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보다는 대한민국으로 즐겨 불리우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은 것이 설령 공부를 못해 자꾸만 떨어지는 시험과 충분히 연관성이 있었지만, 가끔은 행운, 하지만 총체적으로 불행한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도피 유학이 실상 당시의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비록 몇 번 없는, 없을, 설명 가능한 운명이 아닌가 한다.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살아야 겠다며 특별할 것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되면, 기필코 내 제도권의 삶을 극복하고자는 의지 때문에 스스로 헐거운 무장 운운하며 자발적인 갈등을 유발한다. 남자가 36살이나 되었는데 늙으신 부모님 챙기는 것은 소홀하면서 홀트아동복지회다, 시민단체다, 고래다, 달마다 기꺼이 호주머니를 열어주는 모습에 혀를 차는 낯익은 동시대인들에게 힘껏 적도의 열정 같은 주장을 하고픈 갈등의 반동에 휩싸인다.


통계를 빌어 한반도의 남쪽에서 가기 싫은 곳을 가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온 남자가 36살이 되면, 키 2개, 통장 2개, 보험 증서 2개가 생긴다는데 실은 나를 그 범주안에 넣는다면 티도 안나는 기부는 죄의식에 대한 면죄부일 수도 있고, 자본가의 동정어린 적선으로 본다한들 무엇이 다르다고 강성 외침을 지를 수 있는 적절한 논리 보다 변명의 외침을 펄럭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기득권과 권력을 가진 자를 비판하는 일갈 현안의 통찰을 즐기기 시작하고, 사회와 역사에 책임감이 없고 도덕을 뽑아 까마귀 밥을 준 기득권자들과 인간이 그대로 공산품이 되는 곳에서 흠뻑 적셨던 정신에 감성의 진정성이 있었을까.


키도, 통장도, 보험도 없는 학생이었다면? 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듯 이념과 행동이 곧 진정성이 아니었겠는가, 나는 분명 그 운명을 만회하려는 36살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도피는 학습부진아의 부적응이 아니라 안전한 이념과 예상된 강성에 대한 격리였고, 이 설명 가능한 운명이 내 상념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한다.


현안의 통찰은 스포츠가 아니다. 즐기며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이유로 안타깝고 단호해야 한다. 태도에 대한 반동적 역설은 명랑, 즐거움이 아니라 진지, 숭고이어야 한다. 나도 모르던 강성과 감성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원했다면 단순히 자격을 얻기 위한 적빈한 자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 내 흑담즙질한 세계의 담즙질한 변화가 어떻게?의 요구였던 것은 무엇보다 명징하다.
아웃사이더의 경외적 매력에 빠져 주류 사회의 좌파적 시뮬라크르는 아니었는지, 비판 자체의 멋스러운 표상에 눈이 먼 패션주의에 매몰된 것은 아닌지 반성. 그리고 뜻깊은 사과가 필요한 때다.
2006/03/23 19:18 2006/03/23 19:18
DrunkenSTAR 이 작성.

비록 생동감은 없었지만, 나도 싸이라는 데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이젠 없어졌다.) 2001년 송년회때 싸이를 기획했던 이람씨가 클럽을 싸이에 만들어 주십사 말해줌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30여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새 주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녀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많은 대화가 없었음으로 나는 그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유를 분배하는 공동의 공간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일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모두 답사할 수 없다는 결핍의 인정과 내가 답사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엿보기가 더불어 존재하는 비정형적인 공간으로써 싸이는 신화에 가까운 텍스트가 됐다. 싸이와 같은 포탈이라는 유기적 구조속에서 개인의 답사는 변증법적 비물질로 총체화 되어 닮아가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싸이는 자유로운 개인의 사유를 비물질로 간주하고 타인의 상상력과 소통시킴으로써 비물질에 현실감을 심어주어 긴가민가 했던 정의를 단번에 믿음으로 승화 시키는 신화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단 개인은 자신의 답사가 정의하지 못했던 불완전함을 타인의 정의를 통해 믿음을 부여 받게 되며, 그로인해 자유로운 사유의 분열은 멈추게 되고 믿음을 확대하기 위한 닮아가기 신드롬으로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사유는 누군가가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에 빠져서 서로가 서로를 믿는 대변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현실은 현실임을 받아 들이자 라는 말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패배자들은 유기적 구조가 개인의 권리를 지배하는 현실의 엥똘레랑스를 현실로 받아 들이고 대중 뒤에 숨을 것을 강요한다. 싸이는 그런 패배자들을 양산하는 공동의 공간이 되버렸다.
개인의 권리와 사유가 자유롭기 위해서 하나의 세계라는 국가주의적 동원은 비판 받아야 한다. 싸이는 개인의 자발적 의지를 미끼로 보편적 권리가 확장되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사유의 분배를 배급으로 바꿔버린 하나의 세계이다. 그 공간에서는 패배자들이 사유를 배급하고 기득권에 목마른 프롤레타리아가 순서를 기다린다. 국가가 그렇다고 하는 것에 무비판적으로 동원 되는 관제와 다를바가 없다.

타인 만큼 행복함에 안도하고, 타인의 불행에 적당히 동정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다름의 차이는 오직 대중의 트랜드가 인기 순위로 매겨 졌을 때만 인정한다. 배급된 인기가 정해지면 나도나도 대변자가 되려고 줄을 선다. 이를테면, 시가를 꼬나문 체 게바라가 배급되면 그 이미지에 열광하며 그를 규정한 타인의 아티클이 배급의 파도를 탄다. 자신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일상의 영위가 불편하지만 않는 범위에서 배급된 것에 열광한다. 소수자의 보편적 권리와 제국주의의 총부리에 투쟁했었던 혁명가 체의 진정한 사유가 아니라 오직 빨간 바탕에 시가를 꼬나문 이미지로만 날조되는 것이다. 닮아가기 신드롬에 일단 동참하기 시작하면, 체 게바라는 사랑하지만 출근하는 아침에 비정규 근로자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전단지를 받아 드는 것에는 그 열정을 거둬버린다.

현실 세계의 사회주의는 패망하였다. 개인의 보편적인 권리는 내가 처한 세계 뿐만 아니라, 내가 답사해보지 못한 세계에도 보장되어야 하는 국지주의적 소수까지 인정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책임있는 발언과 선언의 자유가 소수의 곳곳에서 들려야 함을 불안정으로 제한 받아서는 안된다. 개인의 사유가 공공선으로 보장되는 공화주의가 지극히 상식으로 받아 들여 지면서도, 유기적 구조속에서 안락하게 사유를 배급 받는 의식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세계의 딜레마를 지고 갈 의지의 결여이다. 현실 세계는 그 결여를 착취의 수단으로 개인에게 파쇼적으로 사용하였고, 의지가 담보된 개인은 사회주의와 공화주의를 자연스럽게 패망시켰다. 결여가 지속될 수록 자기 목소리를 듣고 낼 줄 아는 보통 인간으로써의 희망도 역시 패망할 것이다.
2005/04/02 20:55 2005/04/02 20:55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