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왜 싫어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후배가 있어요, 한술 더 떠서 삼성 정도면 그만한 로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하고요. 반도체와 휴대폰을 만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 받는 기업이니 어느 기업이나 하는 로비를 가지고 회사 무너 뜨릴 마냥 덤비는 건 대중영합주의라고도 합니다.

삼성에 대해 싫어하고 좋아하는 취미가 아니지요, 사람들은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을 종종 헛갈리는 데요. 삼성의 행위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지요. 좋고 싫음이 아닙니다. 김용철 변호사로 부터 불거진 삼성 비자금 의혹의 본질은 이건희, 이재용 일가가 사적 자본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으로 기업지배구조를 재편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오래도록 비자금을 조성하여 국가 기관을 매수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물음은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물어 보는 겁니다. 이건 현명한 판단의 축에 들지도 않습니다. 이런 행위가 죽어도 옳다고 한다면 더 이상 진전을 볼 수가 없겠지요. 보수주의자도 이런 행위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유롭게 시장이 스스로 거래하고 시장에 의해서 수요와 공급이 제어 되어야 한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건희 일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손도 아닌 그들이 시장을 쥐락펴락 했으니 보수주의자나 자본주의자에게도 심각해야 할 문제 입니다. 결국 옳다는 부류는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가치관의 소유자라고 밖에 볼 수 없겠습니다. 삼성의 비자금은 사실이 아니다란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재작년 이학수와 홍석현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를 잊으셨나요? 차명계좌는, 내부 문건은, 무엇보다 7년동안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낸 한 사내의 몸부림은 어떤가요, 무조건 주종관계적 배신으로 이해하는 구린 사고로 내부 고발자라며 무시하면 될까요? 삼성에서 닦고 조여주고 기름쳐주는 기계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을까요.

로비를 린다 김이나 송일국으로 대입하여 드라마틱 버전으로 생각하면 그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로비를 돈, 술, 섹스, 골프로 이루어진 총체적 인간 설득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유희에 의해 가장 해퍼지는 것이 인간인지라 로비의 도구들은 매우 유혹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구설수도 아니고 모랄헤저드도 아닐까요? 로비를 린다 김이나 송일국의 드라마틱으로 생각하게 되면 이것이 반사회적 범죄인지 조차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일단 받고 일에 영향을 미치면 뇌물이되고 쌍방 모두 범죄 입니다. 저렇게 로비해야 된다는 법 없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린다 김이 아침 프로그램에 버젓이 얼굴들고 나온다고 합법 아니고 옳은 일도 아닙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을 인정하는 것이 있다면 제품 경쟁력이나 마케팅 능력이겠지요. 하지만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오직 제품 경쟁력과 마케팅 능력만으로 척도되지는 않겠습니다. 세계에 모범이 되는 기업이라면 기업의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윤리, 노동복지, 경영자 마인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은 기업의 많은 기능 중 하나만 취한 상점에 불과 합니다. 삼성이 과연 글로벌 상점일까요? 기업일까요? 삼성이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라면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사회 윤리와 복지 측면에도 기여하는 좋은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경영자의 경영권을 방어하지 않고 정치권과 영합하여 부패를 일삼지 않는 투명하고 옳바른 기업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삼성이라면 이것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따라서 휴대폰 만들고 반도체 만들어 파는 글로벌 기업이 아니라 글로벌 모범 기업이 되기 위한 중대한 시점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군사 독재시대에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민중의 저항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거대 자본과 시장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절실한 시기 입니다. 회자되는 양극화, 비정규직, 한미FTA 가 모두 이 본질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삼성은 이러한 본질의 먹이 사슬에 가장 높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에 저항하는 것이 대중영합주의는 아니지요. 누군가 대중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통해 군중심리를 일으켜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김용철 변호사가요? 그 분은 배신자도 아니고 하물며 영웅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뒤늦게 양심의 소리를 경청한 측은한 한 인간에 불과 합니다. 그도 말했지만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처벌 받아야 되는 사람 중에 하나 입니다. 그를 이 사회적 처벌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되지요. 다만 그가 처벌 받기 전에 이 사회가 지켜줘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양심입니다. 그가 홀로 고민했을 때는 개인의 양심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것은 사회적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 사회의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강력한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울림을 삼성, 그리고 국가 권력기관이 듣게 하기 위해 사회적 양심을 모으는 의지를 가지느냐 거세하느냐는 그 사회의 양심의 건강함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참여연대]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
견제 받지 않은 권력, 삼성을 말한다.

[잠수함토끼]
삼성과 악의 축
검찰은 떡집인가? 떡집에 왠 수사권
삼성은 해체 되어야 한다.
삼성에 침묵한다면, 기자실은 없어도 좋다

2007/11/16 13:14 2007/11/16 13:14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더욱 격해지고 있는 대선 정국과 삼성 비자금 폭로로 인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현실이 있습니다. 예년 보다 뚝 떨어진 기온으로 가슴이 시렸던 시월 한달 동안 두명의 도시빈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양시의 노점상 탄압에 비관한 이근재씨는 10월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인천건설노조 소속 비정규직 전기원이던 정해진씨는 10월27일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조합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마지막으로 분신 사망했습니다. 한미 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와 경찰폭력에 사망한 하중근 열사의 조의가 채 풀리기도 전에 우리가 일상으로 걷는 거리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비정규직이란 이름과 인간 답게 살려는 외침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요구와 열망이 있던 6월항쟁 때에도 이렇게 많은 동시대인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은 인간성과 의식을 잠식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자본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그 사나운 지배력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름을 지향해야 할 자유로운 의지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세욱, 정해진 열사는 깨지 말았어야 할 꿈에서 깨어 누구보다 먼저 현실을 깨달아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절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것에 맞서는 자신의 작은 노동이 아무리 필사적이어도 결코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의 고독은 번민으로 고통스러웠을 것 입니다. 그가 떠나고 기적처럼 견뎌야 하는 가족들을 보고도 스스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릴 수 있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열사로 불리는 것 조차 모자랍니다. 어느 시대의 시보다 소설보다 더 시적이고 허구적인 현실이 무섭고 슬픕니다.

노점은 누구나 똑같은 목구멍에 그나마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어떤 이의 좌판입니다. 여러분은 그 좌판을 없애고 청계천에 꼭 물을 흘려야 겠습니까? 그래야 국가가 대단한 발전을 이루고 글로벌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된 이후 전보다 보호 받으며 잘 산다는 노동자는 없는데, 왜 노동자들 괜찮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말만 원칙이 되는지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대선보다, 삼성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킴스클럽의 진열대 위에 처분을 기다리는 고등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지 37년 되었습니다. 37년 동안 우리는 민주화를 이뤘고 노동조합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사 반란 정권을 단죄하기도 했으며 평화적으로 문민 정부를 이양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리에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하는 노동자가 그대로 이고 도시 빈민들은 자본과 권력의 폭행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지경 입니다. 어떻게 노동자의 외침이 똑같을 수가 있을까요? 그동안 여러번이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시스템이 바뀌었는데 노동자의 깃발은 여전히 핏빛 입니다. 우리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을 한낮 과격 단체로만 치부하고 왜 저들이 저리 싸우는 데도 또 싸우고 또 투쟁하고 죽어가야만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권영길이하고 이석행이하고 비자금이라도 삥뜯을라고 하는 것인가요? 허세욱, 정해진, 하중근, 이근재 노동자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선, 삼성이 중요한가요? 그렇다면 내년에도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심연을 헤엄치는 등푸른 날생선이 될 것인지, 우리들의 선택과 행동이 그렇게 할 것 입니다.

2007/11/05 20:47 2007/11/05 20:47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회사가 사라졌다.

2007/10/28 21:39 / 생각
고전적인 개념에서 회사는 노동, 토지,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초기 자본주의의 제조업 중심의 개념에 머무른다. 오늘날 수많은 회사는 자본과 지식으로 이루어 진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지식경영이나 창조경영의 핵심이 바로 지식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자본의 유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하는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회사는 대체로 노동의 개념을 조직의 개념으로 둔갑시킨다. 조직의 개념이란 개인 단위의 노동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측정한다.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의 강약으로 계산되지 않고 효율성으로 계산된다. 효율성의 증감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정량의 노동과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도달로 측정하기 때문에 효율성의 증대를 꾀하기 위해서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사용자들의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오늘날의 회사에는 자본, 지식,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움직이는 것은 생산력과 효율성이다. 회사에서 노동은 사라졌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2007/10/28 21:39 2007/10/28 21:39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세계화 단상

2007/09/19 00:33 / 생각

세계화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서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며 현상이다. 하지만 세계화를 세계 여행이나 조기 유학, 영어 교육 쯤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지 않은 오류다. 이것은 세계화의 여러 교과서가 말하는 세계적 변화에 대한 조응이 아니라 개인적 욕구에 의한 국제화일 뿐이다. 세계화는 그 보다 더 현실적이며 큰 개념이다. 세계화는 통신 혁명과 시장의 지배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가 변혁되는 과정을 말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 대테러 전쟁의 동참 정도로 바라보던 중동의 먼 나라가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미디어의 디지털 통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화는 이렇게 인터넷, 디지털 통신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의 발달로 아무 상관 없던 세계적 사건이나 지역을 안방으로 불러 들임으로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투자는 일부 자본가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시 근로자, 중산층은 잉여자본을 더 보전하길 바라지 않고 리스크를 이익율로 대체하는 자본 시장에 유통시키길 원한다. 그 뿐 아니라 더 많은 이익율이 제고되는 세계적 시장, 이머징 시장을 찾아 투자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세계화는 자본을 보유하는 것보다 리스크와 이익율로 대체하는 것이 더 낫고 대체율이 높은 시장으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유통시키는 것을 권장한다. 세계화는 카투만두의 노동자 자본과 서울의 중산층 자본을 홍콩 시장으로 통합하여 서로 이익율을 나눠 가지거나 동시에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과정이다.

시장과 자본유통, 그리고 뒤로 숨기 좋아하는 인터넷으로 세계화를 특징 지을 수는 있어도 세계화의 전체는 아니다. 세계화는 냉전시대를 지나 탈이데올로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변형의 큰 힘이다. 이것은 변형의 요소로서 즉각적인 정보 수용과 비교의 힘을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는 여러 경로를 통해 무엇을 이유로 사회가 변화하는지 지각하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는 다른 나라의 경제지표와 연결되어 있거나 다양한 자본 시장의 금리 변동과 연관된다. 정책은 비슷한 기조를 유지하는 다른 나라의 적용을 거울 삼아 손질되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여 운영된다. 이것은 세계화의 순기능이다. 하지만 세계화의 순기능이 모든 현실적이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세계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운영에 어떠한 개입도 허용하지 않고 디지털 정보통신을 통해 지식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계화가 아닌 세계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교양을 방해한다. 세계화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세계를 움직이고 통합하는 동력은 오직 자본과 시장이며 개인주의적 생활에도 시장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본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사회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세계화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불평등하여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는 세계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시장과 통합 과정을 겪는 부르조아의 변혁 과정을 일컷는다. 이 지점을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예컨데, 카투만두의 노동자와 서울의 중산층은 같은 시장에 투자했지만 같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변동 사항은 물론이며 각 나라마다 재각각인 변동 환율의 영향은 리스크에 리스크다. 자본을 투자한 개인은 이런 모든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시장은 어떠한 리스크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헷지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이것은 수출과 수입 같은 실물경제의 고전경제적 범위가 아니라 거대 금융자본의 세계화적 범위이다. 개인은 빈약한 노동과 임금자본으로 자유로운 시장의 포로가 되어 제로섬 게임에 열중하는 셈이다. 이익율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의 유통에 박차를 가하는 금리와 환율의 리스크에 잉여자본을 침탈 당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세계화로 통합된 것은 카투만두와 서울의 점진적 양극화와 빈곤인 셈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현대적 부르조아 혁명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부르조아의 경제적 프롤레타리아화에도 기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기회 박탈에도 기여한다.
 
세계화는 사람들의 이성적 판단과 사유를 국지적이거나 국가적으로 한정시키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을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기술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에 정보를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세계화된 정보통신은 신정아를 이슈시키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신정아로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화를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주체적인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정보통신의 판단일 뿐이다. 사람들의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정보통신의 영향으로 생각의 이유를 이동하였을 뿐 이다. 개인은 왜 그런 이슈가 발생했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행위를 자발적으로 유보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살게 해준 비용을 청구하는 상업적인 발상 또한 세계화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그들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미덕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화적 정보통신 기술에 판단을 이관시킨 사회는 건강한 세계적 시각을 발전 시킬 수 없고 실제로 경계를 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기억하는 일은 디지털 정보통신이 다시 얘기해주지 않으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계를 넘는 세계적 시각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과 그 폭력의 원인을 스스로 찾아 가상된 진실의 철조망을 끊어 내는 일이다.

세계화 시대의 부르조아는 어느 때보다 사회정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상향조정을 의미한다. 즉 좀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된 곳에는 더 많은 이익율과 서비스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계화의 시민은 경제발전과 사회정의를 동일시 함으로서 경쟁적 불평등이 마치 사회정의인양 순응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하는 질서로 받아 들이고 착취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을 거세해버린다. 사실 세계화는 평등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 전통좌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자본재분배, 그로인한 공동노동과 공동생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평등주의는 지금보다 복지를 더 늘리고 약자를 더 보호하며 공공 사업을 시민 사회의 역할로 규정하는 정부의 적극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여러 정치기조의 지도적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는 여전히 서구적인 세계화를 추구해서는 기초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즉 세계화를 통해 가난이 휠씬 빨리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계화는 더 욱 불평등한 경쟁의 구도를 구축하고 미약한 개인의 노동은 언제나 침탈 당할 수 밖에 없다. 세계화는 자본을 기초로 한 비교의 환경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거대 자본과 노동을 비교할 수 없듯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공존은 기대할 수 없다.

G7이나 일대일 자유무역체제를 세계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계화는 그야말로 서구적 체험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한정은 서구의 관점에서 세계화를 받아 들였을 뿐, 세계적인 관심, 즉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지역, 연간 6천만명의 유아가 먹지 못해 죽어가는 세계 도처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자본을 기초로 한 서구적 세계화는 거대 자본의 유통 경로와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개인은 소외되어 있고 보호 받지 못한다. 이것은 서울의 중산층이나 카투만두의 노동자, 하물며 수단의 난민이나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 있든 한사람의 노동은 대부분 비슷한 생산성을 가진다. 세계화는 얼마나 자본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많은가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세계화의 장에서 살아 남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미덕과 배려가 말라 비틀어진 자본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극복 대상이며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계화의 극복 과정은 변혁의 역변혁으로 가능하다. 역변혁은 세계적 시각을 넓히는 일이다. 이는 인간적 품위이며 미덕이다. 세계화가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있지만 이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의존성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 기능을 파괴하는데 그 의존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한 개인은 세계화의 명령에 따라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거나 잉여 노동을 이익율과 대체하는 시장노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울의 중산층과 카투만두의 노동자는 서로의 자본을 섞어 세계화에 투자 했지만 서로의 사정은 알 바 아니다. 자본 상호 의존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치나 민주주의에는 냉소적이다. 서로의 사정을 알아야 하는 이러한 인간적 품위가 사라지고 나면 세계는 세계화 되었지만 인간은 결코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마르크스의 전통적 방식의 소외만 남게 될 것이다.

2007/09/19 00:33 2007/09/19 00:3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소름 돋는 일

2007/08/11 16:11 / 생각

소름 돋을 일이다. 집단적 관심와 광기의 증후가 버무려진 덩어리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이성 있는 포유류의 소리가 아니라 소음이다. 게다가 악랄하기 까지 하다. 명백히 형편 없는 것을 형편 없다 말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란다. 대중의 요구에 맞는지 아닌지가 이성이란다. 대중의 좋고 좋지 않고 따위의 취미 판단이 이성이라고 고집하는 덩어리들의 객체가 포유류인지 의심 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의 문화적 희망은 온통 미국을 향하고 있다. 문화를 들고가 문화적 코드로서의 잠입이 아닌 시장적 가치의 통쾌함에 목매단다. 이익과 손해의 함수에 밝은 자본적 대중의 폭격은 전두환의 학살적 명령과 그 역사적 감수성을 공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따위 극단적 반이성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대중의 선이 더 이상 옮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게 된 이유야 특별할 것이 없다. 오로지 자본적 이익이다. 대중들은 아직도 이것을 국익이라 떠들고 다니는데 도대체 세금내는 것 아까워서 허구헌 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국익을 메가폰하여 개인적 손익 그래프를 그려내는 발상이야 말로 창조적 아닌가. 강자의 소외에서 나오는 영웅 코드, 미국 마운드에 태극기 꽂는 감수성 넘치는 사대주의, 거기에 국익만 양념되면 대중의 무지를 폭격기에 실어 융단을 내릴 수 있다. 뇌를 가진 포유류를 한꺼번에 무뇌충으로 만들 수 있으니 자본의 정서는 참으로 소름 돋는다.

2007/08/11 16:11 2007/08/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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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해로움

2007/07/26 01:04 / 생각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루머를 들은 적 있는, 할 수도 있겠지 하던 막연한 세계를 전속력으로 우리 앞에 끌어다 놓으신 신묘한 분이 계신다. 이명박이라고, 대한민국의 서민들이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부러움을 이미 몸소 실천하여 누리신 분이다.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 증명된 온갖 특혜는 모두 찝쩍거리시더니 단물 빠진 자본 권력을 뱉고 정치 권력을 잡아 보시겠다고 한다. 특혜와 성역으로 퀄트된 이런 분이 대통령 되도 되나? 그 퀄트를 찢어 골고루 나눠주시려나.

자기 돈 자기가 쓰는데 누가 뭐라 해, 기업 CEO 였던 양반이야 국가도 기업이라는 논리에 빠지지 않는 준거는 '잘 살고 싶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잘 살고 싶은 서민적 생각이 지금보다 더한 윤택함을 추구하고 이러한 생각을 공정하게 비판할 수 있는 마땅한 재료가 없는 마당에 기업처럼 국가를 운영하여 평균 연봉 7~8천짜리 공기업처럼 만들고 거기다가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기필코 경부운하를 뚫어 내어 환경도 좋게 하고 관광도 할 수 있게 해준다니 얼핏 우리나라 만만세 필이다. 모두가 풍요로우니 저절로 복지가 되고 민주주의도 이룩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이데올로기적 민주주의에 대한 채감이 거의 없는 서민들에게 민주주의는 그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직접 투표로 뽑는 지점에서 멈춘다. 수많은 사상가, 정책입안자, 학자, 정치인들의 복잡한 이론적 민주주의의 커튼을 치운 민중적 민주주의란 누구나 먹고 일하고 교육 받는 환경을 말한다. 하지만 동시대의 인민들에게 이러한 민주주의는 경제를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물론 민주주의 속에 인민을 잘 먹이고 입히는 개념이 빠질 수 없지만, 민주주의의 공화적 의미 즉 공공성과 공동체적 선이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사회가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다.

민주주의를 바로 경제로, 자본적 자유로 인식하는 사회에서는 이명박과 같은 공공의 적이 순순히 부러움의 대상, 성공한 사람쯤으로 대접 되는 이치가 성립된다. 세계를 짧게 인식하는 사회일수록 잘 사는데 필요한 비용의 획득을 노동 그 이상의 가치로 여기고 소비에 대한 책임보다는 무한대의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자본의 무한 자유가 사회적 복지를 가져올 것이란 정치적 발언은 보이지 않는 손을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자본이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가에 밀집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과정을 지켜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특혜를 맛보고 온갖 비리로 자본축적의 영웅적 과정을 거친 이명박씨에 열광하는 이성이 마비된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에 목마른 기업이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노동자를 무더기로 해고하는 사태를 보면서도 국가를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이명박씨의 약속에 수긍하는 정체성을 상실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강자의 세계관으로 무장된 지도자가 반드시 추구하는 것은 강자 중심의 사회, 즉 민중을 경쟁만이 존재하는 관계로 규정하고 강자가 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도구를 철학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가 되는 무시무시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좋은 정부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정부이다.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논리와 강자의 생리가 의식화된 이명박씨가 과연 좋은 정부를 만들고 민중적 민주주의를 지향할 수 있는 자인가? 이명박씨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이것은 보편적 상식을 넘어 명백한 진실에 가깝다.

2007/07/26 01:04 2007/07/26 01:04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한국엔 애초부터 정규직은 없다. 노동을 할 수 있어도 자본이 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노동을 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의 존재는 비정규직이고 언제든지 버림 받을 수 있다. 노동을 하는 자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소외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연대와 투쟁, KTX 승무원들이 현재까지 견디는 방법이다. 오늘 이랜드 사태에도 노동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고작 연대와 투쟁 뿐이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페이소스인 KTX 승무원과 월급 80만원을 지키기 위한 우리 어머니들이 이토록 투쟁을 벌여야 하는 사회는 명백히 재앙이다. 오늘날 이랜드 사태를 통해 노무현 정부와 이상수 등을 규탄해야 할 의무는 우리 모두의 당연한 몫이다. 하지만, 불행이도 이러한 운동적이며 공공적 책임에 무감각한 부류도 역시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노동자들이다. 노동이라 생각하지 않는 엘리트 화이트 칼라들, 취업 공부만 있을 뿐 직업 공부가 없는 대학생들, 여전히 로또로 인생 역전만 희망하며 현실과 현장을 직시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존재 부정이 이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불편만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얼마나 악랄한 패러독스가 가득한 세상인가, 기업과 자본에 봉사하는 법안을 만들어 놓고 일명 '보호법' 이라는 수사로 진실을 가리고 그게 두려워 비정규직을 공권력이란 폭력의 이름으로 때려 잡는 사회가 과연 인간이 살만한 사회인가. 우리는 무엇으로도 투쟁할 수 있다. 이랜드가 130억 헌금으로 모시는 그 잘난 예수보다 더 신성한 노동으로 존재를 규정할 수 있다. 우리의 신성한 가치는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명백한 생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정규직 아니다. 잘 사는 것을 돈 잘 버는 것으로 규정하는 당신, 정규직이라며 안도하는 당신, 잘 생각해보라 당신 정규직 아니다. 안이한 생각을 거두고 자본과 권력의 폭거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이랜드 사태를 주목해야 한다.


천민자본주의 선교하는 이랜드의 계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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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0 22:33 2007/07/20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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