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은 복제와 달라서 엄연히 예술은 아닌 것이지요. 글세요, 획일화되고 기계화된 사회에서 위작은 카피의 의미로서 효율적인 배포를 할 수 있는 기능으로 분류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카피라는 기계적 기능이 아닌 위작과 같은 예술과 기술의 오묘한 위치에 있어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적 감흥을 배포 내지는 전이 하려는, 아주 좋게 봐줘서 이 훌륭한 예술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 한 순수한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겠지요. 여기까지는 사회적 합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원본과 사본, 즉 위작의 판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입니다. 이를테면 예술적 사조에 걸맞게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여 밖이 안이고 안이 밖인 원본이 없는 세계, 바로 초현실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 과연 원본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요?

사실, 오늘날의 위작은 위작 자체의 논란을 비켜갑니다. 위작 자체에 대한 검증은 차라리 순진합니다. 예를 들어, 사본인줄 모르고 또 사본을 배껴서 나온 것은 사본의 사본인지, 비록 사본이지만 사본 자체가 사본의 사본에게는 원본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지 아닌지 판별도 안되기 때문 입니다. 즉, 어렵사리 사본이라 또는 위작이라 판별해도 그것이 원본의 위작인지 위작의 위작인지 알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기계적 사본과 달리 위작은 예술의 경계와 아주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작은 사본처럼 널리 공유하는 기계적 기능만을 함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즉, 윤리적이며 상업적인 목적입니다. 예술적 윤리는 일단 버려야 상업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윤리는 합목적적이진 않겠습니다. 일단 위작이 만들어지면 위작을 간직하고 혼자 감상하며 나름대로 감흥을 받는 것이 아닐테죠, 그렇다면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일단 위작은 논란을 비켜서 목적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유통 과정을 거칩니다. 상업적인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상업적인 유통을 거쳐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 내는 과정, 즉 위작의 세탁 과정을 거치게 되있습니다. 이때, 이 믿음에 가장 훌륭한 조력자는 위작의 배포자 뿐만 아니라 원본에 비과학적인 신념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원작자의 가족이거나 원작자를 대표, 대변할 수 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측근이라면 이 조력자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박수근과 이중섭선생의 위작 논란이 있던 작년 가을께, 제주도에 남아 있는 이중섭선생의 셋방에는 여전히 서귀포 섶섬, 그 너머 가족이 살고 있는 일본을 바라보는 이중섭선생의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섭선생의 평생 꿈은 가족과 함께 소박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는지요? 이중섭 미술관에 가보면 이 애틋함으로 절절한 편지로 인해 사뭇 그리움과 소의 깊은 눈망울이 닮아 있다는 것을요. 이중섭이 이쁜 소에 반해서 소를 그렸다는 단순한 동기가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제주도에는 이쁜 소들이 많습니다. 방목하여 생긴 그 이쁨과 이중섭선생의 삶은 아주 달랐지요. 사람들에게 이것 저것으로 당하고 결국 적십자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중섭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그저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정도. 대신에 위작논란, 경매장에서 수억원에 거래 쯤이 오늘날 우리가 만든 이중섭선생의 스탠스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 검찰은 이중섭선생 뿐만 아니라 박수근선생의 작품 2천8백여점이 모두 위작이라고 판명했습니다. 여기에는 이 위작을 배포한 정황이 있는 김용수씨와 조력자로서 공모한 정황이 있는 이중섭선생의 아들 이태성씨가 끼어 있습니다. 박수근선생과 이중섭선생이 서양미술사의 폴고갱이나 반고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국미술의 패트런이라 할 수 있는 김용수씨, 이중섭선생에 관한한 그 누구보다 애정 어린 사무침을 가져야 했을 아들 이태성씨가 "호당 얼마"의 서글픈 상업주의에 복무한 결과입니다. 예술? 이것도 이젠 가격 입니다. 세계적으로 가격이 비싼 작품을 내걸고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야 말로 문화적 유희인양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태도가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위작 입니다.
2007/10/23 10:12 2007/10/23 10:12
DrunkenSTAR 이 작성.

스스로 본인의 그림에 상징이 없고, 어떠한 의미도 감추고 있지 않다고 말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뜨의 그림 앞에 서면 정작 '무슨 의미일까' 자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현실을 창조하는 데는 과거의 일에 철저히 관심을 끊는 방법이 있다. 보이는 것을 믿고(믿는다고 생각하고), 현실의 실제적 사물을 자각하는 것은 과거의 현상을 미메시스 하는 행위일 뿐 창조의 행위는 아니다. 눈에 대한 적응력이 진리 보다 우위에 있는 현실주의적인 우리들은, 과거를 모방한 현재의 믿음에 해석을 달리하거나 새로운 언어로 수정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사물이 주는 교훈에 충실하기만 해도 상식적인 사람으로 오늘날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게의 사람들은 사물을 고전적으로 이해하고 언어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성이나 초전도적인 유행 때문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일단 믿어 보고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아내는 믿음과 합리화의 황홀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러한 부류의 관심은 전통에 있기 때문에 미적 관심 보다는 예측 될 수 있는 의미 관심에 더 민감하다. 앞과 뒤가 없고, 안과 밖도 없는데다가 심지어는 새와 잎이 한몸인 마그리뜨의 그림에서 전통의 반응은 대체로 희안함이거나 괴리일 것이다. 애써 아는체를 해보아도 작품과 나 사이에 좀처럼 괴리감이 가까워지지 않을 때 현실과 소외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작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데,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현실주의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일까? 마그리뜨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며 칼리그램을 한다. 온통 이치에 맞지 않고 직관되지 않는 현실속에 존재하면서도 그런 존재자를 만나면 반갑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한계를 구원하기 위해 마그리뜨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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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 1926
캔버스에 유채
139.5 x 105.5cm
어떤 머리틀을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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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1964-65
캔버스에 유채
41 x 33cm
더비 해트도 아니고 파이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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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추구, 1963
캔버스에 유채
130 x 97cm
죽은 물고기는 생선이다.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는 이유가 진실이나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구에 있을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행위에 진실이 묶여 있고 진실은 더 이상 주목 받지 못하고 죽어간다. 죽은 것을 살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활동은 재현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죽은 것을 통해 현실을 보게 되면 그때 보이는 것이 진실일까?
보이는 것만 믿어도 상식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일차원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실현되기가 실로 어렵다. 노빠의 좌파신자유주의의 낯설게 하기가 그랬고, 황빠의 말씀만으로 존재한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가 그랬다. 보이는 것 자체가 저열한 분열을 일삼았고 광기만을 지닌 텍스트들이 난무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계는 정치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 자체가 초현실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엄청나게 늘어난 정보량, 감당하기 힘든 패러독스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의심치 말아야 할 세계가 있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우상안에 갇히기를 원한다. 편안한 세상, 안락한 금가르기의 현실에 필요한 건 죽은 것을 살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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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바다, 1951
캔버스에 유채
65 x 80cm
그럼, 여긴 바다속??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는 1937년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일에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는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공화국 정부관 주최의 전시회에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피카소는 죽음에 대항하는 삶의 편에,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이나 큐비즘이 부르주아지적 현실을 거부하는 정신에서 비롯 됐다는 점에서 대게의 큐비즘 작가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예술적 영감에 의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독재에 저항하는 논리적 귀결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파괴를 창조의 미덕으로 삼고 평화를 권력의 반동으로 연관지었던 시대에 피카소의 입체주의적 양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결집을 만들어 냈으며 정치적 준거로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피카소의 열정이 지나쳐 주위의 사람들을 망치거나 분열시키고 가족들 마저 그를 경멸하는 것을 읽으면서,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점령한 열정적 젊음과 좌파 지향을 한없이 부러워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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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349.3cm * 77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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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년
2007/04/15 04:02 2007/04/15 04:02
DrunkenSTAR 이 작성.

이중섭의 방

2006/09/08 04:31 / 관심
제주도 서귀포에는 이중섭 화가가 세들어 산 방이 있다. 마당 앞으로는 섶섬이 보인다. 섶섬은 천연기념물 18호다. 이중섭 작품의 위작 논란은 위력적이다. 이중섭 미술관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눈을 부비는 관람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나 또한 그따위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셋방을 나서자 마자 보이는 섶섬을 이중섭이 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름다운 풍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섶섬 넘어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일본쪽 방향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중섭이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을 그렸던 때는 그의 가족들이 일본 송환선을 타기 전이다. 그가 그린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에서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리움을 예견했을리는 없겠지만,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편지를 읽으며 그 그림속에 그리움은 어렵지 않게 묻어 난다. 그의 방앞에 서 보았다. 섶섬이 보이고, 물론 지금은 각종 현대식 건물과 전기줄이 시야를 좁히지만, 그도 이 자리에서 저 섬을 보았겠지...

제주도에는 말만큼이나 소도 많다. 이중섭이 이쁜 소에 반해서 소를 그렸다는 단순한 동기가 믿기지 않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제주도에는 이쁜 소들이 많다. 방목하는 자유가 소도 말도 이쁘게 한다. 유목하는 사람들이 가장 태초의 웃음이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동물도 그렇다. 다만, 이중섭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들에게 당하고 친구들에게 모함 받은, 정에 굶고 사무침에 서러운 사연 많은 표정이다. 오늘날에도 그는 대접 받거나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 한국 미술의 두 거장(이중섭과 박수근)이라며 호들갑스럽기만 하다. 전쟁 후, 그리고 오늘 미술을 대하는 패트런들의 관심은 여전히 호당 얼마로 측정 가능한 미술에 열중한다. 이중섭과 박수근이 현대 한국미술의 역사적 획이었다면, 서양 미술의 폴 고갱과 반 고흐 만큼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다못해 대중 미술 서적에서 조차 이 두 예술가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중문 단지에서 벗어나 이중섭 미술관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셋방 앞에 서서 섶섬을 바라보길 권한다. 50년전 이중섭이 바라보던 그 시야로 말이다. 안타까운게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2006/09/08 04:31 2006/09/08 04:31
DrunkenSTAR 이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