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열에서 빠져 나와 인사동 근처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모처럼 한낮 열기가 뜨거웠다. 그 온도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늙어 버린 보수단체집회 참석자들이 걱정 됐다. 스트로폼도 쇠파이프로 바꿔버리는 언론 때문에 행여 햇빛에 쓰러져도 촛불에 데였다고 보도 할지도 모를 일이기에 그랬다.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초등학생 얼굴이 촛불과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아스팔트 위에서 벌겋게 달아 올라 있다. 측은했다. 한낮 열기를 견디던 노인들은 모두 그늘로 숨고 그 틈을 아이들이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명백한 시위다. 하지만 생때 같은 가족들을 동원해서 산책 삼아 거리로 나온 엄마, 아빠가 태반인 이 거리의 시위에 명백한 시위라는 수식은 얼핏 가당치 않아 보인다. 오늘도 아침이슬을 부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하지만 명백한 이란 수식을 잃어 버린 우리는 낡은 뼈조각들이 또각또각 내는 소리를 경청했다. 해장국에 소주를 말아 먹으며 뉴스를 봤다. 조금전 대책위로 부터 70만 추산이란 문자를 받았으나 경찰 추산 8만이란 보도가 나왔다. 피식, 야유가 일었다. 70만이나 8만이나 도대체 얼마나 되는 규모인지 알 수가 없다. 세종로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차 버리고 아무렇게나 걸어 다니는 흔치 않은 일은 이 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잠시 사람의 끝을 확인하러 떠난 일행이 이제 남대문에서 끝을 봤다고 연락이 왔다. 세종로사거리에서 남대문까지 사람이 들어 차면 8만일까, 70만일까. 언론은 양측의 추산에 반땅을 해버린다. 대략 40만. 설에 의하면 경찰은 축구장 크기에 사람이 얼마나 들어 가는지 평균치를 잡고 축구장 몇개 정도의 규모인지 파악해서 인원을 추산한다고 한다. 여기에 인도에 있는 사람들은 제외된다. 인도에 있는 사람은 시위자가 아니라 행인이기에. 하지만 정작 궁금한 축구장에 얼마나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느냐는 경찰 기밀인듯 아무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70만에서 8만까지, 일단 시위를 시작했으면 세싸움이다. 요소요소에서 벌어지는 자유발언, 문화제를 형태한 공연이 6.10 항쟁의 대동단결 스크럼과 결사행진의 그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지만 세싸움은 여전하다. 사실 민주주의에는 숫자가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거부하는 의식, 다수의 횡포가 아닌 다수의 양해가 이뤄지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이 거리에서 펼쳐지는 민주주의라는 스팩타클은 여전히 70만, 8만의 치열한 세싸움을 벌인다. 이 세싸움이 필요한 이유는 이 거리의 민주주의는 요소요소에서 저들마다 펼치는 자유발언과 경청 그리고 공연에 있을 뿐, 이것의 전체는 혁명이란 이름으로 마음속에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혁명을 시작했으면 숫자는 대단히 중요하다. 소수가 혁명을 일으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아빠를 따라가던 그 측은한 아이는 집에 돌아 갔을까. 아이를 데리고 대열의 맨 앞에 서거나 밤 늦도록 시위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건 우리 마음속에 이미 혁명이다. 아이가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존재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명박산성' 이 관광인파 5만 정도는 끌어 모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과 이 역사의 스팩타클에 동참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혁명을 이룰 수 없다. 이 거리가 가족끼리 나와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되어 어떤 점진적인 혁명의 세불림에 일조 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마음속에 혁명일지라도 이미 거리는 격동적인 시위의 현장이다. 아이는 어른들의 이러한 저항을 통해 더 나은 먹거리로 건강해지고 더 재미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해줘야 하는 것이지 아이 마저 8만에서 70만까지 추산되는 세력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해장국을 먹고 다시 대열로 돌아 가는 일행에서 빠져 나왔다. 다행인 것은 이명박 정부가 입에 달고 사는 '섬기는 정부' 와 '소통' 은 거짓이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증거를 삼으려 해도 되지 않았으나 어제 세종로에 쌓은 콘테이너 박스 퍼포먼스로 관념적인 거짓은 명백한 실체가 되었다. 하지만 정부가 그 담을 넘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지 않고 불필요한 내각 총사퇴 같은 동문서답으로 '이 정도까지 한다' 며 국민을 설득하는 것처럼 거리에 모인 사람들도 그 담을 넘어 '들으라' 며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가슴이 뜨거웠지만 혁명을 할 만큼 진지하거나 절실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더 많은 읽을 거리와 정보를 원하고 있지만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빠와 연인의 손을 잡은 선남선녀는 집으로 돌아간 뒤다. 우리는 이 거리가 항시적으로 놀이터가 되기를 바라고 모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물며 청와대로 전진해 가야 하는 물음에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언론은 촛불집회가 평화적으로 끝났다는 것에 포커스 되기 시작한다. 아직 쟁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쟁취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 가는 것은 아닐까. 벌써 33차 촛불집회다. 이 장관을 그저 스팩타클로 남기느냐 아니면 촛불이 원하는 궁극의 이유를 쟁취할 수 있을지... 이제 마음속의 혁명을 밖으로 내 던져 그 울림을 경청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검색어 '시위'에 대한 2 개의 검색 결과
우리가 온전히 가졌으면서도 지키지 않거나 돌보지 않던 권리들이 하나씩 제한되는 범국가적 조치들을 보면서 쁘띠(부르주아지)다운 적절한 이민의 발상 따위로도 위로가 되긴 어려웠다. 실은 감정과 위선적 배설을 일삼던 블로그에 올 한해 만이라도 서양미술사와 미학에 대해 차근히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새빨간 종족의 수레' 엔 위작된 한국현대미술과 비자금으로 걸릴 미국현대미술로 가득하여 끌기를 포기하라고 강요당했다. 자유의 문제가 반공의 아우성이 아니면 성립 불가인 나라의 처지를 비관하더라도 자율적 자유의 권리를 위작과 비자금이 결정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한대 줘 박고 싶은 폭력의 욕구는 대게 말투나 비웃는 듯한 표정에서 나오지 자신과 다른 생각의 치밀한 논리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의견의 사람들과 세상을 공동체로 일구고 있는데다가 누구나 말해도 되는 자유와 말해야 되는 자율을 누려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이라는 수동적 자유는 지나치게 근본적이어서 관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는 인간의 결정 상태에서 비로서 자유롭다. 따라서 반공으로 인한 자유의 상태 또한 근본적인 피해 불가의 자유가 아니라 각 개인이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율의 상태로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스스로 결정한다고 해서 그 결정이 긍정적 변화를 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이 많은 관계로 민주주의 국가라는 틀에서는 이러한 긍정적 변화의 주도가 대의적이거나 다수 결정체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 자율이 모두에게 보편적인 자유를 보장한다고 볼 수가 없다.
이때 대의적이거나 다수의 틀에서 벗어난 소수의 자율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우리에겐 주먹 보다 멀고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법이 있다. 게다가 사법 개혁을 반대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노임을 털어 호소를 할 수 있다. 막스베버의 오래된 아포리즘을 추억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은 절차와 복지부동에 매달려 민원의 현실과 책상의 판타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에도 호소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얼마나 소수의 자율을 선의로 보장하는가? 우리는 구청이 있는데 왜 시위를 하고 법이 있는데 왜 불법 집회를 하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소수의 자율을 불법과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못된 시위로 규정하는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다수의 결정에 편입하지 못한 소수를 경쟁에 낙오된 계급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이러한 낙오된 소수를 위해 경찰청은 본격적으로 물대포와 전기 충격기를 사용하여 지져서 모두 연행하겠다고 발표 했다. 다수의 교통 체증을 유발하고 전경에 죽창을 휘두르고 무엇보다 경찰이 하지 말랬는데 했다는 불법 시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찰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쟁에서 아직 낙오되지 않았다고 믿는 다수는 시위에 대해 일종의 착각에 빠져 있다. 경찰은 시위를 진압해야 하는 행동으로 다수는 시위를 불편을 초래하는 사회 불안정 요인이라 생각하는 착각 말이다. 둘다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한번도 시위의 원인과 교통 불편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 시위를 하는가 법이 있고 구청이 있는데, 이런 다수의 거세는 사유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불법 시위가 문제라며 경찰을 립싱크 하는 자세 또한 민주주의적 교양이라 볼 수 없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시위는 불법이 될 수 없고 교통을 포함한 모든 일반의 사회적 동작에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시위는 있을 수 없다. 먼저 불편 없는 시위는 시위가 아니다. 시위는 주장과 관철을 위한 활동인데 관심을 일으키고 주장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짜장 묻은 신문지 밑에서 썪을 구청의 민원서류 만큼도 되지 못한다. 시위는 불편하지 않던 다수에게 불편을 주어 환기시키고 주장을 일깨워야 하는 법이다. 시위를 불편함 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것을 불법이라고 한다면 자율을 규제하기 때문에 자유라 볼 수 없으니 공산당 독재 쯤 되지 않겠는가.
폭력적 시위에 대해서, 라는 단선적 폭력도 폭력을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다. 각 개인의 사이코 패스가 뭉쳐 집단화 되지 않는 이상, 새벽의 저주로 모두 좀비화되지 않는 이상 폭력은 상호 작용이다. 시위가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의 치밀한 논리를 들어 보지 않으려는 말투와 같은 태도로 인해 촉발되는 것이고 폭력을 경험하지 않는 다수가 일방적으로 비폭력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다루는 상호간에 비폭력을 담론화 시킬 수 있는 법이다.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가? 시위대가 더 폭력적이었다?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휘둘렀다? 아니다 경찰이 먼저 평화적 시위를 막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모두 우문우답을 동어 반복할 뿐이다. 폭력의 상호작용이 폭력을 맞이할 준비인 전기 충격기나 토끼 몰이식 백골단 검거에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는 지난 20년전을 돌아 보면 될 일이다.
똘레랑스적 가치가 성장과 개발의 가치보다 못한 사회일수록 인간과 자연에 대한 품격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려는 표현과 경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에 시위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 수단인데다가 다수의 주위를 환기 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 기능을 담당한다. 독재와 파쇼의 국가가 아니고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가에서 각 개인이나 집단의 표현 기능은 어느 것 하나 제한 받아서는 안된다. 그것을 불법의 틀안에 가둬 인간의 근원적 품위를 손상시키는 어리석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국가는 더 이상 민주적 태도를 근간한 국가로 볼 수 없다. 시위와 집회의 헌법적 자유가 겨우 5만볼트짜리 전기 충격기로 제한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국가의 품격이란 참으로 어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시위로 불편을 겪게 되는 모든 사회적 장치들은 그 시위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한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고 들어 봐야 한다. 그 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듣고 관심을 가질 수록 생계형이던 정치형이던 시위는 준다. 누가 이 추운 엄동설한에 물대포 맞으면서 괜히 길바닥에 나오겠는가.
그리고 시위로 불편하다고? 미안하지만 불편함을 더 겪길 바란다. 같이 사는 사회에서 저만 잘살려는 욕심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더 불편해야 같이 사는 법을 배울테니 어쩔 수 없다. 불편하니 관심 좀 가져 달라고 하는 짓이니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 전기 충격기가 왠말이냐..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