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석방될 수 있는 가 보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40여일 동안 사람들은 두 가지 분노를 표출했다. 하나는 탈레반에 대한 분노, 이것은 두 명의 피랍자가 살해 당하면서 군사행동 여론까지 치닫는 보편적 분노를 자아 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분노, 기독교의 무차별한 선교 방식이 화를 불렀고 그동안 기독교가 벌인 예수님 판매 방식의 기독교 선교에 치를 떨던 대중들의 이유 있는 분노를 불렀다. 이유가 있어도 찬찬히 뜯어 볼 일이지만, 한국사회가 그렇게 교양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전체의 합의인양 대중을 등에 업고 덧글 폭력에 나선 사실은 이미 주지적이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전원 석방될 것이란 보도(아직 확인은 안됐지만)가 나왔고, 그것도 몸값을 지불할 것으로 예상되자 서서히 구상권 얘기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구상권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의 빚을 갚은 사람이 다른 연대 채무자나 주된 채무자에게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대중의 분노가 증오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구상권이 존재한다면 증오를 이해하는 차원도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가 종교의 믿음과 예수의 헌신을 자본적으로 해석하여 교회를 상업화 시켰던 한국 종교의 부조리에 가해지는 분노를 이해한다 해도 피랍자들에 지불 될지도 모를 몸값에 대한 국민 구상권 주장은 공동체도 이성도 없는 자본교환적 존재들의 폭력일 뿐이다. 응당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에게 '몸값은 세금' 을 주장하는 소위 애국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성마저 피곤하게 만든다. 마치 국가가 세금을 푸대자루에 싸 담아 피랍자 가족을 대신하여 탈레반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몰고 가는 발상은 예수를 상업화시킨 종교와 이론의 야합만큼이나 창조적이다.
누구든 적어도 자기가 준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반대급부가 없다면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 천박한 공동체 정신에 이러한 계약 관계가 마치 합리적인 공동체인양 선동하는 등가의 원칙속에 탄생한 OECD 가입국, 대한민국을 잘 살펴보면 개인은 본질적으로 항상 분리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적 문제와 정당한 비판의 대상을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는 자정이나 학습 능력이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더 이상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다만, 실체적 개인과 관념적 대중만으로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를테면, 구상권의 주장은 돈이 없으면 납치되도 풀려 날 수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개인은 이 상황이 개인과 관계가 없고 세금이 개인을 위해 한 일이 없었던 증오와 결부시켜 주장하게 된다. 굳이 '네 가족이 그 상황에 처했어도?' 라고 물어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분리 되어 있다는 해석으로 무마할 일이 아니다. 애국과 국익을 동일 시 하고 애국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애국은 대게가 남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 뿐이다. 생업하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국가와 민중을 이반시키고 공포를 유발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게다가 대게가 국익이 아닌 것도 일단 관념적 애국의 범주 안에 들게 되면 반대 없는 동의와 다수결의 원리로 비판적 소수를 집단으로 폭행하기 일쑤다. 이쯤되면 국익이나 애국이나 개인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국익과 개인의 이익을 동일시 하고 국가의 손해를 개인의 손해로 일반화하게 된다. 개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대도 국가에 물어 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따위에 빠진다. 자신이 어떤 폭력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상태, 판단 상실의 증후군에 빠진다. 이러한 증후의 상태에서 공동체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함께 보호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의무와 권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로 매장된다. 이건 사회도 공동체도 아니다.
근대 공화적 공동체에 세금의 위치는 국가적 국익이 아니라 공동체적 공익이다. 세금을 어떻게 국가의 쓰임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동안 정부가 행해 온 부패를 견주어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정당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프간에 피랍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우리의 세금이라면 그동안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 세금을 쏟아 부은 정부의 허튼 쓰임새보다 휠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들을 싸잡아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치부하는 것은 옮지 않다. 그들의 문제와 살아 돌아와야 하는 문제는 분리시켜야 정당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또는 대중이 구상권을 주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건 파렴치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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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입양의 날 행사가 코엑스에서 열렸다. 지난 10년간 80여명 아이들의 대리모를 해오신 작은 이모가 표창장을 받으신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정체성을 찾거나 생부모를 찾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해 오는 곳이 대리모라던데, 그걸 다 어떻게 감당하려 하냐며 핀잔을 놓던 기억이 난다. 독신 입양에 대한 구조적 담론에 가열찼던 시간은 많았으나 몸으로 살아 보이시던 작은 이모의 이야기는 잊고 있었다. 버려지는 아이가 없어야 겠지만, 아이는 버려지고 누군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 버려진 아이를 사회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리모도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악랄한 리플은 아무런 고민도 없고 정리도 안되는 인간의 퀄리티 쯤으로 생각하겠다. 작은 이모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선배인 고찬수 PD 가 시트콤 등으로 외도를 하다가 다시 그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한다. 선배는 기부문화에 고민이 많다. 물론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시쳇말로 죽이 맞는 단체나 재단을 줄세우고 관심을 주목시키기 위한 강력한 MC 를 섭외하는 고단한 일은 기부라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선배의 얘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요즘 30대 독신 커리어 우먼들 사이에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유니세프나 월드비전을 통해 직접 기부하고 자신이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들과 소식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헌데, 자기가 기부하고 있다는 걸 왜 그렇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걸까? 홍보대사 인가? 어느 자동차 광고를 통해 세계 각지에 17명인가 자식을 두고 있다는 차인표, 신애라 부부의 감동을 찍어 바르고 안젤리나 졸리의 심심치 않은 입양소식과 이에 고무된 헐리우드 스타들의 시너지 효과까지 매스컴을 타고 전해 지는 것을 보면 이것도 패션이구나 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의 저명 인사, 아니 사회의 저명적 가치나 레벨을 추구하려는 일종의 분열처럼 보인다. 기부라는 것은 대체로 사회적인 것이고 마땅이 그러한 가치체계에 준해야 개인적 만족 벽돌도 도미노처럼 엎어지는 것으로 보는 엄숙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대중영합적인 기부는 이것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다. 기부도 개인 만족, 타인과의 비교, 그러므로 해서 더 우월적인 것으로 갈아 입고 갈아 타는 패션주의가 되가고 있다. 어떻게 자기가 기부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아이보다 친구가 기부 중인 시에라리온의 아이가 더 이쁘다며 바꿔 달라는 저질스러운 스탠스를 취할 수 있는가, 감동을 샤넬로 찍어 바르고 기부도 상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놀라운 천박함을 보여준다. 기부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일종의 예의일 뿐, 공동체적 관심이며 사회적 문제이긴 하지만 형평성과 계급에 대한 문제라는 점, 사심의 개입이 적기를 바라는 일종의 사회적 순수성이라는 점 등을 들어서 뭐하나, 시들해지면 에스케이투로 바꿔 바르면 그만인데... 이건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이제 제발 말쑥한 상품이 은폐하고 있는 사회적 노력과 착취의 이면도 바라 볼 줄 알길 바란다. 어설픈 패미니즘으로 무작정 감싸지들 말고...
대체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주된 실수와 무지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언어에 쉽게 매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원론적인 틀안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든가, 스스로의 목소리가 없어서 언제나 양쪽 다 잘못했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만을 일삼는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을 놓고 논리를 세우는 합리화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입장을 정하고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미 FTA 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치열한 경쟁' 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을 한다. 치열한 경쟁에 대해서 보통의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처한 사회의 경쟁과 더불어 생각하며 치열하지 못했던 자신을 되돌아 보며 더욱 치열해질 것을 다짐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정치언어의 상징성에 그대로 매몰된 자들의 태도이다. 이들이 유산계급도 아니고, 기득권도 없으면서 그것을 가진 자들의 문법에 쉽게 동조하는 이유는 일상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그 긴장으로 인해 쉽게 언어를 왜곡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자립과 독립심을 키위기 위함이라는 소위 패권주의적이고 치열한 경쟁속에 적자생존이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삶 속에 스스로의 목소리 대신 유명인사들의 신변잡기나 사회 구조가 주는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집단적인 열정에 복무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치열한 경쟁은 그러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가능한 자만심이다. 자본을 집중할 수 있고 이미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이 세계화적 경쟁에서 치열함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누구나 행복을 가식하는 싸이월드 1촌들의 이미지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너무 약해 자신의 명예도 생존도 지킬 수 없는 삶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각이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첫지점이다. 한미 FTA 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도 여기에 있다. 정치언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지 상징일 뿐이다.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조망하지 않는다. 특히나 언론과 정치인의 언어는 현실을 창조하고 왜곡한다. 이러한 상징에 매몰된 개인이 많은 사회일 수록 오늘날 한미 FTA 와 같은 사안에 대해 바른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기대할 수가 없다. 자기 내부에 찾을 것이 별로 없는, 자아와 책임감을 포기한 개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는 이미 전제정치, 전제정치사회이다.
한미 FTA 반대!
솜씨 좋은 노래만으로 드림걸즈의 천박한 상업주의와 성급하게 봉합해버리는 화해 무드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랑루즈 이후에 OST 욕심이 생겼다는 점과 트럼펫이야 말로 있을지도 모를 내 음악적 감수성이나 비주얼한 장치면에서 그나마 그럴싸하게 들어 맞는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기 위해 거들먹거리는 가족이란 테마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실, 가족이란 관계는 형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형식안에서 혈연이나 가족간의 사랑 따위의 내용은 차라리 탄압에 가깝다. 가족이란 관계는 모두가 그럴 것이란 고리타분한 정의가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적 형식이고 그 형식안에서 개인의 상실을 강제한다는 염연한 현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볼모로 사회적 관계마저 가족의 테마로 묶으려는 시도는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상업적 필요에 의한, 다루기 쉬운 조직속의 개인으로 존재를 약화시키려는 악랄함을 목격하게 한다. 드림걸즈의 커티스의 역할이 대변하듯 이러한 악랄함을 자행하는 남성이라는 집단이 오랜 세월동안 마치 성적 자부심인냥 취급해왔던 가부장의 의미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결탁해왔다. 돈이나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한 가장의 측은함을 위로하기 전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부심을 부여 잡고 온갖 타협들과 타협했던 패배주의를 질책 받아야 옳다. 드림걸즈의 멋드러진 흑인 음악이 백인의 입맛에 길들여지는 과정을 토대로 흑인들의 꿈을 마치 백인 우월 사회와의 진출인양, 또는 흑인 음악의 저항성을 들먹이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실, 드림걸즈에서 음악을 빼고, 카리스마가 가신 비욘세의 아름다움을 빼면 차, 포 땐 장기판처럼 긴장감이란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성공한 나쁜놈인 커티스를 통해 가족과 상업주의가 긴밀히 협작하는 문제적 자세는 높이 살만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걸즈가 드림을 실현하는 영화적 시나리오를 벗어나 커티스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당한 사람이라도 나중에 살살 달래 주면 언제든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회란 참으로 천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을 것이고 그것은 모두 돈의 양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드림걸즈의 메세지 되겠다.
이제 조만간 공평하게 한살씩들 더 먹게 된다. 자동차 보험도 갱신해야 하고 수시로 신년운세를 보라는 문자 메시지도 도착한다. 운세를 보는 사람들을 탓할 것 까진 없지만, 대체로 운세의 정점은 내년엔 대박 행운이 있거나 돈을 잘 버는 쾌가 있는지 점춰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가 상승률과 잉여자본의 배당으로 판가름되는 내년 연봉이 결정된 도시 근로자들에게 돈을 더 잘버는 쾌란 자투리 돈으로 들어 놓은 적립식 펀드 수익율이 상승하거나 남이 열심히 해준 덕에 차려 놓은 밥상을 먹듯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 정도일 것이다. 더욱 더 가정에 가정을 한다면 서민의 희망 숫자인 로또 이상으로 제도적인 쾌는 없을 것이다. 신년 운세와 신년 소망이 투자 대박과 부채 상환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사회는 분명 기형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소망이 물질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비단 자본주의만의 탓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전체가 오로지 축적에만 관심이 있고 분배에는 무관심한 이유는 자본이 이룩한 제도에서의 옮바른 처세는 축적의 상승 효과에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가치관이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 섰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사회적 소망을 계몽할 수단은 없고, 행복의 척도는 곧 물질적 윤택이라는 등식을 성립하고 나면, 신년운세에 대박과 상환의 두 키워드만으로 삶의 질을 정하고 말게 된다. 이미 노동자들의 알량한 운명은 통계적인 물가 상승률과 잉여자본의 가치만으로 정해 졌는데도 컴퓨터의 뺑뺑이 돌리기에 저당 잡힌 위로와 환희의 감정을 교차시키며 산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보니 사랑하고 분노하고 용서하는 감정들이 가진 분별력이, 자본의 척도로만 가늠되어 진다,
만삭이 된 아내가 걸핏하면 통증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야 눈치를 보며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동료와 집이 멀어 아예 회사에서 자고 먹는 동료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고 짜증을 부려 따로 따로 찢어져야 할 위기에 있으면서도 새벽이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나는 동료들을 다그치는 나는, 악덕일 수 밖에 없는 흔하디 흔한 제도권의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낸 산출물로 그들의 노동이 신성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기껏해야 자본에 대한 호소라는 현실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가 진심으로 가당치가 않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겨루는 늠름한 모습에 가끔은 허탈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을 계량주의라 폄하해도 할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열악한 IT 근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간극에서 미래의 삶의 질적 향상을 꿈꾸는 순진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악덕 상사의 이름이 곧 자본의 명령은 아닐지 언정, 또는 그들 스스로의 알량한 책임감이나 보람일지 언정, 현실의 일상에 던지는 노력이 미래의 변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도 없는데 오로지 노동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신이다. 하나의 노동에 결합된 여러 관계의 삶에게도 헌신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은 자본이 주고 비로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부담을 느낄 때이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그 부담이 말을 하면 곧 명령이 되고 패배주의와 섞여 미필적 고의로 가장된 강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다른 꿈을 꾼다. 고로 그 부담도 다른 꿈을 꾼다. 그 다른 꿈의 범주 중에 대표적인 항목은 노동은 신성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소외된 노동이 바라보는 조직된 노동이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로 인해 같은 노동에도 클래스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고질적인 분열이 일어 나면 자본은 도리어 끈적하게 들러 붙는다. 그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노동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소외된 노동에게 조직된 노동이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조직된 노동의 움직임이 독재로 보이는 지점도 그 이해의 거리처럼 멀고 평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평행이 만나는 교차점이 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을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점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상호간의 이해와 관심이 떨어진 곳에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축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로 인해 인간적인 것들도 사라졌다.
야근이 끝나기 전에, 동료들을 휘몰아 순대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 겠다.
하지만, 목하 토익과 고시에 매달린 학생들, 염려는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2월27일 단의원이 울고불고 저항해도 어쩔수 없었던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시끄럽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요즘 학생들 조용합니다.조용한 걸 보면, 내일이 아니라는 도그마가 팽배한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한 대기업이 특정 학교 학생들 뽑지 않겠다(K대학교 던가요?)루머를 흘리면 요즘 학생들 금새 풀이 죽습니다.(기업이 학문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취업이 무섭긴 무섭나 봅니다. 그렇지요, 생존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비정규직 법안이야 말로 그대들의 생존과 직결하는 법적 장치인데도 내일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봅니다. 설마, 토익과 고시에 열심히 매달린 본인들이 비정규직은 되지 않을 거라 근거 없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초고용계약법에 대한 프랑스 학생들의 저항을 보며, 합리적 관리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투쟁적 관심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민주주의의 의식과 행동의 선두에는 실천지식인으로써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엔 기업논리를 강조하는 짝퉁 개혁진보세력들이 강철대오를 짜 놓았습니다. 그 대오에는 통계적 방식의 진보, 합법성을 가장한 기득권의 수성이 있을 뿐, 노동의 신성함은 없습니다.
이제 학생들은 의식을 배우지 않나 봅니다. 의식은 고전, 토익은 미래가 된 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천박한 무리들이 사회와 제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상업주의의 중금속이 이제 천천히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을 중독시키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한 성찰은 하지 않고 '돈이나 벌지'라며 체념을 하고 맙니다.
우리의 비정규직법안은 지금 학생들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취업준비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자신이 무엇인지,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사고해보지 않고 제도권으로 쓰며드는 것은 자본주의가 원하는 자본교환적 피의 수혈 입니다. 그것도 2년 단위로 쪼개서 말입니다. (정체성은 사회가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대다수가 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록 정체성과는 멀어집니다.)
그러한 비정규직법안이 날치기로 통과 되어도 전혀 불쾌함 없이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기성세대의 자발적 복종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썩었습니다. KTX 승무원의 파업으로 왜 내가 불편해야 하는지 푸념하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대통령이 나서서 제도며 인프라를 왜곡해가며 인간성을 실추해 놓고 자신감 운운하는 반 칸트적인 선언을 일삼는 사회에서 특별히 깨우쳐야 하는 의식은 기대하지 못할지언정, 현안을 제대로 보는 교양 정도는 갖추고 나이는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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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time 2007/08/28 22:26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요즘 인터넷에서 참 보기 어려운,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아프간에 피랍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우리의 세금이라면 그동안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 세금을 쏟아 부은 정부의 허튼 쓰임새보다 휠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냐옹이 2007/08/30 16:57 편집/삭제 댓글 주소
이라크파병등과 관련된 파병이 조건없이 파병됐나요?
국익을 위해 파병된것입니다
냉전체제를 지나 경제력이 강대국지표가 되는 현재에 미국과는 끊을수없는 관계입니다
분명 국익을위해 파병된 부분에 대해 이런식으로 말씀하시다니.. 우리 친구도 이라크장교로 파병됐었습니다
함부로 말씀하시지마세요
피랍된분들은 봉사활동갔다고했지만 분명 선교로갔었고 기독교단체는 첨에 그걸 부정했습니다
분명 구상해야지요
돈이 전부가아니라 국가이미지전반에 타격을주었고(테러와의 협상하는 나라) 제외국민들에게는 테러집단의 타겟이됐습니다
그런 도의적인부분까지 청구해야합니다
아무개 2007/08/30 22:42 편집/삭제 댓글 주소
피납자들이 뭘 잘했다고 하신지..
물론 국가에서 국민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지만
국민도 국가에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는게 아닐까요?
이번같은 경우는 무지한 것보다 무시한 것이겠죠..
지금쯤 피납자 가족에게 격려의 말이 필요하듯이
주위에서 피납자를 위한답치고 올린 이런 댓글은 오히려
더 아픈 상처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다른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신가요. 선교보다 봉사보다 먹고살기 힘들어도 국가를 위해 세금낸 국민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하실련지요...
비밀방문자 2007/08/31 01:23 편집/삭제 댓글 주소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지나던이 2007/08/30 13:2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참 좋은 글이군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 ㄳ
bugugsung 2007/08/30 14:5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국가가 가지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 데도 너희 기독교인들 맘대로 갔는데 그걸 왜 국민들이 낸 혈세로 부담해야 되니 그리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한 일과 이런 사적인 일과는 절대로 비교하면 안되지 국민들이 낸 혈세는 털끝만큼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전체 기독교인들이 도의적인 책임감을 같이 느낀 다면 모금 운동이라도 벌여서 갚아야 정상이 아닐까
바람 2007/08/30 15:3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글은 그럴싸하게 기독교인 아닌것처럼 쓰셨군요~
아프칸에 가지마세요!
죽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가야합니다.
책임지셔야 하지 않을까요?
바람 2007/08/30 15:4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뭔가 많이 아는 사람마냥 괴변을 늘어놓으셨군요!
"예수를 상업화시킨 종교와 이론의 야합만큼"
"응당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에게 '몸값은 세금' 을 주장하는 소위 애국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성마저 피곤하게 만든다."
이따위 내용이 구상권 청구와 무슨 상관인지???
어디 책에서 글을 군데 군데 복사한것 같은데 다시 정리해서 쓰세요.
도데체 글을 쓸줄아는분인지??????
rr 2007/08/30 16:5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글쓴이의 괴변
Pelle 2007/08/30 18:3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아직 모르시는 분도 있나본데 사실 샘물교회측에서 구상권 청구를 받아들이겠다구
밝혔답니다.
인질들 항공료와 치료 비용을 전액 부담 하겠다고 했다는군요.
그 얘기에서 어느분 말마따나 집 홀랑 태워먹은 방화범이 소방차 기름값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말하는 그림이 연상되긴 하지만 말이죠^^
J 2007/08/30 18:56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아무리 같은 국민이라도 예수쟁이들은 도대체가 이해가 안되니...구상권대신 국적박탈은 안될까?
어이쿠 2007/08/30 20:5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가까운 일본만 봐도 구상권은 되고 있더만요. 뭐 일본이 했다고 해서 옳았다는게 아니라, 구상권은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겁니다. 설령 입국금지국이 아니더라 해도 정부가 그렇게 말렸으면 그 정도의 효과는 발휘 한다고 보는데요.
생명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차별한 선교 활동으로 자기를 그렇게 몰고 갔다면,
물론 죽어 마땅하다 이정도 까진 아니지만요. 옳지 못한 행동이었어요. 다짜고짜 남의 집에 가서 내가 니 아버지다 . 이런 행동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정말루요. 그리고 이라크 파병은 국익을 위한게 맞잖아요. 어쩔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참.. 당신의 괴변 잘 읽었습니다.
ㅉㅉ 2007/08/30 22:0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청개구리들 가지말라고 하는데를 왜 가서
이 난리 인지...
참 잘했어요~
한심하다 2007/08/30 22:16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그렇게 가지 말라고 경고했건만..
지내들이 잘못해놓고선....
凸
a965l 2007/08/31 01:18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무슨법률용어도 아니고 상당히 어렵게 쓰셨는데, 글은 자기의 생각을 남이 잘 이해할수 있도록 쓰는겁니다. 절대 이해할수 없도록 꼬아서 쓰는게 똑똑한것은 아니에요.
그 위험한 곳을 가지말라는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갔을때는 자기가 그에따른 책임을지겠다는 각오가 있었을것 아닙니까, 아니면 순교를 각오했던지,
한두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졌야죠
동감입니다 2007/08/31 09:08 편집/삭제 댓글 주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죠. 이 블로그 주인처럼 쓰는 분. 또 하나는 중 고등학생도 쉽게 이해할수 있게 쓰면서 동시에 수준높은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잘쓴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쓸수 있는 분.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후자 >>>> > > >>>>>>> 전자 넘을수 없는 레벨차가 있는 겁니다. 근데 그런 능력은 거의 반이상은 타고나는 거기 때문에 이분한테 뭐라구 할건 없죠.
ppop 2007/08/31 07:4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정말 글 못쓰 시네요,,어찌 이렇게 앞뒤 맞지않고 무식한 글을 읽었다니..
눈이 아프네요,,이라크파병은 국익이요...피랍자들은 죄인입니다!!
Justin 2007/09/02 23:53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우연히 왔는데, 여기서도 구상권 문제군요...구상권에 대해서는 솔직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이런 문제는 이야기를 해 보고 싶네요.
참고로 저는 교회를 오래 다녔고, 열심히 다니고, 최근까지도 단 하루 빠지지 않고 드럼을 2년 칠 정도로 착실합니다만.... 십자군 전쟁의 의미와 신의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으며, 역 라마단 운동의 타문화 배척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각설하고,
결국 선교던 봉사던, 구상권이던 국적박탈이던 .... 우리가 지금 의논하고 토의해야할것은 좀 더 근본적인 것, 즉 한국 기독교계의 선교 정책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라고 하신 [지상명령]을 익히 알고 있지만, 과연 그 지상명령에는 지켜야 할 법도도, 존중해야할 타문화도 없는 것인지...
주께서 원하신 것이 과연 그런 무대뽀와 타 문화 개무시 정책인지....
피랍자건,샘물교회건,한기총이건 결국은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인데, 가장 큰 커뮤니티인 정부의 경고를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것인지...
전, 크리스천으로써 방금 제가 위에서 말한것들보다 [지상명령]이 더 위라면 할말이 없고 순종할 따름이구요,
만약 주의 사랑 방식과 한국 기독교의 선교 정책이 맞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의 마음가짐과 선교 방식들을 돌아보길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