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하진 않지만 사려 깊은 고용주로 인해 나는 어느 회사의 임원이다. IT 회사고 꽤 큰데다가 유명하기까지 하다. 누구는 치사한 일이고 옹졸한 일이지 않느냐 고 하는데 할 수 없다. 내가 주도하는 리쿠루팅에선 경찰 출신은 그(녀)가 의경이던 전경이던 직업 경찰 출신이던 간에 제 아무리 뽐낼만한 경력이 있다해도 절대 내가 다니는 회사에 취업할 수 없을 것이다. 주도하지 않는 리쿠루팅이라도 설득 권고할 생각이다. 나아가 뜻이 있는 협회 임원들과 사석에서 만나 의견을 나누고 같은 생각이 있었거나 어이 없고 울분이 있었던 분들이 계시는지 확인하고 연대할 생각이다. 사람을 뽑을 때는 여러 지표와 기준이 있다. 그 중에도 인격과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양보, 사업을 이끌 수 있는 개인적 신념 등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러한 정성적 평가는 면접관마다 다른데 최근 경찰이 버라이어티하게 보여주는 언행에 비추어 보면 경찰 출신이란 객관적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마땅한 교양, 인간적 양보와 자세가 상실되었거나 결여치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나무랄 때가 없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의경, 전경들은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상관 내지는 물리적 상관이 아닌 상관의 그런 명령 따위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뭐라 불이익을 줄 순 없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격과 관용의 여지는 그들에게도 충분히 있다. 인간이 마땅히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상식 수준의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그저 명령이란 것을 기계적으로 수행할 수 밖에 없다는 변호인데 수용할 수 없다. 그런 인간의 가치관이란 언제나 남의 주장을 따라가고 남의 뒤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는데 열정을 쏟을 부류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어느 정신 못차리는 자본주의 기업에서 뽑아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겠는가. 이익만 쫒는 기업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성 좋은 사람이 팀빌딩 잘해서 성과 내고 인격 좋은 사람이 리더 한다. 따라서 이것은 진보, 좌파, 시위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 빨갱이, 북조선, 인간성 회복, 똘레랑스 하다 못해 이명박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한 일이다.
2009/06/03 00:37 2009/06/03 00:37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회사가 사라졌다.

2007/10/28 21:39 / 생각
고전적인 개념에서 회사는 노동, 토지, 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초기 자본주의의 제조업 중심의 개념에 머무른다. 오늘날 수많은 회사는 자본과 지식으로 이루어 진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지식경영이나 창조경영의 핵심이 바로 지식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자본의 유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하는 전략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회사는 대체로 노동의 개념을 조직의 개념으로 둔갑시킨다. 조직의 개념이란 개인 단위의 노동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측정한다. 조직 단위의 생산력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의 강약으로 계산되지 않고 효율성으로 계산된다. 효율성의 증감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정량의 노동과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도달로 측정하기 때문에 효율성의 증대를 꾀하기 위해서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사용자들의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오늘날의 회사에는 자본, 지식,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움직이는 것은 생산력과 효율성이다. 회사에서 노동은 사라졌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2007/10/28 21:39 2007/10/28 21:39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나는 학번으로는 구공학번이니까, 끼인 세대다. 정치적으로 구분된 386도 아니고 신세대, 엑스세대도 아니면서 베이비부버의 정상을 향한 독주 세대여서 100만명 가까운 동기들과 학력고사를 봤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대 규모는 큰데 딱히 진지하지도 못했고, 반항적이지도 못한 주변 세대라는 점 때문에 다른 세대의 관점으로, 대게는 편의상 이쪽 저쪽으로 편입 시켜주는 세대다. 386세대의 운동적 역사에 대해 끼일라 치면, 넌 겪어보지도 않고, 라며 핀잔이 돌아오고 미시적인 사회개혁(소수자, 양극화, 인권, 양심, 평화 같은 것)에 눈길을 돌리면 그다지 활동적이지 못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다.

특히, 5.18광주민주화항쟁 같은 사안이 그렇다. 나이로 비추어 보아 이성 또는 지적 지각 상태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사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있는데다가 그것을 겪었던 선배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루어 질 수 없는 담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게의 선배들, 자본주의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밝은 선배들은 광주민주화항쟁 같은 사안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미 예상한, 그래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사안들 또는 현안들(소수자, 양극화, 인권, 양심, 평화 같은 것)에 있어서 그들이 취하는 스탠스는 대게가 좋고, 좋지 않음으로 판단 된다. 자본주의에 좋지 않은 것을 너는 왜 그런 걸 모르냐 듯 짐짓 안타까워하는 선배들을 보면 때때로 기가 막힌다.

좋고 좋지 않음으로 세상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논리는 자본주의다. 이런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작동케 하는 민주주의 일 때 이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물론, 그런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돈 잘 벌게 해주면 된다, 그러면 좋고 아니면 좋지 않다, 는 이들에게 명확하다. 스스로 치열하게 돈 잘 버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후배들을 말릴 논리가 바르게 작동할 수 없는 이유도 이 좋고 좋지 않음 이라는 취미 폭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버는 것,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을 미덕으로만 인식하다보니 스스로 모든 잉여를 생산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말이다. 1인의 노동으로 오늘날 생산할 수 있는 잉여는 제한되어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자본 역학, 금융의 흐름, 타인의 잉여 가치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오로지 1인 노동의 결과로만 볼 수 없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버는 행위는 치열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관계적으로 돈을 버는 체제에 있으므로 과정의 옮고 옮지 않음과 소비의 책임이 따라야 하는 반성은 당연한 미덕이어야 한다.  

5.18 민주화항쟁이나 운동적 사회개혁 현안은 절대로 좋은, 좋지 않음 따위로 판단해선 안된다. 물론, 소수자 보호, 평화 구축, 양심 선언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좋은 것은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고 취미로 그치는 일시적인 연민의 상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실은 위험하다. 즉,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좋은 일이다, 또는 옮은 일이다, 라고 판단하는 차이의 엄격한 지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좋은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도 옮은 일은 좀처럼 하기 힘들다. 좋은 일은 굳이 내가 스스로 판단하지 않아도 대중과 트랜드의 판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옮은 일과 옮지 않은 일로 평가하는 행위는 쉽다. 사회와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의 역사는 변화무쌍하다. 그 사회가 만들어 내는 역사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은 진실에 되도록 가깝게 접근하는 일이다. 이것은 제도와 체제의 관점만으로 이끌어 낼 수 없는 일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이니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관점은 고작해야 좋은, 좋지 않은 정도 이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옮은 일이었다고 판단하는 것 만으로 관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광주는 일개 지명과 풍경만으로 그치기 일쑤다. 나와 같이 당시에 이성이 개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에게 있어서 책과 간접 경험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적 사안을 이해하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여행지에서 그저 좋은 풍광과 색다른 문화적 경험에 반해 셔터를 누르는데 정신이 팔리는 '좋은 것'을 위한 행위만으로는 그 고장의 참모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곳에 대해 겸허하고 진지한 개입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곳이 역사적으로 해냈던 진실, 지금 그 순간에도 끊임 없이 만들어 내는 진실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렇다. 겸허해지는 것 이다. 조금 안다고, 조금 읽었다고 까불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사회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사회를 제도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회에 피판적이라고 해도 체제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나는 아직 공부도 덜 됐고 용기도 많지 않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를 까발리고 체제가 왜 바뀌어야 하는지 용기 있기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경외롭다. 게다가 사회 개혁적 현안(소수자, 양극화, 인권, 양심, 평화 같은 것)을 토대로 한 오늘날의 진보운동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매우 용기 있는 논쟁이라 생각한다. 근본적 진보건 계량적 진보건 나는 그런 노선에 대해 어느 줄에 서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노선의 갈등과 토론에 참여 할 만한 됨됨이도 못되는데다가 체제와 사상의 이율배반에도 아직 논리적으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제 중심적인 선배들이 사회를 비판할 때는 고작해야 부동산 시세가 떨어 지거나 주식 투자가 잘 되지 않았을 때이다. 못마땅하니 국회 앞에 가서 피켓이라도 들어야 겠네, 그럼 바뀌냐? 는 사람들의 조롱 따위는 1초도 머리에 머물지도 않는다. 체제를 바꾸자는 것이나 체제 안에서 사회 개혁적 현안을 논의하자는 의견이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싸잡아 친북좌파 쯤으로 규정하고 만다. 부동산과 주식에 매몰된 신체는 광주민주화항쟁을 그저 역사가 옮은 것이라 규정했으니 그렇다고 건성으로 말한다. 하지만, 광주민주화항쟁의 역사가 민주화에 어떤 역할을 했고 이에 연장한 계급적 담론에 이르게 되면 바로 태도를 바꾼다. 그 태도는 친북좌파에 대한 반공적 경계심이다.

역사적 해석이 불가능한 이러한 부류들에게 '좌파는 공산주의' 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내가 번 돈을 게으른 자들(자본주의 방식을 이기지 못한,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에게 뺐기지나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좌파는 공산주의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물론이 실은 좌파에서 나왔다는 친절한 설명은 들어 먹히지 않는 진실에 가깝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적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의 자본을 빼았으려 하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전근대적이며 구린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해하는 것은 자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굴리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옮은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판단하면 그만이다. 왜냐, 돈이 많은 상태가 선한 상태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으로 공산주의를 일깨울 때도 인간의 노동만으로 잉여 가치가 생산되지 않는 시기 였고 바로 그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민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노동 가치가, 나의 노동 임금이 오로지 나만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문제적 지점을 간과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치로서의 자본주의와 사회 매카니즘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나의 자세와 태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 올바른 생각이다. 불행이도 이런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두 사회를 바뀌기 위해 활동가나 운동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에 바른 태도로 진지한 개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러한 사람들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참칭하고 있더라도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최소한 인간이 가져야 할 이성과 존중의 교양이 있다면 그 비판이나 자유의 태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 행위 앞에 취해야 하는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 또는 진보운동을 현실적이지 않은 관념주의로 매도함으로서 현 체제 안에서 안락할 수 있다는 패배주의적 사실을 빨리 인식할 수록 좋다고 가르치는 선배가 많은 현실이 안타깝다.

나는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 잘 모른다. 광주가 여전히 나에겐 여행지에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내 무지의 탓이리라. 그곳이 다른 곳보다 특별나게 진보적이거나 진지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으로 돌아 왔는지는 꼭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왜 죽었을까가 아닌 그렇게 죽을 수 있었을까, 죽을 것을 알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품위와 양심을 위해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지금은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죽어서도 친북좌파나 빨갱이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지켜야할 것을 알고 목숨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광주의 정신을 나 따위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냐만, 그들의 목소리가 악랄한 군사정권에 대항한 진지한 사람들의 특별한 목소리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에서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도 아니고 역시 폭도도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이라는 엘리트들은 진정한 해방구를 만들어 낸 적이 없다. 광주에서도 진정한 해방구를 만들어 낸 얼마간의 시간과 목숨을 바꾼 용기 있는 진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해낸 위대한 일이다.

자유주의 안에서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자본주의에 살면서 사회주의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특별하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이런 특별한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고도로 발달 됐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먹고는 살고 있겠거니, 애써 외면했던 평범한 이웃들의 신음소리다. 광주의 정신은 평범한 사람들도 총을 들고 목숨을 지척 간두에 놓아야 하는 공포 상황을 맞이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정신이 아니다.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였을 뿐이다. 돈으로 신념을 사고, 자유를 사고, 연민을 사는 자본적 정신으로 매몰된 인간성을 구원하는 목소리다.
2007/08/18 00:17 2007/08/1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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