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들의 군복

2009/06/26 15:26 / 생각
전투복(군복은 사재말이다.)을 입으면 여름엔 덥고 겨울에 추웠다. 자대 배치를 받으면 선임들이 입고 남겨둔 전투북을 한두벌 받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작업복이라 불렀다. 훈련소에서 받은 전투복은 A급으로 취급하여 휴가 갈 때 잘 다려 입고 나가려고 짱박아 둔다. 낼세운 다림질은 휴가용 전투복에나 하지 부대 안에서 입는 작업복에는 그따위 공을 드리진 않는다. 그 날선 전투복을 사재에서 멋있게 봐주지도 않는 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휴가 전날 열심 다림질이다. 대게는 지급 받은 전투복으로 군생활을 마치지만 게중에는 사재 군복을 5만원인가 6만원인가 주고 사는 사병들이 있다. 거저 받는 전투복보다 약간은 색깔 빠진 듯한, 뭔가 파스텔톤에 가까운 얼룩무늬에 바지는 통이 넓어서 편하기도 하고 다림질로 날을 세우면 전투복이 아니라 조금은 기성 패션화된다. 어디까지나 그들끼리의 생각이다.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내고 사회에 복귀하고 극히 정상적으로 생활하다가 1년에 한두번씩 있는 예비군 훈련을 가려고 전투복을 꺼내 입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다리는 자연스럽게 짝다리가 된다. 평소에는 눈도 못 쳐다 보던 여성의 다리를 훌터 내리는 눈엔 온갖 마초끼가 철철 넘친다. 예비군 서넛이라도 됐으면 '유후~' 하는 감탄사도 내봄직하다. 그야 말로 제대로된 유니폼 증후군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이 얼룩무늬 안에 갇히면 근거 없는 서서쏴의 자신감을 가진다. 도무지 앉아쏴들이 알 수 없는 모종의 연대마저 느낀다.

요즘 할아버지들이 전투복을 입고 여의도며 덕수궁을 순회하며 그 모종의 연대를 실현하고 있다. 어떤 노년의 외로움의 발현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어처구니가 없다. 모든 현실의 잣대가 좌파척결에 있는 늙은 마초들의 덩어리에서 그 옛날 몇몇 전우(?)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만날 지 모를 사재 여성의 호기심에 들기 위해 사고 다렸던 사재 군복의 컴플렉스를 본다. 군대라는 것이 개개인적으로는 온통 열등에 쌓여 있을 수 밖에 없다. 돈많은 애들은 면제 받고 사회에서 자기보다 앞서서 공부하거나 경력을 쌓을 텐데, 여자친구는 짧은 머리보다 긴머리에 컬이 출렁이는 멋쟁이와 눈맞아서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열등과 불안을 애국과 계급으로 승화시키는 조직이다. 할아버지들이 다시 군복을 입고 돌격 명령을 기다리는 것은 애국도 계급의 지배적인 인식도 아니다. 다만 전역 후에도 그들의 삶이 군대와 다를 바 없이 온통 불안했고 열등했다는 반증이다. 왜 그랬을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언제나 친북좌파척결로 귀결된다. 격결만 되면 로또라는 생각, 뒤집지 못한다. 따라서 군대나 사회나 별반 다를게 없으면 차라리 전투복을 입고 컴플렉스라도 분출하는 편이 여생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는가는 계산은 응당 가능하다. 다만, 예의와 공경에 대한 단어적 의미를 규범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 안쓰럽고 우려스럽고 그렇다. 게다가 경찰이 저런 덩어리를 대하는 태도란, 열등의 연대 인식이 얼마나 감염이 빠른 신종플루인지 가늠이 되고도 남음이다.
2009/06/26 15:26 2009/06/26 15:26
DrunkenSTAR 이 작성.

브래지어

2008/08/20 19:00 / 생각
우리의 삶은 법의 가치로 살아가지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못하고 그렇지도 않다. 법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일시적 규정일 뿐이다. 이것의 생명은 인간의 양심보다 길지 않다. 법대로는 세상을 움직일 수 없고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도 아니다. 법의 집행이나 준수 따위도 법대로는 다 되지 않는다. 법의 집행이나 준수에 가치가 있을 때는 반드시 양심으로 작동되었을 때 뿐이다.

경찰서에서 자살 방지를 위해 면티 하나 입고 있는 촛불집회 연행자에게 브래지어를 벗으라 했다 한다.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이 여기자와 술집 여주인의 가슴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교양에 마사지걸의 얼굴과 서비스의 질적 수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정치가 되는 세상에서 브래지어 호크 열고 닫는 것 쯤이야 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우리 사회의 양심적(?)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유치되기 전에 브래지어를 벗으라는 법은 없다. 자살이 어떤 실존적 의미인지 알길이 없는 경찰관에게 브래지어가 자살용 도구 일리도 없다. 브래지어가 50kg 정도 되는 보통의 여성을 매달 만큼 장력을 지닌 섬유구조로 짜여 있는지 그 좋아하는 과학적이며 국제적 근거가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이건 법이 아니라 법집행, 아니 인간의 양심의 문제인데 도대체 그 양심에 털이 난 건지 가출을 한건지 모를 일이다. 아주 수준 낮은 양심을 스스로 고발한 셈인데, 브래지어 벗기는 일이 예삿일인 사람 아니고서야 생면부지의 여성에게 브래지어 벗어, 이런 말 평생하기 힘들다. 경찰관? 법의 집행 따위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텐데 분명 변태마초들이다. 브래지어 벗기면 팬티 벗기고 싶은게 마초들이고 그 성질은 대통령이고 나도 모두 공통분모다. 아니라면 거세다. 다만 변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무데서나 벗기지 않는 것 뿐이고, 함부로 누구한테 명령하지 않는 것 뿐이다. 함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초딩적 양심인데 경찰의 양심은 법 아래 존재한다는 유아적 양심의 자기 고발인 셈인데다가 일말의 양심 따위를 교육한다는 대한민국 교육제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은 스스로 복제를 하고 예술도 복제를 한다는데 위에서 하는 못되쳐먹은 양심을 아랫것도 복제를 하고 난리다. 이거 무슨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인가. 더 희안한 건 옆에 있었다는 여경이다. 경찰 되려면 여성성을 제거하는 훈련이라도 받는 것인지, 남성이 마초와 변태마초로 구별되듯 성기가 같다고 다 여성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남자 경찰관들의 그 변태마초적 기질과 못된 양심의 복제에서 비롯된 것, 법대로 하려면 브.래.지.어. 가 법조항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자살 방지의 확대 해석은 아닌 것이고, 이건 솔직히 브래지어의 문제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 아니겠는가.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빨고 싶은 판타지에서 비롯된 이 변태적 법집행이 새로운 예술 사조의 개척이 아니라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 어머니, 아내의 가슴 그리고 세상 모든 여성의 가슴에 반성하라는 뜻으로 시인 박영희의 시 하나 남긴다. 잘 읽고 가출한 양심 찾아 왔으면 싶다. 뭐 양심도 복제하는 사이보그 클론들에게 바라기엔 무리이긴 하지만.

- 글을 쓰고 나서 기사를 검색해 보니 마포, 강남에 이어 중부에서도 브래지어를 벗으라 했다는 군요. 이제 보니 경찰들, 색소 묻은 여성 속옷 수집광들이었군요. 양심이 없어도 정신병은 걸리나 봅니다. 이런 변태들이 바바리맨 잡아서 바바리는 벗겨서 유치하는지 모르겠군요.

아내의 브래지어

2008/08/20 19:00 2008/08/20 19:00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