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권리를 포기하라

2007/05/23 18:21 / 생각
기자실이 언론의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한목소리로 언론 탄압을 외치는 매체들을 보면 탄압은 탄압인 것 같고 기자실이 통합되면 당장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알권리가 침해되면 정보가 줄어 들고 소스가 동일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정보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되어 의견과 표현도 대게 비슷해질 것이다. 이거 큰일이다. 막아야 겠다.

언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하는 것보다 휠씬 거대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파악하는 세상은 어느새 비슷해졌다. 언론의 취사선택은 사안의 다양한 관심이나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이데올로기와 정치기반에 따라 다를 뿐이다. 저널리즘은 어떻게 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같고 하나 같이 같은 우상을 생산하고 이미지를 전파하게 되었을까.

기자실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 그곳에서 공식, 비공식 정보들이 난무하고 기사가 생산되어 그것을 알아야 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물론 현장의 기사가 직접 가판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데스크는 여기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첨가한다. 공간이 같으니 서로 컨닝도 하고 저널리스트 포퓰리즘도 무시 못할 테니 비슷한 기사가 나온다는 가정은 순진할까.

언론의 자유가 침해 받으면 민중의 알권리도 침해될까? 대충 그렇다. 기자실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한다. 알권리를 가지고 있는 민중은 그 권리의 충족을 언론에 위임했다. 물론, 위임장 같은 건 없다. 기자실은 저널리즘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자들만이 출입하여 제한된 정보를 취득하고 재생산하는 장소라고 한다. 민중, 시민실이 없으니 기자들이 배포하는 정보가 침해되면 당연히 알권리도 침해되는 구조다.

기자들끼리도 카르텔을 형성하여 정보를 독점하려 하고 기자증이 있어도 기자실에 출입하려면 이미 자리를 잡은 기자들의 투표를 통해 출입여부를 결정하였다고 하니 언론의 자유는 고사하고 신체의 자유조차 구속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년동안 그 잘난 엘리트 주의가 민중을 현혹시킨 우상이 어디 한 두가지 던가. 천박한 신체에 무관의 제왕을 쓰고 있으니 자가당착한 기사가 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겠다.

권리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키는 것, 포기도 당연히 권리 주체의 판단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포기해도 되는 것이다. 알권리는 언론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민중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 하지만 권리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판단은 지키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은 더 이상 민중의 알권리를 방패 삼아 언론의 자유를 외치지 말고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외쳐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똘레랑스적으로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언론 스스로 개방적 사고를 가지고 더 많은 표현의 연대를 이끌어 내도록 하길 바란다. 기자실이란 공간적 시스템이 파괴되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스탠스를 거둬주길 바란다. 여전히 민중이 기대하는 알권리의 충족을 언론에 맡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무현이 보여준 범국가적 분열증은 이제 말기적 증상으로 번지는 것인가, 특정 언론과의 대립각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노무현의 이미지 정치의 준비태세는 집권과 탈권의 시대에 동어 반복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기타 치고 눈물 흘리는 대통령으로 이미지화 시켜 집권에 성공하고 난 지난 5년을 돌아 보면 우리들은 그를 정말 잘 알고 뽑았던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탈권을 하려니 역사가 두렵긴 한가 보다. 정책 보다 이미지가 우선인 선거 기간은 기타치고 눈물 흘리면 그만이었지만,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까지 한 마당에 언론에 알려진 것도 많고 알려지는 것도 많을 것이 차츰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스트레스는 우울증과 분노를 유발한다. 이미지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때, 권력은 물리력을 꼬드기고 임기 내내 개혁은 곧 통합이라는 원칙의 칼을 기자실에 드리댔다.

노무현의 원칙은 분열의 칼이었고 그 칼에 민중은 난자 당했다. 이미지 정치에 보기 좋게 당한 케이스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민중의 알권리가 이미지의 알권리로 변화하길 원하는 모양이다. 권력이 권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굳이 알아야 할 정보가 아니다. 알권리의 주체인 민중은 더 이상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알아야 할 권리를 포기하면 된다. 알려도 알아주지 않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그렇게 저항하면 된다.
2007/05/23 18:21 2007/05/23 18:21
DrunkenSTAR 이 작성.

폭력

2007/04/23 01:02 / 생각
폭력이 일어나고 폭력의 주체를 감금하고 나면 세상은 망각하기 시작한다. 일시적이던, 영원하던 다시는 폭력이 일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안도가 감금에서 나오는 이유는 감금을 행위하는 권력의 존재가 공공 안녕과 정의 때문이라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사건보다는 그렇다고 믿는다. 세상의 망각이란 개개인의 망각이 합해져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폭력으로 부터 도피하는 세상의 망각은 사회적 권력에서 나온다. 폭력을 감금한 공권력 뿐만 아니라, 폭력이라는 언어를 희석시키는 언론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망각의 이유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이유가 종종 슬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광기가 감금되지 않는 이상 언제든 폭력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광기는 망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감금하고 광기를 생산하는 주체가 동일할 경우, 즉 사회적 광기에 대한 책임 또한 권력이나 언론에 있을 때 사회는 절대 폭력으로 부터 안도할 수 없다. 권력과 언론이 이러한 책임에서 손쉽게 벗어 날 수 있는 이유는 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불행이 잠재적 폭력은 국지적이지 않다. 전체적이며, 사회는 발가벗게 노출되어 있고, 모두를 천천히 중독시킨다. 따라서 누구라도 조건만 맞는다면 능력 이상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무턱대고 안도할 수 없는 일이다. 언론을 그대로 읽고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경우, 중독은 한꺼번에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다.
2007/04/23 01:02 2007/04/23 01:02
DrunkenSTAR 이 작성.

정치언어와 한미FTA

2007/04/02 01:39 / 생각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주된 실수와 무지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언어에 쉽게 매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원론적인 틀안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든가, 스스로의 목소리가 없어서 언제나 양쪽 다 잘못했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만을 일삼는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을 놓고 논리를 세우는 합리화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입장을 정하고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미 FTA 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치열한 경쟁' 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을 한다. 치열한 경쟁에 대해서 보통의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처한 사회의 경쟁과 더불어 생각하며 치열하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더욱 치열해질 것을 다짐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정치언어의 상징성에 그대로 매몰된 자들의 태도이다. 이들이 유산계급도 아니고, 기득권도 없으면서 그것을 가진 자들의 문법에 쉽게 동조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그 긴장으로 인해 쉽게 언어를 왜곡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자립과 독립심을 키위기 위함이라는 소위 패권주의적이고 치열한 경쟁속에 적자생존이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삶 속에 스스로의 목소리 대신 유명인사들의 신변잡기나 사회 구조가 주는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집단적인 열정에 복무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치열한 경쟁은 그러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가능한 자만심이다. 자본을 집중할 수 있고 이미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이 세계화적 경쟁에서 치열함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누구나 행복을 가식하는 싸이월드 1촌들의 이미지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너무 약해 자신의 명예도 생존도 지킬 수 없는 삶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각이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첫지점이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도 여기에 있다. 정치언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지 상징일 뿐이다.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조망하지 않는다. 특히나 언론과 정치인의 언어는 현실을 창조하고 왜곡한다. 이러한 상징에 매몰된 개인이 많은 사회일 수록 오늘날 한미 FTA 와 같은 사안에 대해 바른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기대할 수가 없다. 자기 내부에 찾을 것이 별로 없는, 자아와 책임감을 포기한 개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는 이미 전제정치, 전제정치사회이다.

한미 FTA 반대!

2007/04/02 01:39 2007/04/02 01:39
DrunkenSTAR 이 작성.

한심스러운...

2006/07/11 23:59 / 생각
자이툰 부대가 파병된지 2년 됐나요?
2004년 8월3일 전세기를 통해 파병이 시작되었으니 꼭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처음 파병될 때는 말도 많고 언론과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지만, 현재 우리는 자이툰 부대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이툰 부대 홈페이지를 통해서 화장실 개보수 공사를 지원했고, 월드컵 응원을 했다는 활동 정도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CNN 에서 이라크 관련 소식과 미군의 애국적(?) 활약상(현재는 이라크 여성을 납치,강간하고 살해한 두 병사에 대한 보도가 Top Story 로 보도되고 있다.)에 대해서 매일 보도되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고작해야 우리 언론은 파병 교대자 신고식 같은 것을 보도하면서 '서방님 잘 다녀오세요' 라든가, 꼭지점 댄스를 추는 장병들을 보여주며 저 모습이 전쟁터에 파병되는 병사와 가족들에 대한 예의인지, 전쟁터에 젊은 병사들을 보내는 국민들에게 알릴 언론의 보도 태도인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정부의 보도 통제 이후에 이라크와 쿠웨이트에는 대한민국 국적의 기자가 한명도 없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23명의 젊은이가 독일에 파견되어 치른 월드컵에는 수십명의 기자들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언론이 모든 세계를 커버하고 모든 사건을 뉴스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어떤 현안을 기사로 채택하게 되는 저널리즘적 기준이 현재 무엇인지간에,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내몰린 3,000여명의 젊은이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특히 월드컵에 비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자가 없으니 이라크 전쟁의 사실을 외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테고, 더욱이 자이툰 부대의 소식은 일반 언론기관에서 함구로 일관하니 정부홍보기관의 우리나라만세식 보도 밖에는 접할 수 없습니다. 자연히 전쟁터에 그 나라의 젊은이들을 파병해 놓고 이렇게 온 국민이 태평한 나라는 아마도 UN 가입국 중 대~한민국 밖에는 없을 겁니다. 정부의 주도와 언론의 허약 체질이 전쟁의 실상을 방치하고 제나라 군대의 젊은이들 마저 관심의 영역에서 애써 외면하고 있으니 이보다 한심스러운게 또 있을까요?
2006/07/11 23:59 2006/07/11 23:59
DrunkenSTAR 이 작성.

미시담론의 역습

2006/06/20 22:04 / 생각
거대담론의 효용성이 거대담론이 가진 자체적 가치로 부터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거대담론의 효용성에 평가절하를 단정하진 않지만, 거대담론이 삶의 한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체계인 법 또는 제도, 국제사회적 체제인 이념과 협정에 근거 하는 일반적 상식에 의해서 반드시 하향식 영향을 준다고 볼 수는 없다. 공생할 수 없어 충돌하는 한미 FTA 의 저지와 찬성, 동북아 균형자론과 미군기지의 전략적 유연성, 생태와 개발, 노동의 신성함과 자본의 신성함 등의 현재적 거대담론들이 오로지 하향식으로 삶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즉시 미시담론은 스스로 절제의 길을 걷게 된다. 무엇이든지 뭉둥그려 받아 들이도록 훈련시킨 권력집단과 그에 편승한 언론이 주범이겠지만, 뭉둥그려 받아 들일 준비를 마친 대중들이 미시담론을 중단하고 거대담론의 정치적 신념이나 통계적 허구에 휘둘린다면 이 또한 종범이란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종범들의 노예 의식은 그 심각성이 이미 도를 넘었지만, 대체로 나타나는 현상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피해 의식 또는 열등 의식, 100분 토론에 나오는 지식인들이 현학적 수사로 현안을 갈기갈기 분해하여 부위별로 이름을 정하는 의식을 보며 질려 버리는 피해 의식은 그나마 애교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 따로 공부 할 취미도 없는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책이라도 사봐야 한다는 계몽근본주의로 구속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우유 구멍을 밀고 들어와 있는 신문을 펼치고 '액면이 Fact' 라는 고정관념도 모자라 팩트가 아닌 가정에 역사까지 소급하고 적용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작태다. 분리 수거 하시기도 힘든데 스스로 사절을 권유해야 마땅한데, 100분 토론의 현안까지 만이라도 알아야 하는 열등 의식은 그러지도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액면이 Fact' 다는 말도 안되는 의식이야 말로 근본적인 피해 의식 이다. 이러한 '의심 없는 흡수' 의 상태가 매몰이다. 이러한 상태의 개인들은 대게 '코끼리가 춤을 출 때, 춤을 춘다.'

둘째로 타자적 자아 의식, 보고 배운다는 가부장적 전통에 의해 제자를 보고 배우지 못하고 토고를 보고 배우지 못하는 팽배한 강박 관념은 거대함을 지향한다. 가부장적 형태는 자아의 형성 시기부터 순혈의 관계에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애교라고 하더라도, 자아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에 부터 자아가 지향하는 바가 제대로된 가부장적이었을 때, 그 의식은 오로지 의식, 즉 '거대 지향적 오로지 의식' 이 된다. 이러한 거대한 타자를 향하는 자아는 내가 속해 있는 어떤 거대함이 끊임 없고 성실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거대함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과 동격화 시키는데 능통해진다. 이러한 능통함은 민족주의를 가르는데 대단히 엄격하게 사용되곤 하는데, 자신의 순혈적 민족보다 거대함이 지향하는 민족이 앞서고 언제든지 순혈 민족을 이반시키는 행위 또한 거대함이 거대했을 때 더욱 더 능동적이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대 지향적 의식이 최근 가장 잘못 받아 들인 유행어가 세계화이다. 세계화가 시작되는 지점이 우리 라면 우리가 향하는 지향점이 세계이며 방방곡곡인가? 세계화는 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포장지 이름이 아니란 상식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각종 사회이념 서적들을 봤는가 여부를 떠나, 세계화가 지향하는 단순한 지점을 살펴보면 간단히 마무리 된다. 세계화가 트리니나드 토바고나 우크라이나도 살펴보는가? 오직 미국이 세계화이다. 이쯤에서 향후 20년쯤후에 유행 될 '우주화' 에 있어서 미국이 그 거대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미국이 점령한 안드로메다 USA42 혹성이 곧 우주화의 정점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화가 꼭 방사형일 필요는 없다는 재정경제부 고위관료 같은 말풍선은 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미시담론을 절제하는 의식이 없다면, 거대담론을 그대로 충돌시킬 이유가 없다. 불행한 것은 권력의 습성이고 미시담론이 닮지 말아야 되는 감정이 이른바 관료주의이고 보면, 여전히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의식은 패러다임이다. 거대담론을 충돌시키지 않고 종속되지도 않기 위해서 교과서적인 해답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전환은 저항을 수반하지만, 세계가 지금까지의 세계로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돈과 시간을 팔아 세상을 싸돌아 다니는 것과 다른 경험, 그것이 패러다임의 변화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퇴근 후에 촛불이라도 들 수 있고,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서명이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는 신발을 신은 것이다. 그 역할에 맞게 우리는 세상을 천천히 바꿀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미시담론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결코 이상주의가 아니다.  
2006/06/20 22:04 2006/06/20 22:04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