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석방될 수 있는 가 보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40여일 동안 사람들은 두 가지 분노를 표출했다. 하나는 탈레반에 대한 분노, 이것은 두 명의 피랍자가 살해 당하면서 군사행동 여론까지 치닫는 보편적 분노를 자아 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분노, 기독교의 무차별한 선교 방식이 화를 불렀고 그동안 기독교가 벌인 예수님 판매 방식의 기독교 선교에 치를 떨던 대중들의 이유 있는 분노를 불렀다. 이유가 있어도 찬찬히 뜯어 볼 일이지만, 한국사회가 그렇게 교양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전체의 합의인양 대중을 등에 업고 덧글 폭력에 나선 사실은 이미 주지적이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아프간 피랍자들이 곧 전원 석방될 것이란 보도(아직 확인은 안됐지만)가 나왔고, 그것도 몸값을 지불할 것으로 예상되자 서서히 구상권 얘기가 불거지기 시작한다.

"구상권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의 빚을 갚은 사람이 다른 연대 채무자나 주된 채무자에게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대중의 분노가 증오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구상권이 존재한다면 증오를 이해하는 차원도 달라져야 한다. 기독교가 종교의 믿음과 예수의 헌신을 자본적으로 해석하여 교회를 상업화 시켰던 한국 종교의 부조리에 가해지는 분노를 이해한다 해도 피랍자들에 지불 될지도 모를 몸값에 대한 국민 구상권 주장은 공동체도 이성도 없는 자본교환적 존재들의 폭력일 뿐이다. 응당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에게 '몸값은 세금' 을 주장하는 소위 애국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성마저 피곤하게 만든다. 마치 국가가 세금을 푸대자루에 싸 담아 피랍자 가족을 대신하여 탈레반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몰고 가는 발상은 예수를 상업화시킨 종교와 이론의 야합만큼이나 창조적이다.

누구든 적어도 자기가 준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되는 반대급부가 없다면 남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 천박한 공동체 정신에 이러한 계약 관계가 마치 합리적인 공동체인양 선동하는 등가의 원칙속에 탄생한 OECD 가입국, 대한민국을 잘 살펴보면 개인은 본질적으로 항상 분리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동체적 문제와 정당한 비판의 대상을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는 자정이나 학습 능력이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더 이상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다만, 실체적 개인과 관념적 대중만으로 이루어져 있게 된다.

이를테면, 구상권의 주장은 돈이 없으면 납치되도 풀려 날 수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개인은 이 상황이 개인과 관계가 없고 세금이 개인을 위해 한 일이 없었던 증오와 결부시켜 주장하게 된다. 굳이 '네 가족이 그 상황에 처했어도?' 라고 물어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분리 되어 있다는 해석으로 무마할 일이 아니다. 애국과 국익을 동일 시 하고 애국한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애국은 대게가 남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 뿐이다. 생업하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국가와 민중을 이반시키고 공포를 유발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게다가 대게가 국익이 아닌 것도 일단 관념적 애국의 범주 안에 들게 되면  반대 없는 동의와 다수결의 원리로 비판적 소수를 집단으로 폭행하기 일쑤다. 이쯤되면 국익이나 애국이나 개인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국익과 개인의 이익을 동일시 하고 국가의 손해를 개인의 손해로 일반화하게 된다. 개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대도 국가에 물어 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따위에 빠진다. 자신이 어떤 폭력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상태, 판단 상실의 증후군에 빠진다. 이러한 증후의 상태에서 공동체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함께 보호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의무와 권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국가의 이익이나 손해 따위로 매장된다. 이건 사회도 공동체도 아니다.

근대 공화적 공동체에 세금의 위치는 국가적 국익이 아니라 공동체적 공익이다. 세금을 어떻게 국가의 쓰임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동안 정부가 행해 온 부패를 견주어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의미는 정당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프간에 피랍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우리의 세금이라면 그동안 아프간과 이라크 파병에 세금을 쏟아 부은 정부의 허튼 쓰임새보다 휠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들을 싸잡아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치부하는 것은 옮지 않다. 그들의 문제와 살아 돌아와야 하는 문제는 분리시켜야 정당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또는 대중이 구상권을 주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건 파렴치한 행위다.

2007/08/26 18:05 2007/08/26 18:05
DrunkenSTAR 이 작성.

흔히들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균형' 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불행이도 이러한 충고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대게가 시각에 대한 균형을 주장하는 사람조차 균형에 대한 균형 잡힌 기준이 없기 때문인데다가 현상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관념하는 자세에 있어서 균형이란 양비일 수 밖에 없다. 흔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양비론적 시각은 현상이나 현안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견해가 없는 사실에 대한 사실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주장도 반대가 없을 수 없고, 어떠한 견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비판적인 시각은 모두가 만족하고 어떠한 반대도 무릎쓸 수 있는 균형이 아니라, 반대의 의견에 대해 반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시각에 대해 기꺼이 연구하는 자세이다. 이를 위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정치적 레토릭으로 분류하고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이는 어떠한 내용은 견해가 없는 맹목적인 내용에 불과하고 대중들의 시선에 쉽사리 안착하고 만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진보하는 역사는 없다. 사회와 이념에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 이항대립의 구도속에서 역사의 투쟁이 존재하게 된다. 그 속에 균형이란 언제나 기회주의였고 회색분자들의 대중적 논리로 기록되어 있다.

집권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과 비난의 이유는 집권세력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386으로 대변되던 진보의 세력들이 너도 나도 전향 선언을 해버리는 기막힌 현실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앙가주망은, 그 변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한 날조된 구실로 전락해버렸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모든 사회적 부조리 현상에 '노무현 때문' 이라는 무조건적인 비난을 일삼으면서 스트레스를 카타르시스로 승화시키곤 한다. 균형 잡힌 집권세력이 만만한 대상이 되고, 그 균형 잡힌 세력이 민중들에게 한 가장 큰 업적이 담론의 카타르시스 뿐이란 사실은 절망적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해악이 미시 담론의 둘레에서 집권이라는 지도적 세력에게 확대되었을 때, 그 사회가 겪는 관념적 발전을 얼마나 후퇴시키는지 깨닫게 만든다.

진보는 보수의 가치보다 우월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보수적 시각으로 볼 생각이 없다. 다만, 나의 성찰이 부족하여 때로 보수적인 태도와 행위가 있었을 때 마땅히 그것을 반성하려는 자세만 가졌을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결연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균형 잡힌 시각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나의 진리를 배반하지 말자는 의지는 성의껏 다지고 있다. 많은 역사에서 그 진보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생애를 점령한 두 가지 지향점인 '젊음' 과 '좌파이념' 에 나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절대 균형이라는 허구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2006/11/01 23:44 2006/11/01 23:44
DrunkenSTAR 이 작성.

구별

2006/10/18 03:17 / 생각

북한의 핵실험으로 말미암은 갖가지 사태는 민족주의자들과 사대주의자들의 구별, 민족주의에 기댄 기득권과 이념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풀뿌리 민중을 구별 짓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핵에 대한 국제 정치적 논리와 수많은 민중들을 겨냥한 잠재적 위협이라는 못마땅한 구성을 이룰 수 있다는데 그 본질이 있다. 국제 정치적 논리는 미국의 집권 세력의 논리와 UN 안보리의 논리로 구별된다. 미국의 집권 세력의 논리는 우파, 메카시즘, 패권주의 논리이고 UN 안보리의 논리는 상호 보완적 중도 논리이다. 어느 것을 근거 삼는가에 따라 논리의 이념이 달라질 것이다. 국제 정치적 논리에 있어서 북한의 논리는 이유가 된다. 북한의 이유에는 국제사회의 패권적 이념에 대한 정성적 저항이 있을 테고, 갖은 제재에 대한 정량적 논리가 있다. 북한의 이유는 미국의 논리와 UN 안보리의 논리에 의해 국제적으로 묵살된다. 생명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받고 있는 남한의 논리는 미국의 논리와 UN 안보리의 논리에 상호 보완적 중도가 된다. 이 지점에서 생명은 정치성은 띤다. 남한의 제일야당이라는 집단에서 이러한 중도 논리에 휘잡혀 전쟁 불사의 발언을 공공연히 함으로서 일개 민중들의 생명은 지척 간두에 놓인다. 논리가 생명을 먹는다. 북한의 이유에 대해서 담론은 있으나 대화는 없다. 북한의 이유에 대한 담론은 남한과 미국이 암암리에 밀약한다. 남한과 대화를 해봐도 남한은 미국에게 확인을 받는다. 되는지 안되는지. 북한의 이유는 이러한 확인 절차가 주체와 맞지 않는다. 북한의 주체가 국제 민족의 개별적 자유와 다르지 않다. 남한은 그것을 자주라 부른다. 자주가 없는 나라와, 비롯 민족은 같아도, 대화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 북한의 이유는 민중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북한을 북한으로 인정하길 원하는 주체의 발현이다. 결제서류를 들고 결제를 득하는 자가 아니라 결제를 하는 자와 대화를 원한다. 이러한 대화는 미국의 악의 축 정책과 남한의 끄나불에 의해 번번히 저지 당한다. 관심을 끌기 위한 적절하고도 강력한 대응이 북한의 이유 되겠다. 남한의 무능력과 미국의 패권에 대한 경종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민중은 동지로써 생명을 위협받고 있고 생명을 잃고 있다. 북한은 응당 핵무기에 대한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남한은 그보다 더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쟁 불사를 호도하는 기득 야당의 불순분자들을 제거하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민중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이상한 자들과 민중들의 구별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2006/10/18 03:17 2006/10/18 03:17
DrunkenSTAR 이 작성.