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를 위해 투표한 가난한 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개탄이 이어지지만 정작 가난한 자는 여전히 부자가 되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희망이 있으니 부자가 되기까지 가난을 견뎌낼 수 있는 지도 모른다. 가난은 몇대를 걸쳐 대물림되어 왔고 가난한 아비는 부자가 되는 희망을 제자식에게 끈질기게 주입시켜왔다. 그래도 변화가 없다. 가난은 계속되었다. 아비는 병들고 아팠으며, 자식은 비정규직이다. 현대판 수난이대를 겪고 있지만 사회나 부자를 탓하지 않는다. 되려 부자의 습관과 생활 따위를 답습시키지 못한 아비 탓, 사회경쟁력을 따라가지 못한 그야말로 능력이 부족한 자식 탓으로 애써 돌려 놓고 세상을 마감하고 만다. 가난한 아비가 자식에게 물려 준 건 가난이 아니다. 그들이 물려 받고 물려 줄 것은 가난을 견뎌내는 허튼 희망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루쉰(노신)의 구절이면서 수많은 루쉰의 아포리즘 가운데 가장 오역이 심한 부분이기도 하다. 루쉰은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얘기할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희망이란 많은 사람들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만 비로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실천적 행위를 하기 전에 사람들이 어떤 길을 걸어 가기 위해서는 완전한 절망을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품는 어리석은 희망은 절망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희망이 될 수 없고 곧 그 길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쇠고기시장이 미국에 개방되고 한미FTA 의 비준을 통해 공식적으로 농업은 산업에서 제외될 것이다. 원자재 가격은 향후 20년~30년동안 지속될 것으로 OECD 는 분석하고 있다. 교육비는 가난한 자가 부자의 교육수준을 절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벌어져 버렸다. 이제 가난한 자는 광우병에 걸린 미국산 소고기를 사먹기 위해 소득의 80% 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연료는 연료를 먹는 내연기관의 가격을 1년안에 따라 잡고 말 것이기 때문에 물자는 반년만에 제가격을 모두 감가상각시킬 것이다. 상속세를 내리고 종부세를 내리고 도리어 간접세를 올리는 국가 정책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 종부세를 낼 때 혜택을 받을 것이란 꿈처럼 기분 좋은 희망에 부풀어 단숨에 20% 씩 오를 소주의 주류세를 참아 낼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겐 현재도 가난하고 앞으로도 가난할 것이기 때문에 물려 줄 것이라곤 감가상각된 희망 뿐인지도 모른다.

어느 진보적인 언론조차도 희망만이 살 길인 것처럼 얘기한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재화와 잉여를 지속적으로 빼앗아 가도, 죽어라 모은 종자돈이 원자재가격 인상과 인플레이션, 변동환율로 가치가 하락되는 세상일지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선동한다. 보수 언론은 더욱 심해서 그것이 '너희들을 구원하는 조치' 라는 거짓을 끈질기게 주입시킨다.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대체 그 실현불가능한데다가 구체적이지도 않는 희망 자체를 가지는 유행에 열광하고 만다. '넌 희망이 뭐니?', '난 희망 없는데', '바보 희망도 없이 어떻게 사니.. 내 희망은... 로또 1등!' 도대체 누가 쪼다인가?

세상은 후퇴하고 있지만 더욱 디테일해지고 있다. 의료, 교육, 세금, 연료, 식품, 하다못해 옆동네 뉴타운에 배아픈 달동네 알박이까지 세상은 제로섬게임의 공식을 구체화시킨다. 가난한 자는 허튼 희망 말고는 절대 부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부자는 달동네 독거노인의 고쟁이 푼돈에서 부터 맞벌이 부부가 가까스로 모은 종자돈까지 탐내고 쓸어 갈 수 있는 공식을 세워놓았다. 이건희가 수조원때의 비자금을 축적하여 정관계에 뿌려 대는 동안 가난한 자는 간접세로 노동자는 근로소득세로 사라진 돈을 매꿨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희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부국강병? 그렇다,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어리석은 희망이다. 자신이 생산한 잉여에 대한 관심은 거세하고 국가와 삼성과 같은 부자들의 구걸에 자신들의 노력을 자발적으로 갖다 바치는 행위는 그야말로 노예근성이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 노예에서 해방되는 날을 실천하는 것도 아닌 노예의 지위가 박탈될까봐 전전긍긍하는 희망만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포기한 이상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노예의 삶을 절망하지 않는 이상 희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도 희망' 이란 따위는 현혹에 불과하다. 이 나라의 정부와 정권이 세상을 강철로 만들면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나 길을 걸어 갈 것인가? 아니면 그저그런 희망을 일기장에 끄적이며 내일도 노예인 삶에 감사할 것인가. 절망하지 않는 노예에게 희망은 없다.

2008/04/24 17:39 2008/04/24 17:39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오늘날 희망이란 단어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는데다가 희망이 언어의 범주와 슬며시 이별하여 '희망' 이란 단어가 있었지? 추억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될 지경이다. 이쯤되면 분노는 세련됨을 잃고 거칠어진다. 이념따위로 무장한 논리도 희망이란 엔돌핀이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을 돌아 다닐 수 있을 때 하는 얘기다.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가 방어하고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우리보다 더한 정치상황을 빗대어 제사회가 그것보다 덜하니 더 참고 더 견뎌야 한다는 논리는 그럴싸 하지도 않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희망' 자체가 어려워졌으며 희망이 지닌 무궁한 범주 또한 좁아져 버렸다. 대박을 쫓고 대박만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절망은 희망보다 쉽고 더 깊어졌다.

제로섬 게임인 자본주의에서 확률적으로도 대박은 1%안에서도 이뤄지기 힘든 우연이지만 이를 쫓는 99%에게는 언제부터인가 희망보다 절망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가 되버렸다. 현대사회는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관념적 단어가 디테일해진다. 예컨데, 14조원의 무역수지 흑자는 19조원의 해외펀드 손실액이 날려 버렸다는 식으로 디테일한 절망이 우리의 관념적 희망마저 날려버리는 것이다.

마치 더 견뎌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빼앗아 와야 한다. 자본주의는 제로섬 게임이다. 한국은행에서 돈을 따오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정책입안자들은 민중이 절망에 접근하는 매우 일반적인 경로를 시스템으로 깨줘야 한다. 우리는 다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좀 더 경쟁하여 빼앗아 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계몽하고 선동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제는 고소영, 강부자, 명계남으로 코미디된 정권의 도덕적 상식적 무소유를 복기하는 일도 지겹다. 어물어물 하다 국가가 바뀌었고 지속가능한 '나은 삶' 의 열망 또한 금기시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스스로 5년동안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자 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말리고 저항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 또한 절망에 쉽게 방점을 찍어 버리고 냉소하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도 바람은 분다. 옥탑 위에 빤스를 널던 여자가 혼잣말 한다. 오늘 빨래 잘 마르겠다고.. 문득, 서럽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서러워서 살아야 하는 실존이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집안에 묵혀 두었던 빤스를 빨아 널어 보려 한다. 나은 삶에 대한 기대는 잠시 접어 두고 서러워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말려 보자.. 참여연대 회원으로 진보신당 당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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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3 14:53 2008/04/0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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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탈당 했다. 자주파를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너 나은 진보와 더 나은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다. 자주파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며 섣부른 처방을 내리는 것도 삼가한다. 그들의 양심적 신념은 높이 살만하다. 종북으로 인해 친북이 어떤 해악적 정서가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사망 직전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양심적 사람들의 양심을 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주파의 그러한 양심과 진보적 신념도 이해할만 하다. 친북이 그저 조선노동당에 남한의 사정을 보고하는 2중대인양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저 조선일보나 하는 시대착오적 반공주의로만 치부될 수 있다. 자주파의 그것은 분단을 방점으로 우리 사회의 거대한 모순에 대한 숭고한 저항이기도 하다. 어쨌든 자주파의 그 방점을 변명하고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보가 하나의 틀로만 있기에는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시대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라고 본다. 사실 탈당을 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즉시 처리되었다는 메시지를 당으로 부터 받은 것도 그렇지만, 황급히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탈당한 동지들의 전화에도, 한때 같은 당원이었던 자주파의 서슬 푸른 패권적 발언에도 가슴이 시렸다. 지금 이 지점에서 경계해야 할 센치함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한때 동지였고 서로의 비빌 언덕이었고 그것을 갑작스럽게 부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저주하고 혹자는 말이 안통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지만 그들을 진보의 해약적 표본으로 삼는 여론에는 결코 반대한다. 그들의 사상을 이러한 정치적 이슈로 인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폄하하고 침해하는 것은 미래의 진보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진보는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이제 새로운 진보 신당에서 새로운 감수성으로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어느 신문기사처럼 발가 벗겨진 자주파와 평등파가 걸어야 될 시련이 온전히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시대가 이따위고 세대가 단절되었다고 해도 진보는 나아가는 것, 어디로든지가 아니라 정녕 사람 하나를 보살피기 위한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 다만 자주파의 변하지 않는 오랜 부조리에 대한 투쟁보다는 계급과 민중적 저항으로 나아가려는 것, 정치적 집권을 통한 인간다운 체제적 변화를 원하는 것, 자주파의 그 사상적 완고함 만큼이나 또다른 시대적 진보로 나아가야 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탈당과 함께 새로운 진보 정당으로 보내는 엄연한 지지이며 희망이다.

2008/02/06 02:55 2008/02/0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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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계몽, 조직

2007/12/28 18:02 / 생각

정책을 보고 선거에 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가 이미지로 가벼워지는 현상을 개탄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이명박은 정말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의 대게는 이명박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무현이 싫어서가 해답이다. 이를 통해 대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짐짓 이러한 장미빛 미래의 담보가 이미지와 반정부 정서에 의해 형성된 마당에 정책이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이명박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진보의 이데올로기 찬탈을 그야말로 끈기 있기 주입했던 보수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진단하는 상황이다. 당선 됐으니 정책을 재검증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개이치 않는다. 어차피 이제와서 정책을 살펴봐야 별 수 없는 노릇인데다가 민주주의의 작동은 지도자가 아니라 민중의 작동이라 생각하기 시작한 민중들의 집단적 행동에 토를 달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 술자리에서도 열심히 논의 했던 것이지만, 중요한 건 계몽, 그리고 계몽을 주도할 언어, 언어를 공유할 조직인 셈이다. 하지만 계몽도 언어도 조직도 모두 어려운 하수상한 시절이다. 진보라는 개념은 거의 비틀어졌다.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비정규직이 되어 88만원세대의 반열에 들어 있어도 제도적 거부를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이 사회에서 낙오됐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자괴와 더 열심히 무엇인가를 도모해야 한다는 긴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계몽의 주제와 주체는 이 자괴와 긴장만으로 뭉친 덩어리를 해체하고 다시 재조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계몽도 폭력이라며 나자빠질 드라마적 언어 비판을 일삼는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의 자기 중심적 패션은 더 이상 시대를 관통할 수 없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대선 진단은 옳다. 하지만 언어의 개발을 위해 언어에 집중하는 이유가 계몽에 있지 않고서는 합목적적이지 않다. 게다가 운동적 방식도 불특정 계층과 동시대의 모든 대중에 있어서도 생산적이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장미빛 미래에 좌절하고 아무것도 인정 받지 못하는 세대를 새롭게 조직해야 하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절한 세대에게 저항과 투쟁의 진보적 언어로는 세대를 조직할 수 없다. 이것은 좀 더 이미지적인 메시지여야 한다. 흔하고 어떤 대화에도 불현 듯 끼어 들어 유머가 되거나 상처가 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어 뿐만 아니다. 실은 세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세대를 분리시킨 지난 세대의 잘난척에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이건 아주 간단하다. 운동해보지 않은 세대를 배제 시킨 잘난척이다. 이로 인해 세대는 다음 세대와의 교감을 중단했고 세대를 돌보지 않았다. 단절된 세대는 그만큼 좌절했고 사회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셈이 되었다. 연대는 보증처럼 부정적 정서를 함유하게 되었고 나만 책임지고 나만 잘되면 되는 세대가 되었다. 서로 서로를 보듬어도 지난 세대가 만들어 놓은 단절적 사회구조를 연결하거나 뚫어 내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세대는 각개로 움직인다. 누군가는 파산할 것이고 그 만큼의 잉여를 바라며 버틴다. 센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놈이 센 놈인 영화적 언어가 세대의 담론에 방점을 찍는다.

언어, 계몽, 조직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내용이다. 80년대 좌파적 언어다. 현실은 이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낭만적 개념이 저항과 투쟁을 대변해야 한다. 이를 만드는 일은 현재의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현재 진보가 단절시킨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순서를 논하자면 조직이 먼저다. 사실, 언어는 기존 세력에서 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에서 할 일이고 계몽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흘러야 한다. 이제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라 해야할 문제가 남은 셈이다. 장미빛 희망인지 미래인지... 선거는 끝났다. 이제 조직이 그것을 만들 시간이다.

2007/12/28 18:02 2007/12/28 18:02
DrunkenSTAR 가 씀 jackrhee@gmail.com.

아내와 종종 태어날 아기의 교육에 대해 논쟁 할 때가 있다. 우리의 논쟁 중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교육을 문제로 접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교육 그대로 지켜져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무너지고 교육 제도의 형식과 제도의 도입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교육 제도의 문제이면서 제도의 큰 축인 대학과 입시를 위해 학생을 둔 우리나라 대게의 가정이 견뎌야 하는 사교육비 문제가 바로 포커스이다.

아내와 나의 논쟁도 TV토론의 여러 대선 주자들처럼 포커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아내는 이명박을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이명박이나 현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게의 학부모와 같은 각론에 수긍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아내를 탓할 수는 없다. 아내의 생각은 이를테면 한국 사회, 적어도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에서 만큼은 암묵적인 합의 사항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사교육비 많이 드는 몹쓸 세상이긴 하지만 좋은 대학, 덜 좋은 대학으로 나눠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대학은 서열화 되어 있고 공교육만 제대로 개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책적으로 얘기하면 입시 제도는 폐지하되 대학 경쟁력은 키워야 된다는 말과 같다.

입시 제도 폐지, 대학 평준화 하면 학부모들이 지레 겁을 먹나 보다. 아직 학부모도 아닌 아내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여기엔 몇가지 전통적인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입시 제도 없이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냐는 것과 공부 잘 할 것만 같은 내 아이를 위한 세계적인 대학의 막연한 필요성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적이며 일류인 대학 몇 개쯤 보유한 나라에 살고 싶은 약간의 애국심과 자긍심 따위도 양념되면 제도적 문제의 촛점인 사교육비에 있어서는 못난 부모 만나 미안해 로 덮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한 패러다임 안에서 학부모의 고민은 대게가 교육 제도에 학생들을 어떻게 적용하고 적응시키느냐는 문제를 교육의 문제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 주자들이 TV 에 나와 관념적 주장을 늘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책의 관점이 과연 교육을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제도를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인지 따져봐야 할 역할은 오로지 정책 수용자에게 있다.

난 아직은 부모가 아니지만, 대게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남들처럼 제도에 적응하고 남보다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확실히 이겨주길 바란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적응력을 12년동안 치루고 남들이 일류라고 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비로소 교육은 끝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학교가 없고 가르칠 어른이 없어 애초에 배움의 기회가 없다면 그보다 희망이 없는 사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 전문고, 자립형 사립고가 없다고 해서 희망이 없을까. 교육 제도에 더 잘 적응하는 아이를 자랑하기 위한 대학 서열과 학벌 중심적 사회를 지켜야 희망이 있는 사회일까. 나는 과연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예비 부모일까.

고백하건데, 이제 5개월된 아이가 다운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소견을 듣고 아내는 무척 놀랐다. 확률적인 것이라 괜찮다며 아내를 위로 했지만 그게 어디 생때같지 않은 아이의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소리인가. 애썼지만 과연 다운증후군인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기를 수 있을까,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내의 두려움은 얼마나 클까. 아이 앞에서는 나도 보편적 염려와 갈등을 하기 마련이고 애초에 아이를 앞세워 용기를 부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 시간을 깨닫고 말았다. 생때같은 아이, 혹은 생때같지 않은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는 나름의 염려가 있다. 어떤 아이 건 간에, 아이를 가진 부모의 계급이나 정체성에 관계 없이 아이는 교육을 받을 제도적 권리가 있어야 한다. 부모의 염려는 그 권리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권리를 모두에게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협오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죽어라고 경쟁만 하면 될까. 부모는 아이를 교육 제도에 적응시키기 위해 죽어라고 벌어오면 될까. 바꾸면 안되는 것일까?

모든 아이의 출생이 축복인 것 처럼 아이들의 교육 또한 축복된 과정이어야 한다. 나는 아이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 제도를 모두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아이의 이 특별한 시간을 축복되게 하기 보다는 견디라고 고문하고 견디지 못했으니 낙오자라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있어도 어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해로운 교육 제도를 견뎌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해본적도 없지만, 나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바라며 교육을 시킬 생각도 없다. 내 아이를 특별한 학교에 보내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내고 특별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가 특별한 교육 제도에 적응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을 낼 시간이라면 차라리 널려 있는 자연을 보고 느끼는 법, 산책하는 법, 친구들과 노는 법, 남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법, 반성하는 법 처럼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것을 도우는 보통의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이 나라의 알량한 대선 주자들과 자식들 염려와 걱정 뿐인 부모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가 무지개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내도 동의해 줄까.

2007/12/12 18:08 2007/12/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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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길 지지

2007/11/19 13:07 / 생각

사람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결국은 온전한 자본의 지배를 의미 하며, 그 패해 또한 비인간적인 이해를 통해 부조리에 복무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사람 얼굴을 한 자본주의, 이것을 현실적 지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패배주의를 양념한 비판적 지지의 지류일 뿐이란 생각 입니다.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이상주의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과정의 위대한 도그마이며 이로 인해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에서 정책과 체제 변화의 실제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중요한 건 본인은 진보라고 간주하면서 찍을 사람이 없다는 세력 위주의 생각만으로 진보라는 자신의 성향이나 사상을 가볍게 버리고 마는 저항 불능의 심장에 의지의 산소를 불어 넣는 것 입니다. 진보라는 것 복잡한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자본과 시장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고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위해 진정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 얼굴을 한 사람이 진보 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정확히 권영길을 얼굴로 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 비현실적이라서, 세력이 아직 약해서 지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와의 싸움이 지루하니 스스로 킴스클럽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자반고등어가 되겠다고 자기 포기 선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누구라도 해야 세상은 천천히 진보합니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는 명백히 현실을 반영하고 세상이 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진보라고 생각 합니다. 비전이라 얘기하지만 사람을 희망으로 향하게 하는 나침반은 없고 다채로운 부패와 단일화, 대립각만 있는 정치 현실에서 꾸밈 없고 끊임 없는 진보와 공평하고 사심 없는 노동을 꿈꾸어 봅니다.

 
2007/11/19 13:07 2007/11/1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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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식별

2007/04/04 17:39 / 생각

한미 FTA 체결로 대중의 관심은 '살림 살이가 얼마나 나아질까?' 로 급선회를 하는 듯 하다. 대~한민국과 국익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대중들은 행여 국가 체면이 깎이지나 않을까,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터, 이제 한시름 놓고 차분히 계산기를 두두려 보며 대한민국과 국익 앞에 착취 당하는 민중의 뼈빠지는 삶에 대해 부르르 분노를 떨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까 싶다. 한미 FTA 의 손익 계산서 앞에 망연자실한 진보 진영에도 이번 체결을 통해 한가지 확실히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피아식별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내용은 다르지만 반대의 행위가 일치하는 수구 보수세력과의 불편한 정신적 연대를 확실히 구별 지었으며, 노무현 정권의 기회주의적 정체성인 좌파신자유주의라는 황망한 정의에서 드디어 '좌파' 를 때어 낼 수 있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따져볼 겨를이 없는 대게의 동시대인들은 한미 FTA 체결하면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살아 간다. 어떻게 나아 질 것 같은가? 라는 질문에 백이면 백 '시장 경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그것을 통해 발전을 이루는 것' 이라 대답한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오늘을 살아 남은 자들의 이러한 비극적 논리를 탓할 필요는 없다. 이제 국회 비준되고 각종 법률을 미국의 요구대로 바꾸게 되면 당장 의료보험료가 한달에 4만원은 더 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이들에게는 더 벌면 되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한달에 4만원을 더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도 말이다. 나보다 힘 없는 사람들을 지려 밟고 세운 성공과 윤택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가져야 할 보살핌의 철학을 잃은 살벌하고 무서운 사회다.
자본이 문화, 정체성, 역사, 인간성을 지배하는 이익 관계 사회에서 사상적 피아를 구별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권력의 레임덕을 돌파하기 위해 수구 보수 진영에 당당히 서는 선택을 통해 정치적 레토릭과 립싱크를 이용하여 자신보다 힘이 약한 대게의 민중들을 어김없이 지려 밟는 명백한 사상 구별을 단행했다. 철없는 실용주의적 사고가 불러오는 치명적 실수인 절차와 기술적 내용에 대한 편집증은 기어코 긴 호흡의 역사 속에 조직될 진보와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부정까지 일삼고 있다.

그가 인권 변호사로서 억압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시절을 진정성있게 보냈었다면, 한미 FTA 를 통해 수혜 받는 거대 자본과 재벌, 언론 권력의 콧노래를 신화화시키는 시간에 점점 삶의 질을 착취 당하는 대게의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아픔을 보살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인식 안에 그 따위 혜안은 지워낸지 오래다. 사실 투쟁과 저항의 시작은 피아의 식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이고 희망도 이제 시작인 셈이다.

2007/04/04 17:39 2007/04/0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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