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장을 방문하여 그 고장이 오늘날에 이르기 위해 겪은 역사를 겸허하게 받아 들이는 태도로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식민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세계이념적 갈등을 관조하며 바로 우리나라의 해방전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많은 식민지가 겪은 역사의 울림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실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IRA 의 탄생의 서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영화를 감상하는데 열어 두어야 할 감수성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었지만, 켄로치 감독은 마지막까지 담담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본인이 영국인이란 사실조차 잊거나 버린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감독 자신으로 부터 관객까지 펼쳐진 숙명적인 공간속에 반성의 성찰을 가득 부어 넣는 효과를 만들고 꼼짝 없이 역사의 진실 앞에 무릎 꿇리고 만다.
며칠전 강준만 교수의 기회주의로 부터 자유로운 이념이 없다는 강연을 듣고 그를 탁월한 기회주의자쯤으로 생각하게 되어 서글펐는데, 이 영화가 그 기회를 이념과 때어 내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기회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연대에 스스로 만든 기회가 아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너져 버리는 연대가 가진 이념이 기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엄밀히 기회와 주의는 분리되어 있어야 하고 기회 자체가 속물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고장에서나 지배가 있고 피지배가 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작동시키는 계급은 지배 계급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이란 사실 속에서 가장 허탈한 것은 지배 계급이 가진 기회라는 기득권을 피지배 계급에서 나눠주는 것이다. 기회를 투쟁하는 방식으로 받아 들인 피지배 계급에서 기회를 운용하는 방식이 터득되어 있을리 없다. 이 지점에서 기회는 이념적 잣대와 결합하여 계량이 되기도 하고 중도가 되기도 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는 아일랜드의 독립이라는 마이클 콜린스 적인 영웅 서사를 도입하지도 않으며, 독립이라는 반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보리밭을 흔들지도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놀랍게도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성이라는 바람의 울림이고 피와 이념의 갈등으로 그 뇌관을 터트린다. 아일랜드 인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법정에서의 논쟁과 테드와 데이미안이 자치정부 조약의 승인과 지속적인 투쟁에 대해 벌이는 논쟁은 이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쾌쾌한 마르크스주의를 지상으로 끄집어 내는 놀라운 스팩타클을 담당한다. 그들이 동의하는 것은 독립이지만, 지향하는 바는 달랐다. 독립(또는 자치)만 된다면 무엇이어도 상관 없다는 단선적인 사고가 아닌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해방하지 않고는 독립이 되어도 소용 없다는 좌파적 신념이 이 영화의 바람이 지향하는 지점이다.
흔히 등장하는 좌파적 지적 허영 같은 것도 찾아 볼 수 없으면서 테드와 데이미안, 두 형제의 갈등은 눈에 띄게 낯익은 구도다. 식민지였던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는 첨예한 구도속에서 극진적 진보주의자인 데이미안이 지향했던 것은 영화속 논쟁의 한 구절로 요약된다. "우리가 당장 내일 영국군을 몰아 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모두 헛될 뿐이며 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켄로치 감독은 마르크스주의자인 제임스 코넬리를 통해 타협하는 것은 안심일 뿐, 진정한 희망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제국주의적인 폭력을 앞세운 지배는 그것이 타협을 통해 해소된다고 해도 다른 무엇으로 지배를 계속할 것임을 역사적 반복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반성케 한다. 오늘날 그 무엇은 자본이고, 그 자본속에서 누가 기회를 배풀고 있으며 그것을 투쟁하지 않은 상태에서 획득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반복될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희망인가?
검색어 '영화평'에 대한 6 개의 검색 결과
호텔 르완다를 그저 감동적인 영화라 볼 수만은 없었다. 영화 홍보용 홈페이지의 타이틀인 기적과도 같은 용기가 시작되는 곳이란 진부한 마케팅적 텍스트 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힘들었다. 루세사바기니의 용기가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래서 아름답다던지, 아프리카의 쉰들러 리스트 라는 댓글평은 차라리 영화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영화는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내전으로 서로를 잔혹하게 학살하는 1994년의 상황과 그 와중에 살아야만 했던 르완다의 민중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바퀴벌레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그 공포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건 감동이 아니라 처절함이다. 폴 루세사바기니의 행동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남기고 죽음으로 부터 떠나야만 하는 서구 외국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종족 갈등은 왜 일어 났으며, 서구 사회(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외국인들이 아닌 멀리서 지켜보고 결정하는 사회)는 왜 이들이 벌이는 대학살을 방관해야 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종족 갈등은 1919년 벨기에가 르완드를 식민지배하면서 생겨났다. 벨기에는 편리한 지배를 위해 종족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인사정책을 시행한다. 다수인 후투족을 배격하고 소수인 투치족에게만 낮은 관직을 주며 두 종족간의 우열을 갈라 놓는다. 그로부터 두 종족간에 끊임없는 분쟁이 발생한다.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식민통치이념은 생존을 위협하고 결국 인종청소인 제노사이드가 일어 나는 상황이 되자 슬그머니 발을 빼기 시작한다. 세계 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은 왜 방관 했을까? 1992년 소말리아에는 3만의 미군을 투입하여 중재를 했던 사례가 르완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이유가 소말리아에는 4개의 미국 유전 업체가 원유를 채굴하고 있었고 르완다에는 아무런 정치 경제적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25만의 투치족이 후투족 시민군에 의해 학살되는 동안 폴 루세사바기니는 1200여명의 투치, 후투족 난민을 그의 호텔에서 지켜낸다.
서구사회의 인도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작동하는 이념이다. 비단 르완다의 경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호텔 르완다는 지금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서구사회의 모순과 작동원리를 지상의 둘도 없는 이상인양 추구하며 벌어지는 갖가지 부조리한 일들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다. 희망을 만들었던 콘스탄트 가드너와 달리 호텔 르완다는 분노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보여주며 불편하게 만들고 알아가게 만든다. 영화는 묻는다. 불편해라, 저 사람들을 보라, 불편한 그대들이 방치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방치가 공공연하게 늘어가고 있다. 평택 사람들이 그렇고, 매향리 사람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의 자본과 이념에 내몰리는 모든 민중들이 그렇다. 계속 불편해 하기에는 우리의 피가 너무 빨갛고 너무 뜨겁다.
강대국과 거대자본의 논리가 어떻게 세상에 접목되는지 폭로하는 콘스탄트 가드너는 헐리우드 영화가 빠지는 이상적 대단원인 영웅의 등장, 악을 징벌하는 정의 등을 내세우지 않는다. 테사가 추구하는 세상의 정의와 인간성의 회복은 애초에 헐리우드의 진부한 방식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파, 상업주의에 빠진 대게의 대중들은 테사를 엥글로색슨의 영웅 쯤으로, 저스틴을 사랑에 빠진 진정한 로맨티스트 쯤으로, 강대국과 제약회사의 논리를 픽션으로 치부하는데 가차가 없을 것이다.
5월3일자 조선일보 류정기자의 영화평은 모든 우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그대로 투시한다. 못사는 사람들을 위한 싸구려 정의감일랑 집어 치우라는 호소는 그런데로 그들 답다. 하지만 비교적 못사는 사람들, 피부색이 다른데 비교적 짙은 사람들, 출신성분이나 특정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지켜야 했던 최소한의 예의도 없음을 공공연히 사설하던 그들이, 테사의 태도와 배려를 지적하는 부분은 역겹기까지 하다.
조선일보의 영화평 보기
한 인권운동가라는 존재가 제도권의 저항적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권력과 자본에 의해 제거 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는 영화의 형식은 그대로 현실일 수 밖에 없다. 영화 내내 테사와 그녀를 돕는 아놀드는 한번도 영화로 부터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테사는 오직 자신과 다른 시선을 가진 저스틴에게 만큼은 따뜻한 시선 즉 사랑의 시선을 거두지 않음으로써 저스틴의, 우리의 호두 껍질을 깨운다. 하지만 테사의 시선이 그만큼 따갑고 따스한건 우리의 무임승차가 이제서야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금 희망에 부푼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강대국의 논리에 충실히 영합하는 거대자본이 아프리카 민중을 상대로 부당한 실험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의 꿈과 다른 꿈을 꾸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통해 함께 꾸는 꿈은 있어도 어떤 꿈이어야 하는지 규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꿈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영화는 대단원에 어떤 결론도 내려주지 않으면서 콘스탄트 가드너가 될 것인지 아니면 희망을 시작할 것인지 조용히 손을 내밀 뿐이다.
희망은 세상을 바꿀수도 있다.
어디를 찾아봐도 얀 베르메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로 표현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는 것처럼 내성적이고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소심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르네상스의 물결이 닿지 않고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예술의 패트런들, 즉 영주나 교황과 친분이 없었던 것도 그가 잘 알려지지 않게 됐던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를테면 산치오 라파엘로 같은 인물은 수많은 제자를 거닐고 다니면서 교황청과 성을 오가며 사교를 즐겼다는 것을 보면 대비가 가능하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에는 불세출의 꽃의 화가 램브란트가 있었다는 것도 그가 그늘에서 그림을 그리게된 동기가 아닐까? 평생 35점의 작품을 남겼어도 21점을 오직 한명의 패트런을 위해 작품활동을 한 점도 한몫했을 수도 있겠다.(영화에서 베르메르의 패트런은 색광에 파렴치한으로 나온다.)
빛이 투영하는 색깔의 범위를 붓의 몸짓으로 표현한 베르메르는 화풍으로 본다면 바로크적인 빛과 르네상스적인 색깔의 화가였던 것 같다. 상당수의 그림이 시점만 달리 할뿐 그의 아틀리에를 배경으로 그려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인지 영화의 도입부는 '화가의 아틀리에' 라는 작품을 연상케하는 소품들이 가득하게 펼쳐진다. 가냘프게 빛이 스며드는 모자이크 창문과 그에 반은 어둡고 반은 먼지가 얻혀진듯한 네덜란드 지도, 헝겁들이 널려 있는 탁자와 상젤리제, 이젤... 오페라를 보기전에 아리아를 듣고 가는 것처럼 그림을 한번이라도 보고 간 사람이라면 절로 탄성이 나올만 하다.
진주 귀걸이를 할 그리트에 대한 베르메르의 연민이 중세 특유의 생활의 소리와 퀄트 되면서 예술과 예술의 소품에 대한 신비감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튜브에 담겨진 물감이 없는 당시 색을 만들기 위해 식물, 광물질들을 섞어서 만드는 과정과 필시 잔 강에서 기어올린 물로 붓을 닦아내는 장면들은 예술이 '물질에 투영된 정신세계'이며 그때 존재하는 질료들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가난했던 고흐가 가질 수 없었던 베르메르의 상대적 부유 같은 것 말이다.
트레이스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가 원작이긴 하지만 헤이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영화속의 그림, 베르메르의 작품은 '터번을 두른 소녀' 로 더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역시, 해석하기 나름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의 어떤 아름다운 부정, 절제, 연민의 정을 보고 있자면 왕가위의 '화양연화'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최근 열린 부산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한 왕가위의 신작 '2046' 이 화양연화의 연작이라고 하니 그도 꽤 볼만하겠다.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