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2008/05/28 15:30 / 생각
몇 달 전부터 내가 사는 아파트는 간판을 바꿔다느라 분주하다. 입주 당시의 아파트 브랜드를 새로운 아파트 브랜드로 바꾸는 작업이다. 이일을 하는데 입주자대표회의와 조합은 입주민들에게 부당한 동의서를 요구했다. 신규 브랜드로 교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간판 변경과 기타 도색작업 등이 필요한데 이에 필요한 비용을 평수별로 분담금을 부과한 것이다. 이 분담금을 내지 않을시는 소유재산에 법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협박도 일삼는다. 나는 이런 독소 조항이 있는 동의서를 거부했다. 하지만 주민 80%는 자신들의 재산이 브랜드를 바꿔달아 자산가치가 증대할 것이란 희망으로 동의서에 서명을 했고 서둘러 분담금을 입금하고 있다. 독소 조항도 독소 조항이지만 아파트 간판만 바꾼다고 그 브랜드의 상업적 가치가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 아닐진대 너도나도 포장을 바꾸는데 혈안이다. 누군가는 손쉽게 자기집을 구입했을지는 몰라도 대게의 사람들은 지리한 현실과 꿈 같은 꿈으로 어렵게 자기 집 한칸을 마련한다. 이마저도 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사람축에 든다. 그런 집은 브랜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식구가 안전하게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갑작스럽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오래도록 삶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 중요하다. 그러한 공간에 건설회사의 상업적 브랜드는 그 안의 고귀한 삶에 어떠한 간섭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파트가 집이 아니라 상업적 가치의 브랜드화 되면서 집이라는 인간적 의미를 쉽게 팔아 먹어 버린다. 그 집에 제식구가 브랜드와 관계 없이 행복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식은 브랜드로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 브랜드의 개명은 이 아파트를 사고자 하는 다른 수요자에 어필하여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치를 받아 챙기기 위한 수단이란 점에서 간판을 바꾸고 도색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80%의 이런 선량한 상업적 식민들이 있기에 그것을 등에 업은 조합이나 대표회의는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소수자들에게 온갖 악랄한 횡포를 일삼는다. 이권만을 쫒는 조합에는 이성이나 양심, 인간의 영혼따위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다수결을 민주주의로 믿는 무식한 폭력만이 존재한다. 나는 걱정이다, 저런 아비와 어미에게서 자란 아이의 장래가 결코 인간적이지 않을 것이기에 두렵다. 이미 이 상업적 세대는 계몽이나 반성이 불가능하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난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남들이 해놓은 것을 받아 먹으며 기생하며 이권을 챙긴 사회암적 세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을 믿는 사람들이 80% 이며, 우리나라의 법철학은 다수결 중심적이다. 즉, 반대해도 할 수 없다. 다수가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고 다수가 하자고 하면 따를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다. 우리나라의 법은 애초에 약자나 소수자를 보호할 의지나 근거가 없는 강자의 철학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하다 보니 80% 정도의 상업적 동의는 법적으로 유의미하다. 법적으로 말이다.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법적 근거로서 말이다.

나는 이 80%에 주목한다. 이 80%는 우리 사회의 도처에 존재하는 80% 다. 이 80%는 사회전체적으로 약자이면서 미래에 강자가 되고 싶은 헛된 희망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분포와 같다. 제 아이가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안타깝지만, 자신의 아이가 똑똑하다고 믿고 싶고 게다가 MB식 성공까지 보장 받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짐짓 현실직시한 양 행동하는 사람들의 분포다. 자신들의 욕망이 아이를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이 되는 부모 됨됨이의 왜곡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분포다.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정책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도 이명박의 자사고 정책이나 서열화 따위는 궁극적으로 인정하는, 즉 자신의 아이는 똑똑하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학교가 필요하다고 믿는 이명박 지지자들의 분포다. 이제 이런 80% 와 홀로 수개월동안 대치하고 나니 너무 피곤하다. 이 80%는 분담금을 내지 않는 소수가 자신들의 분담금으로 도색한 브랜드의 가치를 분담 없이 취하려 한다고 난리인 분포다. 그래서 법적으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 선다. 법은 어차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종사하는 교양 없는 자본 식민들의 편에서 이해 못할 용어들을 쏟아 낼 것이다. 우리 사회를 좀 더 신중히 대하려 해도 그런 이성이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곳인지 매우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방금 전 강남경찰서로 어제 촛불문화제에서 강제연행된 후배를 면회 갔다 왔다. 면회를 거부 당했지만, 먼저 면회한 사람들의 전언으로는 '48시간 자고 나올테니 걱정말라' 는 것이다.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해서 혼자서만 그거 안먹겠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이라 생각하는 몰지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우리 사회의 80%는 20%의 희생으로 나중에 생길 이권을 취하거나 이롭게 바뀐 사회현상을 공기처럼 거저 마실 사람들이다. 나는 이 후배와 또 강제로 자발적으로 연행당한 사람들의 활동만큼 동참을 하지 못했고, 그런 부실한 오지랖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저 마실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된다. 최소한 이 사회를 같이 살아 갈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마저도 하지 못하면 짐짓 양식있는 양 행동하며 브랜드만 갈아 치우는 일에 열중인 이명박 지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교양으로 아이를 키워 세상으로 내보내면 내 욕망의 성공신화가 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기는 죽어도 싫다.
2008/05/28 15:30 2008/05/28 15:30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이명박 정부의 정권 인수 작업은 당연하게 받아 들였던 것들의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일련의 반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른바 우파적 개혁의 첫 삽질인 정부조직개편안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를 가늠하게 해준다. 이념 우파가 아닌 경제 실용 우파라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예상대로 효율 중심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효율이 모든 사회 가치에 긍정적 발효를 도울 수 있다는 언어 자체의 도단으로 인해 우리는 효율적이면 모두 좋다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효율은 모든 작동의 기름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경제 성장만 된다면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던 괜찮다는 기계적 성장론에 빠진 이유도 효율과 같은 자본주의의 메카니즘만을 신봉할 뿐 좀 더 근원적 가치에 질문을 던지는 토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의 근저에는 대게의 민중이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무원의 철밥통과 복지부동의 오만한 자세도 실용적으로 바꾸겠다는 일종의 외과적 복수를 깔아 여론의 동의를 얻겠다는 계산이 있는 듯 하다. 다만, 이러한 복수심으로 정부조직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근원적인 질문이나 담론으로 다뤄지지 않을 몇가지 중대 미래가 없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은 기우일까.

먼저, 통일부의 문제는 통일을 외교와 같은 대외적 관점으로 전환시키는 일대 사변에 가깝다. 즉 이념적 보수가 아니어도 통일은 이제 민족적 문제가 아니라는 실용적 관점이다. 사업이 되면 하고 사업이 안되면 파기하는 기업의 관점이 통일을 간단히 수술해낸 것이다. 통일회의론은 이미 유행처럼 번져서 세대를 불문하고 통일이 줄 모순의 파괴가 폭넓게 두려움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부조리를 운동적으로 계몽해내지 못한 지식인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통일은 되기 전에도 되고 나서도 여전히 대내적 관점이어야 한다.
교육은 인재라는 재료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은 이미 교육을 버린 이명박 당선자의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도 그 맥락을 찾아 볼 수 있을만큼 명백하다. 기준을 두지 않아야 하는 교육과는 달리 인재는 기준을 통한 인력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라 봐야 한다. 인재의 기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계급의 분리다. 이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사교육비 완화를 총론으로 한 자사고의 추가 설립 등의 공약은 허구라는 점이 입증된다. 그야말로 인재가 엘리트가 아니고서야 성립이 되지 않는 교육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맹렬한 경쟁이 아니라 이미 출신성분으로 계급을 갈라 놓고 심각한 소통 불능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악랄한 철학이 설치된 것이다.
지식경제는 거의 말장난에 가깝다. 과학기술은 그 중요함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과학이 신화가 되었던 황우석 사건을 통해 과학을 더욱 경제적 부류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자연과학부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자원도 경제적 성장과 에너지 구상의 개발건설의 취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환경과 조화로운 자원의 활용과 보존의 관점으로 진보되어야 할 것이 주문되어 환경부가 주축이 된 환경자원부로 통합 되었다면 그나마 덜 코미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효율과 실용적 관점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효율과 실용이 모든 근원적 문제를 진단해서는 안된다. 실용적 관점에서의 상실은 물질의 유무와 시장의 가치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물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악랄한 파괴와 상실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권력과 시장 원리로만 미쳐 돌아가는 모순과 어둠의 세상일 수록 인간정신의 근원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러한 소임 마저도 종말을 선언하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2008/01/17 13:35 2008/01/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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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2007/12/26 22:56 / 생각

상황 하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법과 제도라는 골리앗을 한사람의 힘으로 바꾼 한사람의 이야기다. 1인 시위도 하고 수많은 민원과 진정으로 법 조항을 바꿔냈다. 국가는 미쳐 살피지 못했다며 다윗에게 표창을 한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언젠가 처한 현실에 따라 바뀐 법을 대한다. 누가 이 법을 정략과 날치기에 끼워서 만들었을까.

상황 둘, 국회 앞에는 매일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윗들이다. 자기 잇속이나 챙기려고 저런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라고 한다, 일당 얼마라며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억울하며 저렇게 까지 할까 라며 안타까워 하기도 하지만 이내 관심을 거둔다. 검은 차가 들어 간다, 임기중에 지쳐 떨어질 것을 기대한다. 누가 이 사람들의 억울함을 만들었을까.

상황 셋, 서해에 기름이 유출됐다. 바다와 뻘에 기대 살던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휴가며 휴일을 반납한 시민들이 몰려 들어 기름으로 오염된 바다와 해변을 닦아 낸다. 한숨,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냐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냐며,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름을 닦아 내야 한다고도 한다. IMF 때 처럼 국민의 저력이내 힘이내 하며 언론은 치장질에 바쁘다. 기름에 피부병에 걸리고 벤젠에 폐가 망가져도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삼성도, 허베이호의 선주도, 보험사도, 하다못해 국가도 책임지지 않는다. 왜? 국가가 부르지 않았으니까. 방학인 아이들을 데리고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태안을 찾는 착한 아빠는 무엇을 가르쳐 줄까? "서로 도와야 한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란 말이냐.

시시비비가 있어야 감동적인 사회다.

2007/12/26 22:56 2007/12/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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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노망 났다?

2007/12/05 18:08 / 생각

국민이 노망 났다 는 김근태의 반응은 단 한 순간도 정치적 판단을 버릴 수 없는 직업 정치인의 진정어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과 적당히 선을 둔 전력이 있었지만 그도 민중의 생존적, 정서적 환경을 파탄 내버린 정권의 중심이 아닐 수 없기에 명백한 오만이다. 오늘날 대선구도가 병리적으로 이상징후로 치달아 결국 노망이 될 수 밖에 없는 말기적 증상이 된 원인이 오로지 정권 교체의 열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감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이 한마디로 정치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기득권 수성에 나섰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후안무치 하지만 국민이 노망나지 않은 명제를 증명할 마땅한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BBK 의 안개가 걷히고 이명박 대세 구도가 고착되면 그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광명이 고작해야 한반도대운하와 300여개 사립고 라는 점이다. 국토를 찢어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를 통해 물류를 진작시킨 근대 국가가 없었고, 사립학교를 늘려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비를 줄이는 풍부한 상상력을 적용한 사례가 없는데도 그의 지지도는 절대 물러섬이 없다. 국민을 통채로 치매환자로 규정한 고약함에서 정신을 차리고 망조의 관점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김근태의 노망은 정동영이 안찍고 어떻게 저런 위선적 인간을 지지할 수가 있냐는 통탄이다. 하지만 한스러움 수준에 머문다. 모두에 말했듯 그도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 정권의 반민중적 인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대운하와 교육정책의 방죽을 넘는 정권 교체의 열망이란 것이 노망적 지지도로 환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어두운 전망은 이러한 고착구도가 그대로 선거에 반영될 가능성 또한 사실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이러한 정권 교체의 열망을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역부족에서 찾고 있고 벌써 부터 이를 반성해야 한다며 이론의 숙지 자세로 접어 드는 채비를 서두른다. 분열적 좌파가 아니라 텍스트적 좌파의 위험도가 증대되어 그나마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운동적 투쟁마저 거둬들이는 어둠은 아닐런지 염려스럽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민중 계몽은 분명히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김근태식 반응으로 국민이 노망난 이유는 오래도록 한국 사회를 주름 잡고 있는 시행착오의 경험과 손쉬운 용서에서 비롯된 무식한 교양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김근태가 말하지만 않았다면 이 사회와 국민은 확실히 병리적 이상징후에 빠진 집단 정신병동 맞다. 정신병동은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인간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실존의 문제에 맞닥들인다. 오늘날 대선구도는 이러한 실존적 문제에 직면해 있고 모두가 생각을 놓고 좋은게 좋은 손쉬운 용서를 저변에 깔아 놓음으로서 실존적 문제를 쓸어 버린다. 다시는 현실로 복귀하고 싶지 않은 분열적 상태의 지속을 바다 이야기에 찾는 대중들로 가득차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이러한 반동적 심리는 이명박의 능력이나 인물의 매혹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대게가 정권교체의 열망이라는 노망 현상에 기인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나 이회창 보다 덜 보수적이고 실용에 가까운 이명박이 호주머니 사정을 좀 낫게 해주겠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박근혜의 권위적 보수로의 회귀보다는 낫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그가 살며 보여준 온갖 치졸한 태도와 저열한 교양은 스스로 제작한 사제 시한 폭탄이다. 실용적 보수가 옮고 그르다는 판단은 유보적이어도 도덕적 파탄에 대한 노망적 용서의 집단 행위는 분명 시한 폭탄의 파편에 당할 방패막이를 자체하는 꼴이다.

오늘날 대선 구도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의 빈곤이 주물러진 한덩이의 빗살무늬 토기를 구워내는 상황이다. 게다가 견디기 녹녹치 않은 정서적 폭력의 상황인 것이다. 아 정말 기가막힌 것은, 왜 우리 사회는 다른 사회가 겪은 시행착오의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반복 경험해보고서야 배우게 되는 것일까?

2007/12/05 18:08 2007/12/05 18:08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