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2006/12/09 01:58 / 생활
연일 강도 높은 야근에 남아 나지 않는 건 체력 뿐만 아니라 정신도 온데간데 없다. 마음은 급하고 즉석해서 신기술을 공부하며 장표에 그려내는 작업을 오래간만에 진행하다 보니 세상 물정과는 정확하게 단절된다.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부담이 교차되고 세계가 돌아가는 현상에 무감각해지면 기름칠이 잔득 된 베어링에 가동되는 밀링머신과 다르지 않은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끼니를 굶어 칼로리를 공급받지 못한 뇌는 여러가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베어링을 돌리는데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노동과 가동의 차이가 의심스러운 지점이다.

만삭이 된 아내가 걸핏하면 통증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12시가 넘어야 눈치를 보며 일어 날 수 밖에 없는 동료와 집이 멀어 아예 회사에서 자고 먹는 동료와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고 짜증을 부려 따로 따로 찢어져야 할 위기에 있으면서도 새벽이 되어야 겨우 일이 끝나는 동료들을 다그치는 나는, 악덕일 수 밖에 없는 흔하디 흔한 제도권의 상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낸 산출물로 그들의 노동이 신성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기껏해야 자본에 대한 호소라는 현실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가 진심으로 가당치가 않다.

조직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겨루는 늠름한 모습에 가끔은 허탈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을 계량주의라 폄하해도 할 수 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단, 열악한 IT 근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간극에서 미래의 삶의 질적 향상을 꿈꾸는 순진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악덕 상사의 이름이 곧 자본의 명령은 아닐지 언정, 또는 그들 스스로의 알량한 책임감이나 보람일지 언정, 현실의 일상에 던지는 노력이 미래의 변화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찾을 수도 없는데 오로지 노동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신이다. 하나의 노동에 결합된 여러 관계의 삶에게도 헌신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은 자본이 주고 비로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부담을 느낄 때이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그 부담이 말을 하면 곧 명령이 되고 패배주의와 섞여 미필적 고의로 가장된 강요가 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다른 꿈을 꾼다. 고로 그 부담도 다른 꿈을 꾼다. 그 다른 꿈의 범주 중에 대표적인 항목은 노동은 신성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소외된 노동이 바라보는 조직된 노동이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그로 인해 같은 노동에도 클래스며 계급이 생기게 되고 고질적인 분열이 일어 나면 자본은 도리어 끈적하게 들러 붙는다. 그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노동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소외된 노동에게 조직된 노동이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조직된 노동의 움직임이 독재로 보이는 지점도 그 이해의 거리처럼 멀고 평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평행이 만나는 교차점이 행복이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을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점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상호간의 이해와 관심이 떨어진 곳에서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축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로 인해 인간적인 것들도 사라졌다.
야근이 끝나기 전에, 동료들을 휘몰아 순대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 겠다.
2006/12/09 01:58 2006/12/09 01:58
DrunkenSTAR 이 작성.

어느 고장을 방문하여 그 고장이 오늘날에 이르기 위해 겪은 역사를 겸허하게 받아 들이는 태도로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식민지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세계이념적 갈등을 관조하며 바로 우리나라의 해방전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많은 식민지가 겪은 역사의 울림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실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IRA 의 탄생의 서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영화를 감상하는데 열어 두어야 할 감수성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었지만, 켄로치 감독은 마지막까지 담담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본인이 영국인이란 사실조차 잊거나 버린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감독 자신으로 부터 관객까지 펼쳐진 숙명적인 공간속에 반성의 성찰을 가득 부어 넣는 효과를 만들고 꼼짝 없이 역사의 진실 앞에 무릎 꿇리고 만다.

며칠전 강준만 교수의 기회주의로 부터 자유로운 이념이 없다는 강연을 듣고 그를 탁월한 기회주의자쯤으로 생각하게 되어 서글펐는데, 이 영화가 그 기회를 이념과 때어 내어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기회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연대에 스스로 만든 기회가 아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너져 버리는 연대가 가진 이념이 기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엄밀히 기회와 주의는 분리되어 있어야 하고 기회 자체가 속물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고장에서나 지배가 있고 피지배가 있다. 기회를 만들어 가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작동시키는 계급은 지배 계급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이란 사실 속에서 가장 허탈한 것은 지배 계급이 가진 기회라는 기득권을 피지배 계급에서 나눠주는 것이다. 기회를 투쟁하는 방식으로 받아 들인 피지배 계급에서 기회를 운용하는 방식이 터득되어 있을리 없다. 이 지점에서 기회는 이념적 잣대와 결합하여 계량이 되기도 하고 중도가 되기도 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는 아일랜드의 독립이라는 마이클 콜린스 적인 영웅 서사를 도입하지도 않으며, 독립이라는 반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 보리밭을 흔들지도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놀랍게도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성이라는 바람의 울림이고 피와 이념의 갈등으로 그 뇌관을 터트린다. 아일랜드 인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법정에서의 논쟁과 테드와 데이미안이 자치정부 조약의 승인과 지속적인 투쟁에 대해 벌이는 논쟁은 이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쾌쾌한 마르크스주의를 지상으로 끄집어 내는 놀라운 스팩타클을 담당한다. 그들이 동의하는 것은 독립이지만, 지향하는 바는 달랐다. 독립(또는 자치)만 된다면 무엇이어도 상관 없다는 단선적인 사고가 아닌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해방하지 않고는 독립이 되어도 소용 없다는 좌파적 신념이 이 영화의 바람이 지향하는 지점이다.

흔히 등장하는 좌파적 지적 허영 같은 것도 찾아 볼 수 없으면서 테드와 데이미안, 두 형제의 갈등은 눈에 띄게 낯익은 구도다. 식민지였던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는 첨예한 구도속에서 극진적 진보주의자인 데이미안이 지향했던 것은 영화속 논쟁의 한 구절로 요약된다. "우리가 당장 내일 영국군을 몰아 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모두 헛될 뿐이며 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켄로치 감독은 마르크스주의자인 제임스 코넬리를 통해 타협하는 것은 안심일 뿐, 진정한 희망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제국주의적인 폭력을 앞세운 지배는 그것이 타협을 통해 해소된다고 해도 다른 무엇으로 지배를 계속할 것임을 역사적 반복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반성케 한다. 오늘날 그 무엇은 자본이고, 그 자본속에서 누가 기회를 배풀고 있으며 그것을 투쟁하지 않은 상태에서 획득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 반복될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희망인가?

2006/11/06 02:23 2006/11/06 02:23
DrunkenSTAR 이 작성.

자본주의의 해로움

2006/07/26 15:38 /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하는 주체는 소비의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이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같을 때 얘기다. 어제 한겨례의 박노자 칼럼에서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TV 매체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이건 논란거리도 아니다. 박노자씨가 약간은 이상적인 제시를 한 부분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 낸 고도의 언론 플레이와 상업 광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노자씨가 지적했듯이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매몰 상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의식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기능적이었던 불편한 것들이 심리적인 불안한 상태로 전이된 것을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군중속의 고독이라 본다면 이러한 류의 고독에서 예외적인 인간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태를 겪고 있으면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 자체가 고문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은 대게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현 체제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즉, 당신이 있는 그곳도 자본주의 체제와 제도가 움직이고 작동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곤 한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해로움에 완전히 중독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몇몇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완전 거부를 실행하기 위해 도시와 결별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을 본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가피하게 제공하는 불평등과 불균형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버리는 상태 즉, 적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쟁에 대한 인식은 자아실현의 인식과 같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무경쟁의 상태라든지, 완전 분배의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형평성과 불균형의 상태가 지나치게 괴리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담론이다. 그 사회가 오로지 기득권의 유지를 원하고 보편 타당한 분배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을 경우에는 국지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파괴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의 사회주의적 해방의식이다.

형평성을 이룬다는 측면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가 구축해온 성장이라는 이름의 장치는 마땅히 실패했다는 판단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상태는, 자본이 원하는 체제유지를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자신을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도시근로자들과 체제유지와 반공주의에 종속된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다. GDP 와 무역수지만이 유일한 성장의 지표로 생각하게 만든 보수언론들의 책임은 이미 논할 가치조차 없어졌다. GDP 와 무역수지가 떨어지면 구성원들에게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 대며 더 많이 일할 것을 강요 하고 있는 것 조차 모르는 도시 근로자들의 의식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다. 언제든지 자본의 구조속에서 중산증이라 생각한 알량한 지위가 빼앗길 수 있는 일련의 사례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회주의 이념하의 경제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를 견제하는 보수의 입장은 대체로 현체제의 붕괴를 염려하고 그러므로 발생하는 무질서와 무정부상태를 통해 공산주의화 되는 일련의 과정을 프로파간다 한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러한 재료는 북한의 존재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그들이 경계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일어 날지도 모를 공산주의화가 자생적 이념이 아닌 북한의 위협으로 부터 생기는 것을 논점으로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북한이 없어 졌을 경우, 붕괴 되었을 경우, 또는 통일이 되었을 경우, 그들의 주된 주장을 근거하는 잠재적 위협 요소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진영은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북한의 현상유지를 원한다. 모두가 통일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민족적 소원의 붕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면 통일이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섣불리 반대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고, 정작 통일의 방식이 민족자결에 의해 진행되리란 보장도 없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을 지탱하는 북한의 존재와 미국에 대한 의존은 통일의 방식에서 조차 미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보수를 넘어 신자유주의의 체제속으로 급속히 변질된 미국의 패권주의가 비밀스럽게도 북한의 붕괴와 함께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정을 선언한다고 했을 때 남한의 보수가 이를 반대할만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계급간의 격차가 지나치게 괴리된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해소에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놓여진 그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 통일을 논해야 하고 혁명을 진지하게 담론해야 하는 상황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작금의 문제를 좌와 우의 날개짓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태세는 결국 사회대변혁을 요구 받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20세기 초반에나 일어날만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 물론 그럴수 있다. 자본주의가 더 그 해로움을 전파하면 할수록 언제든지 판을 바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한시대를 풍미하며 살고자 희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속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마땅한 인간적 사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6/07/26 15:38 2006/07/26 15:38
DrunkenSTAR 이 작성.

WTO 나 FTA 처럼 미국이 꾸며가고 있는 체제가 그들이 행한 온갖 악행에 비해 중장기적이란 의미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인 자기 분열의 이론들이 유기적 합체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일단 원인을 모호하게 만들게 되면 책임 소재상 하이라키 구조의 상층부는 넓은 하단의 유기적 조합 때문에 소재를 규명할 수 없게 되고 좋던 나쁘던 그 영향은 구조의 하층부에 가장 포괄적인 영향이 미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점은 좋던 나쁘던 하층부에도 미쳐야 할 영향을 때어 내어 나쁜점 80%를 하층부에 지속시킨다는 점이고 좋은 영향을 취해가는 먹이사슬의 상층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구조체를 WTO 나 FTA 가 실행한다는 것이다.

한미 FTA 를 반대하는 세력은 이 협정의 전반적인 의제에서 볼 수 있듯, 거의 모든 경제구성체에 대한 포괄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계급의 입장에서 서로 이해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반대 담론을 내고 있기 때문에 짐짓 범국민적인 여론이라 볼 수 있지만, 그 논리는 미시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한미 FTA 를 반대하고 협상 중단를 요구하는 반대는, 공화적 공동체와 소수자 입장에서의 반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FTA 의 반대는 반미의 입장이 명확하게 들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구적 반공주의자들에게 친북세력이라는 색깔론을 듣기 마련이다. 소수자의 입장은 계급성과 관련이 없다 할 수 없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선험적 계급성으로서의 노동자와 농민이,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유령처럼 떠 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적 열세를 규정하던 소수자의 정의는 시민적 권리와 인권으로 이양되었고 그로 인해 투쟁의 주체는 광범위하게 억압 받고 있는 모든 개인으로 재정의 될 필요가 있다. - 여기에도 억압 받고 있고, 억압 받을 수 있는 시제의 규정이 있어야 겠지만 언어 도단을 피하고자 넘어가자 - 이러한 반대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적 체제에 생리적으로 반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소수자를 절멸시킨다는 선견적 태도에서 나온 의지로 볼 수 있다. 한미 FTA 를 통해 소수의 지배 계급들이 누릴 이익과 권리를 다수의 권리 소수자와 공동체를 위해 분배되어야 하다는 점은 응당 한미 FTA 의 반대와 중지 요구자들의 이념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반대는 한미 FTA 가 액면적인 경제 협정이 아니라 평화정착을 저해하는 각종 안보적 요소들까지 함유하고 있다는 범위까지 통찰하게 됨으로써 FTA 찬성론자들인 신자유주의자들과 매파들에 의해 불순 분자로 매도 되는데, 이 지점이 세계를 혜안하는 안목이 미국에 쏠려 있는지 진정한 세계와 민족에 있는지 구분하는 명료한 잣대가 된다. 덧부치자면, 한미 FTA 반대, 중단론자들은 대체로 FTA 자체를 반대한다. 즉 다른 나라와의 FTA 도 반대한다. 열세적인 국가에 대한 공세적인 경제와 제도를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점 또한 공동체적 반대의 핵심이다.

황우석씨를 통해 홍역을 치루고 있는 국익 이론이 한미 FTA 반대 여론과 같이 한다는 점은 특이할 만한 내용이다. 지금 한미 FTA 를 하게 되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대는, 역으로 국익이 된다면 다른 나라와(미국조차도) 체결하는 FTA 는 찬성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반대는 이를테면 한중 FTA 는 대체로 찬성하는데, 아직도 중국이 경제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못하다는 호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다. 한미 FTA 를 반대하지만 지금은 반대한다는 논리에서 쉽사리 FTA 지연의 논리를 도출한다. 이 협정을 천천히 진행하여 챙길 국익은 챙겨야 한다는 반대가 결국은 국익이 없으면 하지 말자는 강경한 자세로 변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러한 반대는 국가적 측면의 접근 방식을 통해 국가가 취하는 이익이 소수 이익집단에서 구가하는 이익일 뿐이라는 FTA의 근본 영향을 최대한 감추고 있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공동체적 이익이 아니라 집단 이익의 계통을 밟아 간다는 점, 따라서 집단의 이익이 되는 다른 나라와의 FTA 는 찬성한다는 점은 보호 받아야 할 나라의 보호 받아야 할 민중들에게 피지배를 강권하는 미국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논리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우파적 반대라도 끌고 가야 한다는 담론이 있다. 수세와 공세의 논리에서 수적인 충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국지적 혁명 역사를 작동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미 FTA 에 대한 팩트를 토론하는 몇몇 의미 있는 자리에서도 드러난 정부의 허구와 난무하는 추정치는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선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서 계상된 지표는 오로지 자본의 성장과 유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탄력성이 적은 쪽은 찬성을, 많은 쪽은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자연스럽게 계급을 불러 온다. 물론, 이러한 개급 관념이 반대 시위로 표출되는 시민운동의 현장에서도 대체로 동일하게 가지는 관념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계급과 집단의 논리가 지나치게 지배하는 반대 현장의 분위기는 소박한 개인이 접근하기에 다분히 위협적이다. 반대의 논리를 실질적 반대의 성과로 이끌기 위한 수(數)적 저항이 필요한 시기일 수록 그 캐즘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 또한 현장을 엄습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과 관념 때문임을 반성해야 한다. 그래도 강경한 한미 FTA 의 중지 선언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 계급적 연대감의 회복을 성장만으로는 풀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한미 FTA 를 추진한다는 정부의 생각이 얄팍해지지 않기 위해서 조치해야 할 이익의 재분배 장치는 애당초 없는데다가, 그나마 추진되던 개혁이라는 소극적 이름조차도 연대감은 커녕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공동체를 부양하기도 전에 수구우파 세력에 의해 와해 되어가는 현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내가 한미 FTA 를 반대하는 감수성은 그것의 중단과 FTA 체제 자체의 보이콧에 있다. 다만, 그 공동체의 경험이 집단이나 거대 깃발의 기치 안으로 무작정 스며들거나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혁명의 순간을 잃어버린 또 다른 광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에 대응하는 가치가 자본이 될 수 없음을 지향하는 세계관은 공동체에게, 개인이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마땅한 가치의 보존을 요구한다. 한미 FTA 처럼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자본의 역할을 증대하는 이러한 외부적 요소에 대한 반대에 있어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인격체의 인간으로서 적당한 지위를 찾지 못하고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는 공동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한미 FTA 를 반대하여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고귀한 지향은 개인이다. 개인으로서 그것을 반대하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저항, 개인에게 처해지는 집단의 능욕에 대한 저항, 대체로 권력이 개인에게 저질렀던 폭력을 한미 FTA 는 자본을 도구도 중장기적으로 치루려 한다. 이것은 저항조차 거세한다. 천천히 지속적인 능멸을 통해, 익숙함과 달콤함을 번갈아 사용하는 자본의 힘을 통해 개인의 모든 것은 집단에 예속될 것이다. 개인이 지니는 모든 지향점은 집단의 폭력과 억압 앞에 무기력하게 파멸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반대한다. 개인을 받아 들이는 모든 방식, 그 개인들의 열정과 저항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가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일 것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개인에 있어서도 말이다. 한미 FTA 와 FTA 체제는 그것을 무시한다. 그래서 나는 한미 FTA 를 반대한다.

2006/07/13 22:05 2006/07/13 22:05
DrunkenSTAR 이 작성.

한미 FTA 의 이해를 위해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든지, 몇 권의 경제관계 서적을 읽어 봐야 하고, 하다 못해 정부, 국제 기관의 비밀문서를 분석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미 FTA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 정론지가 아닌 사실 정론지의 검색창에 '한미 FTA' 를 입력하고 위에서 부터 5개만 읽어 보면 더 이상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GATT 4조도 모르는 김종훈 협상 대표를 내세워 1차 협상이 완료되었지만, 현재 한미 FTA 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미 FTA 는 IMF 와 같은 변혁적 구조 조정의 시발점이기도 하지만 IMF 는 그래도 빌린 돈을 갚기만 하면 IMF 가 요구하는 그들만의 프로세스에서 벗어 날 수는 있다. 불행이도 한미 FTA 는 그렇지 않다. 돈도 빌리지 않았고, 식민지도 아니면서 중단 없는 그들만의 프로세스로의 변혁을 요구할 뿐이다. 당연히 자생적인 토양을 기초로한 농업이나 문화는 그 프로세스에 적응할 수 없다. 정확히 얘기하면 미국에서 한국쪽으로 쏟아내는 일방향적 제도와 자본의 무한 이동과 파괴이다. 미한 FTA 의 일방향성일 뿐이다. 수치적으로는 GDP 가 상승하던데? 그렇다. 상승할 수도 있다. 노동자인 당신의 GDP 가 아닌, 삼성 임원이나, 은행의 고위 간부의 상상할 수 없는 연봉이 오르는 것이다.

1차 협상이 마무리 되면서 단순하게도 한미 FTA 에 견제와 은폐의 원리가 극명하게 작용하고 있다. 어차피 참여정부라는 집권세력은 반도를 미국에 바치고 농민들을 내쫓은 농촌으로 돌아갈 궁리에 열중인지라 제껴두어도 무방하다. 국민이 뽑은 국회는 유럽의 경제통합과 맞먹는 파급효과를 미칠 조약 체결을 앞두고 사학법 재개정이라는 대장균을 학교 급식법에 투입하려는 찰나다. 어차피 한미 FTA 가 되면 그들이 지키고자는 잘사는 집 자식들은 사학이고 공립이고 간에 모두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갈 텐데 너무 빡빡할 것도 없다. 어차피 미국과 더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운 한나라당이나 이참에 미국에 반도를 바쳐 그 충성심을 제고하여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열우당의 무의식적인 동업자 정신은 본인들이 대변하고 수호해야 할 국민들을 적당히 편가르고 어떠한 견제도 하지 않는 오래간만에 아름다운 화합을 보이고 있다.

국제관계라고는 미국과 한국의 관계 밖에는 관심이 없는 민족 정론지의 논설인들은 한미 FTA 를 알아 보자는 지식인들을 역시 불온한 세력으로 싸잡아 조만간 배후 빨갱이를 색출할 태세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국제관계가 개인관계가 아니라는 정상적인 생각만 있다면 1차 협상 자료에 대한 공개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동등한 주권 국가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을 경우, 그 체결이 추상적인 국가 개념의 몰입이 아니라면, 국민, 영토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건 만화책에서라도 가르쳐야 되는 것인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어떻게 체결했냐고 보자는데 시치미 뚝 때고 있는 음흉스러움을 통해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역사에 기록되기 싫은 세상의 모든 오만과 독선이 가득할 희대의 갑을계약이 아니 다음에야 제나라 국민에게 공개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솔직히 그 악소리 날 체결 조항을 찬찬히 읽을 용기를 가진 노동자가 몇이나 될지도 의심스럽다.

이제라도 국회가 화합을 끊고 견제의 장을 마련하길 희망한다. 그런 싸움을 하라고 국정감사나 특검 같은 멋진 제도와 법이 있는 것이다. 초극의 정념으로도 인정할 수 없지만 민족 정론지라는 그대들이여, 정보 공개만이라도 사실 정론지들과 연대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새들의 하얀 배와 같은 희망일 뿐, 날아가는 새들의 하얀 배를 우리는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죽을 줄 알면서 가는 고된 걸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기로 각오한 상태일 뿐이다. 죽기를 각오한 자신감으로 무장했다면 더더욱 그 자신감을 믿지 못하겠다. 노동자와 농민과 같이 죽기로 각오한 숭고한 모습을 먼저 보여주던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자신감의 연유는 제나라 이웃을 짓밟고 미국과 더불어 잘 살아 보겠다는 각오 아니겠는가... 아~ 이 썩을...

2006/07/03 23:41 2006/07/03 23:4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