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부자

2008/09/23 15:13 / 생각

는 신자유주의, 반민주주의 정권을 지탱하는 두 계급이다. 부자는 경찰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경찰은 권력을 가진 부자나 또는 그냥 부자를 성심 성의껏 지킨다. 부자와 권력을 겨냥한 비판은 경찰과 부자가 아닌 계급에서 나오고 경찰은 부자를 위해 기꺼이 비판과 맞선다. 서민은, 엄밀히 말하면 돈없고 빽없는 서민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경찰을 때론 존경할 때도 있지만, 부자는 자신들을 아무리 지켜줘도 경찰을 존경하는 법이 없다. 지팡이와 끄나불의 차이다. 게다가 경찰은 부자가 되지 못하고 부자는 경찰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정에 밝은 어떤 경찰은 경찰이면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모색한다. 경찰이 부자가 되려면 로또에 당첨되거나 권력을 핥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에 열심히 헐떡 거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반민주주의로 전속력을 내는 이유는 경찰이 경찰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는 노력을 경주하기 때문에 가속화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부자인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2008/09/23 15:13 2008/09/23 15:1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미국발 금융위기가 심각하다. 글로벌 경제에서는 스스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Key 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7%성장, 4만$ 를 얘기하는 무리들은 모두 사기꾼에 불과하다. 대운하를 통한 지속 불가능한 일자리는 일자리가 아니라 '싸고 질 좋은' 노동의 확대일 뿐이다. 부시랑 이명박이랑 그렇게 친한 척을 해도 돈 관계는 확실한데다가 글로벌과 시장모델을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포커스 하고 있는 이 나라 정부의 스탠스는 미국발 금융위기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제 스스로 리스크를 모니터링하고 해소 단계를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은 붕괴될 수 밖에 없다. 시장경제, 시장경제 하니까 재래시장 경제인 줄 알고 뽑아준 시장통 아줌마와 미국 따라가면 만사 형통할 것처럼 생각하는 이명박 정부의 컨셉의 깊이는 같다. 이러한 컨셉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시스템, 그럼에도 불구하고 747 을 프로파간다하는 권력의 믹스를 통해 이 나라는 다시 한번 IMF, 아니 금융시장 완전 동결, 디폴트 따위가 선언될 날이 좀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와 그 시장경제 좋아하는 뉴라이트에 의하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식으로 AIG 를 살리고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사실상 국유화 조치한 미국 정부의 시장 개입은 도대체 아담스미스를 데리고 와도 설명이 안되는 현실이다. 일본이 너무 좋아 교과서나 책을 통해 아무리 식민지 역사를 미화하려 해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돌 맞는 현실처럼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논리인 것이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수요가 떨어지지 않는 가수요의 원리처럼 오늘날의 경제는 수요와 공급 곡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택의 공급으로 부동산 경제 활성화와 주택 부족을 동시에 해소하겠다는 정책은 순진한 정책이거나 멍청한 컨셉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경쟁을 통해 가격을 다운 시키겠다는 고전적인 수요와 공급 곡선을 적용하는 공공의 민영화는 미국발 금융위기 현상을 지켜보며 반드시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언젠가는 분명히 민영화된 공공을 국민의 세금으로 다시 사들여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공은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사용하며 조금씩 책임을 나눠 우리의 삶 동안 끌고 가야 할 것이지만 민영은 모두가 공평하게 사용할 수 없고 누구나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우리의 삶 안에서 이익을 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망한다. 리먼이나 메릴린치는 망할 수 있어도 수도, 전기, 의료 같은 것들은 문명사회에서 망해선 안되는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5년의 임기 안에 이러한 멍청한 컨셉을 심화 시킬 수록 미국발 금융위기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은 밑바닥 부터 피폐해질 것이다. 미국은 자기들의 위기를 한국과 같은 외부에 나눠주기라도 하는데 이 민망한 컨셉의 나라는 남의 나라 빚잔치에 자기가 빚내서 보증서는 꼴 사나운 짓만 한다. 부동산, 환율, 물가, 세금 이게 모두 글로벌이란 허울 좋은 신자유주의 토대 위에 놓여졌거나 놓여질 것들이다. 어느 것 하나 신자유주의 플랫폼 위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것들이다. 좋건 나쁘건 간에 어느 것 하나 경쟁 시켜 도태 시켜선 안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경쟁은 불가피하게 도태를 낳는다. 하지만 공공의 어느 것 하나 도태를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공을 민영화 시키는 것, 그것은 거짓말 이거나 언젠가는 망할 플랫폼에 거치 시키는 일이다. 이를 통한 기대 효과는, 가진 자를 위한 자본주의적 서비스는 향상되고 없는 자는 도태시키는 결과일 것이다.
2008/09/17 14:15 2008/09/17 14:15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회사가 사라졌다.

2007/10/28 21:39 / 생각
고전적인 개념에서 회사는 노동, 토지,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초기 자본주의의 제조업 중심의 개념에 머무른다. 오늘날 수많은 회사는 자본과 지식으로 이루어 진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지식경영이나 창조경영의 핵심이 바로 지식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자본의 유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하는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회사는 대체로 노동의 개념을 조직의 개념으로 둔갑시킨다. 조직의 개념이란 개인 단위의 노동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측정한다.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의 강약으로 계산되지 않고 효율성으로 계산된다. 효율성의 증감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정량의 노동과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도달로 측정하기 때문에 효율성의 증대를 꾀하기 위해서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사용자들의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오늘날의 회사에는 자본, 지식,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움직이는 것은 생산력과 효율성이다. 회사에서 노동은 사라졌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2007/10/28 21:39 2007/10/28 21:39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세계화 단상

2007/09/19 00:33 / 생각

세계화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서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며 현상이다. 하지만 세계화를 세계 여행이나 조기 유학, 영어 교육 쯤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지 않은 오류다. 이것은 세계화의 여러 교과서가 말하는 세계적 변화에 대한 조응이 아니라 개인적 욕구에 의한 국제화일 뿐이다. 세계화는 그 보다 더 현실적이며 큰 개념이다. 세계화는 통신 혁명과 시장의 지배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가 변혁되는 과정을 말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 대테러 전쟁의 동참 정도로 바라보던 중동의 먼 나라가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미디어의 디지털 통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화는 이렇게 인터넷, 디지털 통신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의 발달로 아무 상관 없던 세계적 사건이나 지역을 안방으로 불러 들임으로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투자는 일부 자본가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시 근로자, 중산층은 잉여자본을 더 보전하길 바라지 않고 리스크를 이익율로 대체하는 자본 시장에 유통시키길 원한다. 그 뿐 아니라 더 많은 이익율이 제고되는 세계적 시장, 이머징 시장을 찾아 투자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세계화는 자본을 보유하는 것보다 리스크와 이익율로 대체하는 것이 더 낫고 대체율이 높은 시장으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을 권장한다. 세계화는 카투만두의 노동자 자본과 서울의 중산층 자본을 홍콩 시장으로 통합하여 서로 이익율을 나눠 가지거나 동시에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과정이다.

시장과 자본유통, 그리고 뒤로 숨기 좋아하는 인터넷으로 세계화를 특징 지을 수는 있어도 세계화의 전체는 아니다. 세계화는 냉전시대를 지나 탈이데올로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변형의 큰 힘이다. 이것은 변형의 요소로서 즉각적인 정보 수용과 비교의 힘을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는 여러 경로를 통해 무엇을 이유로 사회가 변화하는지 지각하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는 다른 나라의 경제지표와 연결되어 있거나 다양한 자본 시장의 금리 변동과 연관된다. 정책은 비슷한 기조를 유지하는 다른 나라의 적용을 거울 삼아 손질되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여 운영된다. 이것은 세계화의 순기능이다. 하지만 세계화의 순기능이 모든 현실적이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세계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운영에 어떠한 개입도 허용하지 않고 디지털 정보통신을 통해 지식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계화가 아닌 세계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교양을 방해한다. 세계화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세계를 움직이고 통합하는 동력은 오직 자본과 시장이며 개인주의적 생활에도 시장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본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사회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세계화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불평등하여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는 세계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시장과 통합 과정을 겪는 부르조아의 변혁 과정을 일컷는다. 이 지점을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예컨데, 카투만두의 노동자와 서울의 중산층은 같은 시장에 투자했지만 같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변동 사항은 물론이며 각 나라마다 재각각인 변동 환율의 영향은 리스크에 리스크다. 자본을 투자한 개인은 이런 모든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시장은 어떠한 리스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헷지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것은 수출과 수입 같은 실물경제의 고전경제적 범위가 아니라 거대 금융자본의 세계화적 범위이다. 개인은 빈약한 노동과 임금자본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포로가 되어 제로섬 게임에 열중하는 셈이다. 이익율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의 유통에 박차를 가하는 금리와 환율의 리스크에 잉여자본을 침탈 당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세계화로 통합된 것은 카투만두와 서울의 점진적 양극화와 빈곤인 셈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현대적 부르조아 혁명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부르조아의 경제적 프롤레타리아화에도 기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기회 박탈에도 기여한다.
 
세계화는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과 사유를 국지적이거나 국가적으로 한정시키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을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기술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에 정보를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세계화된 정보통신은 신정아를 이슈시키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신정아로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화를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주체적인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정보통신의 판단일 뿐이다. 사람들의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영향으로 생각의 이유를 이동하였을 뿐 이다. 개인은 왜 그런 이슈가 발생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유보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살게 해준 비용을 청구하는 상업적인 발상 또한 세계화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그들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미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화적 정보통신 기술에 판단을 이관시킨 사회는 건강한 세계적 시각을 발전 시킬 수 없고 실제로 경계를 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기억하는 일은 디지털 정보통신이 다시 얘기해주지 않으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계를 넘는 세계적 시각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과 그 폭력의 원인을 스스로 찾아 가상된 진실의 철조망을 끊어 내는 일이다.

세계화 시대의 부르조아는 어느 때보다 사회정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향조정을 의미한다. 즉 좀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된 곳에는 더 많은 이익율과 서비스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화의 시민은 경제발전과 사회정의를 동일시 함으로서 경쟁적 불평등이 마치 사회정의인양 순응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하는 질서로 받아 들이고 착취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을 거세해버린다. 사실 세계화는 평등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 전통좌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자본재분배, 그로인한 공동노동과 공동생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평등주의는 지금보다 복지를 더 늘리고 약자를 더 보호하며 공공 사업을 시민 사회의 역할로 규정하는 정부의 적극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여러 정치기조의 지도적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는 여전히 서구적인 세계화를 추구해서는 기초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즉 세계화를 통해 가난이 휠씬 빨리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계화는 더 욱 불평등한 경쟁의 구도를 구축하고 미약한 개인의 노동은 언제나 침탈 당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는 자본을 기초로 한 비교의 환경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거대 자본과 노동을 비교할 수 없듯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공존은 기대할 수 없다.

G7이나 일대일 자유무역체제를 세계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서구적 체험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한정은 서구의 관점에서 세계화를 받아 들였을 뿐, 세계적인 관심, 즉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지역, 연간 6천만명의 유아가 먹지 못해 죽어가는 세계 도처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자본을 기초로 한 서구적 세계화는 거대 자본의 유통 경로와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개인은 소외되어 있고 보호 받지 못한다. 이것은 서울의 중산층이나 카투만두의 노동자, 하물며 수단의 난민이나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 있든 한사람의 노동은 대부분 비슷한 생산성을 가진다. 세계화는 얼마나 자본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많은가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세계화의 장에서 살아 남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미덕과 배려가 말라 비틀어진 자본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며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계화의 극복 과정은 변혁의 역변혁으로 가능하다. 역변혁은 세계적 시각을 넓히는 일이다. 이는 인간적 품위이며 미덕이다. 세계화가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있지만 이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의존성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기능을 파괴하는데 그 의존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한 개인은 세계화의 명령에 따라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거나 잉여 노동을 이익율과 대체하는 시장노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울의 중산층과 카투만두의 노동자는 서로의 자본을 섞어 세계화에 투자 했지만 서로의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자본 상호 의존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치나 민주주의에는 냉소적이다. 서로의 사정을 알아야 하는 이러한 인간적 품위가 사라지고 나면 세계는 세계화 되었지만 인간은 결코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마르크스의 전통적 방식의 소외만 남게 될 것이다.

2007/09/19 00:33 2007/09/19 00:3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충고

2007/09/14 17:47 / 생활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종종 경영 문제를 물어 오는 후배가 있다. 들어보면 대게가 사람에 대한 문제고 사람의 인연과 사연에 대한 것이다. 회사라는 목적 가치에 오래도록 인연을 두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건물은 그래도 둔 채 사람들만 사라지게 했던 IMF 중성자폭탄으로 인해 평생직장이란 가치는 사라지고 직업관은 능력과 시장요구에 부합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로 변화되었다. 여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직이란 근거로 생긴 한가지 믿음이 있다. "한사람 없어진다고 회사가 무너지나" 란 것인데, 이 믿음은 꽤나 신앙이 깊은데다가 한사람 없어서 회사가 잘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코드까지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평생직장은 이미 고전적 직업관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가치로 세계화를 하지 못해 온통 안달이 난 사회에서 평생직장은 마켓의 요구와 완전히 배치된다. 잉여자본이 노동유연성을 더욱 탄력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개인은 더 이상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객체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마켓에 어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기능이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에게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오로지 개인만이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조직은 조직의 이상이라 생각되었던 어떤 비전, 미션으로 구성되기를 거부하고 자본 생산이 용이한 지점과 자본 재생산으로 노동의 탄력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지점으로 끊임 없이 이동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세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동력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게가 '세상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마켓 안에 있다' 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노동이나 사람은 마켓안에서 하나의 문제로 인식되어 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등가의 원칙을 기본하여 개인과 개인, 개인과 회사를 계약으로 묶는다. 이러한 계약에는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 나아가 회사에 대한 책임보다 더 포괄적으로 마켓에 대한 책임을 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마켓이 침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구조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노동의 치열함은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마켓이 원하는 책임, 즉 자본의 창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강제적 복무에 치열함을 부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연이나 사람간의 계약이 아닌 인연의 관계마저 부인하거나 마켓의 요구에 걸림돌인양 치부해버리고 만다.

중소기업을 하는 후배가 물론, 작은 회사에서 경영자가 일일히 챙겨야 하는 것도 순리일 수 있지만, 사람이 조직에서 들고 나는데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그와 함께 했던 오늘을 챙기고 칭찬하며 그의 미래를 격려해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적잖은 시간을 들이기를 바란다. 마냥 칭찬하고 격려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사람을 생각한 경영자라면 충고하고 때로는 아프게 꾸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우애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사람과 노동을 존중하는 경영자라면 말이다.

2007/09/14 17:47 2007/09/14 17:47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