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는 누군가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회사는 그것을 정중하게 '평가' 라고 한다. 평가는 곧잘 이런 식으로 부연된다.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되지 않는다.", 또는 "측정하지 않으면 행해지지도 고쳐지지도 않는다." 경영학의 아버지라는 피터드러커와 세계적인 전력기기 회사인 ABB 의 퍼시 바네빅 회장의 말을 엄숙하게 빌려 말한다. 이것을 국내 기업에서는 KPI 라는 툴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직급, 팀 단위별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사안별, 기간별로 달성 여부를 모니터링 하는 것이다.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애면글면 어떻게든 사용하려는 입장인데 중소기업에서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다. 관리자도 실무자고 경영진이 영업직인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처럼 간지 좀 세우겠다고 KPI 같은 평가툴을 도입했다가는 한해 농사 평가도 못해보고 말아 먹기 쉽상이다. 어줍잖이 지식산업 좀 한다는 기업에 있어서는 측정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가 있냐는 둥 에둘러 검토조차 복잡하다는 입장이다. 이렇다 보니 정성적 판단이 각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대한? 잣대가 된다.
여의도에만 정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성적 판단이 더 많은 중소기업에도 만만치 않은 정치가 있다. 줄을 선다는 개념 보다는 평가할 시기가 오면 관리자들은 1년간 가장 인상 깊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것이 프로젝트 일 수도 있고 술자리의 난장일 수도 있으며 클라이언트의 지나가는 말 일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피평가자는 내내 관리자의 추억에 남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의 불경기, 이직 시장도 좋지 않은 때에는 정치? 행보가 다소 디테일해지고 관리자들도 다른 관리자들과 이런 저런 평판을 들으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이렇게 한바퀴 돌게 되면 관리자들 사이에서도 응당 편가르기가 시작된다. 왜 저놈은 내가 이뻐하는 애를 싫어하지, 어? 내가 미워하는 앤데 임원이 좋아하네, 따위의 각종 정서를 짜집기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세련된 문장으로 만들고 거기에 점수를 기입한다. 물론, 각 항목마다 가중치가 다른데 이 가중치의 근거는 직관이다. 정서와 직관이 합쳐져서 평가 라는 엄숙한 말로 승화된다.
누가봐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기업의 오래된 관습인 비인간적인 시스템도 적용되지 않은 거짓말 투성이로 개인이 평가된다. 이 평가를 통해 당장은 관계가 좋아진다. 좋아 하는 기준으로 좋아 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가 되었으니 궁합도 잘 맞는다. 이것을 또 엄숙하게도 '시너지' 라 명명하면 할말이 없어진다. 관리자와 보기 좋은 관계를 맺어 두지 못한 이른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뻔하디 뻔한 길을 걷게 된다. 인사라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일하겠다는 의지는 경외롭기까지 하다. 이런 경외로움이 지속적으로 조직에 투여 되면 자신을 스스로 리드 하고 소신에 관계된 자유로운 열정을 가진 개인은 차츰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일단 조직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시작하면 금화에서 구리를 빼고 다시 재련하는 매카니즘만으로 되돌릴 수가 없다. 묘하게도 회사에서 정성적 평가에 의존하여 조직을 관리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평가를 시스템적이고 디테일하게 할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평가가 시스템적일수록, 또는 정치가 난무하는 평가일수록 리더만 득실대는 조직이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회사나 조직은 걸핏하면 리더쉽을 얘기하지만 리더쉽이 득달거리는 조직은 전진하지 못한다.
회사는 개인에게 스스로 열정을 갖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문제는 대기업에서 수많은 사람을 관리 라는 학문적 기능으로 묶기 위해 신입사원연수, 선배에 대한 복종, 시스템의 이해, 시스템에 대한 복종, 시스템의 운용 의 과정을 거쳐 리더쉽과 시너지와 평가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조직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영혼의 노숙자' 가 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지식산업 좀 한다는 벤쳐, 중소기업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을 극구 도입하길 원하는데 개인을 이성적인 인간으로, 열정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수완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것이 벤쳐나 중소기업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퇴직금이나 마찬가지다. 리더쉽이나 마케팅 전문 강사의 강의를 쫒도록 하지 않고 인문학 선생님, 철학, 실물경제가 아닌 거시경제학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제공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래도 평가가 필요 하다면 예술사조 강의를 듣고 다음날 디자이너를 몽땅 미술관에 데려가 작품에 대해 토의하고 그때의 태도와 자세를 토대로 평가를 하는 방법은 왜 벤쳐, 중소기업에서 해선 안되는 터부처럼 얘기되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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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년이나 머물렀던 회사를 떠나려고 해요. 오늘 날이 침침하면서도 상큼합니다. 며칠 인수인계하고 행정적인 절차가 정리되면 다시는 출근하지 않을꺼에요.
7년이나 부대꼈으니 아니 다사다난할 수가 없습니다. 적금도 수차례 깨졌고, 신용카드 돌려 막기도 해보고, 연애하고 이별하고, 싸우고 꿰매고, 나쁜 짓, 착한 짓... 이런 것들이 모두 제 삶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제 낡은 스킬과 세련되지 못한 자세를 견뎌주던 그대들에게 직급과 직위를 벗어 던지고 인간으로 술 한잔 대접하고 싶네요.
많은 것들을 섭취하고 배설하고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 감았을 때 보았던 별들의 회오리를 그리워하며 이제 날이 밝았으니 반사회적이고 엥똘레랑스한 프로젝트에 서로 엉겨 있던 몸을 먼저 빼내려 한다고 아쉬워하진 마세요. 어쨌든 우리에겐 치열했고 지리한 시간이 공평하게 존재했고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직업이었으며 정체성입니다. 어느 봉우리에서 서로 얼룩진 땀을 발견할 날이 있을, 우리는 같은 종족이었다는 점을 잊지는 마세요.
그러하니 우리 아름답게 헤어집시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시를 쓴다면 그 시보다 더 시적인 사건들을 겪을 테니 우리는 시리고 아플 것 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자꾸만 잊게 만듭니다. 그러하니 헤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럴수록 우리 잘 있습시다. 저도 어떤 꿈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갈 것이고 여러분도 그러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꿈은 결코 목적 지향적이지 않고 그저 다다를 수 없어도 슬프지 않은 것이면 됩니다.
나는 이만 그대들과 이 자리에서 헤어지겠지만,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서로 연대하며 아프지 않기를 바래요.
그럼, 안녕..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인간에게 노동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즉, 할 수 있을 때와 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을 생계 유지라는 기능으로만 측정할 수 없고 토지나 자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문적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생계가 유지되고 개별적인 자아를 실현한다. 굳이 생계의 수단이 아닌 노동을 할 때에도 인간은 자아를 찾게 된다. 이것은 노동이 개인의 이기적 욕구 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결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절반의 고독과 절반의 소통으로 이루어 진다. 소통은 타인과 공유하는 의견과 타인과 관계하는 노동으로 고독만으로 관찰되지 않는 상호 작용이다. 흔히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회사를 통해 직업을 가진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회인은 회사나 직업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쓴다. 이로 인해 직업은 자아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회사에는 지식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상호 작용은 하고 있지만 지식과 자본으로 소통하고 있기에 상호 작용의 대상과 소외되어 언제나 고독하다.
IMF 사태 이후 회사는 무너졌다. 하지만 회사는 자본과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신자유주의 플랫폼으로 다시 살아 났다. 실제로 무너진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노동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을 계측화시키기 위해 이른바 국제 기준이라는 각종 수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회사 나아가 사회 구조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를 내림으로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에 최대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강도 높은 긴장을 주입한다. 일시적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더 이상 그 시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수치로 측정되지 못하는 노동은 어떠한 경우라도 보장 받지 못한다. 회사의 조직은 이러한 표준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이 왜 노동을 멈춰야 했고 언제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사유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정확히 노동자는 개인의 단위 노동만으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시간에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동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인문적 관점을 버리고 자본의 이동과 축적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자본가와 같이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회사에서 노동으로 종사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은 쉽게 노동을 잠식했고 자본을 위한 종사와 복무의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다.
회사는 이익을 창출한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서 창출하는 이익은 자본의 이익이지 노동의 이익이 아니다. 회사는 이익구조인데 인간은 그 이익구조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노동을 아무리 해도 조직은 개인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자본가 다운 생각을 해도 회사는 이익을 나눠주지 않는데다가 자본시장은 노동자의 임금을 공격할 뿐 잉여자본을 분배하지 않는다. 자본시장의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통화 정책에 따라 축적된 자본으로만 유입된다. 탈근대적인 신자유주의의 구조는 열심히 일해도 노동임금이 늘어 나거나 생계의 긴장을 여가의 여유로 돌릴 수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도 인간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자본이나 공공 기금으로 인간의 품위를 보장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동을 흡수한 회사는 공공적 성격이나 하물려 타인과 소통을 일으켜 자아를 실현하는 그 어떤 속성도 부정하고 있다. 즉, 회사는 이익 집단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와 상호작용을 인정한다. 오늘날 노동의 왜곡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화폐의 왜곡 만큼이나 심해서 노동자 조차도 회사의 이익이 온전히 노동임금으로 돌아 오고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사회 안전망을 통해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회사가 일조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노동자 임금을 인플레이션으로 빼앗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자본가처럼 생각하는 노동자 임금을 간단히 환율과 지배구조로 제압할 수 있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윤리도 사라졌다. 누구도 회사의 목적이 이익 창출이며 주주 관계에 의해서만 이익과 자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사는 더 이상 윤리가 필요 없게 되었다. 회사는 공공연히 가치 경영을 얘기한다. 이익과 자본의 창출을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해도 윤리에 하자가 없게 되자 회사는 노동도 공공의 선도 사회 안전망도 인간의 품위도 가치 경영의 플랫폼에서 명령 받아야 되는 존재, 즉 자율성이 없는 가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회사는 직업을 생성하고 직업에 가질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노동자와 자율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자아와 자본을 창출하고 창출된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하고 자아를 가진 노동자와 함께 사회 공공적 활동에 이익을 재분배하는 순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 회사는 가정과 함께 사회를 거의 양분하고 일부분을 학교에 내어주고 있다. 적어도 현대 사회는 그렇다. 자본가도 자본을 생각하고 노동자도 자본을 생각하는 회사에서 인간이나 노동의 위치는 자본보다 못하다. 자본이 오로지 회사와 노동자간에서 움직이는 폐쇄적인 화폐로 인식하는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할 수 있을 때의 임금과 노동을 할 수 없을 때 돌봐줄 사회를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시장의 명령에 의해 가정의 역할을 재설정하고 학교는 자본의 명령에 의해 회사에서 자본을 창출하고 시장에서 임금을 빼앗길 노동 없는 노동자를 생산하여 수혈하기 바쁘다.
노동이 사라진 회사에는 자본과 노동자의 증오만 남아 있다. 회사가 추구하고 선전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는 착취 당한 노동을 위로하여 자본 창출을 위해 재조직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늘날 회사의 가치는 모두 거짓이며 이러한 거짓에 저항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자멸하고 말 것이다. 회사는 사라졌다. 분명하건데 곧이어 가정과 학교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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