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느날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이야기 하고 있을 때가 되면 그 때가 사랑일수도 있겠다며 거드름 피울 것 같았고, 어떤 마음이나 되려 손사래 치는 씀씀이가 시원치 않아서 기대 만큼 설레지도, 그렇다고 밀어 낼 만큼 덤덤하지도 않아 흐르는 강물에 된장 풀듯 밍밍했던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하오. 그래서 내가 그렇다 보니, 내가 마냥 서툴고 능글능글 하는 모양이 전혀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삼하게 나를 아우르고 때론 불쌍하게 봐주기도 하는 당신이 있어서 어디가서 섭섭한 일들이 생겨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으니, 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주지 못했구려. 삼삼한 당신, 바람도 전 같지 않게 부니... 내 새로운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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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사랑하게 되면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섹시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옛날 옛날 아주 그윽한 옛날부터 외로움과 기다림이 뒤범벅되어 철판 긁는 소리를 내던 날이 그쳐서도 아니고, 마음속에 두껍게 쌓인 녹이 깨끗하게 닦여 나가서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남을 사랑함에 어리숙하여 사랑인가 싶을 때 뒤돌아 눈물이 나는 줄도 모르던 시절을 건너와서도 아니고, 담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사막에서 세상의 모든 상념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소멸하는 듯한 외톨박이의 간절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가 그저 밥 잘 먹었냐고 물어오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얘기해주는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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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부터 나는 매일 아침마다 쉬지 않고 우울을 얘기한다. 내가 우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아직 병원에서 약이나 연극 같은 것으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징조이다. 한강 다리를 건너다가 차를 세우고 검은 벨벳같은 강의 조수를 바라볼 수 있는 가끔, 내가 판단하는 우울이 지나쳐서 한쪽 발을 성큼 들어보기도 하지만 요절한 사내의 뒷모습을 오래 남겨 두지는 않는다. 우울을 판단하기란 너무도 쉽다. 일하다가 듣는 유행가 한줄 멜로디에, 혼자 보러간 영화관에서 운좋게 복도쪽 좌석이 걸렸거나, 두번째 읽는 소설책에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구절을 발견하고 연필로 밑줄을 그던가, 그렇게 하찮은 것들에 희망을 부여하는 나는... 판단하건데, 그때가 우울이다.
우울은 생활의 퇴적물이다. 생활을 파괴할만큼 공포에 휩싸인 우울이 아니라면,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울은 어차피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은 권태, 채념 등이 있지만, 단연 사랑이다. 사랑은 우울과 양립대립쌍이다. 이 둘은 겹쳐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따로 따로 제 힘을 뽐내기도 한다. 한번에 하나씩 오는 양립대립쌍은 없다. 사실, 이때가 가장 두렵다. 생활을 단번에 파괴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이 양립대립한다는 것은 곧바로 공포가 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잠재시켜 놓은 면역 인자들을 공격해나간다. 공포는 확산되고 괴롭고, 외롭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얘기하게 하고 우울을 토해내게 한다. 그런 내가 협오스럽지만, 사랑과 우울은 계속된다.
우리가 사소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랑과 우울은 거기까지 이다. 사랑이 생활을 파괴하려고 할때, 사람들은 사랑에 핑계를 대지만 파괴의 의지는 사랑을 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은 영원불멸의 가치가 아니다. 그건 생활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너진 사랑쯤은 우울처럼 생활의 자양분일 뿐이다. 사랑은 아무나 한다. 먹고, 싸고, 자고, 죽는 것은 생활이지 사랑의 지배 영역이 아니다. 고로, 생활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사랑의 크기나 잣대가 제각각 달라 그것이 생활에 강요하는 바가 저마다 다르다 해도 먹고, 죽는 것에 정의가 없으면 사랑의 위력은 생활 앞에 한방울 피, 그것뿐이다.
결국, 술만 마시면 사랑을 떠벌리고 우울을 고양시키는 것이 겉멋의 일환인양 우쭐거렸지만, 생활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가벼운 제스처일 뿐이다. 사랑과 우울의 입장에 서서 생활을 결탁하려 든다면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누군가에게서 완전하게 소외 될 뿐이다.
생활의 입장에서 사랑의 선택은 그들의 가족을 내 가족처럼 내 살을 깎아 가족의 살을 찌우게 하고, 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벌어다 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토사물을 거둬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울은 생활의 퇴적물이다. 생활을 파괴할만큼 공포에 휩싸인 우울이 아니라면,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울은 어차피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은 권태, 채념 등이 있지만, 단연 사랑이다. 사랑은 우울과 양립대립쌍이다. 이 둘은 겹쳐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따로 따로 제 힘을 뽐내기도 한다. 한번에 하나씩 오는 양립대립쌍은 없다. 사실, 이때가 가장 두렵다. 생활을 단번에 파괴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이 양립대립한다는 것은 곧바로 공포가 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잠재시켜 놓은 면역 인자들을 공격해나간다. 공포는 확산되고 괴롭고, 외롭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얘기하게 하고 우울을 토해내게 한다. 그런 내가 협오스럽지만, 사랑과 우울은 계속된다.
우리가 사소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랑과 우울은 거기까지 이다. 사랑이 생활을 파괴하려고 할때, 사람들은 사랑에 핑계를 대지만 파괴의 의지는 사랑을 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은 영원불멸의 가치가 아니다. 그건 생활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너진 사랑쯤은 우울처럼 생활의 자양분일 뿐이다. 사랑은 아무나 한다. 먹고, 싸고, 자고, 죽는 것은 생활이지 사랑의 지배 영역이 아니다. 고로, 생활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사랑의 크기나 잣대가 제각각 달라 그것이 생활에 강요하는 바가 저마다 다르다 해도 먹고, 죽는 것에 정의가 없으면 사랑의 위력은 생활 앞에 한방울 피, 그것뿐이다.
결국, 술만 마시면 사랑을 떠벌리고 우울을 고양시키는 것이 겉멋의 일환인양 우쭐거렸지만, 생활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가벼운 제스처일 뿐이다. 사랑과 우울의 입장에 서서 생활을 결탁하려 든다면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누군가에게서 완전하게 소외 될 뿐이다.
생활의 입장에서 사랑의 선택은 그들의 가족을 내 가족처럼 내 살을 깎아 가족의 살을 찌우게 하고, 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벌어다 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토사물을 거둬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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