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번도 적빈하게 살아본 적 없고, 한번도 어깨에 쌀포대 이어 본 적도 없는데다가, 거지꼴은 본능적으로 내키지 않은 사람이다. 보고 들은건 있고, 입은 찢어 졌다고 '민중의 노동의 낮은 데로 향하란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최전방에서 제3세계의 어려운 자본을 번거로움 없이 찾아다가 등록금을 대고 기이한 체제와 동족 상잔의 괴뢰 집단으로 북한을 몰아세우는 미국인 급우들과 어울려 시소 놀이를 했었다. 제도권에서 인정 받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잘난체를 하고, 철저한 자본의 시종으로 복종하면서, 체제에 순응하고 굴종하기를 가르쳤다. 이쯤되면 신자유주의적 시민이 아닐수 없다.
돈이 판치는 사회에서 여기 저기 쑤시며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자본교환적 가치가 어떻고 노동이 어떻고 공평이 어떻다니, 또 다른 세계의 지배를 꿈꾸는 떠돌이 이상주의자냐 넌?
그리하여 난 스스로 헐거움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 실은 토론도 최소로 해야 한다는 점에 동참하면서 동시에 이해를 위한 언어의 첫번째 기술은 열거라는 점을 원칙하고 있으니 여전히 패러독스다.
1. 평등하지 못한 담론의 장
내 말이 아무리 개소리라도 대화중에는 절대 비웃을 수 없는 자리, 개소리인줄 알면서도 그 개소리를 억지로 주입시킬 수 있는 자리, 개소리에 대한 반박을 하더라도 논리 정연하지 못하면 논지나 반박으로 받아 들여 지지 않는 노련한 처세와 화술의 장, 불평등할 수록 강한 개소리가 지배되는 대화의 장에 익숙한 사람이 평등한 담론의 장에 참여 하기 위해 갑자기 겸손과 조심스러움의 태도로 임할 수 있을까? 그로인해 평등한 담론 이전에 의식이고 의식 이전에 교양이다. 담론의 장에 계급적 평등이 아닌 교양적 평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그 장이 토론이 되거나 반목이 되거나 한다.
2. 칼라로 구분되는 노동
블루만이 기계 자본에 억압 받는 노동자가 아니다. 실은 사무직과 현장직을 가른 화이트와 블루의 계급성 자체가 수정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져온 것이다. 노동의 신성함이 블루에만 있다는 주장은 이상주의이면서, 그 구분를 두고 은연중에 사무직이라면, 사무직이라 생각하는 화이트라면, 노동이 아니라는 관계 정립을 통해 근로 기준법의 테두리에서 소외시키고자는 음모이거나 무의식속에 침작하려는 의도이다. 화이트? 당신도 노동자다.
3.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자격
노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노동 임금이다. 노동임금이 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잉여자본으로 남아 축적된 자본의 기능이 역시 노동자의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지 않고 지배계급이 수혜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만 늘리는 수단으로 쓰여졌기에 자본의, 자본으로써의 이념이 왜곡되었다. 그로인해 자본은 곧 부르주아지, 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척도, 지배계급의 기득권 등이 되어 노동자는 돈이 없는 사람으로 탈바꿈 되었다. 다시 말해, 없는 자만이 노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되는 희안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4. 노동자이면서 자본가
자본은 노동자의 희생과 피를 먹고 확대된다. 노동자라고 해서 저축하지 말라는 법 없고, 이념 없다. 완전히 화폐가 없는 원시로 회귀하던가 세상을 뒤집지 않고는 노동자가 노동 임금으로 적립식 펀드 넣지 말라는 이념만으로 접근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주의다. 우리가 얘기하는 양극화는 어떤 양극화 인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양극화인가? 목로의 주점에서 떠드는 양극화는 대게가 노동과 자본의 양극화이다. 하지만 그 양극화가 이념적으로 완전히 구분지어 질 수 있는 양극화인가? 양극의 2할을 제외한 나머지 6할은 자신의 사상을 규정하지 못하는 미성숙자들과 노동자이면서 자본가들이 모인 집단인 셈이된다.
5. 노동을 보호할 의지
그럴줄 몰랐던 현재의 정치적 지배계급이 급속도로 그들의 이념을 수정했을 때, 정반대로도 갈 수 없는 좌파 지지층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이며 어디인가? 비정규직 법안을 통해 곧 노동자가 될 계급들이나 화이트 노동자들의 무관심이 들어나면서 그들은 오로지 돈벌 기회만 궁리하게 되고, 그 궁리만을 하도록 모종의 강요가 있다는 점도 함께 간과해 버리면서 새만금과 대추리가 자연스러운 내용이 되버렸다. 이런 재료를 통해 이제 정부는 더 이상 노동, 인권을 보호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노동자는 더 먹고 살기 어렵게 되고 파괴된 환경의 더미에서 인권에 가차가 있을 턱이 없다.
6. 담백한 선택
더 이상 노동자의 지위를 온전히 보전해주지 못하는 지배계급,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고 미래를 영위해야 할 인권을 확대시키지 못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담백하고 솔직한 선택은 계급혁명 뿐이다.
또는 지지층이었던, 그 층에서부터 들고 일어 나야 하는 탄핵 뿐이다.
7. 현안을 바라보는 방법
일단 현안을 보는 교양의 문제다. 미국과의 관계가 사인하라면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 사인할때가 되면 사인하고 마는 태도로 보는 현안이 자유를 말하는 교양인가? 자본의 이해로 FTA 며 자본시장 통합에는 반응도 없던 이들이 거대 자본이 은행 하나 먹튀했다고, 또는 블로그 서비스 하나 인수합병 했다고 급작스럽게 성질을 내는 것은 과잉 민족주의와 다를바 없다. 통계적으로 현안을 파악하는 방법에 익숙할 수록 대중속에 숨는 방법도 가지가지로 빨라지는 법이다. 건강한 시선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가장 먼저 건강한 시선으로 통찰하는 방법은, 통계적으로 현안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좌파라면, 그리고 노동자라면 그렇다.
돈이 판치는 사회에서 여기 저기 쑤시며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자본교환적 가치가 어떻고 노동이 어떻고 공평이 어떻다니, 또 다른 세계의 지배를 꿈꾸는 떠돌이 이상주의자냐 넌?
그리하여 난 스스로 헐거움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 실은 토론도 최소로 해야 한다는 점에 동참하면서 동시에 이해를 위한 언어의 첫번째 기술은 열거라는 점을 원칙하고 있으니 여전히 패러독스다.
1. 평등하지 못한 담론의 장
내 말이 아무리 개소리라도 대화중에는 절대 비웃을 수 없는 자리, 개소리인줄 알면서도 그 개소리를 억지로 주입시킬 수 있는 자리, 개소리에 대한 반박을 하더라도 논리 정연하지 못하면 논지나 반박으로 받아 들여 지지 않는 노련한 처세와 화술의 장, 불평등할 수록 강한 개소리가 지배되는 대화의 장에 익숙한 사람이 평등한 담론의 장에 참여 하기 위해 갑자기 겸손과 조심스러움의 태도로 임할 수 있을까? 그로인해 평등한 담론 이전에 의식이고 의식 이전에 교양이다. 담론의 장에 계급적 평등이 아닌 교양적 평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그 장이 토론이 되거나 반목이 되거나 한다.
2. 칼라로 구분되는 노동
블루만이 기계 자본에 억압 받는 노동자가 아니다. 실은 사무직과 현장직을 가른 화이트와 블루의 계급성 자체가 수정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져온 것이다. 노동의 신성함이 블루에만 있다는 주장은 이상주의이면서, 그 구분를 두고 은연중에 사무직이라면, 사무직이라 생각하는 화이트라면, 노동이 아니라는 관계 정립을 통해 근로 기준법의 테두리에서 소외시키고자는 음모이거나 무의식속에 침작하려는 의도이다. 화이트? 당신도 노동자다.
3.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자격
노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노동 임금이다. 노동임금이 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잉여자본으로 남아 축적된 자본의 기능이 역시 노동자의 풍요로움으로 연결되지 않고 지배계급이 수혜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만 늘리는 수단으로 쓰여졌기에 자본의, 자본으로써의 이념이 왜곡되었다. 그로인해 자본은 곧 부르주아지, 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척도, 지배계급의 기득권 등이 되어 노동자는 돈이 없는 사람으로 탈바꿈 되었다. 다시 말해, 없는 자만이 노동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되는 희안한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4. 노동자이면서 자본가
자본은 노동자의 희생과 피를 먹고 확대된다. 노동자라고 해서 저축하지 말라는 법 없고, 이념 없다. 완전히 화폐가 없는 원시로 회귀하던가 세상을 뒤집지 않고는 노동자가 노동 임금으로 적립식 펀드 넣지 말라는 이념만으로 접근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주의다. 우리가 얘기하는 양극화는 어떤 양극화 인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양극화인가? 목로의 주점에서 떠드는 양극화는 대게가 노동과 자본의 양극화이다. 하지만 그 양극화가 이념적으로 완전히 구분지어 질 수 있는 양극화인가? 양극의 2할을 제외한 나머지 6할은 자신의 사상을 규정하지 못하는 미성숙자들과 노동자이면서 자본가들이 모인 집단인 셈이된다.
5. 노동을 보호할 의지
그럴줄 몰랐던 현재의 정치적 지배계급이 급속도로 그들의 이념을 수정했을 때, 정반대로도 갈 수 없는 좌파 지지층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이며 어디인가? 비정규직 법안을 통해 곧 노동자가 될 계급들이나 화이트 노동자들의 무관심이 들어나면서 그들은 오로지 돈벌 기회만 궁리하게 되고, 그 궁리만을 하도록 모종의 강요가 있다는 점도 함께 간과해 버리면서 새만금과 대추리가 자연스러운 내용이 되버렸다. 이런 재료를 통해 이제 정부는 더 이상 노동, 인권을 보호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노동자는 더 먹고 살기 어렵게 되고 파괴된 환경의 더미에서 인권에 가차가 있을 턱이 없다.
6. 담백한 선택
더 이상 노동자의 지위를 온전히 보전해주지 못하는 지배계급,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고 미래를 영위해야 할 인권을 확대시키지 못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담백하고 솔직한 선택은 계급혁명 뿐이다.
또는 지지층이었던, 그 층에서부터 들고 일어 나야 하는 탄핵 뿐이다.
7. 현안을 바라보는 방법
일단 현안을 보는 교양의 문제다. 미국과의 관계가 사인하라면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 사인할때가 되면 사인하고 마는 태도로 보는 현안이 자유를 말하는 교양인가? 자본의 이해로 FTA 며 자본시장 통합에는 반응도 없던 이들이 거대 자본이 은행 하나 먹튀했다고, 또는 블로그 서비스 하나 인수합병 했다고 급작스럽게 성질을 내는 것은 과잉 민족주의와 다를바 없다. 통계적으로 현안을 파악하는 방법에 익숙할 수록 대중속에 숨는 방법도 가지가지로 빨라지는 법이다. 건강한 시선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가장 먼저 건강한 시선으로 통찰하는 방법은, 통계적으로 현안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좌파라면, 그리고 노동자라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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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후예 2006/05/04 02:55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술자리에선 좌파잖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