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중의 선을 믿지 않는다. 대중의 의견이 앎의 범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취미의 범주에서 집단적으로 뭉쳐 있으며 논리의 기본 전제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옮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쫒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이 비난 받더라도, 하지만 대중이 쫒는 일이기 때문에 거의 비난 받을 일이 없지만, 대중의 뒤에 숨을 수 있기 때문에 안락한 금가르기가 가능하다. 게다가 대중의 의견은 상식이나 앎을 통해 정리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취미, 그들도 이것을 놀이라고 하는데, 로서 소통하고 개입한다는 문제가 있고 이러한 상태를 포퓰리즘이라 하기도 한다. 이 지점이 공직선거법 93조와 운영지침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표현, 배포의 행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에 찬성하는 근거가 된다.
대중의 선, 대중의 집단인격에 바른 이성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을 믿지 않지 않고, 정리 안된 의견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데다가 우르르 몰려 다니며 놀이로 주장하는 파쇼댓글을 지지할 마음도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적, 전통적 장치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공직선거법 93조 및 그 운용지침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인으로 참가한 이유이다. 대중의 치졸한 감정 배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양심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양심은 제한해서 정리되는 것이 아니고 계몽과 사유를 통해서 얻어 지는 것이라 믿는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헌법적, 양심적, 인간적인 부분에 관용이 있어야 한다. 의견에 차이가 있으면 논리를 통해 비판하고 설득과 소통이 가능하면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 표현 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다. 게다가 못마땅한 것이 있어서 그 표현 조차 제한하는 것에 동의하면 다른 것, 즉 사상적, 학문적, 종교적, 문화적 표현도 제한할 수 있는 맥락을 가져 온다는 점에서 절대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는 경선이나 단일화와 같은 공학적 쇼를 통해 그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대의정치는 단 두가지, 표현하고 투표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물론, 이것 또한 너무 부족한 대의정치의 현실이지만,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면 투표하는 것만 남는다. 이것은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공화주의 원칙에도 배척된다. 따라서 공직선거법 93조는 헌법 위반이며 이는 반드시 개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며 대중은 양심에 따른 어떠한 정치적, 사상적 표현도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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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매체의 발달은 보편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고정관념에 지배되어 있던 말과 글을 해방시켰다. 보조 수단이었던 이미지와 멜로디는 거추장스러운 부연과 서술 없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토대로 계층적 지배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매체의 혁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본능적 순수함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어는 인간과 인간이 가까이 있게 됨으로써 기원되었다. 루소의 '언어기원의 시론'에 의하면 인간의 객체가 적었을 때, 상호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객체가 늘어나고 비로서 인간과 인간이 하나의 일을 하며 협동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필요하게 된 도구가 언어이다.
협동의 기표이며 기의인 언어의 형태로써 말과 글은 속지적이며 즉시적이다. 협동과 거리의 관계로 언어를 전달하는 수단의 발전이 있었다면, 목적과 파급의 관계로 언어를 표현하는 수단의 지배관계가 변화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장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를테면 상대방에게 고의적인 영향을 의도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말과 글과 이미지와 음악의 지배관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간과할 수는 없다.
협동의 장르에서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형태는 지금까지 정의한 4가지가 복합적으로 결합, 분해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협동을 통해 어떤 산출물을 내는 목적성에 따라서 구별되기도 한다. 영상이나 광고가 목적이라면, 이전에 협동의 언어는 그것을 밑그림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적 속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속지와 즉시의 성질은 산업화의 '블루 웨이브 협동'에서 지식화의 '화이트 웨이브 협업'으로 변화되었어도 변질되지 않고 있다. 매체와 각종 도구의 첨단화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협업에서 이미지와 음악의 단절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속지성과 즉시성을 가진 말과 글을 대체하진 못하고 있다.
협업 언어는 즉시성이라는 문제가 암묵적으로 고찰되었기 때문에 그 특징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고, 말과 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과학의 발전이라는 후속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기원과 달리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객체가 늘어 나고 거리에 대한 복구가 요원해지면서 음성과 텍스트를 나르는 도구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촉매로 산재될 수 있었다. 물론, 현장에서 협업의 언어가 특징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제도와 특수제도의 구조로 파악할 수도 있다. 즉, 제도안에서 말과 글은 1차, 2차 집단에서 오랜 세월동안 선택권 없이 인간에게 주입되었지만, 이미지와 음악의 부수적인 언어의 특징은 제도의 특수제도에서 습득되어 질 수 있기 때문에 협업의 언어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시도로 받아 들여지는 말과 글의 주입적 교육의 상태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 선택권이 넓지 않다는 - 전제의 논리로 인해 인간 개개인을 규범적 동원체제로 만들었다는 이론으로 공격할 수 있다. 말과 글의 속지성이 그것인데, 태생적인 지역성으로 인해 모국어의 선택은 자유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 계급적 지위에 의해 다국어의 선택이 극도로 제한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보편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도의 기저로 비판 받을 수 밖에 없다. 박탈된 선택권으로 얻은 말과 글의 즉시성이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 의해 속지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과 글의 협업 언어는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협업의 궁극적 단계인 산출물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상식적이며 고전적인 도구 임에도 불구하고, 즉시성을 위해 선택권을 상실해야 하며, 속지성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해야함을 가르친다.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본능적 순수함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어는 인간과 인간이 가까이 있게 됨으로써 기원되었다. 루소의 '언어기원의 시론'에 의하면 인간의 객체가 적었을 때, 상호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객체가 늘어나고 비로서 인간과 인간이 하나의 일을 하며 협동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필요하게 된 도구가 언어이다.
협동의 기표이며 기의인 언어의 형태로써 말과 글은 속지적이며 즉시적이다. 협동과 거리의 관계로 언어를 전달하는 수단의 발전이 있었다면, 목적과 파급의 관계로 언어를 표현하는 수단의 지배관계가 변화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장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를테면 상대방에게 고의적인 영향을 의도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말과 글과 이미지와 음악의 지배관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간과할 수는 없다.
협동의 장르에서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형태는 지금까지 정의한 4가지가 복합적으로 결합, 분해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협동을 통해 어떤 산출물을 내는 목적성에 따라서 구별되기도 한다. 영상이나 광고가 목적이라면, 이전에 협동의 언어는 그것을 밑그림하길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적 속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속지와 즉시의 성질은 산업화의 '블루 웨이브 협동'에서 지식화의 '화이트 웨이브 협업'으로 변화되었어도 변질되지 않고 있다. 매체와 각종 도구의 첨단화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협업에서 이미지와 음악의 단절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속지성과 즉시성을 가진 말과 글을 대체하진 못하고 있다.
협업 언어는 즉시성이라는 문제가 암묵적으로 고찰되었기 때문에 그 특징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고, 말과 글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과학의 발전이라는 후속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기원과 달리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객체가 늘어 나고 거리에 대한 복구가 요원해지면서 음성과 텍스트를 나르는 도구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촉매로 산재될 수 있었다. 물론, 현장에서 협업의 언어가 특징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제도와 특수제도의 구조로 파악할 수도 있다. 즉, 제도안에서 말과 글은 1차, 2차 집단에서 오랜 세월동안 선택권 없이 인간에게 주입되었지만, 이미지와 음악의 부수적인 언어의 특징은 제도의 특수제도에서 습득되어 질 수 있기 때문에 협업의 언어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견해이다.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시도로 받아 들여지는 말과 글의 주입적 교육의 상태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 선택권이 넓지 않다는 - 전제의 논리로 인해 인간 개개인을 규범적 동원체제로 만들었다는 이론으로 공격할 수 있다. 말과 글의 속지성이 그것인데, 태생적인 지역성으로 인해 모국어의 선택은 자유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 계급적 지위에 의해 다국어의 선택이 극도로 제한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는 보편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도의 기저로 비판 받을 수 밖에 없다. 박탈된 선택권으로 얻은 말과 글의 즉시성이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 의해 속지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과 글의 협업 언어는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협업의 궁극적 단계인 산출물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상식적이며 고전적인 도구 임에도 불구하고, 즉시성을 위해 선택권을 상실해야 하며, 속지성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해야함을 가르친다.
TAGS 표현의 자유
혹자는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전문가' 를 '자본주의의 특정 도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이' 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전문가는 도구 사용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자이며 노하우가 발휘되는 도구는 자본주의에 종속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경쟁이 있는 곳에 전문가가 있다는 말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전문가란 입지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의된 도구가 지닌 복잡성과 불연속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구의 전문가가 사상의 전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도구의 작동원리에 대한 진지한 사상을 가지고 통찰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을 지식인이라 말한다.
지식인의 통찰력은 복잡한 도구의 사용성이나 자본주의적 생산성과의 연관성이 아니라, 도구의 사용성이 인격의 유지, 공공권리의 보장, 보편적 인간애 등에 어떻게 작용하여 궁극의 사용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촌철의 살인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의 통찰력은 그 사상적 배경이 무엇이기 때문에와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한 지식인의 사상이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팽창에 있다면 그의 통찰력은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선에서 발휘될 것이다. 우파는 우파, 좌파는 좌파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발휘되는 통찰력이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중도, 양비의 선언은 통찰력과 거리가 멀다.
사상의 가치는 이념 안에서 가장 가치가 있다.
민족적 비난의 대상이 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승조씨는 그 이념 안에서는, 또는 과거 지식인들이 그랬듯 적군의 울타리 안에서는 가치있는 선언으로, 가치있는 지식인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가 그 이념안에서 보여준 통찰력은 통찰력으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어디 가치가 그뿐일까?
그가 주장하는 통찰력은 나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다른 이데올로기, 사상을 가진 사람, 지식인, 또는 양비론자 에게도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이데올로기와 사상이 그의 것보다 훌륭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하는 공공의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나는 한승조씨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제2의 임라일본부설 같은 그의 주장에 털끝도 동조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적 가치는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그렇다하여 표현의 자유조차 부정해서는 안된다. 엥똘레랑스에 대해서 엥똘레랑스로 대응한다는 가치가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치가 되고 보편적이며 공공선의 가치가 되려면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 는 전문가의 사용성 노하우에 앞선다. 사상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는 사상에 앞선다. 한승조씨가 우리시대에 매국노,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어떤 사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가에 있을 뿐이다. 한승조씨는 그의 사상을 표현했고 그 사상에 대해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것이며, 그는 마땅히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함으로 비난을 견딜 것이다. 그 사상의 적은 엥똘레랑스로 표현 할 것이고 그 자유는 쌍방간에 지켜져야 하는 절대 가치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퀄리티는 있다. 따지자면, 한승조씨는 표현의 자유에서 High quality 였지만, 한승조씨의 주장을 옹호하는 지만원씨의 표현의 자유는 저질이다.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고 지만원에게 조차도 평등하게 부여되는 것은 군부가 광주를 짓밟았기 때문에,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인격의 상실화를 강요했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도발을 성심성의껏 막아줬기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군부와 박정희와 미국은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가장 억압하고 간섭하고 있는 세력이었고 세력이다. 그러한 간섭과 억압의 폭력 앞에 굴종하는 노하우에 대한 전문가가 지만원씨라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것이 표현의 자유가 질적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되겠다.
'한교수는 국제잡지에 격조 있는 글을 썼습니다.' 한승조씨의 사상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표현의 자유는 지만원씨의 말대로 격조가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표현의 자유가 동반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대다수 Low Quality 의 덧글과 무엇이 다른가?
당신이 Low Quality 덧글과 달라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추구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당신은 우파 전문가가 아니라 우파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통찰력은 복잡한 도구의 사용성이나 자본주의적 생산성과의 연관성이 아니라, 도구의 사용성이 인격의 유지, 공공권리의 보장, 보편적 인간애 등에 어떻게 작용하여 궁극의 사용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촌철의 살인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의 통찰력은 그 사상적 배경이 무엇이기 때문에와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한 지식인의 사상이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팽창에 있다면 그의 통찰력은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선에서 발휘될 것이다. 우파는 우파, 좌파는 좌파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발휘되는 통찰력이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중도, 양비의 선언은 통찰력과 거리가 멀다.
사상의 가치는 이념 안에서 가장 가치가 있다.
민족적 비난의 대상이 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승조씨는 그 이념 안에서는, 또는 과거 지식인들이 그랬듯 적군의 울타리 안에서는 가치있는 선언으로, 가치있는 지식인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가 그 이념안에서 보여준 통찰력은 통찰력으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어디 가치가 그뿐일까?
그가 주장하는 통찰력은 나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다른 이데올로기, 사상을 가진 사람, 지식인, 또는 양비론자 에게도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이데올로기와 사상이 그의 것보다 훌륭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하는 공공의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나는 한승조씨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제2의 임라일본부설 같은 그의 주장에 털끝도 동조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의 사상적 가치는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그렇다하여 표현의 자유조차 부정해서는 안된다. 엥똘레랑스에 대해서 엥똘레랑스로 대응한다는 가치가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치가 되고 보편적이며 공공선의 가치가 되려면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 는 전문가의 사용성 노하우에 앞선다. 사상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는 사상에 앞선다. 한승조씨가 우리시대에 매국노,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어떤 사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가에 있을 뿐이다. 한승조씨는 그의 사상을 표현했고 그 사상에 대해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을 것이며, 그는 마땅히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함으로 비난을 견딜 것이다. 그 사상의 적은 엥똘레랑스로 표현 할 것이고 그 자유는 쌍방간에 지켜져야 하는 절대 가치이다.
표현의 자유에도 퀄리티는 있다. 따지자면, 한승조씨는 표현의 자유에서 High quality 였지만, 한승조씨의 주장을 옹호하는 지만원씨의 표현의 자유는 저질이다.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고 지만원에게 조차도 평등하게 부여되는 것은 군부가 광주를 짓밟았기 때문에, 박정희가 국민을 상대로 인격의 상실화를 강요했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의 도발을 성심성의껏 막아줬기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군부와 박정희와 미국은 우리의 표현의 자유를 가장 억압하고 간섭하고 있는 세력이었고 세력이다. 그러한 간섭과 억압의 폭력 앞에 굴종하는 노하우에 대한 전문가가 지만원씨라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것이 표현의 자유가 질적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되겠다.
'한교수는 국제잡지에 격조 있는 글을 썼습니다.' 한승조씨의 사상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표현의 자유는 지만원씨의 말대로 격조가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표현의 자유가 동반하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대다수 Low Quality 의 덧글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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