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햇살

2009/03/31 17:26 / 생각

마을 버스를 탔다.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는 마을 버스도 오후 1시에는 텅 비어 있다.
앞자리에 앉은 아줌마의 두피가 훤하다.
봄 햇살이 머리칼 구석 구석을 비춘다.
남편, 자식들 뒷바라지에 머리가 다 빠져 버린 아줌마들만 오후 1시
마을 버스를 타고 내린다.
마르크스가 사라진 도시에서 마르크스적인 것은 햇살 뿐이다.
이 햇살 눈에 익다.
1년전, 아이가 태어 나고 어미는 현대적 의료 시설에서 몸을 가눌 때
빤스, 양말 챙기러 빈집에 들어 가던 날, 그 햇살이다.
마을 버스는 곧 재개발이 있을 것이란 현수막을 히뿌엿게 지나면서
곧 부서질 동네를 닮은 구겨진 몸둥이들을 내동댕이 치고 있었다.
그 더미에 그 햇살이다.
그 햇살에 마른 빤스를 걷어 개고 신문 위에 발톱을 자르는데
안양에서 초등생이 변을 당했다, 그 활자에 그 햇살이 비춘다.

마을 버스를 탔다
배웅을 모르는 아이가 아비를 배웅한다.
아내가 흰머리칼 좀 보라고 한다. 아이가 자라니 흰머리가 생긴다.
안양은 여전히 안전하지 못하고 재개발이 사람들을 옥상에서
태워 버렸다.
햇살에 빤스는 잘 마르는데 그 햇살에 그 활자가 눈에 익다.
출근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진 마을 버스에는 화장끼가 빠진 세대만이
웅크리고 있다.
아비가 어떻게 살았길래 그 햇살은 그대로 공평하고 지폐 뭉치가 증발된
이 도시에 재개발 현수막은 어떻게 새 것으로 매달릴까.
아이가 배웅을 알고 마중을 아는 인생이 되면 아비의 삶은 끝날 것이다.
재개발로 마을 버스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그 햇살에 아이는 아이를 기를텐데
마을 버스를 타다가 아비가 졸던 그 햇살에
아이도 고된 머리를 떨구겠지

2009/03/31 17:26 2009/03/3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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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2009/03/11 15:21 /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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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아프지 않아서 고맙고, 스스로 제 인생 살아 보려 일어서서 한발 띄고 말을 익혀 나가는 것도 고맙고, 매일 늦고 지쳐 고약한 냄새나는 아빠에게 안겨주는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웃고 떠들고 느닷없이 울면서 끊임 없이 내가 너의 아빠고 또 엄마가 네 엄마라는 것을 일깨워줘서 고맙다.
2009/03/11 15:21 2009/03/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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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아리

2008/11/13 20:29 / 생활

나는 요즘 매일 늦는다. 아이를 볼 시간은 아침 뿐이다. 어제는 간만에 일찍 들어갔다. 10시쯤...

한참 옹아리 중인 딸아이가 갑자기 '옴~마~' 라고 말했다. 그 선명함이란...

우리 딸, 다 컸다...

2008/11/13 20:29 2008/11/1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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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2008/09/26 01:01 / 생활

출산 휴가를 끝내고 회사로 복귀한 아내가 복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2박3일 워크샾을 가게 됐다. 갓난 아기 핑계로 빠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아내의 회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너만 애 키우냐, 따위의 아주 유치한 이유로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종일 맡아 주시기로 했다. 나 마저 그 잘난 프로젝트에 목이 매어 야근이 잦은 터여서 아침에 잠깐 보고 밤 늦게나 되어야 아이를 잠깐 안아 볼 수 있었다. 아이는 뭘 아는지 모르는지 시큰둥한 표정이다. 아이를 한팔에 안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현지야 엄마하고 전화해 볼래? 여보, 현지 안고 있으니까 한번 불러봐
아내가 전화 넘어로 현지야 현지야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아이는 금새 표정이 달라지고 전화기 속으로 빨려 들어 갈듯이 몸을 뒤틀어 얼굴을 기울여 들이 민다.
여보, 당신 목소리 어떻게 알아 듣고 전화기로 얼굴 들이 민다.
그새 아내의 목소리가 뚝 끊기 더니 미안해 미안해 하며 펑펑 운다.
괜시리 나도 울컥해서 울고 말았다.
애기랑 처음 떨어져 보니 울만도 하지, 어머니가 한마디 거드시고 아이를 재운다며 들쳐 업으신다.

2008/09/26 01:01 2008/09/26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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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2008/03/12 13:01 / 생활

꿈이 많았던 잠에서 깨면 아내와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 걱정이 빗살처럼 쏟아진다. 괜한 걱정, 이라며 양치를 하고 중얼거리지만 천년동안 모든 아비가 그러했듯이 깨어 있으면서도 온낮을 설친다. 아무런 걱정이 없던 시절에는 무슨 일이 벌어 질 것만 같아 초조했다.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낳기까지 겪어야 할 이루 짐작할 수 없는 모진 고통과 살고 숨쉬려는 아이의 결코 평화로울 수 없는 힘겨움만 생각해도 눈알이 벌겋게 뜨거워진다. 하지만 남편과 남자의 이러한 뜨거움은 아내와 아이의 그것에 비하면 우리 삶의 더 없는 인연의 경계에 서서 너무 가볍고 낭만적인 자세일 뿐. 염려는 뜨겁지만 그 모진 경계를 넘지 못하고 서성인다. 대신 남편은 오랜 일처럼 본능처럼 전투하듯 세상의 경계를 넘어 생활을 지탱하려 욕심내고 부대낀다. 아내는 제 욕심에 마신 술과 꼬릿한 담배 연기에 무기력해지는 남편을 걱정하고 아이에게 얘기한다. 어느날 딱 한번 읽어 준 동화처럼 새가 다닐 길을 내려 아빠는 늦는다고. 제 인연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세상의 경계를 넘는 남편을 사무치게 기다리며 속태우는 국경의 밤처럼, 나도 아내도 서로 염려하며 늙어 간다.

2008/03/12 13:01 2008/03/12 13:01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아내와 종종 태어날 아기의 교육에 대해 논쟁 할 때가 있다. 우리의 논쟁 중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교육을 문제로 접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교육 그대로 지켜져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무너지고 교육 제도의 형식과 제도의 도입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교육 제도의 문제이면서 제도의 큰 축인 대학과 입시를 위해 학생을 둔 우리나라 대게의 가정이 견뎌야 하는 사교육비 문제가 바로 포커스이다.

아내와 나의 논쟁도 TV토론의 여러 대선 주자들처럼 포커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아내는 이명박을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이명박이나 현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게의 학부모와 같은 각론에 수긍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아내를 탓할 수는 없다. 아내의 생각은 이를테면 한국 사회, 적어도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에서 만큼은 암묵적인 합의 사항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사교육비 많이 드는 몹쓸 세상이긴 하지만 좋은 대학, 덜 좋은 대학으로 나눠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대학은 서열화 되어 있고 공교육만 제대로 개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책적으로 얘기하면 입시 제도는 폐지하되 대학 경쟁력은 키워야 된다는 말과 같다.

입시 제도 폐지, 대학 평준화 하면 학부모들이 지레 겁을 먹나 보다. 아직 학부모도 아닌 아내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여기엔 몇가지 전통적인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입시 제도 없이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냐는 것과 공부 잘 할 것만 같은 내 아이를 위한 세계적인 대학의 막연한 필요성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적이며 일류인 대학 몇 개쯤 보유한 나라에 살고 싶은 약간의 애국심과 자긍심 따위도 양념되면 제도적 문제의 촛점인 사교육비에 있어서는 못난 부모 만나 미안해 로 덮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한 패러다임 안에서 학부모의 고민은 대게가 교육 제도에 학생들을 어떻게 적용하고 적응시키느냐는 문제를 교육의 문제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 주자들이 TV 에 나와 관념적 주장을 늘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책의 관점이 과연 교육을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제도를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따져봐야 할 역할은 오로지 정책 수용자에게 있다.

난 아직은 부모가 아니지만, 대게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남들처럼 제도에 적응하고 남보다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확실히 이겨주길 바란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적응력을 12년동안 치루고 남들이 일류라고 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비로소 교육은 끝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학교가 없고 가르칠 어른이 없어 애초에 배움의 기회가 없다면 그보다 희망이 없는 사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 전문고, 자립형 사립고가 없다고 해서 희망이 없을까. 교육 제도에 더 잘 적응하는 아이를 자랑하기 위한 대학 서열과 학벌 중심적 사회를 지켜야 희망이 있는 사회일까. 나는 과연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예비 부모일까.

고백하건데, 이제 5개월된 아이가 다운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소견을 듣고 아내는 무척 놀랐다. 확률적인 것이라 괜찮다며 아내를 위로 했지만 그게 어디 생때같지 않은 아이의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소리인가. 애썼지만 과연 다운증후군인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기를 수 있을까,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내의 두려움은 얼마나 클까. 아이 앞에서는 나도 보편적 염려와 갈등을 하기 마련이고 애초에 아이를 앞세워 용기를 부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 시간을 깨닫고 말았다. 생때같은 아이, 혹은 생때같지 않은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는 나름의 염려가 있다. 어떤 아이 건 간에, 아이를 가진 부모의 계급이나 정체성에 관계 없이 아이는 교육을 받을 제도적 권리가 있어야 한다. 부모의 염려는 그 권리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권리를 모두에게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협오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죽어라고 경쟁만 하면 될까. 부모는 아이를 교육 제도에 적응시키기 위해 죽어라고 벌어오면 될까. 바꾸면 안되는 것일까?

모든 아이의 출생이 축복인 것 처럼 아이들의 교육 또한 축복된 과정이어야 한다. 나는 아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 제도를 모두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아이의 이 특별한 시간을 축복되게 하기 보다는 견디라고 고문하고 견디지 못했으니 낙오자라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있어도 어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해로운 교육 제도를 견뎌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해본적도 없지만, 나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바라며 교육을 시킬 생각도 없다. 내 아이를 특별한 학교에 보내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내고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가 특별한 교육 제도에 적응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을 낼 시간이라면 차라리 널려 있는 자연을 보고 느끼는 법, 산책하는 법, 친구들과 노는 법, 남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법, 반성하는 법 처럼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것을 도우는 보통의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이 나라의 알량한 대선 주자들과 자식들 염려와 걱정 뿐인 부모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가 무지개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내도 동의해 줄까.

2007/12/12 18:08 2007/12/12 18:08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