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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9 세계화 단상 by DrunkenSTAR
  2. 2006/07/26 자본주의의 해로움 by DrunkenSTAR

세계화 단상

2007/09/19 00:33 / 생각

세계화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서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며 현상이다. 하지만 세계화를 세계 여행이나 조기 유학, 영어 교육 쯤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지 않은 오류다. 이것은 세계화의 여러 교과서가 말하는 세계적 변화에 대한 조응이 아니라 개인적 욕구에 의한 국제화일 뿐이다. 세계화는 그 보다 더 현실적이며 큰 개념이다. 세계화는 통신 혁명과 시장의 지배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가 변혁되는 과정을 말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 대테러 전쟁의 동참 정도로 바라보던 중동의 먼 나라가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미디어의 디지털 통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화는 이렇게 인터넷, 디지털 통신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의 발달로 아무 상관 없던 세계적 사건이나 지역을 안방으로 불러 들임으로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투자는 일부 자본가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시 근로자, 중산층은 잉여자본을 더 보전하길 바라지 않고 리스크를 이익율로 대체하는 자본 시장에 유통시키길 원한다. 그 뿐 아니라 더 많은 이익율이 제고되는 세계적 시장, 이머징 시장을 찾아 투자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세계화는 자본을 보유하는 것보다 리스크와 이익율로 대체하는 것이 더 낫고 대체율이 높은 시장으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을 권장한다. 세계화는 카투만두의 노동자 자본과 서울의 중산층 자본을 홍콩 시장으로 통합하여 서로 이익율을 나눠 가지거나 동시에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과정이다.

시장과 자본유통, 그리고 뒤로 숨기 좋아하는 인터넷으로 세계화를 특징 지을 수는 있어도 세계화의 전체는 아니다. 세계화는 냉전시대를 지나 탈이데올로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변형의 큰 힘이다. 이것은 변형의 요소로서 즉각적인 정보 수용과 비교의 힘을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는 여러 경로를 통해 무엇을 이유로 사회가 변화하는지 지각하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는 다른 나라의 경제지표와 연결되어 있거나 다양한 자본 시장의 금리 변동과 연관된다. 정책은 비슷한 기조를 유지하는 다른 나라의 적용을 거울 삼아 손질되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여 운영된다. 이것은 세계화의 순기능이다. 하지만 세계화의 순기능이 모든 현실적이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세계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운영에 어떠한 개입도 허용하지 않고 디지털 정보통신을 통해 지식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계화가 아닌 세계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교양을 방해한다. 세계화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세계를 움직이고 통합하는 동력은 오직 자본과 시장이며 개인주의적 생활에도 시장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본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사회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세계화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불평등하여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는 세계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시장과 통합 과정을 겪는 부르조아의 변혁 과정을 일컷는다. 이 지점을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예컨데, 카투만두의 노동자와 서울의 중산층은 같은 시장에 투자했지만 같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변동 사항은 물론이며 각 나라마다 재각각인 변동 환율의 영향은 리스크에 리스크다. 자본을 투자한 개인은 이런 모든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시장은 어떠한 리스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헷지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것은 수출과 수입 같은 실물경제의 고전경제적 범위가 아니라 거대 금융자본의 세계화적 범위이다. 개인은 빈약한 노동과 임금자본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포로가 되어 제로섬 게임에 열중하는 셈이다. 이익율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의 유통에 박차를 가하는 금리와 환율의 리스크에 잉여자본을 침탈 당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세계화로 통합된 것은 카투만두와 서울의 점진적 양극화와 빈곤인 셈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현대적 부르조아 혁명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부르조아의 경제적 프롤레타리아화에도 기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기회 박탈에도 기여한다.
 
세계화는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과 사유를 국지적이거나 국가적으로 한정시키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을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기술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에 정보를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세계화된 정보통신은 신정아를 이슈시키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신정아로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화를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주체적인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정보통신의 판단일 뿐이다. 사람들의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영향으로 생각의 이유를 이동하였을 뿐 이다. 개인은 왜 그런 이슈가 발생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유보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살게 해준 비용을 청구하는 상업적인 발상 또한 세계화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그들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미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화적 정보통신 기술에 판단을 이관시킨 사회는 건강한 세계적 시각을 발전 시킬 수 없고 실제로 경계를 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기억하는 일은 디지털 정보통신이 다시 얘기해주지 않으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계를 넘는 세계적 시각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과 그 폭력의 원인을 스스로 찾아 가상된 진실의 철조망을 끊어 내는 일이다.

세계화 시대의 부르조아는 어느 때보다 사회정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향조정을 의미한다. 즉 좀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된 곳에는 더 많은 이익율과 서비스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화의 시민은 경제발전과 사회정의를 동일시 함으로서 경쟁적 불평등이 마치 사회정의인양 순응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하는 질서로 받아 들이고 착취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을 거세해버린다. 사실 세계화는 평등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 전통좌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자본재분배, 그로인한 공동노동과 공동생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평등주의는 지금보다 복지를 더 늘리고 약자를 더 보호하며 공공 사업을 시민 사회의 역할로 규정하는 정부의 적극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여러 정치기조의 지도적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는 여전히 서구적인 세계화를 추구해서는 기초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즉 세계화를 통해 가난이 휠씬 빨리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계화는 더 욱 불평등한 경쟁의 구도를 구축하고 미약한 개인의 노동은 언제나 침탈 당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는 자본을 기초로 한 비교의 환경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거대 자본과 노동을 비교할 수 없듯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공존은 기대할 수 없다.

G7이나 일대일 자유무역체제를 세계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서구적 체험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한정은 서구의 관점에서 세계화를 받아 들였을 뿐, 세계적인 관심, 즉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지역, 연간 6천만명의 유아가 먹지 못해 죽어가는 세계 도처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자본을 기초로 한 서구적 세계화는 거대 자본의 유통 경로와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개인은 소외되어 있고 보호 받지 못한다. 이것은 서울의 중산층이나 카투만두의 노동자, 하물며 수단의 난민이나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 있든 한사람의 노동은 대부분 비슷한 생산성을 가진다. 세계화는 얼마나 자본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많은가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세계화의 장에서 살아 남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미덕과 배려가 말라 비틀어진 자본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며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계화의 극복 과정은 변혁의 역변혁으로 가능하다. 역변혁은 세계적 시각을 넓히는 일이다. 이는 인간적 품위이며 미덕이다. 세계화가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있지만 이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의존성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기능을 파괴하는데 그 의존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한 개인은 세계화의 명령에 따라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거나 잉여 노동을 이익율과 대체하는 시장노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울의 중산층과 카투만두의 노동자는 서로의 자본을 섞어 세계화에 투자 했지만 서로의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자본 상호 의존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치나 민주주의에는 냉소적이다. 서로의 사정을 알아야 하는 이러한 인간적 품위가 사라지고 나면 세계는 세계화 되었지만 인간은 결코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마르크스의 전통적 방식의 소외만 남게 될 것이다.

2007/09/19 00:33 2007/09/19 00:3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자본주의의 해로움

2006/07/26 15:38 /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하는 주체는 소비의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이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같을 때 얘기다. 어제 한겨례의 박노자 칼럼에서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TV 매체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이건 논란거리도 아니다. 박노자씨가 약간은 이상적인 제시를 한 부분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 낸 고도의 언론 플레이와 상업 광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노자씨가 지적했듯이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매몰 상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의식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기능적이었던 불편한 것들이 심리적인 불안한 상태로 전이된 것을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군중속의 고독이라 본다면 이러한 류의 고독에서 예외적인 인간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태를 겪고 있으면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 자체가 고문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은 대게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현 체제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즉, 당신이 있는 그곳도 자본주의 체제와 제도가 움직이고 작동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곤 한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해로움에 완전히 중독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몇몇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완전 거부를 실행하기 위해 도시와 결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을 본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가피하게 제공하는 불평등과 불균형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버리는 상태 즉, 적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쟁에 대한 인식은 자아실현의 인식과 같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무경쟁의 상태라든지, 완전 분배의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형평성과 불균형의 상태가 지나치게 괴리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담론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기득권의 유지를 원하고 보편 타당한 분배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을 경우에는 국지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파괴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해방의식이다.

형평성을 이룬다는 측면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구축해온 성장이라는 이름의 장치는 마땅히 실패했다는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상태는, 자본이 원하는 체제유지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자신을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도시근로자들과 체제유지와 반공주의에 종속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다. GDP 와 무역수지만이 유일한 성장의 지표로 생각하게 만든 보수언론들의 책임은 이미 논할 가치조차 없어졌다. GDP 와 무역수지가 떨어지면 구성원들에게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 대며 더 많이 일할 것을 강요 하고 있는 것 조차 모르는 도시 근로자들의 의식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언제든지 자본의 구조속에서 중산증이라 생각한 알량한 지위가 빼앗길 수 있는 일련의 사례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회주의 이념하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를 견제하는 보수의 입장은 대체로 현체제의 붕괴를 염려하고 그러므로 발생하는 무질서와 무정부상태를 통해 공산주의화 되는 일련의 과정을 프로파간다 한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러한 재료는 북한의 존재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그들이 경계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일어 날지도 모를 공산주의화가 자생적 이념이 아닌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 생기는 것을 논점으로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북한이 없어 졌을 경우, 붕괴 되었을 경우, 또는 통일이 되었을 경우, 그들의 주된 주장을 근거하는 잠재적 위협 요소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북한의 현상유지를 원한다. 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민족적 소원의 붕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통일이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섣불리 반대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고, 정작 통일의 방식이 민족자결에 의해 진행되리란 보장도 없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지탱하는 북한의 존재와 미국에 대한 의존은 통일의 방식에서 조차 미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보수를 넘어 신자유주의의 체제속으로 급속히 변질된 미국의 패권주의가 비밀스럽게도 북한의 붕괴와 함께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정을 선언한다고 했을 때 남한의 보수가 이를 반대할만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괴리된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해소에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놓여진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통일을 논해야 하고 혁명을 진지하게 담론해야 하는 상황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작금의 문제를 좌와 우의 날개짓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세는 결국 사회대변혁을 요구 받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20세기 초반에나 일어날만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물론 그럴수 있다. 자본주의가 더 그 해로움을 전파하면 할수록 언제든지 판을 바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한시대를 풍미하며 살고자 희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속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마땅한 인간적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6/07/26 15:38 2006/07/26 15:38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