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끊임없이 절대적인 자연과 환경의 지배로 부터 스스로 아우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으로써의 계몽은 신격화, 신비로움에 대한 반기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 에서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이성을 토대로 모든 현재의 부조리를 해결해줄 것을 믿는 비이성적이며 맹목적인 사회, 즉 야성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모던의 퇴행은 믿음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생긴다. 대중의 잘못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대중의 믿음 또는 절대적이라 격상시킨 대상의 쫓음에 있다. 즉, 내가 믿게 된 과정은 누가 믿기 때문에 믿게 되는 비합리적 지배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경제적 세계화를 믿고 가속화 하는 것에 약싹 빠른 현정권이 그렇고, 남의 책꽂이를 뒤집어 보고서야 안심하고 쇼핑을 즐기는 대중들이 믿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구체성에 의존한 협력 샤머니즘이다.
이러한 협력 샤머니즘은 하지 않아도 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고(음모), 해도 누구 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면책) 대중은 이미 메스 미디어에서 믿고 믿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베이컨의 합리성은 퇴보하여 기꺼이 미디어의 종속을 인정한다. 덧글 한 줄에도 소속감을 느낄 만큼 개개인은 소외되어 있다. 이런 개인의 집합속에 원자폭탄처럼 떨어지는 협력 샤머니즘은 세련된 계몽에 다름 아니다.
비합리적인 집합에 떨어지는 협력 샤머니즘은 다양하다. 그것이 매우 구체성을 띄는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처럼 보이지만, 신빙성을 잃은 집합에게 구체성은 거의 광기에 가깝다. 이러한 광기는 오로지 어떤 감각으로만 존재하거나, 이미 퇴화한 정신을 잡고 감각이 닿는 자연에 대한 계몽 즉, 이미지의 현대화에 기여할 것을 촉구한다. 윤택(이미지의 현대화)은 개발의 미덕을 통해서 이룩되는 실체인양 허구한다. 이에 대항하는 반기로써 일련의 환경운동은 탈근대화의 또 다른 계몽이다.
협력 샤머니즘에 온몸을 바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지배된 마야자키 하야오 세대들의 일반적인 특성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스토리에 열광하지만, 실은 나우시카가 정당성이 떨어진 근대화의 계몽의 만행을 고발하고 탈근대화의 화신으로써 오염된 자연과의 공생을 시도한 것에는 믿음을 거둬버린다.
(무라카미 류는 적중했다, '스토리는 본질을 모호하게 만든다' : 엑스터시)
이런 점에서 지율 스님과 나우시카는 탈근대화의 계몽에 대한 또 다른 계몽을 펼치는 계몽주의자로써 다른게 별로 없다. 다만, 보고 이해하는 이의 수준이 다른 뿐이다.
미국의 경제적 세계화를 믿고 가속화 하는 것에 약싹 빠른 현정권이 그렇고, 남의 책꽂이를 뒤집어 보고서야 안심하고 쇼핑을 즐기는 대중들이 믿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구체성에 의존한 협력 샤머니즘이다.
이러한 협력 샤머니즘은 하지 않아도 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고(음모), 해도 누구 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면책) 대중은 이미 메스 미디어에서 믿고 믿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베이컨의 합리성은 퇴보하여 기꺼이 미디어의 종속을 인정한다. 덧글 한 줄에도 소속감을 느낄 만큼 개개인은 소외되어 있다. 이런 개인의 집합속에 원자폭탄처럼 떨어지는 협력 샤머니즘은 세련된 계몽에 다름 아니다.
비합리적인 집합에 떨어지는 협력 샤머니즘은 다양하다. 그것이 매우 구체성을 띄는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처럼 보이지만, 신빙성을 잃은 집합에게 구체성은 거의 광기에 가깝다. 이러한 광기는 오로지 어떤 감각으로만 존재하거나, 이미 퇴화한 정신을 잡고 감각이 닿는 자연에 대한 계몽 즉, 이미지의 현대화에 기여할 것을 촉구한다. 윤택(이미지의 현대화)은 개발의 미덕을 통해서 이룩되는 실체인양 허구한다. 이에 대항하는 반기로써 일련의 환경운동은 탈근대화의 또 다른 계몽이다.
협력 샤머니즘에 온몸을 바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지배된 마야자키 하야오 세대들의 일반적인 특성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스토리에 열광하지만, 실은 나우시카가 정당성이 떨어진 근대화의 계몽의 만행을 고발하고 탈근대화의 화신으로써 오염된 자연과의 공생을 시도한 것에는 믿음을 거둬버린다.
(무라카미 류는 적중했다, '스토리는 본질을 모호하게 만든다' : 엑스터시)
이런 점에서 지율 스님과 나우시카는 탈근대화의 계몽에 대한 또 다른 계몽을 펼치는 계몽주의자로써 다른게 별로 없다. 다만, 보고 이해하는 이의 수준이 다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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