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 였는가? 오늘날 폭주족만이 널리 기리는 해묵은 해방 의미는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의 모든 부조리를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왜 통일을 하지 못했는가? 우리는 왜 매사 정치적 거대담론에서 반미, 친미의 신체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작금의 글로벌시대에 문화적 니뽄주의가 친일과 무슨 상관이며 친일, 친일파는 진부하다 못해 논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는가? 백범 김구는 존경의 대상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졌는가? 아니면 그야말로 반민중 분열주의자인가? 한국전쟁은 왜 남침되었는가? 이러한 의문은 오늘날 우리의 숙명적 부조리이며 높은 차원의 문제 의식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기 위한 서민적 매진을 일삼는 동시대의 한국인에게 이런 문제 의식은 사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려한 휴가' 가 그랬듯 굳이 과거의 일을 들춰 낸다면 신파이거나 추억이 되어야지 청산이나 규명의 의미부여는 사는데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부조리를 적당히 가릴 수 있는 손바닥 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시대는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시대가 있다. 이미 지나간 시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시대를 거슬러 변하는 오늘을 사는 자세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운명, 그 축적된 과거로 부터 반영된다. 문제는 높은 차원의 의문에 여러 답이 있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관점을 가졌는가 라는 지점이다. 중금속처럼 쌓인 신체의 속성을 깨는 울림은 밖에서 쳐주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부터 울려야 한다. 그로부터 감당할 수 있는 관점은 역사의 어느 시점이나 역사적 고장이 끊임 없이 소리내는 진지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그로인해 눈이 뒤집어 지고 피가 꺼꾸로 쏟는 느낌은 당연한 생리다.
이른바 좌파 필독서라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줄여 : 해전사)' 이나 해전사에 반기를 든 우파 지식인들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줄여 : 재인식)' 이나 변하지 않는 시대를 관통해 낸 다양한 답을 가지고 있다. 결정해야 할 것은 감당할 수 있는 관점이며 판단해야 할 것은 손바닥의 크기이거나 숙명적인 부조리에 대한 용기있는 대결이란 점이다. 항간의 얘기처럼 해전사는 역사의 실패를, 재인식은 역사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손바닥의 크기와 자세의 문제이며 그럴리가 없다고 무턱대고 믿어 버리는 맹목적인 신념의 문제이다. 역사를 살피는데 가장 잘못된 두가지 의식은 신념 그대로의 신념과 역사를 살피고 나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대체로 바른 역사를 살폈다면 신체적 축적을 통해 이룩한 신념 따위는 파괴 되어야 하고 역사를 통해 신념을 재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숙연한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에 대한 신념이 뻔하디 뻔한 것들의 총체적 집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민족민중 사관의 해전사와 탈민족주의 사관의 재인식의 갈등은 민족주의의 감성적 의리의 유무보다는 텍스트 사관과 신념 사관의 경연으로 보인다. 텍스트 사관은 충격적이지만 반성을 수반한다, 게다가 답과 의문을 동시에 던져 놓는다. 재인식을 탈민족주의 사관으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재인식은 그렇다고 믿어야 했던 것을 더 그렇다고 믿어야 하는 당위성을 열거한다. 이것은 신념 사관이다. 이미 나름대로 꽃 피운 민족주의를 수레에 실은 사관이다.
시대가 변한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시대를 만들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며, 선택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전사냐 재인식이냐는 문제는 높은 차원의 질문처럼 오늘을 사는대 하등 도움이 안되고 교양과 처세의 차이를 절감하는 사람에게 교양은 선택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핸드폰으로 누구나와 소통할 수 있고 인공위성으로 친구를 찾을 수 있는대다가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의 일을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장농 속에 모셔 놓은 비자금이 하루 아침에 인도와 홍콩의 어느 기업에 투자되는 첨단 사회에서 어떤 농민은 생계를 절규하고 저항했다는 이유로 백주 대로에서 맞아 죽고, 어떤 택시운전기사는 절망을 이유로 스스로 분신을 해야 하는 사회와 수십년전 동족간 전쟁을 치뤘지만 막상 종전 선언의 대상자가 될 수 없는 현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선택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해전사냐 재인식이냐는 선택은 취향이 아니라 오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가감 없는 자세이다.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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