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네트워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술적인 조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조직이라는 이름의 유기적 구성에 냉소적 입니다. 언제든 맺고 끊을 수 있는 현대적인 네트워크 속에 둥둥 떠다니는 정보들은 대체로 역사적 구성이 철저히 배제된 파편으로 존재합니다. 서사 구조가 없는 파편들을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 짜맞추다 보면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탈중심적 가치에 조응하는 텍스트를 생산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비선형적인 텍스르틀 네트워크에 흘려 보내고 열심히 유통시킵니다. 이러한 반복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선형적인 텍스트를 탑재한 후천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옮다고 믿는 정체성은 비유기적인 네트워크가 추구하는 노마드 정신과 같아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노마드 속성은 언제나 변화해야 한다는 명제를 진보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 들이게끔 합니다. 사람이나 정보나 스피드 있게 취하고 떠나야 하는 변화는 결코 진보적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경향의 섭취에 능숙하고 서사의 느림에 무관심한 오늘날의 젊은이나 학생에게서 역사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사의 느림과 노동의 무던함에 가장 답답한 건 자본 입니다. 자본의 스피드한 흐름과 냉정한 관계 형성은 네트워크에 충실한 사람들을 매료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안락합니다. 고용은 없고 성장이 있는 시대가 이러한 인과관계를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고용은 사원에서 관리자로 관리자에서 경영자로 이어지는 계급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성장을 의미 합니다. 따라서 프롤레타이아트 는 오늘날의 네트워크적 관계형성에 가장 뒤쳐지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노동자이면서 자본가가 되어야 하고 사람과 정보를 방랑해야 하는 시대에 NL 이며 PD 라는 과거도 실시간으로 네트워크안에서 파편화되지 않으면 아무도 접하지 않을 개념이 된 것 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생활속의 디테일 그리고 제거할 수 조차 없는 네트워크는 모더니즘이 없던 사회에 너무 빠른 포스트 모더니즘을 불러 온 판타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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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 '세계를 보는 혜안'에 대한 13 개의 검색 결과
- 2007/05/19 네트워크의 디테일 by DrunkenSTAR
- 2007/04/02 정치언어와 한미FTA by DrunkenSTAR
- 2006/12/27 반항하라, 시간이 없다. by DrunkenSTAR
- 2006/11/21 혁명 by DrunkenSTAR
- 2006/06/27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by DrunkenSTAR
- 2006/06/20 미시담론의 역습 by DrunkenSTAR
- 2006/05/16 술자리 좌파 by DrunkenSTAR
- 2006/05/11 서울대의 한총련 탈퇴와 붉은 악마 by DrunkenSTAR (2)
- 2006/05/08 권력은 인간에게만 by DrunkenSTAR (2)
- 2006/05/03 나는 좌파가 아니었다. by DrunkenSTAR (1)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주된 실수와 무지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언어에 쉽게 매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원론적인 틀안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든가, 스스로의 목소리가 없어서 언제나 양쪽 다 잘못했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만을 일삼는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을 놓고 논리를 세우는 합리화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입장을 정하고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미 FTA 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치열한 경쟁' 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을 한다. 치열한 경쟁에 대해서 보통의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처한 사회의 경쟁과 더불어 생각하며 치열하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더욱 치열해질 것을 다짐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정치언어의 상징성에 그대로 매몰된 자들의 태도이다. 이들이 유산계급도 아니고, 기득권도 없으면서 그것을 가진 자들의 문법에 쉽게 동조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그 긴장으로 인해 쉽게 언어를 왜곡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자립과 독립심을 키위기 위함이라는 소위 패권주의적이고 치열한 경쟁속에 적자생존이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삶 속에 스스로의 목소리 대신 유명인사들의 신변잡기나 사회 구조가 주는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집단적인 열정에 복무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치열한 경쟁은 그러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가능한 자만심이다. 자본을 집중할 수 있고 이미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이 세계화적 경쟁에서 치열함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누구나 행복을 가식하는 싸이월드 1촌들의 이미지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너무 약해 자신의 명예도 생존도 지킬 수 없는 삶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각이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첫지점이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도 여기에 있다. 정치언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지 상징일 뿐이다.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조망하지 않는다. 특히나 언론과 정치인의 언어는 현실을 창조하고 왜곡한다. 이러한 상징에 매몰된 개인이 많은 사회일 수록 오늘날 한미 FTA 와 같은 사안에 대해 바른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기대할 수가 없다. 자기 내부에 찾을 것이 별로 없는, 자아와 책임감을 포기한 개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는 이미 전제정치, 전제정치사회이다.
한미 FTA 반대!
서른 여섯해를 살아 오면서 삽겹살집 계산대처럼 한해 한해를 결산해 본 적도 없고, 인생 최고의 아이템을 꼽은 적도 없지만, 올해 읽었던 책 정도는 반추해 보길 원했는데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는 읽은게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달째 잡고 있는 호치민평전이 너무 방대한 분량이란 핑계가 감성적으로 통할지 몰라도 독서의 속도가 지나치게 더딘건 사실이다. 물론, 아직 베트남으로 돌아오지 못한(책의 그 지점) 호치민에 대한 평가를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이 인물이 가진 매력에 대해서는 의문 투성이긴 하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주요 요원이면서,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에 반한다고 볼 수 있는 민족해방노선을 끌질기게 주장했었던 호치민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은 패배주의의 극복이다.
패배주의에 매몰된 이에게 패배주의를 극복하려는 가열찬 모습은, 때로 열등감의 표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패배주의가 가장 해로운 지점이며, 의식을 그런식으로 식민지화 시킨다는 점이다. 패배주의는 경쟁을 도전이라는 감성적인 과제로 묶고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에 맞서서 당당히 이겨내라고 한다.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왜 사회적 부조리를 그대로 두고 그 경쟁에서 살아 남는 소수가 되어야 하는지? 왜 이러한 구조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사회적 가치와 윤리에 반동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는데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사회적 위기는 한국전쟁의 종전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해소되지 못한 물리적 조국통일의 과업속에서 제대로 반항하지 못한 민족적 사대주의는 좌우익의 대립을 지난하게 끌고 가는데 유용한 밑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좌우익의 대립각은 역사의 이항대립으로서 사회적 제도와 인간생활의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끌고 나가는 메카니즘의 휘발유 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중심적 투쟁의 대상이 여전히 좌우익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씹으면 씹을 수록 재미난 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근원적으로 지닌 동란의 역사를 회피하면서 얻은 의식의 식민지화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변화를 오직 기술적, 개발적 변화만으로 치켜 세우는 자본주의적 발상은 좌우익의 담론을 이용하여 어떤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비틀림, 일그러진 엘리트의 초상이다. 효율적 생산을 옹호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에 골몰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반지성적 행위를 하는데 열광하고 그것을 비판하는데 침묵한다. 황우석의 거짓말도 모자라서 700 명이나 되는 비틀린 지식인들의 전시작전통제권반환 반대 성명은 반지성적 행위가 위험수위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에 질세라, 마시멜로에 열심히 사인하며 드디어 일그러진 엘리트 계급에 든 것을 자축했던 정지영은 개천에서 용내야 하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패배주의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민족해방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와 연대해야 겠으나 그들은 혁명이 촉발할 시점이 오면 반동적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들어낼 것이 분명하다는 호치민의 주장이 오늘날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것은 혁명 이후, 동란 이후, 마땅히 사람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꾸준히 배반하고 반동해 온 자들이 이른바 반지성적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남한의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지점은 좌우익의 대립각이 아니라 지식인과 쁘띠 부루주아지들이 거대 자본과 정치 권력에 결탁하여 생산한 패배주의의 예리한 각도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리함이 난도질한 사회에서 진정한 붉은 피가 흘러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적 장치들은 제대로 된 작동을 멈춘지 오래다. 고름처럼 문드러진 패배주의가 열등감을 마치 당연한 것인양 기름칠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실천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자세 또한 문제지만, 그것이 민주적인 장치들을 중지시킨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우리 사회를 병적인 패배주의와 상업주의로 몰아가는 엘리트들과 자본이 문제다. 그것에 반항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럼으로, 나의 올해의 책
[호치민 평전]
윌리암J 듀이커
푸른숲
[한국현대사산책]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대화]
리영희, 대담 임헌영
한길사
어떤 혁명이나 개혁에 있어서 그것이 변화시키려고 하는 대상보다 이를 원리적으로 뒷바침 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덜 받는다. 혁명과 개혁은 같은 단어가 아니며 개혁은 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에 폭력적 절차를 수반하던 비폭력적인 민주적 절차를 수반하던 원래의 질서 가운데 일부는 남게 되어 현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가 아무리 개혁을 주장해도 원래의 질서 중 일부는 남게 되고, 남는 질서는 반드시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충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무리 개혁을 해도 분배할 수도 분해할 수도 없는 원래의 질서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를 변화 시키는 민주주적 절차로 한나라당이라는 대안이 마치 개혁인양 인식하는 무리들이 바로 남겨진 원래의 질서들의 총합이라 해도 비약이 아닐 것이다. 집권 세력의 변화를 통해 그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또 다른 군주제를 유지 하는 것이며 그나마 파괴된 원래의 질서를 복원하는 일이 전부이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역사에 기록하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용인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땅히 진보해야 할 역사를 되돌릴테니까.
혁명은 이데올로기에 지배 받는다. 혁명은 한 체제를 다른 체제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좌우 되는데 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오직 사회주의가 대안으로 남는 이유는 세계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의 메카니즘일 뿐,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시대인들이 어떻게 살고자 하고 잘 살고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돈을 결부 시키는 것은 그만큼 자본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시스템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을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시스템, 즉 체제를 붕괴시키는 역사인 셈이다. 자본의 탐욕과 자기 확장에서 벗어나 공동의 노력,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아 혁명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일 것이다. 천천한 개혁으로 할 수 없을 때 비로서 혁명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한 기운은 쉽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볼세비키 혁명을 기록한 존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의하면 계급적 억압도 억압이지만, 혁명 전 러시아는 연설과 읽을 거리를 무차별적으로 빨아 들이는 사막의 모래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도시의 골목은 공개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발언대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난상 토론을 펼쳤다. 인민들이 갈구한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엄청난 읽을 거리, 즉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했고 자신의 비참한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혁명을 진두할 수 있는 혁명가를 필요로 한 것은 혁명가의 요구가 아니라 인민의 요구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혁명가는 기존 체제에 안주한 계급에서 나오지 않으며 한 개인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행동적 규범이 따르게 된다. 이는 19세기의 극단적인 혁명가였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문답' 에서 얻을 수 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는 혁명적 대의에 눈먼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무자비하며 심지어 권모술수에도 능한 인물일 수도 있다. 혁명가는 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친구나 가족과 모든 유대를 끊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도덕성의 기준을 희생하여, 혁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레닌이나 호치민은 네차예프만큼 극단적이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좋아했고 그들의 혁명적 경전과 강령에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혁명가는 고사하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자본교환적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대중적 유행만이 있을 뿐이다. 억압은 있으되 어디서도 혁명적 기운은 찾아 볼 수 없다. 개혁이라는 자본의 헛개비를 믿고 국익적 선동에 무리지어 사상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고작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유교적 사상을 자본의 제단에 재물로 바치고 민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사회 공동체에 진작하는 노력은 없고 개별 집단에 대한 복지만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저급한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에게 희망은 없다. 좀 더 불공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획득이나, 남보다 먼저 자본의 흐름에 양탄자를 깔고 눕는 것이 유일한 삶의 치열함이다. 그런 치열함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자본의 물음에 대입시키며 고민한다. 그러한 방정식에 필요한 건 성형수술과 사치품, 그리고 적당한 동정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에게는 아직 혁명 같은 순결한 대의가 필요하지 않다.
종범들의 노예 의식은 그 심각성이 이미 도를 넘었지만, 대체로 나타나는 현상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피해 의식 또는 열등 의식, 100분 토론에 나오는 지식인들이 현학적 수사로 현안을 갈기갈기 분해하여 부위별로 이름을 정하는 의식을 보며 질려 버리는 피해 의식은 그나마 애교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 따로 공부 할 취미도 없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책이라도 사봐야 한다는 계몽근본주의로 구속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우유 구멍을 밀고 들어와 있는 신문을 펼치고 '액면이 Fact' 라는 고정관념도 모자라 팩트가 아닌 가정에 역사까지 소급하고 적용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작태다. 분리 수거 하시기도 힘든데 스스로 사절을 권유해야 마땅한데, 100분 토론의 현안까지 만이라도 알아야 하는 열등 의식은 그러지도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액면이 Fact' 다는 말도 안되는 의식이야 말로 근본적인 피해 의식 이다. 이러한 '의심 없는 흡수' 의 상태가 매몰이다. 이러한 상태의 개인들은 대게 '코끼리가 춤을 출 때, 춤을 춘다.'
둘째로 타자적 자아 의식, 보고 배운다는 가부장적 전통에 의해 제자를 보고 배우지 못하고 토고를 보고 배우지 못하는 팽배한 강박 관념은 거대함을 지향한다. 가부장적 형태는 자아의 형성 시기부터 순혈의 관계에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애교라고 하더라도, 자아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에 부터 자아가 지향하는 바가 제대로된 가부장적이었을 때, 그 의식은 오로지 의식, 즉 '거대 지향적 오로지 의식' 이 된다. 이러한 거대한 타자를 향하는 자아는 내가 속해 있는 어떤 거대함이 끊임 없고 성실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거대함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격화 시키는데 능통해진다. 이러한 능통함은 민족주의를 가르는데 대단히 엄격하게 사용되곤 하는데, 자신의 순혈적 민족보다 거대함이 지향하는 민족이 앞서고 언제든지 순혈 민족을 이반시키는 행위 또한 거대함이 거대했을 때 더욱 더 능동적이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대 지향적 의식이 최근 가장 잘못 받아 들인 유행어가 세계화이다. 세계화가 시작되는 지점이 우리 라면 우리가 향하는 지향점이 세계이며 방방곡곡인가? 세계화는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포장지 이름이 아니란 상식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각종 사회이념 서적들을 봤는가 여부를 떠나, 세계화가 지향하는 단순한 지점을 살펴보면 간단히 마무리 된다. 세계화가 트리니나드 토바고나 우크라이나도 살펴보는가? 오직 미국이 세계화이다. 이쯤에서 향후 20년쯤후에 유행 될 '우주화' 에 있어서 미국이 그 거대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미국이 점령한 안드로메다 USA42 혹성이 곧 우주화의 정점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화가 꼭 방사형일 필요는 없다는 재정경제부 고위관료 같은 말풍선은 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미시담론을 절제하는 의식이 없다면, 거대담론을 그대로 충돌시킬 이유가 없다. 불행한 것은 권력의 습성이고 미시담론이 닮지 말아야 되는 감정이 이른바 관료주의이고 보면, 여전히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의식은 패러다임이다. 거대담론을 충돌시키지 않고 종속되지도 않기 위해서 교과서적인 해답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전환은 저항을 수반하지만, 세계가 지금까지의 세계로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돈과 시간을 팔아 세상을 싸돌아 다니는 것과 다른 경험, 그것이 패러다임의 변화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퇴근 후에 촛불이라도 들 수 있고,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서명이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는 신발을 신은 것이다. 그 역할에 맞게 우리는 세상을 천천히 바꿀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미시담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결코 이상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반성이 끊임 없이 행위되어야 하는 당위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보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자격 논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중대한 범위는 실은 생각의 권리와 범위이지 오로지 사적재산의 범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멈춰있지 않고 바쁘고 자유로울 때, 물질은 가야 할 곳, 공평한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나의 생각이 일단 그러하지 않고는 유물론적 가치관은 공평하지 않고 극히 사심에 의한 복무에 열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도 현실과 괴리를 가지고 생각하는 방식은 이상주의의 조달이거나, 근본주의의 회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마저도 먹물의 기득권이라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을 기득권이라 규정하고 나면 할 일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사상과 글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새로 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이 터지는 것은 믿음을 가진 몇몇 선각자의 일이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민중들의 소통과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일개의 민중으로 부터 내가 해야 할 일과 도울 수 있는 일들을 찾고, 보잘 것 없고 어줍잖은 노동을 보태려 할 뿐이다. 내가 제도권에서 어떤 위치의 인간이냐는 입바른 명예욕과 경계지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주의가 오직 진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가장 역사적인 철학은 이기심이다. 이로서 '여유있을 때, 세계을 둘러보겠다' 는 경제적 접근 방식이 현대를 지배하는 술어가 되었다. 세상을 둘러보는 물리적 여행과 세계를 둘러보는 사색과 의식의 범위를 쉽게 동질시 하는 안락한 금가르기는 만행에 가깝다. 인간이 오로지 이기적임을 규정하고 부터 시작하는 경제학의 토폴로지가 그 자체로도 불가능하며 우리는 편리함에서 수고스러움으로 가벼운 전환을 해야 함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의 가장 원형적인 이상주의인 것은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그 만족이란 것에 접근할 수 없고, 단 한번의 붓그리기로 세상의 문법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 본능적인 이기심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나의 담론은 선동적일 수 없다. 불평등한 기억에서 평등한 선동으로 맘 편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령처럼 떠도는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붙들고 거대 담론을 타파하기 위한 선동으로 술자리를 이끌어야 하는 충분한 성량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감수성과 이성에 걸쳐 자본이 해결해준 것이 무엇인지, 자본의 순환고리에 매수되어 짐짓 외면 했던 이웃들의 제스쳐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활동이 되고 현상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나마 좌파라며 떠들 수 있는 술자리를 조금씩 줄이면 소비가 기여가 되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첫걸음을 기반삼아 행여 큰 활동이 되려 노력하거나 강시처럼 이마에 경제적 면죄부를 붙이고 다니지 않고, 세상을 찬찬히 면밀하게 둘러보고 보잘 것 없는 손을 내미는데 그 노력을 거둬들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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