들이 대중을 쫒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판단하는 안락한 방식이다. 포퓰리즘? 이제는 대중 파쇼의 시대다. 넘치는 정보의 파편들을 민주주의의 형식안에 밀어 넣고 안락한 방식으로 랭크를 매기는 속성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 여기에 약간의 비장미, 마초 남성들의 노현정 바라보기 같은 것, 를 가미하면 마치 무슬림의 순교자가 된 양 거대자본에 맞서는 투사가 된다.
현대 사회를 상업주의의 화신으로서 거대자본이 구조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누구든 적어도 자기가 준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반대급부가 없다면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 마치 합리적인 계약 방식으로 공동체를 엮어 놓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등가의 원칙이 전제가 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본질적으로 항상 분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이익집단적 게젤사프트 사회에서 게마인샤프트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비장미 넘치는 사명감으로 투쟁해야 하는 것이 정작 거대자본에 대한 투사 노릇이다. 포탈의 행위에 대해서는 적잖은 거부감과 그들의 못되먹은 행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노현정의 결혼은 노현정의 결혼일 뿐이다. 거기에 거대자본의 횡포라는 전개는 어떻게 보더라도 그 전사들의 과잉이다.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인터넷을 이용하는 대중들이 상업주의나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렇다할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엉뚱한 투쟁이 성행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대중이라는 막강 파워를 등에 업었다고 생각하는 소외에 대한 위로의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자신들이 엮여 있는 사회가 이익만을 위해 언제든지 묶였다가 수틀리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게젤샤프트적이라는 점을 기만하고 연속하면서 성찰의 기회는 사라진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게마인샤프트로 돌아선다. 그것을 인정 못하게 하는 것들은 많다, 이를테면 가부장적 전통, 수구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등등... 한동안 기만의 연속은 진행될 듯 싶다. 노현정 아나운서가 결혼한다는데 축하는 못해주고 너무 정치적이었나 싶고...
반 월드컵 스티커의 문구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월드컵 조형물에 부칠 계획이라고 한다. 스티커의 부제로는 '나의 열정을 이용하려는 너의 월드컵에 반대한다' 이다. 벌써 몇달 전 부터 인가? 이명박씨가 시청앞 광장을 SKT 에 팔아 넘기고 거대 자본이 서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시민들을 상업주의에 가둬버린 것이. 2002년, 온 나라의 붉은 물결이 네셔널리즘이다, 파시즘이다, 설왕설래 되는 이유가 그 광기의 거부감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파시즘인지 아닌지 정의하려는 정치적 수사 또한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순수한 응원 체계의 열정과 카타르시스의 분출이라는 의견은 솔직히 순수가 아니라 순진이라 봐야 한다.
스포츠 오락으로써의 월드컵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집단 의식은 모든 사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치의 슬픔이나 고통 없이 월드컵에 열정을 폭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들 위로 태극기가 떠다니고, 그 안에서 대한민국의 하나됨을 꿈꾸는 것은 그 집단의 트래이드 마크인 전설, 신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라의 정치는 볼 것도 없다며 완벽한 체념으로 일관하고 서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는 자조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는 태극기 아래의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이 없는 상태, 신화와 전설의 몰입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언론과 거대 자본만이 가해자라는 견해에도 반대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오로지 언론의 조작에 의해 형성된다고 볼 수 없고, 거대 자본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본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의도하는 응원가를 부르는 온갖 상업주의를 동원했기 때문에 집단 의식이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니힐니즘이 면죄부일 수 없다. 이것은 그것을 원하는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태세의 상태가 그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온 탓이다. 대중들은 그 문화의 유행성에 편승하여 오래 전부터 자본이 준비한 몰지각의 행위를 해오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우시카를 스타벅스에 팔고, 체게바라를 패션에 팔아 자신만이 잘 살고 행복하면 되는 이기적인 웰빙에 종사하는 것이 사이 좋은 세상이란 관점을 스스로 관철시켰으며 이미 의식을 넘어 무의식이 되었다.
자본이 연계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 엮어낸 새만금과 강제 철거의 현장에서 홀로 죽어간 고 신현기씨, 생때 같은 두 어린 학생들을 탱크로 깔아 버리고도 의기 양양하게 다닐 수 있도록 놓아둔 우리 탓에 채 1년이 안되어, 그 땅에 기대어 밥 먹고 그 땅을 길어 책보고 공부했다는 우리가, 서슴 없이 미국이라는 우상에 내어준 대추리와 도두리, 죽을 것을 아는 몇몇 사람들만이 투쟁하는 한미 FTA 반대 운동에 어느새 월드컵에 쏟은 열정을 거둬들이고 무임승차할 무리들을 반대한다. 그러기를 원하는 권력과 자본의 이중논리인 월드컵에 온통 이성과 감수성을 빼앗기고 나면 한미 FTA 의 말도 안되는 1차 협상안이 타결될 것이다. 그것을 카타르시스 라고 하는 무리들이 그 다음에 쏟을 열정은 어떻게든 빠른 시일안에 미국화 되는 일 뿐이다. 미국쌀을 먹고 미국 신용카드와 이자도 없는 미국 은행에 계좌를 터야 한다. 타이레놀 한알에 10만원 할 날은 바로 코 앞이다. 그리고도 다시 4년이 지나면 정치엔 관심 없고 여전히 경제는 어려운 무리들이 다시 모여, 그 열정의 동어 반복을 자랑스러워할지 궁금하다.
성에 관한 도덕적 인식에 있어서 대중들은 파쇼가 파악한 대중의 일반 속성을 그대도 답습하고 있다. 성의 인격에서 술의 인격으로 본질을 흐리더니, 과업으로 도덕을 덮고 사람과 나라를 동일 시 하는 전체주의의 망령을 무덤에서 파 낸다. 같은 여성이라도 다른 정치적 위치에서 도덕을 바라본다. 진보세력의 문제가 내부에 있듯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최대의 해로움이 도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보편적인 가치관이 정치성에 의해 다른 판단을 하게 이른다면 여성의 최대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수도 있다.
대중들의 집단 인격이 불분명하더라도 대중이 취하는 관심이나 무관심, 추종이나 반동에는 책임이 있어야 한다. 그 책임의 수위는 공인에게 기대되는 수위와 결코 낮아서는 안된다. 책임이 낮을 수록 대중의 다수결은 신화성에 근접하게 되어 있고, 신화는 위정자들의 입맛에 맞게 파쇼로 재단된다. 대중은 몇몇 야심찬 기득권력자들에 의해 심리를 파악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정리된다.
사건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태도는 담론의 가치조차 없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대중의 규범적 다수결이다. 책임이 떨어진 대중에게 깊은 통찰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므로 대중은 철저히 어떤 야심가가 펼치는 레토릭에 편 갈라진다. 그리고는 상대적으로 다수가 집결한 편에 서서 웅성거리는 립싱크에 열중한다. 그 편의 가장 뒷줄에 황우석, 전두환, 최연희가 졸졸 따라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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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07/08/07 14:2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디워가 인기 있는것은 님처럼 대중을 우습게 아는 대중보다 위에 있지도 않은데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에 대한 반감이죠. 그거 아십니까? 님이 대중을 참 못났다고 말할수 있드시 대중도 님을 참 못난 인간에 꼬일대로 꼬인 인간이라고 비판할수 있다는것을요. 님의 다른글을 둘러보니 충분히 그런 소리 듣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2007/08/07 21:3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디워에 관해서는 성숙한 비판과 의견교환은 영 요원한 일이군요. 벌써부터 파르르 떨며 인신공격 들어가기 하나 나왔네요. 이 영화에 대해선 그냥 눈 감고 귀 닫는 게 현명한 일인 듯 합니다.
완두콩 2007/08/09 16:4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디워... 재밌는데~ㅎㅎ
7,000원 중에 영화 재미에 5,000원 정도 지불하고
2,000원은 심형래의 미래에 투자한다 생각하고 다음에 더 좋은 영화를 기대하는 것.
그냥 아주 비약이 심하지만 그게 제 간단한 태도랄까^^
re지나가다: 참고로 저의 신념은 "비판할 땐 항상 나를 밝힌다"입니다.
홍반장 2007/08/13 15:26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형...우선 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