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인가?

2008/02/16 17:23 / 생각
한국노총의 수상한 행보는 대선 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경영 견제, 노동자 권익보호와 같은 상식적인 정체성에 반동적인 한국노총의 비즈니스 프랜들리화는 단순한 줄서기나 사상적 변질로 이해될 수 없는 깊은 계산이 깔려 있는 듯 하다. 한국노총을 위한 변명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계 극복이 요원한 운동적 노력을 접고 반동적 정치화를 통한 현실 변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잠시 영혼 따위도 접어 두자는 것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나가는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 나아가 총선을 겨냥한 한나라당 후보 지지 선언은 이러한 반동적 맥락을 통한 그들만의 깊은 인내라고 보여진다.

단, 그러한 계산이 통할 때 오늘의 반동이 내일의 혁명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짐짓 상식 수준의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은 계량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용서가 안되는 부분으로서 타협을 통한 체제 변화는 좌파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자본과 권력의 욕심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용에 대한 도덕적 노력에 있지 않고 사용 가능성에 대한 반영구적 착취에 있는데도 이를 수용하는 태도야 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적인 측면에서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이 이러한 양심보다 가치 전가와 반동적 인내를 통해 정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경고한 노동조합의 권위주의와 권력화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명박 지지선언을 한 한국노총은 이것을 '정책적 연대, 정책협약' 으로 규정하고 협약을 이행하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노정간 정기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좀 더 어느 방향으로 프랜들리해지지 않는 이상 결론적 협의는 불가능한 형태가 바로 이러한 연대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따라서 한국노총은 이용득 위원장이 "한국노총은 조합이 주인인 조직, 주인이 결정해준 대로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 이라는 해묵은 다수결 원칙을 액면으로 깔고 상상할 수 있는 이면으로서 손쉽게 제도권 정치권력에 진입하기 위한 포석을 떠올릴 수 있다. 대선 직후 이용득 위원장의 한국노총 위원장 불출마 선언이 이러한 상상력에 신빙성을 부여 한다고 볼 수 있다.

제도권 안에서의 변혁은 세력화가 정치적 무기가 된다. 특히, 소신과 정책적 결의가 없는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세력화는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앞선다. 제공과 착취의 계급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의 투쟁을 제도권 안으로 투입시키기 위해 세력이 아닌 정책적 타협을 시도한 한국노총의 발상을 시대 소명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세력화를 배제하고 접근한 노동자들의 순진함이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몇몇 노동조합 간부들을 정치권에 흡수시켜 자신들의 정책을 도입, 추진하겠다는 의지로서 결과적으로 세력화를 무시한 협소한 권력지향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주종적 병폐인 지역주의,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체에 대한 권력 열망, 정책적 대타협을 빌미로 한 전시정치의 극명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하며 치부를 환하게 조명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질곡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한다." 이를 위한 제도권 권력의 쟁취가 필요함을 선언한다. 민주노동당은 하나의 세력이다. 최소한 이러한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체제 진입은 새로운 체제 즉,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이란 뚜렷한 가치를 천명하기 때문에 엄연한 세력이고 구체적인 당원과 관념적 지지세력을 통해 세력화 되었다. 최소한 한국노총이 어떠한 '질곡' 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몇몇 기득권 편입론자들을 우선적으로 권력화시키는 치졸한 정치 메카니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지만 이미 포석은 집을 짓고 말았다. 한국노총의 이러한 행위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악랄함으로 두고두고 피력될 것이다. 질곡의 파괴와 희망적 건설 의지가 자기 실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체제적 안주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선언한 볼상 사나운 '짓'으로 규정할만 하다. 하지만 이는 정치가 아니라 "처세" 즉, 한국사회와 정치의 대표적인 패단과 결탁한 처세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

한국노총의 악질적인 결탁은 지금껏 한국사회의 주류가 걸어온 길이고 그 길의 원심력에서 튕기지 않으려는 매카니즘의 본질과 마주하고 있다. 자신의 실존적 의지를 연구하거나 사유하지 않는 사회에 민주주의나 공화주의 따위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자리 잡혀 있을리 없고 따라서 그것을 기대하는 정치 세력조차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민주화 이후에 직접 선거는 지역 재래시장을 돌아 다니며 의미 없는 악수와 포옹을 통해 "아는 사람 만들기 정서"로 추락했고 이런 식으로 접근해도 쉽게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들의 얕은 정치 의식을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의 질긴 생명력 때문에 완전히 변질 되었다. 현학적인 계급적 성찰은 접어 두고서라도 자신들이 필요한 물질, 보호받아야 하는 생존 환경과 인간적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다만, 손안의 따뜻함,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아는 사람이란 이유가 개인적 정치 사유가 되는 의식의 본체를 지닌 바보들의 대표성을 우리의 주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 한국사회의 정치적 주류의 길이었다. 이러한 주류들의 정책과 메니패스토는 형식적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봉건적인 지역주의를 정치인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발생이다. 따라서 한국노총은 봉건적 주류의 길에서 그들이 버린 '질곡의 극복' 을 마술적으로 해보이겠다고 말하는 "판타지 집단"인 것이다.

오늘날의 갈등은 자기 자신과 자신, 자신과 자본, 사람과 자본의 이항대립들에서 비롯된다. 소위 엘리트 대 민중 이라는 해묵은 계급대립은 종결되었다. 이러한 종결의 중요한 관점은 불행이도 대립의 해소로 부터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립의 주체인 엘리트는 지식 엘리트, 노동 엘리트 등으로 각개 분활되어 사회전반적인 엘리트의 자세와 비판적 계몽에서 벗어나 그들의 활동 근거 내지는 활약 범위에서 기득권의 확대를 노리는 객체로 주저 앉아 버렸다. 민중은 민중 대로 오래된 염원인 "잘사는 생활" 의 방향을 관념적 엘리트가 아닌 활동 범위내의 가깝고 구체적인 엘리트의 방향에서 찾고 그것을 생활의 비전으로 삼아 버렸다. 따라서 엘리트와 민중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경쟁"할 뿐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 설정이 상호간의 기여와 담론을 통한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력한 것"에 의해 설정되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란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자본은 많은 자와 적은 자의 갈등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광범위한 분야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로 자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자본은 부와 가난에 동시에 작용하여 동시에 같은 믿음을 생산하는 놀라운 능력의 총체이면서 스스로 유물적이지만 실체적 물질이 아니라 인식적 믿음을 제어 하고 전염시키는 유기체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가난은 언젠가 돈이 많게 될 것이란 생각을 끊임 없이 주입 받는 "자본샤머니즘"을 불러 일으킨다. 부자는 경멸해도 자본은 숭배한다. 자본의 추구라면 정치나 민주주의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는 존경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을 얻었을 때 받을 경멸은 믿음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잘 살 수 있는데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상점화의 맥락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 사회가 이런 믿음을 조장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에 견주어 이른바 "그보다 못한 자신", "실패한 자신", "부자이지 못한 가장" 으로 자발적인 폄하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과 인간적 본질과의 대립에서 대중은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만성적 패배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피곤함은 자본의 유기적 특성 뿐만 아니라 정치 세력에게도 유용한 침투 경로가 된다. "부자일 수 있는 왜 더 노력하지 않는가" 간단한 구호를 밀어 넣으면 대중은 알아서 작동한다.

자본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을 받은 세력화된 정치 집단이 동력을 제공하여 반응하는 사회속에서 자본의 헤게모니로 인한 폐해와 자본이 복속한 인간정신을 증언하는 행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더 이상 인간을 대상으로 전진하지 않는 "자본민주주의" 의 해괴한 기치만이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소통하지 않는 유령의 상태는 마르크스가 우려한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소외가 드디어 "완전한 고립"의 상태에 접어 들었음을 신호한다. 이것은 명백히 "미래가 우리 사회에 보내는 경고" 다. 하지만 이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라 엄중한 선택이어야 한다. 더 이상 역사와 민족을 들러리 세우는 신화적 재물이 아닌 사유와 고독을 통한 결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최근 이른바 진보의 세력화였던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한국노총의 보수우파 지지선언은 어떤 선택과 어떤 사명에 의해 극명하게 갈라진 현상이란 점에서 조명해야 할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물론, 역사를 관통한 찬란한 반사가 아니라 바로 현재 시점을 대하는 거울이란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노총이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전제로 하였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 극복의 고육지책으로서 승리한 보수우파 정치권에 줄을 대고 노총출신 인사의 정계 진출을 꾀했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돌파가 아니라 흡수가 될 것이다. 한국정치사를 조금이라도 음미한 사람이라면 현재의 정치권이 그러한 역사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다시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한국노총의 행보가 얼마나 진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인지, 진보가 아니면서 진보인 척 한 노무현의 임기가 끝나면서 등장한 "제2의 노무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노총은 내가 누구인가? 나아가 "우리는 무엇인가?" 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이유에 더 이상 응답을 거부하면서 내면적 분열의 길 즉, 스스로 소외의 길로, 완전한 고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민중의 조난 신호는 간증으로 해결하고 자본의 부름은 하느님의 계시로 설교하는 한국개신교의 길과 거의 다를바가 없다.

선택의 범위에서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어떠한가. 평등파는 아니지만 다른 평등파들과 함께 탈당을 감행한 나는 왜 총선을 코앞에 두고 내포만 한채 아직 탈당하지 않는 심성정, 노회찬의 여전한 잔류에 조급함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가. 두 의원의 탈당을 통해 급속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전진시키기에 앞서 더욱 급한 민중적 당면 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명백한 경고를 묵살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한미FTA" 이다. 국회비준처리를 앞둔 한미 FTA 를 대하는 교양 있는 사람의 자세, 나아가 당파를 떠나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진보 진영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한미FTA 란 사안 만큼 보수와 진보, 시장주의와 사회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가르는 요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첨예하고 시대 변혁적인 내용들이 숨어 있는데도 이를 온몸으로 맞닥드릴 대게의 민중은 그 어떤 조항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 한미FTA 를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따른 선진국 진입으로 생각하는 찬성론자들은 글로벌이란 의미 조차 미국으로 한정시킨 오류에 빠져 있다. 국회 비준을 서둘러 미국 의회가 비준을 할 수 있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철 없는 논리를 펼 수 있는 것도 글로벌과 미국을 동격으로 논 근본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미FTA 가 우리 경제에 가져올 악영향에 대해서는 두루 살피지 않을 만큼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미FTA 를 하나의 경제협정으로 봐야 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미FTA 는 태생과 전개는 "토론의 부재" 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진할 때나 그것이 만약 상호간에 비준되어 발효가 되더라도 철저히 반민주적인 토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그저 글로벌 경쟁력을 키운다는 앞뒤 자른 허울 좋은 선전만 되풀이 함으로서 민중들이 겪고 견뎌야 할 어떤 것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공공재를 민영화 시키고, 시켜야 하는 법률적 강제성 마저 띄고 있는데도 정부는 시장 경쟁을 통해 경쟁력과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답만 내놓을 뿐이다. 이것은 현정권과 차기정권이 하나의 거대한 커넥션을 미뤄낸 것을 짐작케 한다. 즉, 큰정부의 노무현은 정부가 해야 할 분배와 조정의 정의, 공평한 공공재의 역할 등을 시장의 기능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인 정부로 볼 수 없고 이를 이어 받은 차기정권의 작은 정부는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정책적 조치라는 점이다. 즉, 시장에서 알아서 할테니 굳이 정부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이 되지 않으면 주민등록등본도 민간 기업에서 적정하다는, 그리고 그들이 믿을만 하다는 시장이 정한 수수료를 내고 띄어야 할 판으로 속도 좋게 가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소위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자들이 충정 어린 민족통일, 민족해방을 주장하고 대동단결 투쟁을 하더라도 한미FTA 가 비준되기만 하면 동서독의 통일 과정인 경제 통합, 정치 통합의 본보기적 통일 과정을 절대로 거칠 수 없게 된다. 한미FTA 가 비준된다면 남한과 북한을 절대 국가 대 국가로 보지 않는 민족주의자들도 어쩔 수 없이 남과 북을 국가 대 국가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한미FTA 가 비준되면 남북한의 교역이나 개성공단을 통한 대외교역에서 관세나 한미FTA 가 정하는 통상 절차 없는 교역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독일이 GATT 를 통해 동서독의 교역을 민족교역으로 인정 받고 관세나 기타 통상 절차 없이 경제 통합을 이뤄낸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대미 관계가 핵폐기만을 골자로 하기 보다는 개방을 통한 시장교역에 까지 확대 될 경우 북미간 수교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테면 북한의 WTO 가입을 예상할 수 있고 이 경우 남한과 북한에 있어서 통일은 구호와 염원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일각에서 제기되는 남북FTA 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 또한 민족통일의 관점에서 이뤄질까? 천만에 말씀이다. 이미 한미FTA 가 그러한 상황까지 모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한가한 민족 염원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상정, 노회찬의 선택을 조급히 기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보다 이들의 반대투쟁이 지닌 정당한 이유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있기 때문에 반대는 반대를 위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는데 있다. 대중 전반의 이러한 스탠스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무관심과 지식인들의 비판적 책임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경부 운하를 건설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천연덕스럽게도 학문적 논리인 양 얘기할 줄 아는 박석순이나 추부길과 같은 그릇된 지식인들처럼 한미FTA 를 찬성하는 지식인들 또한 신자유주의의 수혜자로서의 논리로만 대중을 계몽하려 한다. 한미FTA 를 추진할 경우 이익이 안되는 것들만 열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것들을 파악하고 수혜 받을 것들을 미리 준비해 놓은 "이기적인 자본지식인" 들이 그러한 계몽에 적극 나선다는 것이다. 그들의 계몽은 유효 적절해 보인다. 중산 부루조아 계급은 자신들도 수혜 대상일 것이란 기대를 하고 무산 프롤레타리아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하루 하루를 사는데 정신이 없다. 두 계급의 격차가 커질 수록 "혁명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시간에 도달" 하는 역사적 증명에 가까워질 뿐이다. 자본은 혁명을 허락하는 이념만큼 낭만적이지 않고, 자본과 시장을 극복하지 못한 절망의 시간은 공멸을 의미한다.

숭례문의 전소 사태를 보며 문화나 문화재에 대한 공공성이나 보존의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분노의 대열에 동참한다. 후대에게 물려줄 어떤 사명을 들먹거리지만 불행이도 사건을 관전하는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를 구성하고 지배한 생활 방식은 성장과 개발 중심이었다. 문화재는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들에게는 어느 일요일 도심에서 펼쳐지는 시위의 불편함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안락함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에 대해 관심을 거세했기 때문에 이 사회의 문화재는 도시 한복판에서 불에 탈 수 있는 것이다. 관심과 관계의 확장에 실패한 지식과 인식의 덩어리는 분노의 지점조차 찾지 못하고 오로지 신나에 불을 붙힌 한 노인에게 쏟아진다. 우리는 불에 탄 문화재와 시위로 교통 불편을 겪을 때나 똑같은 분노를 표출한다. 명백히 우리 사회가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알고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나날이 고뇌하였다면 안타까움과 분노는 분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가난의 고통, 상처투성이의 야만적 시대를 살아온 기성 세대가 아무것도 모르고 물질적 풍요와 자유의 열매를 따먹는 현세대와 대화를 거부하면서 부터 다시 그 가난과 야만을 물려주려는 어떤 복수의 구도처럼 보인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냐만, 세대간의 소통 단절은 이미 오래전 부터 진행되어 온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들어야 할 역사" 를 듣지 못하고 시대가 달려 가는 데로 달려갈 뿐 왜 달려 가야 하고 왜 달려 가도록 하는지,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옥죄는 "정체성의 부재"를 낳았고 시장자본주의의 지배에 손 쓸 수 없는 사회의 근거로 남았다.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왜 낙산사를 태우고도 숭례문을 태우는 짓이 반복되는지를, 수많은 민중의 삶이 초토화된 FTA 의 실제 상황을 보고도 한미FTA 를 추진하는 정권과 국회가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지켜야 되고 물려 줘야 할 것이 남았는데도 그것을 파헤쳐서 성장 개발해야 한다는 경부대운하 찬성 지식인들의 말도 안되는 논리가 활개치는지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다른 세계에서 실패한 역사를 끌어 와 다시 실패를 재연하는 한국사회의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한번쯤 고민해 보았다면 언제나 성장과 개발만을 강조하여 곧 당도할 것만 같은 선진국을 거들먹 거리는 정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수사만을 일삼는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 선진국이 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선진국이 되는가" 이다. 이것은 성장을 통한 선진이 아닌 "성장 없는 선진" 이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지켜내야 하고 우리의 사상과 생활을 지배하는 자본으로 부터 인간의 "자율"과 인간들간의 "연대" 를 찾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우리는 바닷가에 밀려온 검은 기름때를 온몸으로 막아낼 수 있는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길래 우리가 지켜낸 것을 자본과 자본의 하수인인 기업과 정치인에게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우리 사회와 주위 환경을 잘 살펴 보기를, 우리는 누구이며 또 무엇인가.
2008/02/16 17:23 2008/02/16 17:23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165 대 165, 민주노동당 한 지역구의 국회의원 경선 후보 선거 결과다. 13% 대의 정당 지지율을 얻고 있으면서도 겨우 3% 지지로 마감한 민노당의 이번 대선 결과 만큼이나 신묘한 숫자다. 초등학교 반장 투표에서도 저런 숫자는 무승부, 재투표를 의미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재선거를 하지 않고 '규정에 의거하여' 당원 번호가 빠른 후보를 당선시켰다. 그나마 빠른 민주주의 의사결정 체제 중 그나마 빠르다는 쪽수제도의 동률 처리 방안을 겨루기판의 체중 달기로 마무리한 셈이다. 아무도 군소리 하지 않고 재선거를 해도 무당 칼에 쩍 갈라진 숫자에 혀를 내두를 참인데 당원 번호 순이라는 규정집을 꺼낸다. 민주노동당은 그만큼 관료적인데다가 한나라당도 하는 일을 민주노동당도 똑같이 하고 당규정을 내세워 간단히 제압하려 한다는 점이 놀랍다.

종북주의란 무엇일까? 즉 북한과 정서적 교류를 너무 심하게 해서 명백히 비판 받아야 할 북한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 이 종북주의 때문이란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어떤 행동이란 핵실험 같은 것을 말한다. 민노당 내에서의 패권주의란 무엇일까? 다수파인 자주파는 이번에도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내었다. 당의 헤게모니는 오래전부터 자주파가 독점하고 있었고 이러한 패권적 경향을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민노당의 대선패배에 대한 논란의 핵심이고 쇄신의 방향에 큰 담론의 틀이다. 민노당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당원의 입장에서 이렇게 민중과 철저히 괴리된 담론의 틀로 사회주의경제체제의 구현이나 이를 위한 집권을 이룰 수 있을 지, 어둡기만 하다.

지독한 일이다. 민중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해도 권영길을 더 이상 민노당의 얼굴로 보지 않는데다가 극단적으로 민노당은 지지하면서도 권영길은 지지 하지 않는 올드패션의 진부함을 논하는데도 당은 해석 불가능한 언어로만 정치를 하려고만 한다. 이미지 정치를 비난할 줄만 알았지 정작 이미지와 정갈한 구호로 마음을 쓸어 담는 민중들의 쓸어 담지는 못했다. 결국 패션화를 경멸만 하다가 문국현에게도 뒤진 지지율에 당도하고도 내부 헤게모니적 노선 투쟁에 의례 클래식컬한 언어를 동원하여 그것들을 유희하는데 시간가는 줄 모른다. 최소한 세상을 바꿀 구호 정도는 회자 되어야 진보 정당의 진보화가 계몽되었을 터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뀔 수 없다는 원초적 진보에 대해 먼저 알아 버린 것은 민노당이 아니라 민중이었고 이를 반성하는 쇄신의 틀이 이른바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기댄 정파의 혁신이라는 것이 민노당의 생각인 것 같다.

최근에 이와 같은 '견 풀뜯어 먹는 반성의 소리' 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민중은 사람을 바꿔 정치와 세상을 바꾸겠다며 삶을 송두리채 시장에 내 놓으라는 이명박을 찍는데 스스럼이 없는데 자주가 먼저인지, 평등이 먼저인지 논의 한다는게 견 풀뜯는 소리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물며 자주며 평등을 자신들의 정체성이라고 못대고 치더라도 자주와 평등이 풀뜯는 소리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로 나와야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이제와서 종북주의와 당내 패권주의가 반성의 틀에 견주어지는 마술적 자세와 언어 도단은 민중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급기야 분당을 거론, 아니 견 풀뜯는 소리는 더 이상 못 듣겠다며 대놓고 깨지자는 분위기다. 차라리 반성을 못할 부류들이라면 깨지고 깨지는 것이 맞겠다. 한나라당이나 통합신당이 하는 구차스러운 협작 뿐만 아니라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와 조직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치졸성을 들어낸 마당에 다시 민중을 얘기하고 진보를 선전할 총선의 상황이 벌써부터 쪽팔려 온다. 도대체 민중을 걱정하던 당이 맞던가.

165대 165, 그리고 당원 번호 순이라는 이 당췌 당원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자세가 안되어 있는 당의 규정일랑 한나라당에 헌납하길 바란다. 자주파는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연구하며 당과 당내의 정치를 위한 당을 만들어 북풍에 기대어 선거를 치루던 구호를 선전하던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 민중적 언어와 계몽에 힘쓰지 않고 자신들의 민주화 투쟁 경력과 지식을 기득권 삼아 '잘난체 하는 인사'는 현재의 민주노동당에 남겨 두길 바란다. 오래도록 민주주의를 연구하도록.

이 감동 없는 한해를 마감하며, 내년엔 민주노동당을 넘는 민주노동당을 기대한다.

2007/12/31 23:07 2007/12/31 23:07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언어, 계몽, 조직

2007/12/28 18:02 / 생각

정책을 보고 선거에 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가 이미지로 가벼워지는 현상을 개탄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이명박은 정말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의 대게는 이명박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무현이 싫어서가 해답이다. 이를 통해 대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짐짓 이러한 장미빛 미래의 담보가 이미지와 반정부 정서에 의해 형성된 마당에 정책이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이명박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진보의 이데올로기 찬탈을 그야말로 끈기 있기 주입했던 보수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진단하는 상황이다. 당선 됐으니 정책을 재검증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개이치 않는다. 어차피 이제와서 정책을 살펴봐야 별 수 없는 노릇인데다가 민주주의의 작동은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의 작동이라 생각하기 시작한 민중들의 집단적 행동에 토를 달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 술자리에서도 열심히 논의 했던 것이지만, 중요한 건 계몽, 그리고 계몽을 주도할 언어, 언어를 공유할 조직인 셈이다. 하지만 계몽도 언어도 조직도 모두 어려운 하수상한 시절이다. 진보라는 개념은 거의 비틀어졌다.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비정규직이 되어 88만원세대의 반열에 들어 있어도 제도적 거부를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이 사회에서 낙오됐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자괴와 더 열심히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는 긴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계몽의 주제와 주체는 이 자괴와 긴장만으로 뭉친 덩어리를 해체하고 다시 재조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몽도 폭력이라며 나자빠질 드라마적 언어 비판을 일삼는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의 자기 중심적 패션은 더 이상 시대를 관통할 수 없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대선 진단은 옳다. 하지만 언어의 개발을 위해 언어에 집중하는 이유가 계몽에 있지 않고서는 합목적적이지 않다. 게다가 운동적 방식도 불특정 계층과 동시대의 모든 대중에 있어서도 생산적이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장미빛 미래에 좌절하고 아무것도 인정 받지 못하는 세대를 새롭게 조직해야 하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절한 세대에게 저항과 투쟁의 진보적 언어로는 세대를 조직할 수 없다. 이것은 좀 더 이미지적인 메시지여야 한다. 흔하고 어떤 대화에도 불현 듯 끼어 들어 유머가 되거나 상처가 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어 뿐만 아니다. 실은 세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대를 분리시킨 지난 세대의 잘난척에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건 아주 간단하다. 운동해보지 않은 세대를 배제 시킨 잘난척이다. 이로 인해 세대는 다음 세대와의 교감을 중단했고 세대를 돌보지 않았다. 단절된 세대는 그만큼 좌절했고 사회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셈이 되었다. 연대는 보증처럼 부정적 정서를 함유하게 되었고 나만 책임지고 나만 잘되면 되는 세대가 되었다. 서로 서로를 보듬어도 지난 세대가 만들어 놓은 단절적 사회구조를 연결하거나 뚫어 내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세대는 각개로 움직인다. 누군가는 파산할 것이고 그 만큼의 잉여를 바라며 버틴다. 센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놈이 센 놈인 영화적 언어가 세대의 담론에 방점을 찍는다.

언어, 계몽, 조직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이다. 80년대 좌파적 언어다. 현실은 이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낭만적 개념이 저항과 투쟁을 대변해야 한다. 이를 만드는 일은 현재의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현재 진보가 단절시킨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순서를 논하자면 조직이 먼저다. 사실, 언어는 기존 세력에서 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에서 할 일이고 계몽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흘러야 한다. 이제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라 해야할 문제가 남은 셈이다. 장미빛 희망인지 미래인지... 선거는 끝났다. 이제 조직이 그것을 만들 시간이다.

2007/12/28 18:02 2007/12/28 18:02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어디 강의를 갔다가 혹시 NL 계열이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 적이 있다. 이른바 386 의 거대담론인 PD, NL 노선이 여전히 진보라는 범주 안에 늠름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나보다. 노선이 분명하던 시대에는 노선 갈등이 주된 담론이었을 터, 헤겔의 변증법이 현실적으로 힘쓸 수 없는 지경에서 PD, NL 은 지난한 분열을 겪었지만 오늘날 그것과 하등 관계가 없는 나에게 까지 예의 없이 다가온다. 이른바 386 의 저열한 변질을 조망하게 되었지만, 사람은 죽어도 노선은 살아 있는 셈이다. 물론 노선이 가치로 전환된 시대에도 PD, NL 을 운운하는 공룡 같은 사람들이 있고 이러한 화석 담론을 활성화시키는 이유에 기득권이 자리하고 있는 꼬까운 기분이 아니 들지도 않는다. 여하튼 이상주의자, 관념주의자로 제도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었고 그것이 마치 레닌의 쏘비에트 혁명과 견줄만한 다수의 열정적 무리로 집합되면서 이른바 "빠"의 시대를 열었다. 이데올로기적인 '노선'에서 자본주의적인 '가치'로, 정보혁명을 통한 문법으로서의 '빠' 까지 이상과 정체성의 감수성은 표정만 달리했을 뿐 갈등은 여전하다.

해방 후 좌우의 노선은 여전히 대립적이다. 이런 정치적 노선은 현재까지 이견이 없다. 다만, 우익은 현실 정치의 동반자였지만 좌익은 재야 였다는 사실, 그로인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통해 재야의 정치가 현실의 갈등과 대면했을 때 겪어야만 했던 혼란은 이른바 노선의 진지함이 대중의 이해관계 또는 정치의식과 너무 외람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해탈이 노선 변질의 명분이 될 수 없지만, 그 명분이 정당하다면 노선의 진지함도 포기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개혁진보라는 노선이고 소위 짝퉁 논란이다. 적당히 가격이 매겨진 짝퉁은 진품 만큼 오래 가고 면밀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대게의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핸드백 원리에 비추어 좌파의 개보를 잇는다는 개혁진보의 짝퉁성은 그만큼 오래가고 매혹적이다. 이런 짝퉁 논란이 지리하긴 하지만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은 좌파의 진정성이 퇴보 되었다기 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좌파 노선으로 괘도를 옮긴, 즉 진지함을 걷어낸 탈권위주의로의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노선은 죽고 사람은 살리고 본 정치적 조류는 우익에 가까운 좌익을 형성하게 되었고 참여정부 정도면 충분한 빨갱이임을 유권자의 이성에 각인 되었다. 이에 진보는 의레 개혁 안에서의 개혁, 우익에 가까운 좌파적 개혁을 추구하고, 노선이 죽은 지식인은 체제의 연관성은 고려치 않고 이러한 개혁의 진보성에 대한 패러독스만 선언하는 꼴이 되었다. 더 많은 자기 혁신과 체제 저항을 통해 얻어 질 수 밖에 없는 사회개혁의 스팩트럼을 서너단계는 줄여버린 결과를 초래한 정치적 개혁진보는 그로 인해 짝퉁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 개혁, 진보, 또는 개혁진보라는 단어는 결코 진정성 있는 진보의 감수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개혁진보가 집권 후 걸어 온 노선은 교묘한데다가 교활하기까지 하다. 오죽했으면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정리까지 했을까. 따라서 여러 정책들은 패러독스가 아니라 개혁진보의 괴이한 노선을 대변하는 것으로 진정성 그 자체이다. 즉 스팩트럼을 줄이기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진보를 개발, 성장, 가치변조와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유의미로 대입하기 위한 시도들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미FTA 와 통하며 양극화를 해소한던지, 파병을 통하며 평화를 추구한다던지, 대추리, 새만금을 통하며 관용과 환경을 설득하는 자세가 모두 그러하다. 이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라 사상이 없는 노선의 상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서 교활하다. 이제 정권재창출의 운명 앞에서 개혁진보는 정치적으로 단물이 빠질 만큼 빠진 진보의 이름을 바꿀 태세다. 정책실패가 구체적으로 들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빠르게 진행된 민심이반에 가장 적절한 대처는 무엇보다 바꿔타기이며 필요한 건 선전정치의 새로운 구호이다. 이른바, 중도, 실용의 기치인데 개혁진보의 노선 아닌 노선의 요로에는 이미 중도실용이 저변에 깔려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교묘하다.

한국정치는 대척점의 역사, 정체성의 정,반에서 활성된 갈등의 소산이다. 역사의 동력이 이 정, 반의 비판과 동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은 노선의 역사이다. 원본과 복제의 시대를 넘어 복제와 시뮬라크르의 현대 사회에도 노선은 존재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사필귀정한 원칙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짝퉁은 복제와 다르고 대신 시뮬라크르와 닮아서 원본이란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에는 명분이나 명분의 근거인 노선이란 것이 있는데 개혁진보는 명분은 있으나 노선이 존재하지 않는, 원본 없는 이미지만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된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구호는 알지만 비전은 모르며 절차는 알지만 사상은 모르는 매카니즘만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매카니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개혁진보세력이 중도를 향하거나 더욱 해괴한 '불온자유주의' 같은 노선을 통해 재집권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빠' 정치의 시대를 연 것도 개혁진보세력이며 개혁진보를 그 이름 자체로 쓸 수 없는 짝퉁으로 전락시킨 것도 그들이다. 대립의 각 위에서 이합집산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중도를 통해 '빠' 를 집단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신념은 여전히 해괴하다. 즉 중도가 정권을 창출하는 한국정치사의 일대 사변을 모반하는 개혁진보세력의 행보가 그래서 매카니즘적일 수 밖에 없다. 맥락 차원에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물론 중도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대중의 일반적 정치의식 수준을 과대평가하고 좀 더 넓은 정치 스팩트럼의 창조를 포기한 개혁진보세력만의 황홀경일 뿐이다. 이러한 황홀경 때문에 진보로 향하지 못하는 민중들이 생겼으며 이에 대한 노선상의 성찰이나 책임이 없었던 고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보수화 되어 가는 현실을 좌시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개혁진보세력이 집권 기간 동안 보수는 보수요, 진보도 보수, 부드럽게는 실용보수라는 수정 노선에 복무한 탓에 오늘날 가장 악질적인 사회 보수화에 기여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이 책임을 전가도 희생양도 만들지 못하고 맞닥드린 정권재창출의 운명 앞에서 그들의 히든카드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을 수 밖에.

자기혁신과 체제개혁은 같은 말이다. 게다가 진보적인 소신이다. 이러한 진보적 소신을 가졌던 수많은 민중들이 진정성 있는 진보로 가는 요로를 막아선 개혁진보세력 때문에 다시는 진보로 갈 수 없는 지경에 도달 했다면 이는 한국정치의식의 완전한 퇴보에 기여한 것이다. 짝퉁의 구린 냄새는 여전히 매혹적인 겉모습 때문에 아주 가까이 가지 않고는 맡을 수가 없다. 이들의 트랜스포머적인 변신은 정치공학을 새로 쓰고 그 독해 마저 어렵게 한다. 짝퉁은 그것밖에 할 것이 없다. 레토릭만 있고 노선이 없는 짝퉁은 절대로 정권을 재창출 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 보수와 이른바 짝퉁인 실용보수 내지는 진보의 탈을 쓴 실용진보의 대결은 어차피 보수 대 보수이기 때문에 진성진보로 갈 수 없는 민중들이 짝퉁진보이며 보수 노릇도 걸음마인 범여, 개혁진보세력을 선택하기란 만무하다. 따라서 보수화를 거쳐 전통 보수를 선택하는 것은 엄연한 맥락이다. 그 거창했던 노선을 살리기엔 이미 이들의 정체성을 담은 신체가 너무 많은 악세사리를 달아 버렸다. 개혁을 체제내 소극적 변화로 축소시킨 노선에 어떤 악세사리를 달고 치장을 한들, 경선쇼와 후보 단일화를 한들 이미테이션 수준에서 반짝일 것이 분명하다.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 더 진보로 갈 수 있는 민중들의 노선을 막은 짝퉁정치의 기록은 차라리 삭제되어야 할 명백한 재앙이다.

2007/09/06 17:39 2007/09/06 17:39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흔히들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균형' 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불행이도 이러한 충고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대게가 시각에 대한 균형을 주장하는 사람조차 균형에 대한 균형 잡힌 기준이 없기 때문인데다가 현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관념하는 자세에 있어서 균형이란 양비일 수 밖에 없다. 흔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양비론적 시각은 현상이나 현안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견해가 없는 사실에 대한 사실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주장도 반대가 없을 수 없고, 어떠한 견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비판적인 시각은 모두가 만족하고 어떠한 반대도 무릎쓸 수 있는 균형이 아니라, 반대의 의견에 대해 반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시각에 대해 기꺼이 연구하는 자세이다. 이를 위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정치적 레토릭으로 분류하고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이는 어떠한 내용은 견해가 없는 맹목적인 내용에 불과하고 대중들의 시선에 쉽사리 안착하고 만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진보하는 역사는 없다. 사회와 이념에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 이항대립의 구도속에서 역사의 투쟁이 존재하게 된다. 그 속에 균형이란 언제나 기회주의였고 회색분자들의 대중적 논리로 기록되어 있다.

집권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비난의 이유는 집권세력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386으로 대변되던 진보의 세력들이 너도 나도 전향 선언을 해버리는 기막힌 현실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앙가주망은, 그 변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한 날조된 구실로 전락해버렸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모든 사회적 부조리 현상에 '노무현 때문' 이라는 무조건적인 비난을 일삼으면서 스트레스를 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키곤 한다. 균형 잡힌 집권세력이 만만한 대상이 되고, 그 균형 잡힌 세력이 민중들에게 한 가장 큰 업적이 담론의 카타르시스 뿐이란 사실은 절망적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해악이 미시 담론의 둘레에서 집권이라는 지도적 세력에게 확대되었을 때, 그 사회가 겪는 관념적 발전을 얼마나 후퇴시키는지 깨닫게 만든다.

진보는 보수의 가치보다 우월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보수적 시각으로 볼 생각이 없다. 다만, 나의 성찰이 부족하여 때로 보수적인 태도와 행위가 있었을 때 마땅히 그것을 반성하려는 자세만 가졌을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결연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균형 잡힌 시각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나의 진리를 배반하지 말자는 의지는 성의껏 다지고 있다. 많은 역사에서 그 진보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생애를 점령한 두 가지 지향점인 '젊음' 과 '좌파이념' 에 나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절대 균형이라는 허구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2006/11/01 23:44 2006/11/01 23:44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진보와 좌파

2006/09/01 02:38 / 생각
진보와 좌파는 무엇이 다를까? 이 둘을 같이 생각했었던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보는 역사의 인식속에, 좌파는 이념의 스팩트럼속으로 한정지을 수 있다.(한정 지을수 있어야 한다.) 논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 시류를 배제할 수는 없다. 시류에 편승이네라는 논점은 애초에 관점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시류에 대한 것이야 말로 시민과 민중의 이해도이기 때문이고 그 숫자에 대해서 겸허해야 될 태도가 존재한다. 본류에 대한 문제는 사실 먹물의 의무이다. 그만큼 본류를 시류속에 편승시켜야 하는 실천, 그에 반하여 시류를 본말전도식으로 포퓰리즘으로 즉각적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다만, 오늘날 현안적인 문제에서 매체의 발달에 더불어 여론의 호도적인 측면은 여전히 지식인들이 극히 지식인적인 행동에 가난하게 대처해서 생긴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진보적 지식인과 좌파적 지식인이 다른점을 담론하기도 전에, 자칭 진보정권이라는 집권세력의 분열적 좌파신자유주의의 노선에 있어서 정녕 진보와 좌파의 의식이 폄하되고 있는 심각한 현안에 대해서 침묵을 강요하는 기득권, 보수수구세력들의 민족주의적 반동에 대해서 우왕좌왕하는 진보와 좌파들의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글..

2006/09/01 02:38 2006/09/0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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