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는 통일 전쟁이라 발언한 강정구 선생은 알고보면 위대한 학자는 아닙니다. 학자에게 그 정도 사상의 스팩트럼 조차 없다면 일단 학자의 탈을 쓴 장사꾼(등록금 받아 쳐먹는)으로 봐야 합니다. 게다가 리영희 선생에 비하면 그의 주장은 평이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 강정구 선생이 천막 강의를 하는 코 앞에서 이명박씨가 '청년의 꿈과 도전' 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고 합니다. 900명의 학생들이 이명박씨의 특강이 끝난 후 자신들의 미니홈피에 올리기 위해 이명박씨를 애워싸고 디카촬영을 했다네요. 이명박씨가 미니홈피에 올리는 거냐고 학생들과 농을 주고 받고 있었을 때, 밖에서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이명박씨의 황제 테니스 특혜 등을 풍자한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강의 중 학생의 질문(기업이 잘 돼도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처분은?)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정보기술산업 시대에서 기업이 잘 돼도 일자리가 안 늘어나는 것은 세계공통적인 현상이고 대한민국이 일자리를 만들려면 첨단분야에도 중점을 둬야 하지만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균형 발전하는 것도 필요하다"


모 이런 강의를 듣는 것도 선택의 자유이긴 합니다. 학생들은 강정구 선생의 '통일 전쟁론' 보다 첨단분야도 제조업도 서비스업도 잘되어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콧방귀 나오는 얘기가 더 유익한가 봅니다. 선택의 자유, 기회의 균등, 자신감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사회에 살아서 행복한 학생들... 선택은 자유지만,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는 '혜안'은 자유롭게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명박씨 처럼 모든 것을 돈으로 재단하는 어른의 얘기를 들으면 귀에서 꿀이 흐름니다. 사회의 모든 것을 파악한 것처럼 얘기하기 때문인데, 실은 그가 파악한 건 돈 밖에 없습니다. (돈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돈으로 다른 것들을 재단하려는 게 잘못된 것 입니다.)


그대들도 대한상공회의소 김상열 부회장 같은 얼빠진 어른이 "강 교수 수업 수강생은 취업 때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고 해서 풀 죽었나요? 걱정 좀 되겠네요. 이명박씨나 김상열씨는 어른의 탈을 쓴 장사꾼 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회에 나오는 즉시 비정규직으로 탈바꿈시켜서 2년 단위로 처분할 테니까요. 그래야 이익이 남는 답니다. 어쩌겠습니까... 선택적 차별, 망집의 눈을 가진 여러분이 선택했는데...
2006/03/30 21:27 2006/03/30 21:27
DrunkenSTAR 이 작성.

인간이 끊임없이 절대적인 자연과 환경의 지배로 부터 스스로 아우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으로써의 계몽은 신격화, 신비로움에 대한 반기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 에서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이성을 토대로 모든 현재의 부조리를 해결해줄 것을 믿는 비이성적이며 맹목적인 사회, 즉 야성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모던의 퇴행은 믿음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생긴다. 대중의 잘못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대중의 믿음 또는 절대적이라 격상시킨 대상의 쫓음에 있다. 즉, 내가 믿게 된 과정은 누가 믿기 때문에 믿게 되는 비합리적 지배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경제적 세계화를 믿고 가속화 하는 것에 약싹 빠른 현정권이 그렇고, 남의 책꽂이를 뒤집어 보고서야 안심하고 쇼핑을 즐기는 대중들이 믿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구체성에 의존한 협력 샤머니즘이다.


이러한 협력 샤머니즘은 하지 않아도 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고(음모), 해도 누구 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면책) 대중은 이미 메스 미디어에서 믿고 믿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베이컨의 합리성은 퇴보하여 기꺼이 미디어의 종속을 인정한다. 덧글 한 줄에도 소속감을 느낄 만큼 개개인은 소외되어 있다. 이런 개인의 집합속에 원자폭탄처럼 떨어지는 협력 샤머니즘은 세련된 계몽에 다름 아니다.


비합리적인 집합에 떨어지는 협력 샤머니즘은 다양하다. 그것이 매우 구체성을 띄는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처럼 보이지만, 신빙성을 잃은 집합에게 구체성은 거의 광기에 가깝다. 이러한 광기는 오로지 어떤 감각으로만 존재하거나, 이미 퇴화한 정신을 잡고 감각이 닿는 자연에 대한 계몽 즉, 이미지의 현대화에 기여할 것을 촉구한다. 윤택(이미지의 현대화)은 개발의 미덕을 통해서 이룩되는 실체인양 허구한다. 이에 대항하는 반기로써 일련의 환경운동은 탈근대화의 또 다른 계몽이다.


협력 샤머니즘에 온몸을 바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지배된 마야자키 하야오 세대들의 일반적인 특성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스토리에 열광하지만, 실은 나우시카가 정당성이 떨어진 근대화의 계몽의 만행을 고발하고 탈근대화의 화신으로써 오염된 자연과의 공생을 시도한 것에는 믿음을 거둬버린다.
(무라카미 류는 적중했다, '스토리는 본질을 모호하게 만든다' : 엑스터시)
이런 점에서 지율 스님과 나우시카는 탈근대화의 계몽에 대한 또 다른 계몽을 펼치는 계몽주의자로써 다른게 별로 없다. 다만, 보고 이해하는 이의 수준이 다른 뿐이다.
2006/01/31 13:08 2006/01/31 13:08
DrunkenSTAR 이 작성.

비록 생동감은 없었지만, 나도 싸이라는 데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이젠 없어졌다.) 2001년 송년회때 싸이를 기획했던 이람씨가 클럽을 싸이에 만들어 주십사 말해줌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30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새 주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녀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많은 대화가 없었음으로 나는 그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유를 분배하는 공동의 공간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일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모두 답사할 수 없다는 결핍의 인정과 내가 답사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엿보기가 더불어 존재하는 비정형적인 공간으로써 싸이는 신화에 가까운 텍스트가 됐다. 싸이와 같은 포탈이라는 유기적 구조속에서 개인의 답사는 변증법적 비물질로 총체화 되어 닮아가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싸이는 자유로운 개인의 사유를 비물질로 간주하고 타인의 상상력과 소통시킴으로써 비물질에 현실감을 심어주어 긴가민가 했던 정의를 단번에 믿음으로 승화 시키는 신화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단 개인은 자신의 답사가 정의하지 못했던 불완전함을 타인의 정의를 통해 믿음을 부여 받게 되며, 그로인해 자유로운 사유의 분열은 멈추게 되고 믿음을 확대하기 위한 닮아가기 신드롬으로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사유는 누군가가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에 빠져서 서로가 서로를 믿는 대변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현실은 현실임을 받아 들이자 라는 말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패배자들은 유기적 구조가 개인의 권리를 지배하는 현실의 엥똘레랑스를 현실로 받아 들이고 대중 뒤에 숨을 것을 강요한다. 싸이는 그런 패배자들을 양산하는 공동의 공간이 되버렸다.
개인의 권리와 사유가 자유롭기 위해서 하나의 세계라는 국가주의적 동원은 비판 받아야 한다. 싸이는 개인의 자발적 의지를 미끼로 보편적 권리가 확장되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사유의 분배를 배급으로 바꿔버린 하나의 세계이다. 그 공간에서는 패배자들이 사유를 배급하고 기득권에 목마른 프롤레타리아가 순서를 기다린다. 국가가 그렇다고 하는 것에 무비판적으로 동원 되는 관제와 다를바가 없다.

타인 만큼 행복함에 안도하고, 타인의 불행에 적당히 동정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다름의 차이는 오직 대중의 트랜드가 인기 순위로 매겨 졌을 때만 인정한다. 배급된 인기가 정해지면 나도나도 대변자가 되려고 줄을 선다. 이를테면, 시가를 꼬나문 체 게바라가 배급되면 그 이미지에 열광하며 그를 규정한 타인의 아티클이 배급의 파도를 탄다. 자신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일상의 영위가 불편하지만 않는 범위에서 배급된 것에 열광한다. 소수자의 보편적 권리와 제국주의의 총부리에 투쟁했었던 혁명가 체의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 오직 빨간 바탕에 시가를 꼬나문 이미지로만 날조되는 것이다. 닮아가기 신드롬에 일단 동참하기 시작하면, 체 게바라는 사랑하지만 출근하는 아침에 비정규 근로자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전단지를 받아 드는 것에는 그 열정을 거둬버린다.

현실 세계의 사회주의는 패망하였다. 개인의 보편적인 권리는 내가 처한 세계 뿐만 아니라, 내가 답사해보지 못한 세계에도 보장되어야 하는 국지주의적 소수까지 인정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책임있는 발언과 선언의 자유가 소수의 곳곳에서 들려야 함을 불안정으로 제한 받아서는 안된다. 개인의 사유가 공공선으로 보장되는 공화주의가 지극히 상식으로 받아 들여 지면서도, 유기적 구조속에서 안락하게 사유를 배급 받는 의식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세계의 딜레마를 지고 갈 의지의 결여이다. 현실 세계는 그 결여를 착취의 수단으로 개인에게 파쇼적으로 사용하였고, 의지가 담보된 개인은 사회주의와 공화주의를 자연스럽게 패망시켰다. 결여가 지속될 수록 자기 목소리를 듣고 낼 줄 아는 보통 인간으로써의 희망도 역시 패망할 것이다.
2005/04/02 20:55 2005/04/02 20:55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